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토드 부크홀츠 지음, 류현 옮김, 한순구 감수 / 김영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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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선택의 학문이다. 하지만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단지 그들은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이해시켜 줄 뿐이다. - P35

물론 (애덤) 스미스는 그들이 이기심에 의해서만 움직인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단지 이기심이 친절, 이타심, 또는 희생정신보다 더 강력하고 꾸준하게 동기를 불러일으킨다고 말할 뿐이다. 간략히 말해, 사회는 인간의 이타심과 같은 고귀한 동기에 자신의 미래를 믿고 맡겨서는 안 되며, 그보다 더 강력한 동기를 가능한 최선의 방식으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 P66

그럼, 이제 《국부론》을 요약해보자. 애덤 스미스는 노동을 경제성장의 주요 엔진으로 보았고, (1) 노동력 공급이 증가할 때, (2) 노동이 분화될 때, (3) 새로운 기계의 도입으로 인해 노동의 질이 상승할 때 경제성장이 가속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투자 아이디어와 발명이 계속해서 상상력을 자극하고 자유로운 교역이 허용되는 한, 경제는 꾸준히 성장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으로 일반 국민들이 높은 생계 수준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 P86

(애덤) 스미스는 "유치산업infant industry"을 육성하기 위해 초기 발전 단계에 한해 "일시적으로temporary" 그 분야의 수입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해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깊이있게 고려했지만, 끝내 수용하지 않았다. 이런 유치산업보호론은 몇 년뒤에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에 의해 수용되었고, 그리고 그로부터 200년 뒤에 일본은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이런 논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 P95

그렇다면 스미스는 왜 유치산업보호론을 반대했을까? 스미스는 유치산업이 성장한 뒤에 정부가 기존에 폈던 관세 정책 등 보호 정책을 철회할 정치적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런 산업은 다 큰 뒤에도 어린애처럼 응석을 부리고, 젖을 달라고 떼를 쓰며 울부짖을 것이다. 아니면 논점이나 전략을 바꿔, 이제는 임종을 앞둔 노인네처럼 숨을 헐떡이거나 침을 흘리면서 무조건적인 보호를 요구할 수도 있다. 미국의 철강 산업은 이상의 두 가지 전략을 모두 사용했다. 처음에는 노망든 사람처럼 행동하더니, 나중에는 다시 태어난 어린애처럼 응석을 부렸다. 그러나 철강 산업 보호는 다른 산업 분야에 대한 보호와 달리 엄청난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철강의 가격이 상승하면 냉장고에서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철강이 사용되는 모든 제품의 가격이 상승하고, 그에 따라서 기계류의 수출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 P96.97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풍자가인 헨리 루이스 멘켄Henry Louis Mencken은 청교도를 "지금 이 시각, 누군가가, 어디에선가 쾌락에 빠져 재미있게 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 P107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현재 만 25세 직장인이 개인퇴직계좌에 매년 2,000달러씩 은퇴할 때까지 예치할 경우 은퇴 시에 무려 100만 달러 이상을 보장 받을 수 있다는 글귀였다. 그리고 으레 은행들의 수법 또는 광고의 수법이 그렇듯이, 복리라는 마술에 의해 지상에서 발사 돼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 돈 뭉치의 궤적을 진하게 그리고 있는 그래프가 친절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광고 하단에 조그마한 글씨로 보일락 말락 하게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상기 보장 금액은 예금 이자율이 향후 40년동안 평균 12퍼센트라는 것을 가정해서 산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보장금액은 예금 이자율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일 이자율이 40년 동안 평균 12퍼센트를 유지한다면, 인플레이션 역시 40년 동안 똑같이 오를 것이기 때문에 이자의 대부분을 까먹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은행 광고 어디에도 이런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 P114

그렇다면 기업의 생산 활동에서 초래되는 오염이 노동 비용(임금)이나 기계의 감가상각 또는 지대와는 어떻게 다를까? 기업은 이들 비용에 대해서는 정상적으로 지불한다. 즉, 그것들은 기업의 생산 활동에서 ‘본질적internal‘이다.
하지만 기업은 자신의 생산 활동에서 비롯하는 오염에 대해서는 어떠한 비용도 지불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 전체가 오염된 공기를 들여마심으로써 지불하는 ‘비본질적인external‘ 요소다. 그럼 이로 인해 초래되는 결과는 무엇일까? 환경오염이 생산비용으로 산정되지 않기 때문에 실제보다 낮게 책정되고, 따라서 기업은 같은 비용으로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 따라서 기업이 적정량의 제품을 생산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통상적인 생산비용 외에 환경오염 비용까지 그것에 포함시켜 환경오염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부담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경제학자들은 자주 환경세taxes on pollution(공해세라고도 함)를 도입할 것을 주장한다. - P136

어쨌든, 뉴욕 항에 우뚝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평화의 상징이지 경제의 상징이 아니다. 간혹 이민자들에 대해 반감을 표시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미국은 물밀듯이 밀려오는 이민자들을 환영했다. 그들은 자유를 갈망했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를 더욱 부유하게 만들어 주었다. - P145

1823년, (데이비드) 리카도는 사망하기 직전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맬서스와 수많은 이견이 있었음을 언급하면서 "나는 당신이 내 의견에 순순히 동의했더라면 지금만큼 좋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리카도의 유산 상속인은 모두 세 명이었는데, 맬서스는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뒤에 맬서스는 이렇게 선언했다. "내 가족 이외에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153

이것을 근거로 리카도는 사람이든 국가든 가장 적은 것을 포기하도록 하는 분야를 전문화해야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각자의 비교우위다. 그리고 서로가 포기해야 하는 것, 즉 산초에게는 물고기, 돈키호테에게는 움막이 각자의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이다. 그러므로 전문화는 기회비용이 더 낮은 쪽에 의해 결정된다.
리카도가 비교우위(론)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자유무역은 교역 상대국이 경제적으로 앞서 있는 그렇지 않든두 나라 모두에 이롭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 나라의 국민들이 더 많은 제품을 소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리카도가 곡물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프랑스 농민들이우리보다 더 적은 비용으로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하는데, 프랑스 식량을 먹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리는 그 시간에 다른 유용한 일을하는 편이 낫다." - P160.161

경제가 국내로 향할 경우, 경기는 거의 항상 하향 곡선을 그리게 된다. 경제가 내부로 향하면서 경기가 상승 곡선을 그리는 그런 상황은 경제학에 존재하지 않는다. - P163

리카도의 분석이 우리 시대에 가장 크게 시사하는 것은 부유한 국가들이 채택하는 보호무역주의가 저개발 국가들에게는 경기 침체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개발 국가들에 대한 해외 원조와 융자 명목으로 수백만 달러씩 제공하면서 동시에 이들 국가에 대해 무역 장벽을두는 것은 일견 모순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미국 연방 의회는 국내 설탕 제조업자들의 압력에 굴복해 설탕 수입을 제한함으로써 설탕, 특히설탕의 주원료인 사탕수수가 주요 수출품인 카리브 해 연안의 많은 국가들의 개발 의지를 좌절시켰다. 1977년에 600만 톤에 달했던 설탕의수입 쿼터가 1998년에 120만 톤으로 급격하게 제한됐다. 이쯤 되면 남아메리카의 농민들이 수출 길이 막힌 사탕수수 대신 코카나무 coca(남아메리카산 약용 식물)를 재배해서 미국의 마약 밀매 업자들과 거래를 한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은 아니다. 그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 P169.170

최근에 한 경제학 방법론 연구자는 이렇게 선언했을 정도다. 즉, "만약 경제학이 본질적으로 분석기관engine of analysis, 다시 말해 모든 결과의 집합체가 아니라 결과를 도출해내는 사고방식이라고 한다면, 리카도는 경제학 기법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 P193

그렇다면 왜 (존 스튜어트) 밀은 소득세에 대해서는 신중하고 느슨했던 반면, 상속세inheritance tax에 대해서는 엄격했을까? 밀은 누진세와 달리 상속세에 높은 세금을 물린다고 해서 그것이 노동 의욕을 떨어뜨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상속 재산은 상속받는 자가 직접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재산이 아니기 때문에 공공선public good을 위해 제한을 받아야 한다"고 썼다. - P225

자본주의 사회의 의무 중 하나는 상업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든 시민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 P231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불행하게도 인적 자본, 지식, 숙련, 또는 이윤증대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관리 기술을 포함해 모든 종류의 자본을 멸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 P279

이와 같이 한계효용이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모든 상품에 지출된 1달러가 가져다주는 즐거움은 같게 된다. 만일 상품 A에 지출된 1달러가 상품 B에 지출된 1달러보다 더 많은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면, 소비자는 두 제품의 한계효용이 같아질 때까지 A 상품은 더 소비하고 B 상품은 덜 소비할 것이다. (앨프리드) 마셜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소비자는 "특정 상품에 너무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돈의 일부를 다른 상품에 지출하면 더 큰 만족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항상 주의를 기울인다." - P328

마셜은 수요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면서 경제학에서 가장 중요한 분석 도구 중 하나인 탄력성elasticity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가다듬었다. ‘거시 경제‘와 ‘미시 경제‘를 막론하고 오늘날 거의 모든 경제학적 논쟁은 탄력성 문제와 관련이 있다. 모든 정부 정책은 암암리에 또는 드러내 놓고 탄력성 문제를 다룬다. 이처럼 오늘날 절대 피해갈 수 없는, 우리 주변을 떠도는 탄력성이라는 유령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탄력성은 반응도responsiveness의 또 다른 이름이다. 사람들은 가격 변화에 어느 정도 민감하게 반응할까? 사람들은 가격이 오르거나 떨어지는 것에 맞춰 소비를 조절할까? 아니면 가격에 상관없이 항상 적정 소비 수준을 유지할까? 물론 이에 대한 대답은 상품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 P332.333

뿐만 아니라 (소스타인) 베블런은 수요와 공급이 점진적이고 순조롭게 균형점에 도달한다고 가정한 한계주의자들의 주장을 공격했다. 구제도학파 경제학자들은 균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경제는 항상 변화한다고 항변한다. 균형이란 현실 세계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경제학자들의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들이 보기에 균형이란 바람일 뿐이지 현실은 아니다. - P346

판사는 법정에서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거나 권리를 인정해 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궁극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후 경과는 법정 판결과 아주 판이하게 진행될 수 있다. - P382.383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케인스의 승수이론multiplier이다. 승수 이론은 원래 그의 제자이자 뒤에 킹스 칼리지 경제학과에서 교직원으로 같이 일하는 리처드 칸Richard Kahn 의 것이었다. 승수 이론의 핵심은 어떤 한 사람의 지출 변화가 시간이 지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에는 국가 지출 전체에 영향을 주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는 데 있다.
여기에 메이너드 주식회사가 있다고 하자. 이 회사는 남성 화장실을 신축하기 위해 100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그 결과 국가 전체의 총지출은 이전에 비해 100달러 증가한다. 메이너드 주식회사는 이 돈의 일부를 배관공, 건축가, 실내장식가에게 임금으로 지급한다. 그럼, 배관공, 건축가, 실내장식가는 이 돈을 어떻게 할까? 그들은 일부는 지출하고 나머지는 저축할 것이다. (다음) - P424

(이어서) 그들이 지출하는 돈은 식료품점 주인, 텔레비전 세일즈맨, 맥주집 주인에게 돌아갈 것이다. 한편, 이들도 각각 자신들이 벌어들인 수입의 일부는 지출하고, 나머지는 저축할 것이다. 이런 연쇄 반응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비록 처음에 메이너드 주식회사가 투자한 비용은 100달러이지만, 총수입은 300달러로 늘어날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승수는 3이 된다. - P424

부wealth는 그것이 구매할 수 있는 재화와 용역으로 측정되지 숫자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 P447

화폐 공급량과 GDP를 직접 연동하는 변속 메커니즘transmision mechanism 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화폐의 유통 속도가 일정하다는 통화주의자들의 가정이 옳다고 전제하자. 만일 FRB가 채권을 구입하는형식으로 화폐 공급량을 늘린다면, 채권 판매자의 수중에는 더 많은 화폐가 쥐어질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 사람들은 화폐 보유랑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고 싶어 한다. 이때 통화주의자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일상적인 거래에 필요한 돈만을 수중에 갖고 있다. 그러나 시중에 현금이 풀리면서 여분의 돈이 수중에 들어오게 되면, 사람들은 상품, 재화, 실물자산 등에 그 돈을 지출할 것이다. 따라서 GDP는 상승한다.
반대로 FRB가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갖고 있던 채권을 매각한다면, 사람들이 수중에 갖고 있는 돈의 양은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들은 화폐 보유량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고 싶어하기때문에 대신 씀씀이를 줄일 것이다. 따라서 GDP는 하락한다. (다음) - P453.454

(이어서) 통화 정책monetary policy이란 본질적으로 민간 부문에서 일어나는 화폐 유동성과 벌이는 게임이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일정 수준으로 유동성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한, 통화 정책은 GDP를 예측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FRB는 국민들을 부처님 손바닥에 올려놓고 그들의 지출 수준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 - P454

이때 케인스가 주요 비판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화폐의 유통 속도였다. 왜 화폐의 유통 속도가 일정하다고 가정해야 할까? 중앙은행이 화폐 공급량과 유동성을 높이면 어떻게 될까? 왜 사람들이 평소 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는 돈 외에 추가로 생긴 돈을 주로 지출할 것이라고 가정해야 할까? 오히려 그 돈을 이불 밑이나 벽장에 보관할 수도 있지 않은가! 만일 그들이 추가로 생긴 돈을 벽장에 꼭꼭 숨겨 놓는다면, 화폐의 유통 속도는 떨어질 것이고, 중앙은행이 가속 페달을 밟아 화폐 공급량을 늘린 것은 별다른 효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결국 GDP에도 큰변화가 없을 것이다. (다음) - P455

(이어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불황이 닥쳤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화폐수량설을 옹호하는 통화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일상적인 구매를 위해 또는 ‘만약을 대비해 (예비적 동기) 화폐를 보유한다고 주장했지만, 케인스는 제3의 동기, 즉 ‘투기‘를 목적으로 돈을 보유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보통 전자는 거래적 동기transactions motive라 부르고, 후자는 투기적 동기speculativce motive라 부른다. 사람들은 주식이나 채권 시장에 투자하기 위해 여분의 유동성을 보유할 수도 있다. 만일 금리가 오르면 화폐에 대한 투기 수요 역시 오를 것이다. 따라서 화폐 공급량이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돈을 쓰지 않고 쌓아두려고 하는 욕구도 덩달아 상승할 수 있다. - P455.456

통화주의자들은 케인스가 다음과 같은 중대한 질문을 교묘히 피해갔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재정 지출에 필요한 돈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만일 화폐 공급이 일정하고, 정부가 돈을 지출한다면, 다른 사람이 쓸수 있는 돈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세상에 공짜free lunch는 없다. 만일 연방 의회가 정부의 재정 지출 정책에 필요한 돈을 확보하기 위해 세금 인상안을 통과한다면, 소비자의 수중에서는 세금이 인상된 만큼재화와 용역을 구매할 수 있는 돈이 줄어들게 된다. 반대로, 만일 연방의회가 정부 보유 채권을 개인이나 은행 등 기관에 판매함으로써 시중에 유통되는 통화량을 줄인다면, 기업은 그만큼 투자에 필요한 돈을 빌릴 수 없게 된다. 금리가 오르면 투자는 위축된다. 정부 지출이 민간 지출을 저해한다. 케인스 이론의 가장 기본이 되는 승수는 이것을 간과하고 있다. - P467

이런 문제는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이미 만성화된 문제다. 어떤 하나의 동기에서 똘똘 뭉친 이익 집단들은 국가 차원의 경제 정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그에 따른 결과에서 사소한 몫을 가져가는 개별 소비자들의 이해관계는 철저히 짓밟는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개별 소비자들은 이득은커녕 국가적 효율성과 소득의 하락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분명한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개 특수 이익 집단들은 공공의 복리에서 아주 적은 몫만을 챙겨가기 때문이다. 물론 그 몫이 하나로 뭉치면 무시 못할 크기이지만. - P493

한 코미디언이 말한 것처럼, "당신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없어요. 모든 것을 가진다고 해도 그것을 다 어디에 놓아둘 거죠?" - P494

사람들은 확실한 것을 좋아한다.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은 사람들이 뭔가를 잃는 것을 죽도록 싫어하고, 때로는 사소한 것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주식 투자자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주식이 약간 손실을 입었다고 해서 바로 보유한 주식을 매각하지 않는다. 이런 반응은 주식 전문가들이 현재 상황으로 볼 때 더 큰 손실을 입을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해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정서적으로 자신들이 보유한 주식, 주택, 직장에 집착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 P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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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열린 책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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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집에 가고 나와 버니만 남았다. 그러자 버니는 우리 집에 가서 드램뷰이 위스키 한 병을 가져왔다. 버니와 렉스는 술을 마시며 크랜브룩 이야기를 하면서 (렉스가 그곳에서 제작한 작품들의) 슬라이드를 다시 보았다. 마리아와 나는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내다버렸다. (앨버커키의 레드 스트리트) - P174

저녁을 먹고 나서 커피나 와인을 마실 때 남자들은 주로 시와 재즈,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자들은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을 잠재우고 남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양철 지붕 흙벽돌집) - P189

폴이 멕시코식 해먹을 사다가 두 사과나무 사이에 걸었다. 일하러 가가기 전 그들 네 식구는 흔들흔들하는 해먹에 다 함께 누워 들종다리, 붉은깃찌르레기새, 가슴이 흰 떼까치를 구경했다. 멀리 푸른 하늘 아래로 산디아산맥이 보였다. 산디아산은 빛깔이 시시각각 변했다. 다양한 빛깔의 갈색이었다가 초록색으로, 짙은 파란색이었다가 해 질 녘이면 분홍빛으로 이글거리는가 싶으면 이내 자홍색이 되었다가 연보랏빛 하늘 아래 부드러운 자주색으로 변했다. (양철 지붕 흙벽돌집) - P194

마야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흥얼거리면서 수양버들을 심고 화초에 물을 주었다. 양동이 두 개에 물을 가득 받아 들고 휘청거리며 능소화 화단으로 가는데 버즈 코헨의 빨간색ㄷ 포르셰가 다가와 집 앞에 섰다.
"어서 빨리 타요!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나랑 도망갑시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가무잡잡한 그는 잘생기고 색시했다. 여자에게 비열한 타입임에 분명했지만 마야는 미소를 보였다.
"버즈? 저는 마야라고 해요. 폴의 아내예요. 어서 들어가세요." (양철 지붕 흙벽돌집) - P199

시내의 워싱턴 마켓은 인적이 없다가 일요일 자정을 기해 일제히 과일과 채소 가판대가 길거리로 쏟아져나오고, 레몬과 자두와 귤이 그려진 기발한 현수막이 나붙는다. 거기서 풀턴 스트리트 쪽으로 좀 더 내려가면 그보다는 은은한 붉은색과 갈색으로 감자와 호박, 노란 양파를 광고하는 현수막이 보인다.
상인들이 물건을 사고 싣는 일이 스타카토처럼 이어지고 새벽녘이면 마지막 배달 트럭이 자리를 뜬다. 그리스인과 시리아인 상인들은 저마다 검은색 차를 타고 총총히 사라진다. 그러다 동이 트면 지저분하고 텅 빈 장터에 사과 향기만 남아 감돈다. (안개 낀 어느 날) - P206

리사는 열아홉 살이었다. 그녀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좋은 대화 상대가 필요한 나이였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안개 낀 어느 날) - P210

"자, 어서 내리자." 그(폴)가 말했다.
"그대로 타고 있으면 돈을 안 내도 되는데."
"리사, 넌 어째서 올바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냐? 이를테면 쓰레받기는 왜 안 사?"
"난 쓰레받기가 싫어." 리사는 그를 따라 페리에서 내리며 말했다. 사실은 여러 번 샀지만 매번 실수로 쓰레기와 함께 버렸다. (안개 낀 어느 날) - P215

"난 정말 운이 좋아." 에르난은 자신도 모르게 이 말이 튀어나왔다. 그는 당황하며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자신의 말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미소를 짓고 그 말을 반복했다. "난 정말 운이 좋아!" (낙원의 저녁) - P231

그들(엘리자베스 테일러, 리처드 버튼, 존 휴스턴)은 에르난에게 음식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에르난은 교회 뒤로 돌아가면있는 이탈리아 음식점이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관광객들은 멕시코에 와서 왜 이탈리아 음식을 먹느냐며 잘 안 가는 곳이지만 조용하고 음식을 잘한다고 했다. (낙원의 저녁) - P232

버즈와 마야는 당나귀와 돼지가 들어가지 못하게 늘 울타리를 손보고, 채마밭에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았다. 피야와 루이스는 끊임없이 강 상류쪽에서 물을 길어왔다. 건기에는 마을 우물에서 물을 길어와야 했다. 루이스와 파블로와 버즈는 하루 종일 땔감을 모으고 장작을 했다.
"이렇게 낙원에서 사는 게 힘들어." 버즈가 말했다. (환상의 배) - P241

장작불에 비친 그들의 얼굴은 수척한 게 해골 같았다. 마야는 그런 그들의 얼굴에 어려 있는 표정을 보고 구역질이 났다. 중독자가 약을 주사하기 일보직전의 그 얼굴, 강렬하게 성적이고, 극도의 욕구와 탐욕을 뿜어내는 그 표정. 그들은 서로의 팔뚝을 묶어주었다. 빅터는 불에 스푼을 달구었다. "조금씩 천천히 해, 이건 그전 것처럼 묽은 게 아니야." 버즈가 먼저 주사기에 약을 채우고 여러 차례 시도하다 결국 혈관을 찾았다.
주사기에 피가 역류해 흘러들자 피스톤을 꾹 눌렀다. 팔뚝을 감았던 끈이풀렸다. 그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지고 눈은 쾌감에 도취되어 반쯤 감겼다. 몸도 돌처럼 굳어지는 듯싶더니 천천히 몸을 흔들었고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에트루리아 무덤의 호색적인 그림처럼 관능적이었다. 그의 조용한 신음 소리는 독경을 외는 듯했다. (환상의 배) - P252.253

중독이 다시 시작되자 거짓말도 다시 시작된다. 두려움이 되살아난다. (환상의 배) - P256

그(마이크 케이시)의 몸은 멋졌다. 얼굴은 남부의 무식한 백인 같은 구석도 있는 듯 수척하고, 눈은 휑하고 슬쩍슬쩍 엿보는 듯하고, 입은 침울해 보이고 치아는 엉망인 것이 마치 남북전쟁 용사 같았다. (내 인생은 열린 책) - P266

집에 전화를 서너 번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었다. 수화기를 잘못 놓은 모양이었다. 우리가 키우는 영리한 고양이는 수화기를 잘못 놓았다는 경고의 말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으려고 일부러 수화기를 떨어뜨리곤 했다. (내 인생은 열린 책) - P270

은색의 라메 점프수트를 입은 마지는 나보다 더 술에 취해 우스꽝스러워 보였고, 어디론가 사라진듯싶더니 벅이라는 이름의 조종사와 함께 있었다. 나치 군인 느낌의 단정한 얼굴은 흡사 옛날 흑백영화의 리처드 위드마크 같았다. (내 인생은 열린 책) - P270

나는 울지 않았는데, 가슴속에서 바람 같은 곡소리가 새어나왔다. (내 인생은 열린 책) - P275

어휴, 난 난파선 같아. 이 집은 난파선이야. (1974년 크리스마스) - P296

신장 투석 환자들 간에는 알코올중독자 갱생협회나 지진 생존자 모임에서 볼 수 있는 유대감 같은 게 있다. 일시적으로 죽음을 모면했다는 의식이 있는 그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한다. (딸들) - P306

제인은 늘 혼자 여행하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어제 테오티와칸에 갔을때는 경관이 너무 장엄하여 누가 옆에 있었더라면 그곳 색이 용설란 색이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 그게 맞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늘) - P332

투우 관광을 갈 사람들이 두 시 삼십 분에 로비에 모였다. 그 가운데 조던과 매킨타이어라는 성을 가진 두 쌍의 미국인 부부도 있었다. 남편들은 외과 의사들로 어떤 회의에 참석차 멕시코시티에 와 있었다. 테니스로 다져진 몸이 햇볕에 그을었다. 아내들은 고급 바지 정장을 입었는데, 그런 옷은 그들이 의학전문대학원에 다니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던 시절에 유행한 것이었다. (그늘) - P333

일본인 관광객도 네 명 있었다. 야마토라는 성을 가진 노부부는 검은 민속의상 차림이었다. 그들의 아들 제리는 키가 크고 잘생겼고 나이는 사십대였다. (중략)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제리는 건축가이며 캘리포니아에서 왔다. (중략) 그의 부모는 그들을 보러 도쿄에서 왔다. 그들은 투우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제리는 투우에 일본적인 요소가 많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미시마 유키오가 일본적인 우아함과 잔인함의 요소라고 일컬은 무언가가 조합된 것이 투우라고 했다. (그늘) - P333.334

여행은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이 살아온 파편적이고 불완전한 직선적 시간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행위다. (초승달) - P350

"하느님이 마침내 그이를 데려갔어요. 마침내 내 기도에 응답해주신거죠. 팔 년 동안 자리보전을 했거든요. 그 팔 년 동안은 말도 하지 못하고, 일어나지도, 혼자선 먹지도 못했어요. 갓난아기처럼 누워만 있었죠.
나는 피곤해서 온몸이 쑤시고 눈이 따끔거리곤 했어요. 그러다 마침내 그이가 잠든 듯해서 가만히 방에서 나가려 하면 그이는 무서운 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곤 했죠. iConsuelo! iConsuelo!(여자 이름. 스페인어로 ‘위안, 위로’를 뜻한다.) 그러면서 나를 향해 말라빠진 손, 죽은 도마뱀 같은 손을 뻗는 거예요. 정말 힘들고 끔찍한 세월이었어요." (초승달) - P354

산들바람이 형언할 수 없이 살포시 불었다. (초승달) - P355

어머니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어머니는 반항아였다. 놀랄 만한 공예가였고 한창때는 춤도 잘 췄다. 어머니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령 앨버커키의 센트럴 애비뉴에서 스모키 로빈슨을 차에태워 그가 공연하기로 되어 있는 티키카이 라운지로 가는 길에 대마초를피웠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 그날 밤늦게 들어온 어머니에게서는 땀과 담배 냄새가 풍겼지만 샤넬 향기는 아직 약간 남아 있었다. (루시아 벌린의 아들 마크 벌린의 헌사: 중요한 것은 이야기 그 자체다) - P362

요는, 내가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객관적이든아니든) 나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불리리라는 것이다. 그걸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루시아 벌린의 아들 마크 벌린의 헌사: 중요한 것은 이야기 그 자체다) - P362.363

그리고 우리는 말 없이 앉아 어머니의 책장을 바라보기만 했다. 책장 선반이 받치고 있는 언어의 힘과 아름다움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음미와 관조의 대상이었다. (루시아 벌린의 아들 마크 벌린의 헌사: 중요한 것은 이야기 그 자체다)

- P363

멕시코에서는 인생은 파리 목숨이라고들 하지만, 거기엔 물론 즐거움도 있을 수 있다. (루시아 벌린의 아들 마크 벌린의 헌사: 중요한 것은 이야기 그 자체다) - P363

어머니의 알코올중독과 관련해서 많은 일이 있었고, 어머니는 그로 인한 수치와 싸워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약 이십 년 동안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이때 어머니는 생애 가장 좋은 글을 썼고, 교단에 서서는 새로운 세대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루시아 벌린의 아들 마크 벌린의 헌사: 중요한 것은 이야기 그 자체다) -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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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열린 책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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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길을 건너고 보니 공중전화 부스에서 어떤 레즈비언이 여성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애인과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매일 아침 열 시 삼십 분이면 거기에 있다. (벚꽃의 계절) - P10

"당신은 오늘 하루 어땠어?""좋았어. 맷 데리고 산책하고 공원에도 가고."
"잘했어."
"맷이 낮잠 잘 동안 나는 지드의 소설을 읽었어." (카산드라는 지드의 책을 읽으려 노력하면서도 대개는 토머스 하디를 집어들었다.) "어떤 우체부가......"
"우편집배원."
"우편집배원." 카산드라는 말을 고쳤다. "난 그 사람을 보면 우울해져. 그 사람은 기계 같아. 일정이 매일 똑같아. 심지어 신호등이 바뀌는 시간까지 맞춘다니까. 그걸 보면 나 자신의 삶을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서글퍼져."
데이비드가 화를 냈다. "그래, 당신 정말 힘들게 살고 있구나. 그런데 말이야, 사람은 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하고 살지. 나는 교과서 편집 일이 좋아서 하는 줄 알아?"
"내 말은 그게 아냐. 난 내 일과를 좋아해. 난 그냥 어떤 일을 꼭 열 시 이십이 분에 할 수밖에 없는 게 싫을 뿐이야, 알아?" (벚꽃의 계절) - P11

하느님, 좋은 것만 보게 해주세요. 카산드라는 상념에서 벗어나 의식적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랬더니 실제로 벚꽃이 만발해 있었다. 조금씩 피어나던 벚꽃이 바로 그날 아름답게 보였다. (벚꽃의 계절) - P12

카산드라는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그이는 나의 텍사캐나 베이비, 난 그녀를 인형처럼 사랑해요. 그녀의 엄마는 텍사스에서 오고 아빠는 아칸소에서 왔어요." 몇 번을 불러준 끝에 맷은 잠이 들었고 그녀도 잠이 들었다. 한참 낮잠을 자고 눈을 떴을 때 파란 하늘에 분홍색 꽃이 보였고, 그 순간 카산드라는 가슴이 덜컹했다. (벚꽃의 계절) - P14

나는 핏자국을 닦고 뒤뜰로 나갔다. 진달래와 수선화, 미나리아재비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세라와 내가 함께 심은 꽃들이었다. 우리는 미나리아재비 구근의 어느 쪽을 아래로 가게 해서 심어야 하는지 몰라 절반은 뾰족한 끝이 아래로 가게 심고 나머지 절반은 위를 향하게 심었다. 그중 어떤 것들이 싹을 트고 나와 자라났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동생을 지키는 사람) - P20

타일러는 내가 크리스마스를 얼마나 싫어하고 경멸하는지 안다. 타일러와 렉스 킵은 매년 이맘때면 사방을 돌아다니며 미쳐 날뛴다. 장애아들에게 장남감을 사다주고 노인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각종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어쩌고 하면서. 나는 그들이 크리스마스이브에 후아레스에 있는 빈민촌에 장남감과 음식을 가져다주려고 모의하는 소리를 들었다. 자기들이 무슨 밥맛 떨어지는 왕족들인 양 돈지랄하며 과시하려는 것이다. (1956년 텍사스에서의 크리스마스) - P29

타일러는 더 나아가 크리스마스이브 파티에 여든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초대했다. 그게 바로 내일이다. 하필이면 새로 온 가정부 루페가 상아 손잡이가 달린 고기 식칼들을 훔쳐 달아난 마당이었다. 루페는 허리춤에 그것들을 숨겨 가지고 후아레스로 가는 다리를 건너가다 무슨 미친 연유가 있었는지 허리를 굽혔다가 칼에 찔려 죽기 직전까지 피를 흘렸다. 결국 이 모든 일이 타일러의 잘못으로 결론지어졌고, 타일러는 앰뷸런스 비용과 입원비를 무는 것도 모자라 멕시코인 밀입국자 루페를 고용했다는 이유로 엄청난 벌금까지 물어야 했다. 물론 당국에서는 우리 집 정원사들이나 세탁 도우미까지 모조리 밀입국자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은 집안일을 도울 사람이 없다. 애꿎은 에스터만 있을 뿐. 그리고 낯선 파트타임 도우미들, 도둑년놈들. (1956년 텍사스에서의 크리스마스) - P30

렉스: 이봐, 타이, 이 위스키 기막히게 맛있는데.
타일러: 그래. 기막히게 맛있지.
렉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게 엄마 젖 같아.
타일러: 비단결처럼 부드럽지.
(사십여 년 동안 그 싸구려 술만 무진장 마셔왔으면서 그러고들 자빠졌다.) (후략) (1956년 텍사스에서의 크리스마스) - P31

맥스는 검은 벨루어 천으로 만든 목욕용 가운을 입었고, 데카는 빨간 비단 기모노 차림에 긴 검정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있었다. 그들은 충격적일 만큼 멋있었다. 충격적이었다. 그들의 존재는 일격을 가하듯 물리적 영향을 주었다. (아내들) - P40

데카. 영국의 귀족이나 미국의 상류층 여자들 이름은 어째서 하나같이 푸키랄지 머핀이랄지 하는 것일까? 유모들이 부르던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일까? NBC 티브이 기자 중에 코키(Cokie. 보통명사로 쓰이면 ‘코카인 중독자’라는 뜻이 있다. 푸키(Pookie)나 머핀(Muffin)은 애칭이다.)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있다. 그러니 그 코키가 오하이오주와 같은 시골의 좋은 집안 여자일 리는 없다. 아무튼 코키는 뼈대 있는 훌륭하고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필라델피아일까? 버지니아일까? (아내들) - P41

데카는 로라가 아는 알코올중독 여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술을 숨겨두지 않았다. 로라는 자기가 술에 빠져 산다는 걸 아직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항상 술병을 숨겨두었다. 아들들이 술을 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녀 자신이 술을 보지 않고 술을 직시하지 않기 위하여. (아내들) - P43

데카는 한숨을 쉬고는 테이블 위에 굵게 말아놓은 대마초를 집어 불을 붙인다. 그러자 피식피식 탁탁 하며 작은 불똥이 튀어 아름다운 기모노 세 군데에 큰 구멍이 났다. (아내들) - P47

사람들은 우리를 사랑스럽게 여겼다. 우리는 일곱 살, 둘 다 나이에 비해 키가 작았다. 문을 두드리고 아주머니가 나오면 내가 경품권 이름을 팔았다. 나의 무성한 금발 머리는 부피가 내 머리 크기의 두 배나 되어 커다랗고 노란 회전초 같았다. "금실로 된 후광 같네!" 나는 이가 다 빠졌을 때라 웃을 때는 마치 수줍음을 타는 듯이 혀를 내밀어 윗잇몸을 덮고 웃었다. 아주머니들은 내 등을 토닥여주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으려고 몸을 구부렸다... "아유, 천사 같은 것, 뭔데 그러니? 물론이지, 사고말고!" (오르골 화장품 정리함) - P60

나는 카드의 이름들을 반복해서 읽어보았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해서 당첨되었으면 하는 사람들의 이름에는 가위표를 하고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이름에는 동그라미를 쳤다. (오르골 화장품 정리함) - P62

할머니와 나는 식당에서 성경책을 펼쳐놓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아직 잠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속으로 사랑하는 것보다 터놓고 꾸짖는 것이 낫자."(잠언 27장 5절)
"왜요?"
"알 거 없다," 나는 잠들었고 할머니는 나를 침대에 데려다 뉘었다. (오르골 화장품 정리함) - P65

새뮤얼 헨리 스로퍼, 거주지는 미국, 발 닿는 곳. 이 사람은 기차역 유색 인종 구역에 있던 나이 많은 사람으로, 자기가 당첨되면 화장품 정리함을 우리더러 가지라고 했다. (오르골 화장품 정리함) - P68

담을 따라 올라가는 언덕길 꼭대기에 있는 공터에서는 보도가 내려다보였다. 그곳에는 부스스한 회색 풀이 무성했고 보라색 꽃이 피었다. 공터 여기저기에 달려 있는 깨진 유리조각들이 풀숲 사이로 햇빛을 받아 저마다 다른 연보랏빛으로 채색되었다. 그때는 오후 늦은 시간이라 햇볕이 비스듬히 비쳐서 공터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하고, 꽃 속에서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자수정에서 나오는 빛 같기도 했다. (오르골 화장품 정리함) - P69

오백 명이 넘었다. 우리는 당첨되었으면 하고 우리가 가위표로 표시한 사람들의 이름을 훑어보았다.
"이 중 몇 사람한테는 우리가 오르골 화장품 정리함을 사주면 될 거야......"
호프는 비웃었다. "무슨 돈으로? 어쨌든 오르골 화장품 정리함이라는 건 없어. 너, 오르골 화장품 정리함이라는 거 전에 들어본 적 있어?" (오르골 화장품 정리함) - P70.71

어떤 군인들은 우리가 자기들에게 매력을 느끼기를 바라는 듯, 가지들이 매력적으로 보였으면 하는 듯한 간절한 얼굴로 우리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우리가 카드를 내밀면 뭐가 그리 급하고 거북한지 카드는 볼 체도 안 하고 일 센트나 오 센트, 십 센트짜리 동전을 "옜다!" 하고 디밀어주고는 쓱 지나갔다. 우리는 그들이 미웠다. 우리가 멕시코 사람인 줄 아나. (오르골 화장품 정리함) - P73

나는 오로지 아버지가 보고 싶고 아버지를 찬미할 뿐이었다. 아버지는 중위로 해외 어디엔가 주둔해 있었다. 오키나와. (오르골 화장품 정리함) - P75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별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여름철에는 가끔 북쪽 하늘에서 유성이 비처럼 쏟아진다는 것도 우리 집 식구들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 (여름날 가끔) - P85

호프네 할머니는 우리 머리를 뒤로 바짝 당겨 모아 한 가닥으로 땋아주었다. 그래서 그날 아침 우리는 아시아인처럼 눈마저 옆으로 당겨져 비스듬해 보였다. (여름날 가끔) - P86

붉은 칼리치(건조 지대의 지표에 탄산칼슘이 응고한 지층)에서 나온 흙물이 금세 보도를 덮더니 급기야 우리 집 앞 콘크리트 층계의 다섯 번째 계단까지 차올랐다. 우리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코코아처럼 미지근하고 걸쭉했다. 뒤로 땋은 머리가 물에 둥둥 떴다. 우리는 길을 휩쓸어 내려가는 물에 몸을 맡기고 몇 블록 빠르게 떠내려가다가 가장자리로 나와 차가운 비를 맞으며 비탈을 거슬러 올라가 집 앞을 지나 맨 윗길까지 가서 다시 물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기를 반복했다. (여름날 가끔) - P86

업슨가의 주민 중에는 은퇴한 제련소 노동자들과 영어를 잘 못 하는 멕시코인 과부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아침과 저녁에 홀리패밀리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다녔다. (여름날 가끔) - P86.87

할머니는 집안일에는 형편없었다. "네 할머니는 옛날이 흑인 하인을 두고 사셔서 그래." 어머니가 자기 어머니를 두둔해 그렇게 말했다. (여름날 가끔) - P87

우리 할머니는 외국인을 불신했고 호프의 할머니는 미국인을 증오했다. 호프네 할머니는 그래도 나를 좋아했는데, 내가 웃음을 주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호프의 형제들이 할머니가 새로 구운 따끈한 빵에 얹은 키베를 받으려고 오븐 앞에 줄을 서 있었다. 나도 그냥 줄을 섰고, 호프네 할머니는 얼떨결에 나에게도 음식을 주고 나서야 그게 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호프네 할머니가 아침마다 내 머리를 빗어 뒤로 모아 땋아주게 된 것도 비슷한 경위를 거쳤다. 처음에는 짐짓 얼떨결에 빗겨주게 됐다는 듯이 행동했지만, 곧 움직이지 말고 가만있으라고 시리아어로 말하고는 빗으로 내 머리를 탁 때렸다. (여름날 가끔) - P88

존 삼촌은 포투나투스 삼촌이 아주 오래전 식구들한테 그가 절실히 필요할 때 자신들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당시 존 삼촌과 할아버지는 둘 다 술 문제 때문에 일을 할 수 없었다. 타일러 삼촌과 포투나투스 삼촌이 전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밤중에 포투나투스 삼촌이 집을 나가 캘리포니아로 가버렸다. 모이너핸가의 쓰레기 같은 집구석에 넌더리가 났다는 쪽지 한 장만 달랑 남기고서. 그러고 나서 생활비든 편지든 한 번도 보내온 적이 없고, 심지어 할머니가 돌아가실 뻔했을 때도 집에 오지 않았다. 이제 그는 어느 철도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포투나투스 삼촌을 봤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존 삼촌이 말했다. (여름날 가끔) - P91.92

제련소 굴뚝에서 엄청난 검은 여기가 하늘 높이 굽이치며 솟아올라 굉장한 속도로 뭉게뭉게 퍼져나가 우리 동네 상공을 뒤덮었다. 연기가 안개자락처럼 지붕 위로 골목 사이로 넘실대자 그제야 한밤중 같았다. 연기는 춤을 추듯 온 마을로 퍼져나가며 점차 엷어졌다. 우리는 꼼짝할 수 없었다. 냄새가 고약하고 메케한 유황 연기에 눈이 따끔거리고 눈물이 났다. 비스듬한 햇빛에 반짝이는 공터의 유리 조각처럼, 마을 저편으로 몰려가 흩어지는 연무가 역광을 받아 여러 색채를 띠었다. 멋진 파란색과 초록색, 움푹 파인 길에 고인 물에 자동차 기름이 떠서 생기는 강렬한 초록색과 무지갯빛 보라색. 너울거리는 노란색과 붉게 녹슨 색도 있지만 대개는 은은한 이끼 빛이 나는 초록색이 우리 얼굴에 비쳤다. 그럴 때 호프는 이렇게 말했다. "이크, 네 눈에 저 온갖 색이 다 있네." 나는 호프 네 눈도 마찬가지라고 말했지만 사실 거짓말이었다. (다음) - P93.94

(이어서) 호프의 눈은 여전히 검은색이었다. 내 눈은 주변 색에 따라서 변하는 벽안이라 아마 소용돌이치는 연기의 색에 따라 변했을 것이다. (여름날 가끔) - P94

나는 어머니 곁을 파고들어가 잠이 드었다. 한밤중인 듯했다. 존 삼촌이 나를 흔들어 깨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가서 네 친구 호프를 깨워." 삼촌이 속삭였다. 나는 그 집 방충망에 작은 돌을 던졌다. 호프는 곧바로 밖으로 나왔다. 삼촌은 잔디밭으로 가더니 우리더러 누우라고 했다. "눈 감아. 감았어?"
"응."
"네."
"좋아, 이제 눈을 뜨고 랜돌프 스트리트 쪽 하늘을 올려다봐."
우리는 눈을 뜨고 텍사스의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 별이 무성했다. 하늘 가장자리에서 땅의 어둠으로 후두두 쏟아져내릴 듯한 수많은 별이 반짝였다. 몇십 개, 몇백 개, 몇백만 개의 유성이 흘러갔다. 그러나 구름이 조금씩 끼기 시작하더니 우리 머리 위의 하늘을 점점 더 많이 덮었다.
"잘 자라." 삼촌은 우리를 다시 들여보냈다. (여름날 가끔) - P94.95

로라가 이바네스그레 씨의 농장에서 연휴를 보낼 것이라고 하자 콘치와 캐나는 그걸 대단하게 여겼다. 이바네스그레는 광산업의 원로일 뿐 아니라 예전에 프랑스 주재 대사였다. 또한 칠레에서 손꼽히는 부호로, 태평양 연안에서 안데스산맥에 이르는 칠레 남부의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의 땅이 전부 그의 소유였다. "칠레는 가로 폭이 좁은 나라지만, 그래도......!" 케나가 말했다. 그들이 모르는 사실, 로라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실은 이바네스그레와 로라의 아버지는 미국 CIA 소속이라는 것이었다. 로라의 친구들은 그녀의 부모가 여행에 함께 가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몰랐다. (순찰: 고딕풍의 로맨스) - P100

권태는 어째서 세련된 것일까? 품위 있는 여행자 또는 공연장이나 드나드는 이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권태에서 우러나오는 괴로움의 표정이 있다. 그들은 어째서 그냥 "여행이라고요? 신나겠어요! 훌륭한 연극이었어요!"라고 하지 않을까? (순찰: 고딕풍의 로맨스) - P105

이윽고 일행은 유칼립투스숲 사이로 약한 불빛이 가물거리는 오두막집들의 군락에 다다랐다. 트럭이 속도를 줄이자 안드레스 씨가 차창을 내렸다. 아로모와 솔 향기가 훅훅 불어 들어왔고, 참나무 장작불 냄새도 났다. 그의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안드레스 씨는 칠레에서 농부를 가리키는 roto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 말에 깨졌다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 (순찰: 고딕풍의 로맨스) - P110

"이 집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영국인 가정교사 같아요!"
"동쪽 부속 건물엔 가지 말 것!" 하고 하비에르가 씩 웃었다. 그를 조금 더 좋아하게 된 로라가 미소로 답했다.
"나는 프랑스, 러시아 소설들을 읽고 환상을 품고 이 집을 지었지. 이 고장부터 고스란히 투르게네프의 소설 그 자체야." 안드레스 씨가 말했다.
"......농노들을 생각하면 그렇죠." 하비에르가 말했다.
"정치 얘기는 하지 말자. 하비에르. 로라, 내 아들은 사회주의자란다. 혁명가 지망생이지. 칠레의 전형적인 무정부주의자. 옷깃의 먼지를 털어 주는 시종을 거느리면서 대중의 곤경을 논하는 부류야." 이 말에 하비에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만 마셨다. (순찰: 고딕풍의 로맨스) - P113

테레사는 흐느껴 울며 일어나 나갔다. 내가 인정 있는 사람이라면 테레사에게 갈 텐데, 하고 로라는 생각했지만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순찰: 고딕풍의 로맨스) - P131

세상에는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게 있다. 사랑 같은 어려운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장례식도 재미있는 장례식이 있다든가, 불난 집 구경은 재미있다든가 하는 어색한 말이 그런 것이다. 마이클의 장례식은 그런 의미에서 신나는 행사였다. (흙에서 흙으로) - P141

교회 밖에는 장례 행렬에 가세할 오토바이들이 백 대도 넘게 세워져 있었다. 연기를 내며 털털거리고 총성 같은 폭발음을 내는 엔진 소리, 소매에 자신들의 팀 마크가 붙은 검은 가죽옷과 검은 헬멧 차림의 레이서들. 장례식장에서 본 그들 중 얼마나 많은 레이서들이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미남이었는지 학교 친구들에게 말하는 것은 천박한 짓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말하고야 말았다. (흙에서 흙으로) - P142

그러자 곧 사제가 무덤 속 관을 굽어보며 멋진 말을 했다. "주님은 나에게 삶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리라. 주님 계신 곳에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님의 오른손에는 영원한 기쁨이 있도다." 이 말에 조니가 미소 짓는 것을 보고 나는 그게 마이클에게 적절한 말이라는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흙에서 흙으로) - P143

바다 여행의 좋은 점은 오래 걸린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거기엔 대양과 대륙과 계절을 넘나든다는 점, 그 광대함을 인식한다는 점도 있었다. (이별 연습) - P146

리마에서 파나마로 가는 비행기에서 나는 예수회 사제 옆자리를 택했다. 나의 선택 유형이 대체로 그렇다. 안전하고 현명해 보이는 쪽 택하기. 그런데 그는 삼 년 동안 야생에서 일하다가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이었다. 승무원은 결국 나를 작은 주방에 있는 자리에 데려다 앉혔다. (이별 연습) - P152

나는 입학시험 공부도 해야 하니 공항까지 나올 필요가 없다고 그들에게 역설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정말 그런 시험이 있었고, 나는 이미 시험 준비를 했어야 했다. (이별 준비) - P152

고모를 본 순간 나는 자만심 강함 십대의 속물 근성 탓에 몸을 움츠렸다. 고모는 몸이 우스꽝스럽게 뚱뚱한 데다 갑상샘종까지 있었다. 목 뒤에 쌍둥이 머리가 하나 더 있는가 싶을 정도로 커다란 갑상샘종이었다. 의사들이 갑상샘종 치료법을 찾았음이 분명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갑상샘종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사 고모는 파마한 머리를 파랗게 염색했고 볼에는 널따랗게 연지를 발랐다. 붉은 꽃무늬 무무(품이 넉넉하고 색이 화려한 하와이 여성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나를 몸이 으스러지도록 꼭 껴안았다. (이별 연습) - P155

비행기는 해 질 무렵 앨버커키 상공을 선회했다. 산디아산맥과 끝없이 펼쳐지는 바위 사막은 산호빛의 짙은 분홍색을 띠었다. 나는 나이 든 기분이 들었다. 어른이 된 느낌이 아니라 지금 느끼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은데 이제는 너무 늦은 느낌. 뉴멕시코의 공기는 청량하고 차가웠다. 나를 마중 나온 사람은 없었다. (이별 연습) - P157

남자들은 늘 그렇듯 한국전쟁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제 학생이라고 해서 징병 유예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징집될까 봐 두려워했다.
"애를 낳아야 해. 지난주에 공표된 사실이야. 애아버지들은 징집에서 제외된다는 거야. 빌어먹을, 결혼 사유로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어?"
모든 건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모두가 그날 밤 당장 침대로 가서 임신할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확히 아홉달 반 만에 마리아, 마조리, 나, 이렇게 셋이 모두 출산한 걸 보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남편들은 징집되지 않았다. (앨버커키의 레드 스트리트) - P163

놓쳐버린 기회. 한마디 말, 몸짓 하나로 인생이 바뀔 수 있다. 모든 걸 망칠 수도, 모든 걸 회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도 그런 말을 하거나 그런 몸짓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떠났고, 그녀는 새 담배에 불을 붙였고, 나는 일하러 갔다. (앨버커키의 레드 스트리트)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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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입니다 -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 지음 / 봄알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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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티콘을 사용하지 않아서 상대방 기분을 상하게 하면 어떻게 하나, 내 말투가 딱딱하다고 느끼고 오해하면 어쩌나 불편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마음이 괴로웠다. 하지만 더 나를 괴롭게 만든 것은 따로 있다. 법정에서 ‘넹?’ 하며, 내 메시지를 재현하는 변호사의 목소리를 수차례, "넹? 넹? 왜 이런 말투를 쓰셨죠? 증인, 넹?" 하는 것을 듣는다면, 미쳐버릴 것 같은 "넹?"의 목소리가 귓가에 종처럼 ‘넹넹넹’ 울리면서 바로 딱 ‘ㅇ’에 가던 손가락이 멈춘다. - P226

여자 정장에는 주머니가 많이 없었지만, 수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가지고 다녀야 해서 위 주머니와 안감의 안쪽 주머니까지 보면서 샀다. 주머니가 없는 옷에는 내가 직접 달기도 했다. 안희정의 물건을 모두 지참하고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안희정은 ‘슈트발‘이 안 산다고 절대 양복에 물건을 넣지 않았다. 휴대폰도, 담배도, 라이터도, 명함도, 신분증도, 휴지도, 펜도, 안경닦이까지 모두 수행비서가 가지고 다녀야 했다. 손으로 부르면 달려가 원하는 걸 전달해야 했다. 나는 만물트럭이었다. 사람들이 내 주머니에서 자꾸 뭐가 나오는 걸 보며 놀라워했다. 가방은 슈퍼를 차려도 될 정도였다. 내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그 흔한 화장품 콤펙트도 없었다. - P227

가끔은 예쁜 옷을 입고 싶어서 박하 맛 사탕처럼 톡톡 튀는 잔꽃무늬 파자마를 입고 잔다. 팔부의 긴 소매 옷이다. 어디 나가지는 못하지만 색깔 있는 꽃무늬 파자마를 입으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그리고 다시 외출을 할 일이 있으면 우중충한 검은색 옷으로 갈아입는다. 스스로 피해자다움에 갇혀버린 건 아닐까 걱정도 된다. - P227

나는 업무로 안희정을 수행하여 수많은 국내외 일정을 출장으로 다녀야만 했고, 그 업무 장소에서, 업무 시간 중에, 상사였던 안희정에게 잦은 성희롱과 성추행 등 성폭력을 당했기에 장소에 대한 트라우마(심리적 후유증세)가 심한 편이다. 안희정이 수장으로 있었던 충청남도를 포함하여 곳곳의 장소가 모두 사건 장소로 기억되고 있어 어디 하나 편안히 숨 쉴 만한 안전한 공간이 없다고 느껴진다. 사건 이후로 공포의 땅 위에 고립되어 있다. - P228

나는 멤버십 회원이지만 적립할 수 없다. 확인 차원에서 "김지은 회원님 맞으시죠?" 하고 계산대에서 이름을 불리는 일이, 사람과 마주하는 일이 여전히 숨 막힌다. 쉽지가 않다. 그저 재빨리 가게를 나가고 싶을 뿐이다. 사실 가게에 가는 일도 드물다. - P232.233

성폭행은 성폭행대로, 2차 가해는 2차 가해대로, 사생활 침해는 사생활 침해대로, 언어폭력은 언어폭력대로, 괴롭힘은 괴롭힘대로, 모욕은 모욕대로, 명예훼손은 명예훼손대로 각기 다른 화살들이 모두 다 내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다. - P235.236

8개월 만에 다시 입원했다. 통원 치료를 꾸준히 받아왔지만, 그것만으로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아서였다. 최근 몇 달 새 체중이 9킬로그램이 늘었다. 병원에서는 폭식증이 너무 심해서 더 이상 살이 찌면 안 된다고 했다. 그전에는 영양실조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폭식증이라고 했다. 몸도 마음도 바스라진 상태였다. 추슬러서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응급실을 경유해 전문의 진료를 받았고 의료진 판단에 따라 늦은 밤 긴급히 입원이 결정됐다. - P270.271

우울의 구름이 내 머리 위에 비를 내린다. 한참을 맞다 우산이 필요할 것 같았다. 내리는 우울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간호사 호출기를 눌렀다. "안정제 좀 부탁드릴게요." 약이 흡수되어 안정을 찾아갈 때까지는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엄마 목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좋다. - P278

어느 친구가 내게 말했다. "이런 사람들이 대통령이, 영부인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다시 한 번 고마워." 민망할 정도였다. 서글펐다. 내가 그들을 위해 진심을 다해 일한 시간들이 스쳐 갔다. 온 몸이 서늘하고 머릿속은 스산해졌다. 내가 죽을 때까지 이 고통은 계속될까? 벗어나고 싶다. - P279

가족들이 나를 걱정하는 게 싫었다. 어쩌면 핑계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 내 불안한 미래를 들킬까 봐 철저하게 가림막을 치고, 좋은 것만 짜잔 하고 선물처럼 드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잘 해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부모님은 늘 나를 믿어주셨다. - P286

24시간 업무 중인 수행비서에게 상사의 지위는 24시간 그대로 유지된다. 그것을 고의적으로 성범죄에 이용한 가해자는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 - P294

성폭력 신고는 쉽지 않다. 얼굴과 이름을 내놓고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한다. 비공개로 신고를 하더라도 피해자가 속한 조직 내에서는 신고자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낸다. 알음알음 피해자의 신상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대부분의 성폭력은 권력의 차이에서 비롯되기에 가해자들은 여전히 조직의 핵심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피해자를 향한 조직적인 공격을 시작한다. 2차 가해다. 가해자는 여전히 해당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서 피해자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피해자가 그 힘 밖으로 나오려면 그 분야에서 쌓아온 자신의 미래도 함께 버려야 한다. - P295.296

피해자의 SNS를 모두 털어서는 왜 이날 이렇게 웃었냐며, 왜 아무렇지 않게 일했냐며 공격했다. 피해자의 삶은 잘게 분절되어 해체당했다. 성폭력을 겪었고, 문제를 제기했을 뿐인데도, 그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겪는 부당함은 온전히 피해자의 몫이었다. 오랜 시간이 걸려 피해 사실을 인정받은 이후에도 피해자는 회사와 학교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이게 내가 만난 미투 이후 피해자들이 겪는 진짜 현실이다. - P296.297

도청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안희정의 운전비서에게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했다. 이에 대해 조직에 호소했지만 아무도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다. 조직이 제대로 굴러가야 한다는 이유로, 외부에 알려지만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핑계로 내 피해는 감내되어야만 했다. 그런 조직인 것을 알았기에 나 역시 참고 참다 고심 끝에 시정을 요청한 것이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일말의 기대는 산산조각 났고, 자존심은 무너졌다. - P298

가끔은 나의 삶이 너무 끈질긴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내게는 작은 숨결만 있으면 되었다. 메마른 겨울 나무처럼 소리 없이 죽어가다가도, 아주 작은 봄의 기운만 느끼면 새순을 피워내는 그런 삶. 손톱만큼의 희망만 있으면 되었다. 미투를 하기까지, 거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그 작은 희망을 보고 말할 수 있었다. - P311

다만, 성폭력 피해자는 당신과 다르지 않다. 그저 잠깐 교통사고를 당했을 뿐, 그 사고가 깊어 후유증을 극복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뿐, 결코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겪지 말아야 할 끔찍한 경험을 했을 뿐이고, 보통의 사람으로 보통의 일상을 살아간다. - P317

나는 안희정의 다른 피해자들에게 고소나 미투를 권유하지 않는다. 그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 P337

저는 단 한 번도 피고인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저한테 피고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사님이었습니다. 누구보다 피고인 스스로 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수행비서는 지사님 옆에서 지사님이 업무하는 데 조금의 불편함도 없게 하는 역할입니다. 그것이 바로 저의 임무라고 인수인계받았고,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그때는 저의 이러한 열심을 성실하다고 칭찬하였던 주변 동료들이 이제는 법정에서 저의 그런 성실과 열의의 마음을 피고인에 대한 사랑인 양, 애정인 양 몰아가는 것에 다시 한 번 좌절하였습니다. (2018.07.27 1심 결심공판 최후진술) - P344

어쩌면 그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저한테 했던 말들, "나는 어떤 여자와도 잘 수 있다" "모든 여자들은 나를 좋아한다" "나는 섹스가 좋다" "내가 그렇게 잘생겼니?"라는 말, 그건 왕자병이 아니라 치료받지 못한 비정상적인 성적 욕구를 숨기지 못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피고인은 말로는 민주주의라고 이야기했지만 그 방식은 굉장히 폭력적이었습니다. 여성, 인권, 젠더 감수성이 중요하고, 이 사회에 대화가 없는 불통을 척결해야 한다면서 실제로 피고인은 폭력과 불통을 행하고 있는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2018.07.27 1심 결심공판 최후진술)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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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입니다 -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 지음 / 봄알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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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의) 지인이 감장을 하는데 가뭄과 홍수로 고춧가루를 구하기 어렵다 하니 좋은 고춧가루 10근을 사서 보내라고 시켰고, 가족에게 줄 간식과 선물도 내가 사 오도록 했다. 그리고 이런 비용들은 수행비서의 사비로 내야 했다. - P100

안희정의 부인이 빵이 먹고 싶다고 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 식사하는 시간에 그걸 사러 다녀왔다. 유명 빵집이 멀든 그래서 내 밥을 못 먹든 상관없이 말이다. 이런 구매에 들어가는 돈은 누구에게도 받을 수 없었다.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더 주장할 수도 없었다. 처음 수행비서 인수인계 때 선배가 만들어두라고 한, 한도를 최대로 높인 개인 신용카드의 쓰임을 알게 되었다. - P100.101

정치인 안희정의 대외적 이미지와 내가 업무를 통해 겪는 실상은 낱낱이 상반되었다. 그는 신분과 계급이 존재하는 세계에 살았다. 나의 자리에서는 그에게 아주 기본적인 인권이나 노동권도 존중받기를 기대할 수 없었다. - P101

안희정은 성 평등을 지지하는 진보적 지도자인 것처럼 알려져 있었지만 내가 본 그는 누구보다 자신의 권세를 잘 알고 누리는 사람이었다. "내 위치에 이런 것까지 해야 되겠느냐"며 일정을 당일에 취소하기도 했다. 국제 행사였던 한 토론회 참가 일정을 바로 전날 취소하기도 했는데, 패널들이 자신의 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거기서 반문할 수 있는 이는 그의 주변에 없었다. 나를 포함해 그의 주변인들은 그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대령하기 위해 노력했다. - P105

고통스러웠던 일은 노동자로서 내가 할 이유가 없으며 해서도 안 되는 일들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안희정이 아들과 가는 요트 강습을 예약하거나 의약품을 대리 처방받아 전달하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했다. 더러 주위에 어려움을 토로하면 "비서는 업무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지사가 지시하는 것이라면 뭐든 해내야 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 P105

늘 괜찮은 척 웃으며 일했다. 행사 중 그에게 다가오는 팬들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며 비난받으면 그다음부터는 더 열심히 막으려 노력했다. 수해 현장을 방문한 지사를 수행했을 때 공식 일정은 10여 분 만에 끝나고 지사는 평소 연락하던 여성과 술자리를 가졌지만 나는 잠자코 수행하며 술에 취해 그가 여성과 어울리고 있는 자리를 지켜야 했다. - P106

노동자로서도 극한에 몰려 있던 상태에서 성범죄가 더해지면서 나는 극도로 피폐해졌다. 고민하고 주저하기를 반복하다 용기 내어 주변에 SOS를 보내기도 했다. 내 상황을 직, 진접적으로 들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 자리와 부름을 피하라고 내게 말했다. 그런 조언을 하는 이들은 내가 회피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내게 "네가 조심해라"라고 말했다. - P106

이곳에서 나는 암묵적 제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안희정의 일부 측근들은 모임이 있을 때면 대부분 안희정의 좌석 옆에 여성들을 앉게 했다. "지사님은 여자밖에 몰라." "지사님 가까이 여자가 있어야 분위기가 좋아져." "지사님의 기쁨조가 되고 싶어도 우린 남자라서 못 하니까 너희가 최선을 다해." 여성 참모들에게 그런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했다. - P107

안희정의 참모들 중 일부는 감옥에 다녀오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안희정이 대선 자금 수사를 받고 감옥에 갔던 일은 조직에서 우상화되어 있었다. 안희정은 대의를 위해 감옥에 다녀왔다며 훈장처럼 이야기했고, 주변의 오랜 참모들은 수시로 ‘부하는 주군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한다‘와 같은 언급을 했다. 안희정을 대신해 감옥에 다녀왔다는 한 참모는 ‘성골‘로 대우받았다. 법과 원칙보다 조직을 위한 희생이 중요한 곳이었다. - P108

거듭되는 사과와 이어지는 강도 높은 업무들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안희정은 내가 정신적으로 흐트러지는 모습이 잠깐이라도 보이면 괜찮아 보일 때까지 내내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게 부하 직원을 성폭행하고도 암묵적인 복종을 하게 만들고, 입을 막아버렸다. - P110.111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왜 네 번이나 당해?"
나는 이것을 안희정에게 묻고 싶다. - P111

그러나 그(안희정)가 미투를 언급하며 네 번째 범행을 내게 가할 때 나는 이것이 마지막이 아닌 또 다른 처음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사과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어느 때보다도 선명히 깨닫게 되었다. 진정한 사과가 아니었다. 다음 범죄를 위한 수단이었다. 그저 나를 범행에 이용하고 묶어두기 위한 목줄 같은 것이었다. - P114

"조배죽."
안희정 조직의 회식 자리에서 고위 참모가 종종 하던 건배사다. "조직을 배신하면 죽는다"는 뜻의 기 건배사를 모두가 웃으며 따라했지만, 의미는 뇌리에 새겨야 했다. - P115

안희정을 대통령 만들고 그 곁에 오래 있으려던 사람들에게 나는 ‘조배죽‘의 대상이었다. 한 나라를 경영하겠다는 ‘대의‘로 모인 사함들의 조직을 뛰쳐나왔기에 내게 가해지는 형벌은 더 가혹했다. 온라인의 댓글, 주변의 평판, 지인들을 동원한 조직적인 죽이기까지 다양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악성 댓글을 달고, 법정에 나와 위증을 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은 작은 사례에 불과하다. - P116.117

미투 이후 모든 과정은 위력 그 자체였다. 나는 사실을 밝히면, 물론 어렵고 시간이 걸린다 해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내 생각은 순진했다. 내가 상대해야 할 가해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권력 조직이었다. 내가 순진했음을 깨닫고 후회한 적도 많다. 안희정은 30대에 대통령을 만들었고 이후 재선 도지사, 유력 대선 후보로서 권력을 가진 수많은 사람과 친분관계를 맺어왔다. 그렇게 맺어진 관계는 촘촘했다. 관계가 곧 권력이 되는 한국 사회에서 안희정은 도지사직을 내려놓았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 P117

‘안희정의 000‘임을 캐치 프레이즈로 내세우고 그 후광으로 국회의원이 된, 이제 재선을 노려야 할 의원들에게 이 재판은 어떤 의미일까? 답이 정해져 있는 싸움을 나는 왜 하고 있을까? 다들 두려워하는 싸움을 왜 나같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하고 있을까. - P117.118

지사는 전화번호를 직접 누르지 않는다. 수행비서가 전화를 건다. 송신음을 듣다가 전화가 연결되면 귀에 가져가 대드린다. 상대방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에 딱 맞춰 전달해야 한다. - P119

안희정의 잦은 외부 강연과 해위 출장이 언론과 의회에 의해 여러 차례 지적을 받았다. 그러나 안희정은 하던 대로 밀고 나갔다. 처음부터 1월엔 스위스, 2월엔 호주, 3월엔 중국, 4월엔 일본 등 한 달에 한번 해외 출장 계획을 잡으라고 지시했다. - P119

안희정이 해외에 가 있는 동안에는 조직 구성원들은 휴식을 취했다. 업무를 지시할 사람이 없으니 모두 해외 휴가를 다녀왔다. 나는 갈 수 없었다. 안희정이 퇴임 이후 사용할 일명 ‘안희정 포털‘을 만들어야 했다. 8년 동안 도지사로서 행한 정책과 인명 기록들을 정리하고, 향후 대선 레이스에서 사용할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하는 일이었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도와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도청에 들어간 지 채 6개월밖에 안 되는 내가 프로젝트 매니저가 되어 일을 추진해야 했다. 일부 참모는 재판 중에 ‘이 작업을 위해 전문가를 소개시켜줬고, 자신들도 열심히 도와줬다‘고 증언했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했다. 예정된 회의에도 대부분이 다른 이유를 대며 참석하지 않았다. - P120

일반 공무원들도 이 작업을 탐탁지 않게 보았다. 합법적인 일 처리처럼 보이게 하면서도 실제로는 도청 예산을 이용해 개인 포털을 만드는 일이었다. 일의 이면을 들여다본 사람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중략) 도와주기로 했던 일반 공무원은 사무실에 와서 내게 커피를 타오라고 시키고는, 이어 커피를 마시며 ‘이 일은 불법이고, 자신은 일반 공무원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한 뒤 돌아갔다. - P120

"여자가 있으면 분위기가 좋아져. 지사님이 부드러워져."
그리고 그렇게 분위기를 풀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내 역할은 충분하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인지도 잘 몰랐다. 불쾌했지만, 그 말이 성희롱이며 어떻게 부당한 것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 P122

상대적으로 어린 내게 선배들은 반말과 비속어, 욕설을 쉬이 내뱉었다. 나보다 나이가 적은 남자들도 자신이 정치권 선배라며 선배로 대우받기를 원했다. 이곳의 위계질서에서 나는 가장 하층민으로, 모두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조직의 막내였다. 이토록 위계를 중시하면서도 호칭은 ‘오빠‘라고 부르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이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터에서나 술자리에서나 늘 대화의 첫마디는 "오빠가......"로 시작했다. 징글징글했다. "나는 당신 같은 오빠 없습니다. ‘여동생 같아서‘라는 말 제발 그만하세요." 수도 없이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 P123.124

나는 미투를 하고 나서야 높은 굽에서 내려왔다. 미투 이후에야 주변에서 처음으로 내게 물었다. "신발이 너무 높은 거 아니에요? 힘들어 보이는데." 그러고 나서 활동가가 내게 운동화를 선물했다. 끝없이 외모 품평을 받던 환경에서 시작된 높은 굽 생활이 끝나던 날이었다. 불편한 줄도 몰랐던 그 굽 높은 신발이 정말로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운동화를 신게 되었다. 물론 가끔은 내 의지로 높은 굽도 신고, 멋진 옷도 입고 싶다. 어디까지나 내가 원할 때 말이다. - P124

짐을 빼서 다른 비서실로 옮길 때는 무거운 상자를 혼자서 옮기는데 빨리 나가지 않는다며 큰소리를 들었다. 불안한 상황 속에서 동료에게 당한 대우가 너무 비참해서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때 보였던 눈물은 이후 안희정과 멀어져서 울었던 것이라는 거짓말이 되어 세간에 돌았다. 정무비서가 된 것은 승진한 것인데도 내가 슬퍼했다는 거짓 주장도 나왔다. 역시 잘못된 사실이다 급수는 그대로였고 보직만 변경되었다. - P126

수행비서를 하면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비협조적이었는데, 정무비서가 되면 더 심할 것이 뻔했다. 무엇보다 가장 불안하고 괴로웠던 것은 내게 왜 정무비서로 가는지 아무도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현실이 납득되지 않았다. 주변에서 내가 ‘잘렸다‘고 여기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 P126.127

(충남도청 상급 공무원의 기간제 근로자에 대한) 도청 성희롱 사건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바로 이어진 화제는 안희정이 스위스 다보스포험으로 출국할 때 공항패션으로 사진 기사를 한번 내는 게 어떻겠냐는 주제였다. 토론은 활발히 이어졌다. - P130

(1심 재판부에서는) 피해자 진술 시 피고인과 분리해주겠다고 했지만, 피고인이 소리가 잘 안들린다고 하자 내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바로 재판정 안으로 들였다. 얇은 가림막이 설치되었지만 숨소리까지 그대로 들렸다. 나는 두려워서 그 방향은 쳐다보지도 못했다. 사실상은 피해자 바로 옆에 피고인을 앉힌 것이다. 공포스러웠다.
피고인이 움직이는 소리와 기침 소리가 들렸다. 안희정은 내가 진술할 때마다 수시로 헛기침을 했다. 마치 수행할 때 관용차 안에 있는 것처럼 아주 작은 공간에서 안희정 옆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16시간을 덜덜 떨면서 진술했다. 한여름 날이었지만 체온이 급격히 내려가 손끝과 입술이 보랏빛으로 변했다. - P144

증인들은 첫 번째 피해 이후 내가 찾지도 않은 순두부를 찾았다고 했고, 들어가지 않은 부부 방에 들어갔다고 했으며, 마지막 피해 이후 만나지도 않은 날 나와 만났다고 돌아가며 위증했다. 모욕적이고 괴로운 말들이었다. 언젠가 위증의 죄도 꼭 묻고 싶다. - P145

3심 상고심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배정된 대법원 재판부의 대법관이 기피 신청을 했다. 피고인과의 연고로 인한 이유라고 했다. 피고인이 연고를 갖지 않은 재판부가 과연 있을까? 1심, 2심, 3심 모두 두 번 이상 재배당됐다. 전직 대통령이나 대기업이 주로 받곤 한다는 재판부 재배당과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관과 얽힌 인연들이 왜 이토록 빈번하게 생길까?. 이 반복되는 유예가 안희정의 위력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위력은 존재하나 행사하지 않았다"던 서울서부지방법원 조병구 재판부의 말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내가 겪은 재판 과정의 면면이야말로 곧 그 위력이 어디까지 닿는지를 절실히 느끼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 P146.147

피고인(안희정) 측 변호사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답변이 나오지 않거나 내가 혼란스러워할 때 검찰 조서에는 있지도 않은 말들을 조서를 넘기듯 보며 마치 내가 한 것처럼 질문했다. 안희정의 변호인에게 항의하자, 변호인은 "변호사는 얼마든지 유도심문할 수 있다"고 당당히 답했다. - P148

(1심) 재판부는 내게 정조보다 무엇이 더 중요했는지 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반박하고, 관련된 증거를 내고, 담담이 이겨내는 것뿐이었다. 수치와 감내 모두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 P149

직장에서 나의 생사여탈권을 쥔 안희정은 내가 도망쳐 나가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 P150

세 명의 판사는 안희정에게는 묻지 않았다.

‘왜 김지은에게 미안하다 말하며 여러 차례 농락했는가?‘
‘왜 직접 페이스북에 합의에 의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썼는가?‘
‘왜 세 번이나 입장을 번복하였는가. 일관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왜 검찰 출두 직후 휴대폰을 파기했는가?‘ - P150.151

하지만 자극적인 말들과 허위 증언 앞에 내가 낸 객관적인 증거와 수십여 시간에 걸쳐 받은 진술들은 아무 의미 없는 것들로 치부되었다. 사실이 중요한 것으로서 대우받지 못하는 채로 여론과 선정성만이 중요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상황을 만드는 데 얼마 전까지 나의 동료였던 사람들이 참여했다. 2차 피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큰 배신감과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꼈다. 권력 앞에서 사인 간의 우정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음을 배웠다. 인간은 없고, 조직만 있었다. - P156

1심 재판의 심문이 검찰 측 증인은 일부 공개, 피고인 측 증인은 전부 공개가 되면서 언론에 노출된 정보의 불균형이 극심했고 수많은 억측과 거짓이 양산됐다. 이 거짓의 파도에 쓸려 내려온 거친 유리 조각들을 지금도 여전히 줍고 있다. 하지만 언제쯤 다 치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괴로운 일이다. - P157

이후 2심 중 안희정은 ‘연인 관계‘에 대한 진술을 여러 번 번복했다. 모든 성추행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번복했다. 결코 그런 적이 없다, 어쩌다 그랬을 수도 있다, (나는) 대중의 시선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다, 친밀한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손을 잡는 등의 가벼운 접촉은 할 수 있었을 수도 있다, 호감이 있었기 때문에 잠깐잠깐 만지는 스킨십은 있었을 수 있다, 연인 관계라면 그 정도는 가능한 것 아니냐...... - P158

안희정의 수행비서로 일하기 전 정부 부처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지만 그 어떤 상사도 친하다는 이유로 내 손을 잡지 않았다. 그것이 엄연한 성추행이라는 것은 사회인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다. 안희정이 그것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무엇이든 허용된 자리라고, 자신은 그래도 된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 같다. - P158

함께해주는 사람들은 말했다. 조직의 배신자로 비난받고 있지만 김지은을 돕는 게 내 소신을 지킬 수 있는 길이어서 다행이라고, 김지은 개인만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내 자아를 지키고 내 가족을 위하는 길이라고 말이다. - P160

모든 것이 끝나고 마음이 추슬러지면 정식으로 항의하고 싶었다. 어떻게 피해자도 받지 못한 (항소심) 판결문 전문을 단독 입수하게 되었는지, 왜 개인정보 보호도 없이 공개했는지 묻고 싶다. 왜 법원은 이것을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외부에 주었는지, 왜 실명 버전을 주었는지, 성폭력 사건의 판결문이 단독 입수되고 외부로 노출되어 버젓이 기사화되는 데도 왜 어느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피해자가 겪을 고통과 모욕은 아무도 고려하지 않았다. - P168

그저 믿어주고, 지지해주고, 신뢰해주는 것, 그것이 성폭력 피해자에게는 가장 큰 힘이 됨을 직접 경험했다.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는 잘못이 없고,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해주는 것, 그 말 한마디에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성폭력 피해자는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온다. - P170

전략의 목적은 명확했다. 메시지를 반박하지 못하니 메신저를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이 여자가 어떠어떠한 사람이기 떄문에 피해자의 말을 믿을 수 없다‘ ‘어떤 과거가 있기 때문에 피해자가 아닐 것이다‘와 같은 식으로, 내가 낸 증거들과 상관없는 진술들로 나의 말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애초에 ‘피해자의 과거의 이력‘을 묻는 것은 해외에서는 금지되어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 P172

위력의 무서운 점은 위협적인 말을 듣지 않아도, 스스로 몸이 굽혀진다는 것이다. 위력은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다. 타인의 의사를 제합할 수 있는 유형적, 무형적인 힘이다. 폭행이나 협박을 동원한 경우는 물론,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이용하여 의사를 제압할 경우도 포함된다. 우리는 살면서 그런 힘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고, 느끼고, 경험하고 있다. (중략) 그 위력에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참는 일은 많다. 그럼에도 개인은 그 안에서 자신의 업무나 학업을 쉼 없이 이어나간다. 위력이 존재한다고 해서 학교나 직장을 바로 그만두지는 않는다. 그것이 위력의 실상이자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이다. - P174.175

안희정의 성폭력 범죄를 증명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증거는 따로 있었다. 그런 자료들이 재판에서 증거로 다루어졌고 판결문에 인용되어 유죄 판결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러나 재판은 비공개였다. (중략) 합리적이고 공정한 판결에 의문을 제기하는 언동들이 2심 재판부를 비난했다. 일부 언론들도 "같은 사안, 다른 판결"이라며 "피해자 말이면 다 믿는 성 인지 감수성"이라고 기사를 썼다. 추가 증거와 추가 증인 신술에 피고인 진술까지, 그 외 모든 점에서 1심과 2심은 엄연히 다른 재판이었다. 그저 공소 제기된 범죄가 같을 뿐이다. - P178

성폭력 기사만 봐도 내 얘기가 아닐까 심장이 쿵쾅거리고, 다른 뉴스에 사건을 연상시키는 말들, 충남도청, 민주당, 국회의원, 도지사, 러시아, 스위스, 미투 등이 나오면서 나는 불안에 휩싸인다. 연쇄 작용이라는 것은 놀랍다. 찰나에 순간이동을 해 나는 다시 한 번 사건을 경험한다. 어느 때는 내 심장이 콩콩콩 뛰는 것조차도 아프고 저리다.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이 된 것 같다. - P221

수행비서를 할 때 안희정에게 꾸중을 듣고 욕도 먹었지만, 안희정 팬들에게는 더 심한 욕과 위협을 받기도 했다. 저런 깐깐한 년, OO년, 지사 옆에 붙어 있는 년, 비서년, 여자수행년...... 인수인계받은 원칙대로 일했지만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이전 남자 수행비서들이 듣지 않았던 욕을 더 들어야 했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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