한 걸음 더 나아가, 무익한 치료는 환자를 수단으로 만든다. 치료가 환자에게 어떤 이득을 줘야 하는데 그럴 수 없으니, 환자는 그저 처치의 대상, 즉 의학적 진행 과정의 한 요소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의료적 과정에서 환자가 다시 인간으로서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즉 다시 온전히 목적 그 자체로 여겨지기 위해 환자는 치료와 관련한 모든 결정을 스스로 내리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결정권을 돌려받음으로써 환자는 자신의 존엄을 회복해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다. 연명의료를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 결정은 그저 삶의 길이를 정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나‘를 소외시키던 의료화의 물결에서, ‘나‘를 객체로 만들던 의료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결단을 의미한다. - P25
자살은 죽음이 목적이거나, 또는 그렇게 가정된다. 하지만 안락사는 한 개인이 자신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 목적이며 죽음은 그저 수단으로 택한 것이다. 개인은 극심한 고통을 피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죽음을 택할 권리는 없다 할지라도 고통을 피할 권리는 갖고 있다는 견지에서 안락사를 허용해야 한다고 보는것이다. - P26.27
그러나 존엄사에서 핵심은 죽음 앞에서 환자의 결정권을 다른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이며, 이에 따라 환자가 갖는 결정권은 다름 아닌 연명의료를 받을지 여부다. 즉, 존엄사와 안락사는 결정권의 대상이 다르다. 안락사는 환자가 능동적으로 자기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죽음을 결정할 권리가 개인에게 있는 건가? 이는 각자의 철학적 견해에 따라 상이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문제다. - P28
치료 가망 없이 계속 고통받는 환자의 연명의료를 중단해 사망하게 두는 것과 그가 사망에 이르도록 하는 약을 처방해주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수동적으로 기다릴 것인가 능동적으로 행동할 것인가의 차이밖에 없다. 의도와 결과가 동일하다면 행위 여부가 허용의 기준 요소가 되기 어렵다. 따라서 연명의료 중단을 허용하면 자발적 안락사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논증적 차원과 제도 시행의 차원은 매우 다른 것이며, 제도 시행 여부를 결정하는 데는 사회문화적 요인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즉 논리적 정합성이 있다고 해서 그에 따라 무조건 제도를 시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 P39.40
물론 우리는 완벽한 삶을 위한 마무리로서 안락사를 고려하지는 않는다. 그런 것은 안락사가 아니라 자살이라 불러야 한다. 물론 누군가는 자살을 지지할지 모르나 사회 전체가 자살을 지지할 수는 없다. 자살이 되었든 안락사가 되었든, 개인이 그러한 결정을 내릴 때 외부 강압이 미치지 않도록 관련 요소를 사회가 최대한 개선하거나 보조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다. 적어도 한국 사회는 그 점에서 명백히 실패하고 있다. - P43
안락사 찬반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해야 할 일이 있다. 환자와 가족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것이다. 찬성하는 쪽에서 환자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여야 하며 안락사가 고통을 없애줄 최후의 방법이라고 말하려면 그 전에 이미 다른 노력도 해봤음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반대하는 쪽도 환자의 고통을 줄여야 한다는 생각은 마찬가진데, 그렇다면 고통을 줄여보려는 시도도 없이 안락사를 반대하는 것 역시 무책임하다. - P43.44
질환의 폭풍 앞에서 큰 혼란을 겪고 있는 환자야말로 스스로를 이해할 방법을 찾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 P53
하지만 ‘윤리‘라는 것은 반드시 현실에서 작동해야 한다는 대전제를 지닌다. 의료윤리는 특히 그렇다.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 논의는 의료윤리에서 무의미하다. 의료윤리는 이론적 논의를 현실에 적용해 현실 속에서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어야 한다.(그래서 ‘응용윤리‘의 대표 분야로 꼽힌다.) 그런데 이때 현실의 문제를 푼다는 것은 그 시시비비를 가려 일도양단의 결정을 내리는 일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 결정은 법의 영역에 맡겨두자. 의료윤리는 다만, 현실의 문제를 묵묵히 살아내야 한다. 그 ‘살아냄‘에서 의료윤리적 통찰이 나온다. - P58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용어부터 정리하자. 낙태, 임신중절, 임신중지는 같은 행위를 가리키는 세 가지 표현이다. 임신 중인 모체에 개입하여 배아 또는 태아를 제거하는 일을 의미하는 이들 표현은, 맥락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낙태는 국가 또는외부의 개입으로 인한 행위를 의미하거나 부정적 함의를 담아 이야기할 때, 임신중절은 의학적 행위로서 언급할 때, 임신중지는 해당 행위가 여성의 선택으로 이뤄질 때 사용된다. 이 책에서 나도 이 세 단어를 교차하여 사용할 것이며, 그 용례는 설명한 바와 같다. - P61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는 언뜻 자녀의 성별에 얽매이지 말자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실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로 이루어진 쌍이 이상적임을 제시하는 가족계획 시책이다.(엄밀히는, 누나와 남동생의 남매 쌍이다. 여기서도 아들에게 가족의 모든 자원을 투자하겠다는 생각이 엿보인다. 한국의 빠른 성장 과정에서 전통적 가치와 유입된 가치가 충돌했다고 말하지만, 가족계획의 이상은 두 가치가 표면적으로 반목하되 뒤에선 제휴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가족은 재테크의 수단으로 변했다.) - P64
1987년 의료법 제19조 제2항은 의료인이 진찰이나 검사 과정에서 태아의 성별을 알게 된 경우 이를 임부나 가족에게 알리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데 2008년 이 조항은 부모의 알 권리와 의료인의 직업 수행상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판단하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았다. 사실 1987년 개정 때도 이 조항은 문제가 있다고 여겨졌으나 당시 성감별에 따른 낙태가 워낙 횡행했기에 어쩔 수 없이 법 개정이 이뤄졌던 것이다. - P68
국내의 낙태죄 조항은 애초 태아생명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보기 어려운데도 이를 조항 유지의 근거로 삼을 수 있을까? 더불어, 임신중절을 제한하는 방법이 임부를 처벌하는 자기낙태죄와 의료인을 처벌하는 동의낙태죄만 있다면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 모른다. 그러나 의료 시술을 제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 P71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정치 전략의 핵심으로 생명을 분석해낸 그 지점에서 우리는 낙태죄를 살펴야 한다. 낙태죄 문제가 우생학, 인간 생명을 선별하는 학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는 이유가 거기 있다. 낙태죄는 국가가 다시 인구 증가를 시도하려는 시점에서 문제가 됐다. 당시 국가의 인구정책은 "인구 자질 향상", 즉 적정인구 유지를 통해 인구 구성의 연령비, 성비를 조절하려 한 것이었다. 따라서 남아 비율이 높았던 1990년대엔 성감별이, 아예 출산율 자체가 문제가 된 2000년대엔 낙태 시술이 문제가 됐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낙태죄는 태아를 보호하기 위한 것도, 여성을 처벌하기 위한 것도, 의사와 조산사의 비위를 막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인구 통제를 위한 국가의 장치였다. 어디서도 태아생명권에 대한 깊은 관심은 찾아보기 어렵고, 적정인구 확보를 위한 국가의 시책이 있었을 뿐이다. 2012년 헌법재판소가 이 문제를 생명권 대 자기결정권의 문제로 호도했다는 지적은, 그러므로 타당하다. 낙태죄가 인구 통제를 위해 여성을 인간이 아닌 수태의 수단으로 여기는 정책의 발로라면, 당연히 낙태죄는 폐지되어야 하고 이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 P74
그러나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태아의 세포는 모체와 유전자가 상당한 차이를 보이므로, 모체와는 별개의 조직이다. 모체의 면역 기능이 태아의 세포를 공격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예외적이며, 이를 모체 면역 관용maternal immune tolerance이라 부른다.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모체와 태아의 관심은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진화생물학자 데이비드 헤이그David Haig가 내놓은 모체-태아 경쟁 가설maternal-fetus competition hypothesis에선 모체와 태아가 영양을 놓고 경쟁한다고 본다. - P78
즉,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10주, 12주 등 주의 수로 선을 긋기엔 너무나도 많은 요소가 얽혀 있는 문제다. 만약 14주 태아부터 생명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하자. 무엇을 보호하는 것일까? 한 생명이 살 권리를 보호하는 일은, 그냥 태어날 수만 있게 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살 만한 세상을 제공하는 것, 그가 자신의 가능성을 펼 수 있는 지반을 제공하는 것이 누군가의 태어남을 진정으로 보호하는 일이 아닐는지. 그렇다면 임신중절 허용의 대상을 몇 주 태아로 할지 논의하는 일은 태어날 아이의 양육 환경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 P86
인구 감소는 결혼과 출산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라는 식의 생각은 결혼 시점이 늦어지고 비혼을 선택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현 상황에 대해 눈을 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는 정말로 아이가 늘어나는 것에, 그들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에 관심이 있는가.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다. 단지 인구정책의 하나로 출생률을 늘리려 한다면 이 정책은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 앞서도 살폈듯 인구 감소를 위해 노력했던 가족계획이 여전히 그 영향력을 곳곳에 남겨둔 상황에서 반전을 꾀한다고 해봐야 한계가 있다. 더욱이 한국에선 여전히 아버지, 어머니, 자녀라는 삼각의 구조가 중요하지, ‘아이‘를 독립적 개체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 P88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환경을 우선 제공하고 그다음에 출산을 장려하는 제도를 마련한다면 그건 따져볼 수 있는 문제다. 낳은 다음엔 어쨌든 사회가, 국가가 책임질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모든 책임이 가정으로 귀속되고 부모와 아이 사이의 신성한 삼각형을 지켜야 하는 한국 사회에서 출산에 개입하여 임신중절을 제한하는 것은 억지다. - P89
결국 문제는 그동안 양육의 책임을 여성에게만 전가해온 사회에 있다. 아직 우리는 가족이, 사회가 함께 아이를 키운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이 상황에서 우리의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사회가 함께 아이를 키우는 방법을 고민해 실현하거나, 임신중절의 선택권을 전적으로 여성에게 부여하거나. - P90
혹시라도 낙태죄 폐지로 무책임한 성행위가 만연할 것이 염려된다면 그건 문화적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이지 법적으로 강제할 부분이 결코 아니다. 더욱이, 법으로 강제한다면 무책임한 성행위를 한 이들 모두에게 죄를 물어야지 임신한 여성에게만 죄를 묻는 것은 이상하다. 따라서 이 점을 정말 염려한다면 낙태죄 유지를 주장할 게 아니라 성의 아름다움과 책임감 있는 관계에 관한 전방위적 교육을 요청한다거나 그런 내용을 설득력 있게 보급하기 위한 다양한 콘텐츠(웹툰, 드라마)를 제작, 활용하는 것이 타당한 방안이 될 것이다. - P93
임신중절을 반대하는 쪽에선 낙태가 태아에게 심대한 위해를 끼친다고 본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임신중절은 빼앗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경우 우리는 무엇과 무엇을 비교해 위해 혹은 이익을 따지는 것인가? 임신중절을 하면 태아는 태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이익을 태어난 생명의 이익과 비교해야 하는데, 이를 비교하기란 불가능하다.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이익을 따져볼 순 없기 때문이다. - P101
임신중절이 태아의 생명권을 해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이미 ‘태어난‘ 생명을 살해하는 것을 가정하고 있지는 않은가. - P101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치매 전과 후의 ‘나‘는 같은 사람인가? 내가 지금까지 지켜오던 내 생의 역사와 가치, 목적, 규칙을 다 잃어버린 다음에도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겉모습이 같고 주변 사람들이 같은 이름으로 부르니 여전히 ‘나‘일까, 아니면 인지기능이 변하고 기억을 잃으면서 더는 과거와 같은 인물로서 ‘나‘를 구성할 순 없으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이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일 수 없다. 적어도 그 개인의 동일성이 의심되는 상황이므로 그 사람에게 이 질문을 던져봐야 무의미하다. 그렇기에 적어도 치매의 의료윤리 문제를 다룰 때는 ‘나‘ 이외에 ‘타인‘ 또한 논의 안으로 끌어들여야만 한다. 결국 치매는 우리에게 함께 사는 방법에 관한 뼈아픈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 P114.115
하지만 우리가 의학의 절차와 방법을 도입할 땐 지식만을 떼어내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의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지식(의과학)과 실천(의료 행위)을 함께 수용함을 의미하며, 실천은 당연히 가치의 문제를 포함한다. 즉, 현대 의학은 서구의 개인 정체성이라는 틀을 포함하므로 생명의료윤리를 고려할 때 자율성을 배제하고 논의해선 안 된다. - P120
보통 사람들은 혼자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운 경우에 관련 분야 전문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치매 환자의 경우엔 타인에겐 어렵지 않은 결정을 내릴 때도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게 다르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치매 환자를 무능력자로 설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접근은 우리에게 생각의 틀 자체를 바꿀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개인이 언제나 스스로 합리적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개인의 삶은 타인과 환경에 영향을 받지만, 기본적으로 삶에 타인이 꼭 필요하진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치매 환자를 통해 사유하다 보면 이런 전제는 이내 허물어진다. 우리가 그동안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가정해온 ‘단독 결정자‘로서의 주체 개념에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 P123
우리는 아픔과 고통 앞에서 나약해지는 존재이며 그때는 타인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손 내밂’은 항복의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도움을 청하고 그의 자리를 만들며, 이를 받아들인 그 또한 돕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확인할수 있도록 하는 초청의 몸짓이다. 이는 분명 어려운 일이며, 고통을 나눠서 지는 일이다. 하지만 그 돌봄의 자리는 우리에게 함께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다. - P127.128
(박완서의 <해산바가지>에서) 화자가 친구에게 해주는 이야기도 실은 친구 역시 이미 아는 내용이다. "그 이야기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 중의 한 토막이어서 당연히 시시할 수밖에 없었고 친구도 대강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내용은 다 알고 있는 시어머니 이야기가 작품 종국에서 빛나는 깨달음을 전해주는 것은 서로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는 두 사람이 있기에 가능하다. 두 사람의 투닥거림과 마음 상황을 슬며시 전달하는 작가의 세심함을 읽어낼 수 있는 독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 P137
그러므로 ‘윤리‘를 말할 때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하고 또 듣는 능력이다. 상대방이 겪은 문제를 듣는 자세,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상충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힘이 필요하다. 아울러 가치에 관해 숙고해야 한다면 숙고의 공간이 되어줄 만한 서로의 이야기를 준비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세 가지가 밑바탕이 되어줄 때 우리는 비로소 윤리에 관해 말할 수 있다. - P138.139
치매가 그토록 두려운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존재를 붙드는 기억을 위협해서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을 만나는 일, 당신이라는 세상 속에 있는 내가 지워진다는 사태는 하나의 우주가 사라짐을 목도하는 일이기에. - P140
이를테면 2020년 5월 이태원에서 코로나19 확산이 발생했을 때 일부 사람들은 성소수자 집단을 문제시하며 이들의 비행으로 국민의 안전이 위협받는다고 봤다. 이에 따라 긴급 위기, 예컨대 전시나 재난 상황에서 적용될 법한 방안이 동원됐다. 서울시가 특정 시점의 스마트폰 GPS 자료를 수집한 것이라든지 언론이 코로나19에 감염된 성소수자를 특정하고 상당한 양의 개인정보를 노출한 것 등은 결코 일상적 상황에선 용인될 수 없는 공적 조처였다. 당시 감염 규모는 2020년 초 대구나 2020년 말 전국적 확산과 비교할 때 소규모 확산에 불과했음에도 이런 초월적 위기 대응 방법이 용인되고 시행된 것은 그만큼 감염 환자의 배제를 당연하게 여기는 의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의미였다. - P152.153
DNA 정보를 활용하면 범죄자를 잡을 수 있으니 유용하고, 대다수 사람의 DNA는 범죄 이력과 무관해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별로 왕래도 없던 친척의 범죄로 불이익을 받게 된다면 어떨까.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추후 범죄 추궁을 당할까 봐 DNA 표본을 제공하지 못하고, 그래서 유전 질환 검사를 받을 수 없다면 어떨까. 이런 예는 드물 테고 피해를 입는 사람도 많지 않겠지만, 과연 소수의 피해라고 무시해도 되는 걸까? - P156.157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줄어들면서 운영 금지 조치는 점차 해지됐으나 이 상황은 우리에게 어떤 기준과 방식으로 특정 시설의 영업을 중단시키는 게 좋을지에 관한 질문을 제기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선 모든 시설의 영업을 중단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일부만 중단하는 경우엔 그 정책이 형평성을 지니는지 따져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곧 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첫째 조건이기 때문이다. - P159
사회 구성원 전체의 삶이 문제를 겪을 수 있는 감염병 상황에서 개인만을 우선할 수는 없다. 가상의 도시 오랑에서 벌어진 감염 사태를 다룬 소설 《페스트》에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가 각자도생하려는 등장인물들의 분투만 그렸다면 어땠을지 생각해보라. 반면 이 소설은 파견 기자 랑베르가 자신은 도시에 속하지 않는 인물이라며 끝까지 벗어날 방법을 궁리하다가 후반부에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바로 이것이 독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 P159.160
먼저, 심리학에서 말하는 가용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 또는 편향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문제를 목도했을 때 관련 자료를 조사해보기보다는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에 의존하는 경향을 말한다. 극적 사건이나 일화가 통계 자료보다 훨씬 잘 떠오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를 확률과 연결해 생각해보면, 사건 발생 가능성을 따질 때 관련 자료를 찾아 차근차근 판단하기보다 머릿속에 얼른 떠오르는 대로 가능성을 배정한다는 것이다. - P169
다시 말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가치다. 어떤 것을 우선할지 확인하지 않은 채 각자가 주장하는 사실에만 매달리다 보면 문제 해결의 과정에서 여러 상처가 남게 된다. 몸에 난 상처와 달리, 사회에 남은 상처는 쉬이 봉합되지 않는다. - P173
이와 같이, 인구 집단 수준에서 볼 때 더 큰 위험에 처한 국가나 팬데믹 대응에 어려움을 겪는 국가에 우선하여 백신을 공급하는 것은 ‘사망 최소화‘와 ‘필요성‘이라는 가치로 정당화될 수 있다. - P179.180
(의료윤리학자 이제키엘 이매뉴얼Ezekiel Emmanuel 등이 제시한 공정한 우선권 모형Fair Priority Model의) 첫 번째 단계에서 각 국가 간 백신 분배 양을 설정해야 하고 이를 위해 표준 기대여명 손실 연수SEYLL를 구하게 된다. SEYLL 값이 클수록 팬데믹으로 인해(코로나19로 인해 직접적으로 사망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모두 포함해) 이른 나이에 사망한 사람이 많다는 뜻이 된다. 조기 사망자가 많은 국가에 백신을 더 많이 분배하면 조기 사망을 줄여 점차 SEYLL 값의 국가 간 차이가 줄어들 것이다. 이렇게 첫 단계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을 어느 정도 줄이고 난 뒤 두 번째 단계에서 사회·경제적 궁핍 문제도 함께 다룬다. 이때 SEYLL 값을 척도로 유지하되 여기에 백신 접종 1회당 줄일 수있는 빈곤 격차poverty gap의 절댓값과 백신 접종 1회당 국민총소득GNI이 얼마나 증가하는지의 값을 함께 검토한다. 즉, 백신 분배를 통해 확보할 수 있는 기대여명(건강 문제)에 더하여 빈곤과 국민총소득(사회·경제적 문제)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다. - P181
이득도 위해도 모두 가능성의 영역이라면 그 사이 어딘가에 선을 그을 필요가 있으며, 이것이 생명공학에 관한 윤리적 접근의 핵심이다. - P196
하지만 황우석 사태가 가져온 파급력은 단순히 연구 부정에서 끝나지 않았다. 인간 복제에 기술이 사용되거나 체세포 복제로 생체 인증을 받아(이를테면 혈액을 채취해 유전자 검사를 하여 접근을 승인하는 금고가 있다고 해보자)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 기술 발전을 위해 난자 채취가 폭넓게 허용돼 여성 건강에 위해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 P208
여기서 사전주의적 조치란 무조건적 금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전주의 원칙을 채택한다 하더라도 엄격한 금지부터 추가 연구 결정까지 다양한 수준의 정책을 적용할 수 있다. 이것은 사전주의 원칙이 과잉 규제로 이어진다는 반론에 대한 대답이 된다. 그 반론이란 가능성만으로 규제하면 결국 규제 과잉 또는 규제 만능 상태로 이어질 것이라는 지적인데, 가능성이 있으니 추가 연구를 해보자는 말은 결코 과잉 규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위해 가능성 앞에서 사려 깊은 접근을 하자는 것이 사전주의 원칙의 지향점이다. - P210
후술하겠지만, 롤스는 만약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모인다면 결정 후 자신이 최약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최약자에게 가장 많은 몫을 배분하는 정책을 선택하게 될 것이고, 이것이 공정한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 P218
이처럼 우리가 유전자조작 문제를 걱정하는 것은 곧 현재의 유전적 완전성, 인간종 전체로 봤을 때 현재 삶의 형태를 부여하고 이를 후대로 전달할 수 있는 유전적 소질이 상실될 것을 염려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종이 다른 무엇으로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인간‘이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를 걱정하는 것이다. - P225
예컨대 유전자조작이 인간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다면, 장애인은 어떤가? 성소수자는? 이들 또한 인간의 정의를 되묻고 있지 않은가? 이들을 여러 방식으로 배제해온 것이 지금까지의 의학이고 사상이었다면, 이런 차별적 범주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해온 학문을 비판하고 새로운 규정을 쓰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유전자조작의 윤리다. - P236
이렇듯 저수가(진료 행위와 재료에 낮은 비용을 지급)와 저급여(건강보험금을 낮춤)라는 특징으로 출발한 한국의 의료 제도는 이를 벌충하기 위해 급여 항목과 비급여 항목을 구분했다. 주로 필수적 진료로 이뤄진 급여 항목에서 발생한 손해를 그 외의 영역인 비급여 항목에서 채우는 것을 허용한 이 제도는 이후 외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사회 분위기와 함께 성형 및 미용 분야의 급속한 성장을 낳았다. - P245
담뱃세의 경우 국민 전체의 흡연율을 감소시키는 데도 목적이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저소득층과 청소년의 흡연율을 감소시키는 데 있다. 고소득층은 세금이 올라간다 하여 담배 구입에 큰 불편이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저소득층과 청소년은 당장 담배 구입에 어려움을 겪게 돼 이들의 흡연율은 감소시킬 수 있다. 건강세도 전체 음주율이나 설탕 소비율을 줄이고자 하려는 목적도 물론 있겠으나 그보다는 저소득층의 술과 설탕 사용을 줄이는 데 방점이 찍힌다. 건강세를 부여하면 제조사가 함유량을 줄이기도 하겠지만, 결국 제품 가격도 상승할 수밖에 없다. 제품 가격 상승은 저소득층의 해당 제품 사용 감소로 이어진다. 즉 건강세 부여는 저소득층이 술이나 설탕 함유 제품을 적게 소비해 이로 인한 건강 효용을 누릴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 P271.272
(1970년대의) 화이트 홀 연구(Whitehall Study)는 두 차례에 걸쳐 3만 명이 넘는 영국 공무원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직위와 심혈관 질환 사망률의 관계를 밝히려 시작된 연구는 절대적 빈곤만이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던 그때까지의 통념을 뒤엎고, 직위, 업무 통제력과 같은 사회경제적, 심리적 요인이 건강에 영향을 미침을 증명해 냈다. - P276
운 평등주의에서는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를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P281
심리적 편향을 활용해 사람들이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돕는 넛지를 보건의료 정책에서 활용하는 것을 건강 넛지health nudge라고 하며, 영미권에선 이런 방식의 정책 적용과 활용이 연구되고 있다. 이런 건강 넛지 정책으로는 건강세를 비롯해 저소득층 음식 바우처, 스마트 디바이스를 통한 건강 행동 유도, 주기적 건강 검진, 약물 중독 정책등이 논의 중이다. 앞에서 간단히 소개했지만, 어떤 국가에선 건강보험 혜택을 모두 누리려면 주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아야 한다. 최근 모바일 헬스케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스마트 디바이스를 통한 건강 행동 유도는 의료계만이 아니라 IT 업계에서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어떤 식으로 건강 행동을 유도할지, 감염병 상황에서 위험한 행동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지에 관한 논의에도 불이 붙었다. - P283.284
(1969년 미국의 타라소프 사례Tarasoff case에서) (타티아나) 타라소프의 가족은 병원이 (프로세지) 포다르의 살해 의도를 알고 있었음에도 타라소프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며 대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병원 측이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호소한 것이 제네바 선언에 규정된 비밀보장의 의무였다. 살해 의도는 포다르의 비밀이므로 이를 공개하는 것은 의료인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인 데다 환자들이 자신의 비밀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정신과 치료를 꺼리게 돼 결국 더 큰 피해가 발생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법원은 가족의 손을 들어줬고, 이후 비밀보장의 의무는 타인에게 심대한, 즉 생명을 위협하는 위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만 지켜져야 한다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 P290
(2017년의) 이국종 교수와 (2018년의) 남궁인 교수의 사례에서 우리는 어떤 정보가 공개됐을 때 개인정보가 유출된 것이라고 봐야 할지에 관해 이견이 존재함을 볼 수 있다. 북한 병사의 신체 상태는 환자의 개인정보인가? 사망자의 시신에 가해진 외상은 환자의 개인정보인가? 이것은 당연히 "개인정보다"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예컨대 개인정보보호법이 규정한 개인정보는 살아 있는 개인에 관한 정보로 성명, 영상 등 개인을 알아볼 수 있는 정보를 말한다. 여기에 따르면, 사망자의 외상에 관한 설명은 개인정보가 아니다. 즉 사망자의 사인死因이나 그 내용을 공개하는 것은 현행법에선 문제가 되지 않는다. - P295.296
또 사회를 개인의 집합이라고 할 때, 사회를 거대한 개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반면 아무리 사회라 해도 그건 그저 개인들이 단순히 연결되어 있을 뿐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전자는 공리주의적 관점일 테고, 후자는 비공리주의적 관점(또는 칸트적 의무론이나 권리 기반 윤리)이라 하겠다. 어느쪽으로 생각할 것이냐는 결국 개인의 성향에 따른 선택으로 볼 수밖에 없다(즉 이것은 논리적 설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개인과 사회가 충돌하는 상황에선 개인이든 사회든 어느 한쪽에 우선권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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