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다시 삼 년의 세월이 흘렀네. 고스케가 열두 살 때, 동네 아이들과 바닷가에서 놀다가 잘못하여 그만 물에 빠져 버렸는데,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은 무서워서 그냥 도망쳐 버려 아무도 이 일을 어른들에게 알리지 않았어. 저녁이 되어도 고스케가 돌아오지 않아 놀라서 우리도 함께 찾으러 나갔을 때는 이미 늦어, 그 불쌍한 시체는 참으로 희한하게도 겐 씨의 배 밑에 가라앉아 있었던 게야. (겐 노인) - P13

이렇게 그(기슈)의 마음은 남들이 모르는 사이에 황폐해져, 사람들이 아침 해를 쬐고 밥 짓는 연기가 오르고 부모자식이 있고 부부가 있으며 형제가 있고 친구가 있으며 눈물이 있는 세계에 그 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그는 언제부터인가 인적 없는 묘지에 그 쓸쓸한 거처를 옮기고 그 마음도 땅속에 묻어 버렸던 것이다. (겐 노인) - P19

옛날의 무사시노가 실제로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것은 틀림없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겠지만, 내가 지금 마주하는 무사시노의 아름다움은 이런 과장된 표현을 감히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나를 감동시켰다. 나는 무사시노의 미(美)라고 말하였지만, 미라고 하기보다는 시취(詩趣)라고 말하고 싶다. 그게 더 적절하리라 생각한다. (무사시노) - P36

11월 24일
나뭇잎이 아직 다 떨어지지는 않았다. 먼 산을 바라보면 마음도 스러질 듯 그립다. (무사시노) - P39.40

옛날의 무사시노는 끝없는 억새밭 풍경으로 절정의 미를 뽐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의 무사시노는 울창한 숲이다. 숲은 실로 지금 무사시노의 특색이라고 해도 좋다. 즉, 나무는 주로 졸참나뭇과로, 겨울에는 잎이 모두 다 떨어지고 봄에는 방울지듯 신록의 싹이 움트는 그러한 변화가 치치부(秩父) 산맥 동쪽 수십 리의 들에 일제히 나타나니, 봄여름가을겨울 내내 성에, 비, 달, 바람, 안개, 소나기, 눈, 녹음, 단풍 등이 다채로운 광경을 만들어 내는 묘미는 아무래도 서쪽 지방이나 동북 지방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본인은 여태껏 참나뭇과 낙엽림의 아름다움을 잘 몰랐던 것 같다. 숲이라고 하면 주로 소나무 숲만 일본의 문학, 미술에 보이고, 옛 시에서도 참나무 숲속에서 빗소리를 듣는 장면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나도 서쪽 지방 출신으로 소년 시절 공부하러 처음 도쿄에 상경한 지 십 년이 지났지만, 이런 낙엽림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로 그것도 다음의 글이 크게 나를 깨우쳤던 것이다. (무사시노) - P42

닛코(日光)라든가 우스이(碓氷) 같은 천하의 명소도 좋지만, 무사시노처럼 넓은 평원의 숲이 구석구석 모두 물들어,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짐과 동시에 온통 불꽃을 피우는 것도 특이한 미관이 아닐까. 만약 높은 곳에 올라가 한눈에 이 장관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그것이 어렵다고 해도 평원의 경관이 단조로운 만큼, 무사시노는 사람에게 자신의 일부를 보여 주고 끝없이 넓은 광경 전체를 상상하게 한다. 그 상상에 감동하면서 저녁노을을 향해 단풍 속을 걷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숲이 끝나면 들이 나온다. (무사시노) - P47

보라, 저기에 외눈박이 개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이 개의 이름이 알려진 곳까지가 곧 이 교외의 영역이다. (무사시노) - P63

"부모나 자식, 또는 친구와 지인 그밖에 은혜를 입은 선생님과 선배 같은 사람은 한마디로 말해 단순히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지. 잊어서는 아니 되는 사람이라고 말해야지. 그런데 그런 은혜와 사랑의 인연도 없고 의리도 없는 전혀 모르는 타인 중에서 솔직히 말해 잊어버린다고 해서 인정이나 의리를 모른다고 할 수도 없지만, 이상하게 끝끝내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지. 세상 모든 사람에게 그런 사람이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적어도 내게는 있어. 아마 자네에게도 있을걸."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P76

"왜냐하면 여자는 하품을 할 테니…… 일반적으로 하품에는 몇 종류가 있네. 그중에 가장 슬프고 미워해야 할 하품이 두 가지 있네. 하나는 삶을 지겨워하는 하품, 또 하나는 연애를 지겨워하는 하품이네. 삶을 지겨워하는 하품은 남자의 특색이고, 연애를 지겨워하는 하품은 여자의 천성이네. 하나는 가장 슬퍼해야 할 것이고, 또 하나는 가장 미워해야 할 것이네." (쇠고기와 감자) - P109

당시의 아이코를 생각하면 아무리 냉정하게 생각해도 순진한 처녀라는 것 외에는 달리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어차피 인간이므로 그녀도 당시 이미 여러 사악한 점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때의 사랑이 순결하고 열정적이었다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남들은 가능하여도 나는 불가능하다. 나는 그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즐거운 꿈길을 거닐며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슬프고 애틋하고 부드러운 피리 소리를 듣는 듯하다. (가마쿠라 부인) - P153

실로 가쓰라 쇼사쿠는 살아 있는 『서국입지편』이라 할 수 있다.
가쓰라 자신도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서국입지편』을 읽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나의 오늘이 있는 것은 오로지 이 책 덕분이야."
『서국입지편』(스마일스의 『자조론』)을 읽은 사람은 동서양을 합쳐 수백만 명이 될지 모르겠으나, 가쓰라 쇼사쿠처럼 "나를 만든 것은 이 책이다"라고 명언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것인가.
그러나 천부적인 재능으로 말하자면 가쓰라는 중간 정도의 사람에 불과했다. 학교 성적도 중간으로, 동급생 중에 그보다 뛰어난 소년은 얼마든지 있었다. 또 그는 상당한 개구쟁이라 우리와 함께 잘 놀았기에 학교에서나 마을에서 특별히 주목받는 소년은 아니었다.
그래도 하늘이 준 성질을 보자면, 그는 솔직하고 단순하며 또 어딘가 범할 수 없는 용맹심도 있었다. 용맹심이라기보다는 역경을 무릅쓰고 나가는 기상이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 것이다. 즉 그것이 때로는 모험심이 되고 또 때로는 투기심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투기심 때문에 실패했고 그의 형은 모험심 때문에 죽었다. 그렇지만 쇼사쿠는 『서국입지편』 덕분에 이 기상을 거듭 연마하여 견실하고 유익한 정신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비범한 범인) - P168.169

가쓰라만큼 책을 소중히 다루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그는 어떤 책이라도 결코 책상 위나 방 한가운데에 그냥 놔두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그는 책만 소중히 여길 듯하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는 자기 주위의 모든 것을 소중히 했다.
책상도 꽤 훌륭했다. 책 상자도 그리 시커멓지 않았다. 보통 그런 것을 소홀히 하는 동양 호걸풍의 미덕이나 악벽을 그는 이어받지 않았다. 지금 유행어로 말하면, 그는 『서국입지편』의 감화를 받은 만큼 대단히 ‘하이칼라‘적인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건대, 나는 하이칼라 정신이 내 친구 가쓰라 쇼사쿠를 지배하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비범한 범인) - P173.174

"실은 돈도 마련되었어. 삼십 엔 정도 저축해 놓았으니까 왕복 여비와 선물로 이십 엔이면 충분하겠지. 삼십 엔 전부 써 버리면 나중에 곤란하니까"라는 대답을 듣고 나는 새삼스럽게 그의 준비성에 감동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년 전부터 이미 귀성 계획을 세워 꾸준히 저금했다고 한다.
어떤가, 제군! 이런 일은 하기 쉬울 듯하지만 좀처럼 할 수 없는일이다. 가쓰라는 범인이겠지. 그렇지만 그가 하는 일은 비범하지 않은가. (비범한 범인) - P178

그러나 오해를 막기 위해 한마디만 합니다. 나는 결코 세상사 모두가 연극과 같다는 설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단지 아까 말한 대로 나 같은 성질을 가진 부류는 어딘가 냉정한 데가 있어, 신변에 닥친 사건도 조용히 방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극히 착하고 성실한 얼굴을 하고 교묘하게 일을 잘 처리할 수가 있습니다. 교묘히 처리한다는 것은 이미 그곳에 연극 같은 면이 있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정직자) - P220.2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목광수) (전략) 2002년 이후에 사모님이 제자들에게 선생님(존 롤즈) 소유의 책을 한 권씩 가져가도 좋다고 하여서 제자 중 한 사람이 책을 한 권 가져왔다는 내용의 블로그 글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 글의 저자는 노직의 책인 『아나키,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를 가져왔는데, 책 여러 곳에 선생님이 "It is not Rawls!"라는 메모를 남겼다고 하더군요. 선생님도 1991년 인터뷰에서 노직이 오해한 부분이 적지 않다고 언급하셨으니 그 내용이 사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음) (후략) - P13

JR(존 롤즈) 저는 『정의론』 자체가 모든 현실적 문제에 답을 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적 문제를 분석하여 대안을 제시할 때 『정의론』이 이론적 차원에서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등대가 배를 직접 끌지는 않지만, 광활하고 어두운 밤바다에서 배가 방향을 잃지 않고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돕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이론적 기여는 철학을 공부하는 후학들의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 P17

둘째는 차등 원칙 the difference principle으로 최소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돌아가야 하다는 원칙이다. 상위 원칙을 충족한다는 조건 아래 사회적 이익의 배분은 최소수혜자의 처지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체계적으로 조정되어야 한다. (중략)
차등 원칙이 담고 있는 보상, 상호성, 박애 정신 덕분에 차등 원칙은 정의의 두 가지 원칙의 사회가 불운한 사람들이 경쟁에서 뒤처지도록 내버려 두는 식의 형식적 차원의 평등한 기회에 입각한 실력주의 사회meritocratic society로 가지 않게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정신을 담고 있기에 차등 원칙은 최소수혜자에게 조금의 이익이 있는 것만으로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수혜자를 포함한 사회 전체 구성원의 자존감이 유지될 수 있을 정도에 해당하는 적정 수준 이상의 경제적 수준을 유지하게 하는 기능을 할 것이다. - P34.35

롤즈의 이론이 복지이론인 복지국가 자본주의에 적합할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생각했지만, 롤즈는 자신의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실현될 수 있는 사회 체제를 재산소유 민주주의 체계property owning democratic system라고 천명하고 있다. 재산소유 민주주의는 경쟁적 시장 체제를 인정하지만 시장의 불완전성을 바로잡고 분배적 정의의 토대가 되는 배경적 제도들을 유지하기 위한 적정 수준의 정부 개입을 옹호한다는 특징이 있다. 재산소유 민주주의의 배경적 제도들은 부와 자본의 소유를 분산하고 이를 통해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 영역까지도 독점 지배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막는다. 이러한 특징은 롤즈의 두 가지 원칙 가운데 차등 원칙이 갖는 성격과 부합한다. 차등 원칙은 사후적 재분배를 옹호하기보다는 사회 기본구조를 정의롭게 만드는 배경적 제도들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이런 성격은 누진세를 적용하는 부분에서 재산소유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자본주의의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 준다. 복지국가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의 독점화 등과 관계없이 최종적인 총소득에 누진 과세를 적용하여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 기금을 마련하는 사후ex post 재분배 정책이다. 그러나 재산소유 민주주의는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정신에 따라 자유와 공정한 기회의 평등을 유지하기 위해 협동의 최초 상황을 공정히 하고자 상속, 증여 등의 불로소득에 대한 사전ex ante 재분배 정책으로 누진 과세를 부여한다. 재산소유 민주주의에 따른 이러한 사전 재분배 정책을 통해 사회 구성원은 상호성 원칙에 걸맞게 상호 이익을 위해 협력하게 된다. - P37.38

롤즈는 시민 불복종을 법이나 정부의 정책에 변혁을 가져올 목적으로 행해지는 공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양심적이지만 법에 반하는 정치적 행위로 정의한다. 이런 점에서 시민 불복종은 개인적 차원에서 직접적인 법령이나 행정적인 명령에 불순종하는 양심적 거부와는 차별화된다. 시민 불복종 행위는 비록 해당 법을 위반하긴 하지만 그 행위는 정의롭다고 해당 공동체 성원들의 정의감에 호소하는 사회적 방식이다. 롤즈는 시민 불복종 운동의 대상은 정의의 제1원칙인 평등한 자유의 원칙에 대한 심각한 위반이나 제2원칙인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에 대한 분명한 위반에 국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제2원칙인 차등 원칙은 심각한 부정의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시민 불복종은 합법적인 다른 방식이 존재하지 않을 때 적용하는 최후의 대책임을 명시한다. 롤즈는 거의 정의로운 사회 체계를 전제한 비이상론을 전개하면서도 사회 기본구조가 심각할 정도로 부정의하다면 극단적인 변화나 혁명을 위한 방도까지 마련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이런 경우에는 무력에 의한 행위나 다른 종류의 저항도 분명히 정당화될 수 있다고 롤즈는 주장한다. - P39.40

롤즈는 자신의 정의론이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갖는 심리 상태와 가치를 통해 지지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이 중 하나가 자유와 자존감에 대한 논의이다. 롤즈 정의론의 토대가 되는 다양한 개념 중 하나는 자유가 어떤 가치보다 우선한다는 자유의 우선성 개념이다. 롤즈에게 자유는 사회적 기본재화로서 모든 사회 구성원이 더 많이 갖기를 바라는 가치이지만 동시에 다른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하고 양보될 수 없는 가치이다. 이러한 자유의 우선성은 사회 구성원의 가장 고차원적인 이해관심이 자유라는 논변에 근거를 둔다. 롤즈 논의에서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계획하고 구성하며 추진하는 존재인데, 이와 같은 논의는 자유를 전제로 한다. 롤즈는 또한 자유의 우선성을 자존감 논의를 통해 정당화하고자 한다. 자존감이 없다면 어떤 것도 할 만한 가치가 없어 보일 것이며, 또 어떤 것이 우리에게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추구할 의지를 상실할 것이라고 말한다. 롤즈에 따르면 자존감은 대단히 중요해서 원초적 입장의 합의 당사자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존감을 침해하는 사회적 조건을 피하길 바랄 것으로 전망한다. 이렇게 중요한 자존감이 확보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가치가 바로 자유이다. 사회 구성원은 평등하게 분배된 자유로 인해 사회에서 동일한 공적 지위를 갖게 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많은 자유로운 공동체에서 충실하고 다양한 내적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어 자존감을 충족할 수 있다. - P44.45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롤즈의 정의론은 사회를 전제하며 그러한 사회에서 사람들의 정의감이 고양된다고 주장한다. - P46

비슷한 맥락에서 피케티Thomas Piketty는 교육을 통한 학문적 노력과 능력을 맹신하는 새로운 엘리트를 "브라만 좌파"로 명명하며 이러한 실력주의의 문제를 분석한다(토마스 피케티 2020:815-819), 새로운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업적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에 특권 의식을 고집하는 과거 엘리트들을 경멸할 뿐만 아니라 성취를 이루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노골적인 경열을 드러내고 자존감을 훼손하게 하는 차별주의 태도로 새로운 민주주의적 불평등을 심화한다. - P59

예를 들어, 공부할 분위기가 갖춰진 가정에서 자란 아이와 그렇지 않은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는 공부에 대한 태도와 습관, 노력하려는 자세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가정환경이 학생의 자기학습량과 학업성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경험연구는 이를 뒷받침한다(손진희, 김안국 2006:256-259). 롤즈는 "도덕적 응분의 몫을 보상하는 데 직관적으로 가까워 보이는규칙은 노력에 따른 분배, 아마도 더 나은 표현으로 양심적인 노력에 따른 분배이다. 그러나 재차 말하지만, 한 개인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노력도 타고난 능력, 숙련된 기술,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라고 강조하여 노력이 우연성과 관련 깊음을 강조한다(Rawls 1999a:274). - P59

뒤에서 검토하겠지만, 교육과 관련해서 노력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검토가 중요한 이유는 롤즈의 논의에서 노력이 우연성이 아니라 개인의 책임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면 노력의 대가인 부나 권력이 응당한 몫으로 도덕적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공부를 잘하여 획득한 부는 정당하다고 여기는 배경에는 이러한 논리가 작동한다. 한국 사회에서 실력주의는 노력의 대가가 도덕적 응분의 몫이라는 공평성 개념과 결합하여 정당화되는 분위기이다. 그래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을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노력의 대가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에 형식적 차원의 기회균등만을 추구하려고 한다. 그런데 롤즈는 자신의 공정성 개념을 통해 노력이 도덕적 응분의 몫이라는 개념을 비판하며 실력주의 사회를 『정의론』에서 거부하고 있다(Rawls 1999a:91-92). - P60.61

롤즈에 따르면, 자존감이 상실되면 파괴적 감정인 시기심의 경향성이 강화되어 사회의 정의와 공정성이 훼손되기 쉽다. 이런 측면에서 롤즈는,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다른 어떤 정치 이론보다도 자존감을 한층 확고하게 지지해 준다고 주장한다(Rawls 1999a:470) - P70

롤즈는 "천부적인 재능의 분배를 가정할 때, 동일한 수준의 재능과 능력, 그리고 이러한 자질을 이용하려는 동일한 수준의 의욕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출신 사회계급, 즉 그들이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하는 계급과 관계없이 동일한 성공의 전망을 가져야 하는 것이 공정한 기회라고 언급하여 자아실현을 위한 교육을 강조한다(Rawls 2001:44). - P72

공정한 기회균등 원칙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자신의 재능을 실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교육과 관련해서 롤즈가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부정의인 불공정함은 자신의 능력을 사회적 여건으로 인해 계발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적 우연성에서 유리한 사람에게 더 많은 재화를 투여하는 것은 공정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이러한 공적 재화 투여가 자연적 우연성에 토대를 둔 교육 혜택에서 더 많은 격차를 나타낼 수 있겠지만, 롤즈는 이러한 격차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격차가 교육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경제적 특권으로 전이되어 불평등을 야기한다면 부정의하다는 것이 롤즈의 입장이다. 예를 들어, 교육을 통해 더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 그러한 많은 교육이 필요한 직업을 갖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그러한 직업을 통해 지나치게 큰 경제적 혜택을 독점하고 사회적 권력을 갖는 것은 부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롤즈의 민주주의적 평등은 공정한 기회균등 원칙의 이러한 부수 효과side-effect를 차등 원칙을 통해 교정하고자 한다. - P76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실질적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렇다면 롤즈의 정의론에서 볼 때, 한국 교육에서의 진정한 문제는 대학의 학벌이 가져오는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 사회 최소수혜자에게 혜택이 되지 못하는 사회 기본구조이다. 일부 교육 시민단체가 출신학교 차별금지법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것이 차등 원칙의 구체적인 전략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최저임금을 높이고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방식, 그리고 직업군들 사이의 소득 격차를 낮추는 방식 등도 교육의 민주주의적 평등을 실현하려는 구체적인 전략이 될 것이다. - P81.82

따라서 롤즈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필요로 하며,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는 것, 즉 완성하는 것은 타인과의 적극적인 협동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Rawls 1999a:460). 이러한 협동이 꼭 임금 노동이나 일일 필요는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임금 노동에서 배제되는 사람들, 예를 들면 가정주부나 가족을 돌보는 사람 등은 인간으로서의 사회성 자체를 갖지 못한 존재로서 자기실현을 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 P94

따라서 정부가 의미 있는 일자리를 충분히 제공할 수 없다면 사회 구성원은 여전히 일자리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율성을 보장받아야 한다. 이를 보장할 효과적 방법 중 하나는 기본소득 정책이다. 임금 노동에 참여하는 사회 구성원이 자존감이 훼손되지 않은 채 의미 있는 일을 추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소득에서 차지하는 노동 소득의 비율을 낮추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Hsieh 2009:412). 더욱이 의미 있는 일이 앞에서 본 것처럼 단지 경제적 활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성을 갖는 다양한 비경제적 활동까지 포함한다면 이러한 기본소득은 의미 있는 일을 위해 더욱 필수적일 것이다. 정부가 제공하는 것에 이러한 비경제적 일이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는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최소치가 보장될 때 사회 구성원은 사회적 기여를 하는 다양한 활동, 예를 들면 취미 활동이나 예술 활동, 사회봉사 활동 등을 통해 자신의 자존감을 고양하고 사회성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 P116.117

셋째, 정의로운 저축의 원칙이 없다면, 롤즈 정의론의 기본 정신이 훼손되는 것이다. 기후변화 시대가 원하는 정의의 요구는 미래 세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현세대가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자연을 보존하라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이러한 정의의 요구는, 롤즈가 『정의론』 제1장에서 밝힌 직관적인 정의와 일치한다. 롤즈는 영미 전통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해 온 공리주의를 거부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공리주의는 직관적인 정의와 배치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사람들의 직관적인 정의에서 보자면, 설령 다수라고 하더라도 일부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일부의 이익이 희생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듯이 현세대의 이익을 위해 미래 세대의 이익이 희생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Freeman 2007:136). 따라서 롤즈의 정의론은 논리적 일관성을 위해 기후변화 시대에 적합한 정의의 원칙을 제시해야 한다. - P138.139

롤즈는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가 합리적이고 합당한 존재라고 전제하는데, 합리성의 성격 중 하나가 상호 무관심성이다. 롤즈는 자신의 합리성 개념이 기존의 사회과학에서 사용되는 합리성 개념과 동일하지만, 그러한 합리성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상호 무관심성이라는 특징이 추가되었다고 기술한다(Rawls 1999a:123-124). 그런데 합의 당사자의 상호 무관심성은 다른 합의 당사자에 대한 것이지 그외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Freeman 2007:149), 합의 당사자가 상호 무관심적이라는 것은 다른 합의 당사자의 목표aims와 헌신commitments을 고양하는 것에 직접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지, 합의 당사자가 다른 사람의 목표와 헌신을 고양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롤즈는 원초적 입장의 합의 당사자를 고립된 개인으로 보지 말아야 하며 다른 사람, 특히 자신의 후손에 대한 애정과 헌신을 갖는 존재라고 주장한다(Rawls 1999a:181). 롤즈의 합당성 개념은 정의감을 포함하는데, 정의감에는 후손에 대한 고려나 상호성에 대한 강조 등이 포함될 수 있다. - P145

더 나아가서 부정의한 현실 속에서 규범적 이상론 없이 특정 부정의를 제거하기 위해 취해진 행위는 더 심각한 부정의를 초래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 취업에서의 불이익이라는 부정의를 시정하기 위해 군복무한 남성에게 주어지던 군가산점 제도는 규범적 이상론의 방향성 없이 단기적 관점에서 이루어져 실제로 남녀 차별과 장애인 차별 등의 심각한 부정의를 초래했다. 만약 이러한 사안에 대해 공정한 기회의 평등이라는 장기적 관점, 즉 규범적 이상론을 고려한다면 부정의를 시정하기 위해 모병제라든지 대체 복무와 같은 다른 식의 공정한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면서 부정의를 시정하기 위한 단계적 조치를 취해야 했을 것이다. - P165.166

기본적인 정의의 조건으로 간주될 수 있는 교육이나 참여의 기회 등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적 토론을 진행하는 것은 자칫 부정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의를 정당화할 우려가 있다. - P189

복지국가 자본주의와 POD(재산소유 민주주의property-owning democracy)는 생산 자산에 대한 사적 소유를 허용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복지국가 자본주의는 생산 자산에 대한 소수의 독점을 용납하는 반면에 POD는 이러한 독점을 방지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소유하는 방식으로 분산하려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복지국가 자본주의에서 초래할 수 있는 소수의 사적 소유 독점은 경제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는 정치적 삶까지 통제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복지국가 자본주의는 성장 위주 정책을 추구하면서도 이에 따른 부작용을 보완하기 위해 실업수당이나 의료 혜택을 제공하고자 한다. 이는 사회 구성원이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보장하고 사고와 불운에 대한 보호로서 취해지는 조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복지에 의존하는 하층계급을 형성하고 정책 과정에서 항상 수동자라는 배제의 인식을 낳게 된다. 더욱이 사고나 불운으로 손해 보는 이들을 지원하려는 복지국가 자본주의의 사후 재분배 정책은 수혜자로 하여금 의존적이고 굴종적인 태도를 갖게 하여 자존감을 훼손할 수 있다. 롤즈는 『정의론』에서 "자존감 없이는 어떤 것도 할 만한 가치가 없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존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자존감 훼손을 초래할 수있는 복지국가 자본주의는 정의론을 반영하는 제도로 보기 어렵다(Rawls 1999a:386). - P210.211

자유롭고 효과적이며 의무적인 기본 교육은 천부적 능력과 재능, 그리고 사회적 여건의 차이가 숙련도의 불평등으로 나타나는 정도를 감소시키는 방식에 기여해야 한다(Van Paris 2003:221). - P222

롤즈는 가족에게 사적이면서 공적이라는 독특한 이중적 위치를 부여한다. 가족은 롤즈가 정의의 대상으로 삼는 사회 기본구조basic structure에 포함되어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가 적용되는 영역인 동시에 합당한 포괄적 교설reasonable comprehensive doctrine이 허용되어 자유로운 가치관이 향유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 P240

롤즈는 『정의론』 초판에서 정의론이 성평등을 지향하고 있음을 명시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실수였다고 이후의 저작에서 자인한다(Rawls 1993a:466). - P242.243

비슷한 맥락에서 (샤론) 로이드는 다원주의에 관심을 갖는 롤즈에게 중요한 것은 특정 가족의 형태가 아니라 정의로운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을 효과적으로 양육하고 준비할 수 있는 역할을 어떤 형태의 가족이 할 수 있는가라고 분석한다(Lloyd 1994:358-359). 이런 의미에서 롤즈는 가족의 역할인 사회적·문화적 재생산과 상호부조 기능을 한다면 어떤 형태의 가족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롤즈의 논의는 동성애 가족, 생활동반자 법에 대한 입장도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P246

비슷한 맥락에서 밀John Stuart Mill은 『여성의 종속』(1869)에서 가족 영역이 소년들에게 성차별적 특권을 소유했음을 가르치는 "폭정의 학교school of despotism"라고 언급한다(Mill 1998:47). - P250

초기 논문인 「분배정의 Distributive Justice: Some Addenda」(1968)에서 롤즈는 자존감의 사회적 토대를 제공하려는 롤즈적 정치 체계의 경향은 "항상 인간을 목적으로만 간주하고 결코 수단화하지 않으려는 칸트적 정신의 더 강한 변형"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러한 부분은 자존감이 칸트적 의미를 가진다는 해석을 뒷받침한다(Rawls 1999c:171). - P277.278

오히려 자존감의 공동체주의적 특성은 자중감, 즉 평가적 자존감 개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롤즈가 자존감이 다른 사회 구성원의 존중에 의존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존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발적으로 속한 소집단, 즉 롤즈식으로 표현하면 사회적 연합체social unions 구성원의 존중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적 연합체로서의 집단은 구성원의 자연적 자산, 등력, 이해관심, 사회 경제적 지위 등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상대적 평등을 유지하는 집단, 즉 공유된 가치와 문화를 전제하는 집단으로 볼 수 있다(Rawls 19992:388). 이런 맥락에서 롤즈는 "이해관심을 공유하고 자신의 노력이 동료에게 인정받는 공동체가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Rawls 19992:388). - P282.283

이러한 동적으로 해석한 자존감의 구체적인 내용은 러셀Daniel Russell의 설명에서 일부 엿볼 수 있다.

"자존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일종의 조화, 즉 자신을 자신이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어떤 사람은 진정한 우정을 위해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자신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자존감은 도덕적 성숙함의 한 형태인데, 이러한 성숙함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의 핵심 성품이며, 사람이 잘 살기 위해 필요한 성품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자존감은 인간의 바람직한 측면이고 좋은 사람의 성품이기 때문에 자존감은 그 자체로 도덕적으로 적합하다"(Russell, 2005:120). - P285

자존감의 중요성은 『정의론』에서 "자존감이 없다면 어떤 것도 할 만한 가치worth가 없어 보이며, 또한 어떤 것이 우리에게 가치value가 있더라도 그것들을 추구할 의지를 상실하게 된다. 모든 욕망과 활동은 공허하고 헛된 것이 될 것이며, 우리는 무감각하고 냉소적인 상태에 빠질 것이다. 따라서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존감을 침해하는 사회적 조건을 피하길 바랄 것이다"라는 문학적인 표현을 통해서도 강조된다(Rawls 1999a:386). - P2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지만 어째서인지 눈물이 쏟아지려 해 껍질을 벗기고 사탕을 입에 넣어 쭉쭉 빨았다. 왜 늙은 사람들은 계피를 좋아하는 걸까? 나도 늙으면 이런 맛을 좋아하게 될까? 맛도 더럽게 없는데. - P22

하지만 이모는 자신을 독신주의자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멋졌다. ‘독신‘과 ‘주의자‘. 나도 독신이다. 나도 무엇인가에 주의자가 될거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 P26

나는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고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악마들은 사람의 표정을 좋아한다. 웃는 것도 좋아하고 우는 것도 좋아한다. 화내고 욕을 하면 오오오, 소리를 내며 좋아하고 하지 마, 울며 애원하면 큭큭큭, 웃으며 기뻐한다. 이럴 땐 아무 표정을 짓지 않아야 한다. 무표정. 지루한 걸 싫어하는 악마들은 금방 흥미를 잃고 다른 먹잇감을 찾아 떠나기 마련이니까. 평생을 장난감과 놀림감으로 살아온 나는 강해지는 대신 현명해지는 것을 택했다. 놀리고 놀려도 반응 없는 인간은 마네킹과 다를 바 없으니까. - P32.33

직업도 없고 돈도 없고 얼굴도 거지 같고 싸가지까지 없는 엄마의 전 애인, 최악 중의 최악. 이제 새롭게 만날 애인이 없어서 헤어진 애인을 다시 만나다니. 더 실망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더 분노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마음이 위아래로 출렁거리며 요동쳤다. - P40

국어도 그렇고, 재능 없는 가수 지망생도 그렇고, 죽여야 할 어른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사는 게 너무 번거롭다. - P62

그리고…… 더듬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도 안 더듬는 건 아니야.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것도 아니야. 다들 어느 정도 말더듬이들이야. 우리는 보기에 조금 튀는 거고, 너도 나중에 더듬지 않게 되면 알게 될 거다. - P75

이모는 두 종류의 라켓을 보여 줬고 둘 중 하나를 골라 보라고 했다. 하나는 공격에 유리하고 주걱처럼 둥글고 평평한 라켓은 방어에 능하다고 했다. 나는 주걱을 골랐다.
음, 이건 셰이크핸드야. 초보자들이 잡기 가장 좋은 라켓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인 선수들도 선호하는 라켓이야. 이상하게도 탁구는 공격적으로 달려드는 선수보다 셰이크핸드를 쥐고 방어하면서 경기하는 선수들이 더 많이 승리해. 세계적인 선수들도 대부분 셰이크핸드고, 어, 잘 새겨들어. 잘 방어하는 것, 공격하지 않더라도 일단 부드럽게 넘기는 것, 그게 중요한 거야. 계속 잘 방어하는 건 공격보다 훨씬 강한 공격이거든. - P79.80

원장 머리가 갑자기 어떻게 된 걸까? 설마 중학교 2학년에게 시계 보는 법을 알려 주려고?
작은 바늘이 1에 있으면 한 시. 2에 있으면 두 시야. 그런데 긴 바늘이 1에 있으면 5분이야. 어릴 때 난 작은 바늘은 대충 이해됐는데 긴 바늘이 이해가 안 됐어. 왜 1인데 5지? 그리고 왜 시는 한 시 두 시 세 시 네 시라고 하면서 분은 1분 2분 3분 4분이라고 하는 거지? 넌 이게 이해가 돼? 왜 한 시 한 분이라고 하거나 1시 1분이라고 하지 않고 그렇게 헷갈리게 사용하는 거냐고, 이 복잡한 법칙을 남들은 어떻게 그렇게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걸까?
그걸 어려워하는 원장이 바보처럼 느껴졌지만 왜 다섯 시 다섯 분 혹은 5시 5분이라고 안 하고 다섯 시 5분이라고 하는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 P96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지 모르겠는데 암튼 부모들이란 그렇단다. 잘해 주다가도 때리고 사랑하는 말로도 상처를 주곤 하지. 그러니까 네가 이해해. 다 그러려니 해. 그리고 미워해. 마음껏 미워해, 괜찮아. 일기에 죽이고 싶다고 마음껏 써도 되고, 그런데 그걸 말로 행동으로는 하지 마. 기다리면 돼. 나쁜 짓을 하면 언젠가 다 죄를 받고 죽어야 할 사람은 알아서 다 죽게 된단다. 원장님이 이런 말 했다고 엄마한테 말하지는 말고, 우리 둘만의 비밀이다. - P97.98

이이이모, 이모는 왜 살아요?
이모는 웃었다. 그리고 나를 껴안아 줬다.
왜 사냐니. 무슨 질문이 그래. 아들, 알려 줄 테니까 잘 기억해. 왜 사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냥. 그냥 살아.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 그래. 그냥 사는 게 사는 데 있어 가장 큰 이유야. 다른 이유는 없어. 돌멩이가 왜 딱딱한지 아니? 왜 나무는 말을 못 하게? 몰라. 나무도 돌도 몰라. 사람도 그래. 사는 데 이유는 없어. 이유를 찾기 시작하면 사는 건 피곤해지고 슬퍼진단다. - P102

놀림거리로 살아온 사람은 알 것이다. 놀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들린다. 비웃는 표정이 보이지 않아도 보인다. 그것은 기억에 새겨져 반복 재생되는 비디오 같다. - P105

하나도 잊지 않을 거다. 어떤 기억도 희미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다. 때문에 써야 했다. 기록해야 했다. 그것들은 콸콸 쏟아지는 물 같아서 도저히 작은 두 손과 평평한 종이에 담아 내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대충 요약할 수 없었다. 최대한 자세하게 써야 했다. 그렇게 하려니 한 장면 한 기억을 쓸 때 시간이 오래 걸렸다. 상관없었다. 밤은 길고 잠도 안 오고 무엇보다 나는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으니까. 자세하게 쓰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느낌과 감정을 표현하는 게 쉽지 않았다. 피츠가 말했던 문학적 표현인가 뭔가를 사용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감도 오지 않았고 떠오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 곁에 있긴 있었다. 나와 종이 사이 한 뼘도 안 되는 허공 속에 아지랑이처럼 투명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걸 잡을 방법이 있을까? - P144.145

너도 안 되면서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미워하면서 동시에 사랑할 수 있고 싫지만 좋을 수도 있으니까. 복수하고 싶으면서 용서하고 싶은 것도 가능하지. 그런데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 P150

어리고 유약한 존재들에게 가해지는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부주의함에 대해서도 새삼 숙고하게 해 주는 이 소설은 가까이에서 혹은 멀리에서 소년과 같은 힘겨움을 안고 매일매일 아프고도 충만한 기록을 이어 나가고 있을 어떤 고독하고도 단단한 마음들을 떠올려 보게 한다. 그 마음들로 인해. 그 마음들과 함께, 그 마음들 곁에서. 이상한 위로를 받는 동시에 말없는 응원을 보내고 싶어지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의 작고도 큰 미덕이라 하겠다. -(이제니(시인)) - P166.1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성발톱같이 안으로 아프게 파고드는 내향적인 성격은 중학교 때 당한 학교폭력 이후 나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당시의 학교폭력이 발생한 데에 그렇다 할 원인은 없었다. 설령 원인이 있었다 하더라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는 문제다. 그저 가족끼리 대형마트에 갔던 날 오빠의 휠체어를 밀다가 학교 친구와 마주쳤고, 짧은 인사를 나눈 뒤 돌아섰다. 그런데 다음날 학교에 가니 장애인 동생이라는 소문이 나 있었다. 단지 그뿐이다. 재앙은 언제나 은밀하고 신속하게 다가온다. - P9

그렇게 특별한 음식도 좋은 풍경도 마주할 일 없이 원통에 갇힌 쥐처럼 방 안에서 곰팡이 핀 벽만 긁던 내가 스물세 살에 경찰이라는 조직에 입직한 뒤 완전히 달라졌다. 늘 희부옇기만 했던 눈앞이 환해졌다. 경찰공무원 시험에 최종 합격하면 충청북도 충주에 위치한 중앙경찰학교에서 약 6개월간의 합숙 훈련을 받아야 한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는 이가 가질 법한 두려움과 그 못지않은 설렘을 양손에 꽉 쥐고 입교한 날, 한자리에 모인 신임 여경들에게 선배 여경인 지도관님이 말했다. "너희끼리 이 자리에 모여 있으니 여경 되게 많아 보이지? 나중에 전국으로 흩어지면 옆에 아무도 없다. 지금 이 순간이 너희 주위에 여경이 제일 많을 때야." 맞는 말이었다. 남성의 비율이 90퍼센트 가까이 차지하는 조직에서 같은 꿈을 가진 여성들과 한 공간에 모여 장기간 합숙훈련을 받는 일은 그동안 엉망진창이던 나의 세상이 둘로 쪼개지는 것처럼 강렬한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 P10.11

언니들은 아픈 오빠를 둔 동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였다. 따뜻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신파 없이 서로의 고통을 담담하게 대화로 풀어내는 법을 배웠다. 눈물을 동반하지 않고도 상처를 드러내는 법과 눈물을 보일 땐 부끄러움 없이 펑펑 울며 기대는 법을, 시기나 질투 없이 진심으로 누군가를 축하하는 법을,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오롯이 현재를 누리는 법을 배웠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이 누군가를 부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마음 내키는 대로 살 권리가 있는 하나의 생명이라는 걸 깨우쳤다. 어둠이 짙게 내린 길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 P12

사랑하는 언니들과 동유럽의 작은 식당에서 저녁으로 닭고기와 맥주를 먹으며 웃고 떠드는 일 같은 건 비루하기만 했던 내 인생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을,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에피소드인 줄 알았다. 이문세의 〈알 수 없는 인생〉이라는 노래 제목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살아 있길 잘했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죽고싶던 숱한 날이 떠올랐다 스치듯 사라졌다. 내 방 깊숙한 곳에 처박아둔 오래된 유서가 남의 것처럼 느껴졌다. 처박아둬서 다행이다. 누군가에게 읽히지 않게 내가 버티고 있어서, 그래서 너무나 다행이다. 여기서는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아직 프라하에서의 밤이 이틀이나 남아 있으니까. - P27.28

잊지 못할 추억이라 떠들어놓고서도 사는 게 바빠 어느덧 책장 깊숙이 넣어버린 시간들이지만, 언니들의 온기만큼은 지금까지 생생하다. 그들의 존재를 피부로 느끼고 있는 나는 더 이상 약하게만 굴지 않을 거다. 꼭 내 자리에서 살아남아 언젠가 언니들에게 보탬이 되고 싶으니까. 이건 나의 출사표다. 전국 서열 그놈들처럼 전국을 제패하진 못했지만 나라는 사람의 인생 하나 정도는 장악하고 있는 언니들이 사랑하는 ‘나’는 어떻게든 끝까지 나의 남은 생을 무사히 살아낼 것이다. - P29

언젠가 언니가 말했다. "너랑 만나면 한 시간 전에도 만난 느낌인데, 헤어지고 나면 아주 오래전에 헤어진 것 같아." 지금까지도 이렇게 또렷이 기억하는 걸 보면, 난 언니의 말이 못내 좋았었나보다. 나도 언제나 같은 마음이라고, 그 언젠가의 언니에게 말해주고 싶다. - P37

여기서 밝히는 사실이지만 내 키는 155센티미터다. 어쩌면 이 키가 한국 남자의 평균치가 아닐지 강렬한 의심마저 든다. 내가 투 블록 스타일을 고수하면서도 남자냐 여자냐로 오해받지 않았던 곳은 딱 두 곳, 바로 목욕탕과 미국이다. 목욕탕에선 옷을 다 벗고 있으니 오해받을 일이 없었다(대신 운동선수냐는 소리는 엄청 들었다…). 오히려 모든 걸 공개했을 때 편견이 사라진다는 걸 알았다. 미국에서는 어딜 가도 남자냐는 질문을 받지 않았다. 사생활을 존중하는 문화적 차이도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피지컬 차이가 엄청나니 키가 155 센티미터에 불과한 나를 남자로 착각할 일은 만무했을 테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쇼핑하기가 정말 편했다. 눈치 보지 않고 원하는 스타일의 옷을 맘껏 입어보았다. 고국에서 느껴본 적 없는 자유를 타국에서 진하게 맛본 것이다. - P58

한국에서의 성별이란 구레나룻 길이 하나로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것이고 그로 인한 사회적 위치도, 하물며 내 돈 주고 먹는 밥의 양마저 내 의사와 상관없이 바뀐다. 이쯤 되면 생물학 같은 과목은 배울 필요가 없지 않은가. 성별 따위 머리카락 길이 하나로 대통합되고 마는데. 이토록 일상의 모든 부분에서 첨예한 성차별이 자행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묻고 싶다. 그렇게 차별한 결과로 다들 종부세를 낼 정도의 부자가 됐는지도 궁금하다. - P60

난 나에게 남자냐 여자냐 묻는 사람들이, 정말 내 성별이 궁금해서 묻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여자인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 모습이 정말 키 작은 남자로 보였다면 그런 무례한 질문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을 거다. 어라, 넌 여자인데 머리가 짧네? 평범하지 않아. 너는 잘못됐어. 왜 너 혼자 그러고 돌아다니냐. 너 진짜 이상하게 보여. 질문에 가려진 그들의 본심을 내가 모를 리 없다. - P60.61

언니에게는 선한 사람한테서 느껴지는 특유의 슬픔 같은 게 있었다. 늘 슬픔을 껴안고 사는 사람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을 쉬이 알아본다. 나에게 언니는 그런 존재였다. 비슷한 결의 슬픔을 가진 사람. 그럼에도 지난한 세월을 꿋꿋이 지나온 사람. 언니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졌다.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만 언니, 눈가에 매달린 눈물이 떨어지지 않게 입술을 꽉 물고 덤덤히 이야기를 이어가던 언니가 보고 싶어 무작정 언니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 P82

언니가 꽃집에 들러 알뜰살뜰히 식물을 고르고 큰 키를 이용해 정성껏 벽에 장식하는, 요가 매트를 펼친 뒤 몸을 쭉쭉 늘리며 야간 근무의 고단함을 씻어내는, 시간을 쪼개 책상에 앉아 법 과목을 공부하는, 침대에 누워 낮은 천장을 쳐다보며 하루를 마감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혼자, 그것도 냉정한 구석이 꽤 많은 서울에서 자리를 잡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언니의 공간 속에는 현실의 고단함과 그럼에도 나아질 날을 위해 노력하는 희망이 사이좋게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이 공간의 온기가 꺼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소망했다. - P83

사정을 들은 언니는 내가 당장 해야 할 일의 순서를 조곤조곤 알려주었다. 형사 쪽에서 해당 사건을 어떤 절차로 마무리하는지, 시간이 꽤 걸릴지도 모른다는 것과 팀장님께 전화해 내일 하루 연가를 써야겠다고 말씀드리라는 것, 혹시나 연가를 못 쓰게 한다면 그 부서에 정 붙이지 말라는 것, 친구 장례식도 못 가게 하는 사람 밑에서 일 할 필요는 없다고… 난 언니가 가르쳐준 대로 움직였고 팀장님께 휴가 승인을 받은 뒤 무사히 장례식장에 갈 수 있었다. 내 앞에 육개장이 놓였지만 차마 먹지는 못했다. 왜 우리의 마지막 대화가 ‘밥 한번 먹자‘ 였는지. 친구와 조만간 먹기로 한 밥은 이제 영원히 먹을 수 없을 것이다. - P95

언니는 내게 만화책 『명탐정 코난』 같다. 완결이 날 듯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는, 완결이 날 거라 기대하며 책을 사 모으다 50권이 넘어갈 때부터는 포기한 채 간간히 시리즈에 대한 소식만 듣고 있는, 언젠가 끝은 나겠지만 처음부터 한 권씩 다시 읽어나갈 애정은 남아 있지 않은. 아니, 애정은 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또 다른 애정이 부족한 상태라고나 할까. - P100

가족끼리는 좀 더 타인처럼 굴 필요가 있다. - P114

아직 기어 다니지도 못하는 쌍둥이를 두고 옆방에서 목을 맨 언니도 있었다. 가혹한 시집살이와 독박육아에 내몰리다 죽음으로써 퇴근한 것이다. 남편은 늘 그렇듯 술자리에 있었다. 오늘도 늦게 들어오면 정말 죽어버릴 거라고, 밤 9시 전에 꼭 들어오라는 언니의 연락을 남편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가 술에 취해 집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1시.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다. 아랫집에 살던 시부모는 며느리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기는커녕 왜 하필 집 안에서 이 난리를 피웠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체를 흘겨보았다. 울며 보채는 쌍둥이가 귀찮은듯 자꾸만 인상을 썼다. 나는 언니의 죽음이 타살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P136

나는 아직도 대낮에 역 광장 한가운데서 건강상 이유로 실신한 여성 주위를 둘러싼 채 강간할 기회만 호시탐탐 엿보고 있던 십수 명의 남자 노숙인을 잊지 못한다. 기어코 그들 중 하나가 애인인 척하며 그녀를 어디론가 데리고 가려다 출동한 경찰에게 붙잡혔다. 이 언니는 그날 운이 좋은 편이었나보다. 하지만 끝까지 좋진 못했다. 남자 노숙인은 아무런 법적 제재도 받지 않고 훈방 조치되었기 때문이다. 운이 한풀 꺾인 여성에게 그 뒤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 참혹한 기분을 떨칠 수 없다. - P154.155

운이 억세게 나빠 대한민국 경상도에서 여성으로 태어난 나의 유일한 행운은 주위에 또 다른 여성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회사에서 겪은 모욕적인 순간이 오래된 창고 속 먼지처럼 켜켜이 쌓여 콜록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재채기와 기침을 연거푸 반복하며 눈물이 찔끔 고였던 그때, 내가 근무하던 경찰서에는 삼십대 여성 과장님이 있었다(일선 경찰서 과장은 경찰서장 바로 아래 지위이다). 서울에서는 평범한 일일지 몰라도 지방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인사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분과 면담을 하고 싶었다. 여직원들만 모아놓고 성범죄 예방 교육을 할 때, 왜 늘 피해자인 여성에게만 이런 교육을 실시하는지 그 저의를 알 수 없다며 이의를 제기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남몰래 잡은 면담 날. 나를 맞아주던 과장님 앞에서 40분을 내리 울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는데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과장님은 나를 달래지 않았다. 그저 실컷 울라며 휴지를 잔뜩 가져다주었고, 나는 앞에 놓인 휴지를 다 쓴 뒤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과장님은 내 이야기를 찬찬히 듣더니, 혹시 피해를 공론화하고 싶다면 자기가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서 도와주겠노라 약속했다. - P155.156

이 나라는 아직까지 여성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운으로 치부한다. 남자를 잘못 만나서, 하필 그 길을 지나서, 왜 그 옷을 입어서. 여성들이 피해 입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치밀하게 짜놓고도 피해 여성 개인의 운이나 노력만을 물고 늘어진다. 그렇다면 나는 이에 대항하여 모든 여성이 억세게 운이 좋기를 바란다. 사회가 운을 따진다면, 여성들의 운이 겁나게 좋으면 해결될 일이다. 여성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스러진 생명이 수도 없다. 그러니 이젠 여성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잘 먹고 잘 살며 운까지 좋을 차례가 아닌가. 지금껏 남성들은 운이 너무 좋았다. 자신에게 감정이입하여 죄인이 되지 않도록 힘써줬던 사법기관 구성원을 만났고, 무조건적으로 관대한 각종 인사계 직원들이 있었으며, 무슨 일이든 남자에게 마이크를 넘겨주고 유리한 고지를 선점해주는 그들만의 카르텔은 철옹성보다 단단했다. 이제는 여성들이 운 좋을 차례다. - P157

세상이 심어준 혐오와 수치 대신 서로의 용기를 양분 삼아 앞으로 나아갈 우리는 설렁탕을 먹지 않아도 충분히 운수 좋은 날을 맞이할 것이다. - P1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라 장보고가 망하고 15년이 지난 때(서기 861년을 말함), 한주(漢州) 지방(지금의 서울, 경기도, 충청북도 일부)에 장희(張姬)가 살고 있었다. 장희는 꼬마였을 때부터 장보고의 무리 사이에 끼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의 심부름을 했다. 장희는 부지런히 일을 하여 제법 밑천을 모아두었다.
장보고가 망하자 장희는 도망쳐서 한주로 건너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밑천을 축내며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기만 했다. 그렇게 긴 세월을 지내다보니 장희는 마침내 모아놓은 재물이 모두 바닥난 것을 알게 되었다. 장희는 우선 마지막 한줌의 쌀로 밥을 지어 배부르게 먹었다. 그러고 나니 이제 집 안 창고는 아무것도 없이 깨끗이 비어 있었다. 그런 즉, 당장 내일부터 굶게 될 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재물을 벌어야겠구나."
장희는 사람이 많은 곳을 찾아 거리로 나갔다. - P8.9

"사람으로 태어나서 굶지 않고 밥을 먹자는 것이 무슨 죄란 말이오? 사람이 살기 위해 밥을 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소? 그런데 왜 우리가 그따위 놈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해야 한단 말이오? 옛날 설총과 강수와 같은 대학자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이 존귀한 것은 학식이 있고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알기 때문이라고 하셨소.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재물만 탐내는 그 벌레가 지금 우리를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소. 그러나 깊이 학식을 연마하여 옛 시인들이 남긴 아름다운 글에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우리는 그놈을 올려다보며 밥 좀 달라, 밥 좀 달라 노비처럼 빌어야 하오. 이것은 가축이 사람을 채찍질하는 짓거리나 다를 바 없지 않소? 우리가 가축처럼 그놈에게 채찍을 맞아가며 밥을 빌어먹어야겠소?"
"옳소! 옳소!" - P24

"본시 사나운 기세로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일어서게 되면, 중간에 그게 아니다 싶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도 그냥 그 기세에 눌려 일을 저지르게 되는 수가 많은 법이오. 더군다나 자신은 현명하여 세상의 이치를 잘 아는데 주위에는 멍청한 자들뿐이라고 믿고 함부로 말 떠들기 좋아하는 놈이 한둘만 섞여 있으면 일이 험악해지는 것은 더 쉬워지기 마련이오." - P25

"(전략) 본시 벼슬아치들이란, 자기에게 귀찮은 일이 떨어지는 것을 고양이가 목욕 싫어하듯 하는 법이오. (후략)" - P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