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목광수) (전략) 2002년 이후에 사모님이 제자들에게 선생님(존 롤즈) 소유의 책을 한 권씩 가져가도 좋다고 하여서 제자 중 한 사람이 책을 한 권 가져왔다는 내용의 블로그 글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 글의 저자는 노직의 책인 『아나키,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를 가져왔는데, 책 여러 곳에 선생님이 "It is not Rawls!"라는 메모를 남겼다고 하더군요. 선생님도 1991년 인터뷰에서 노직이 오해한 부분이 적지 않다고 언급하셨으니 그 내용이 사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음) (후략) - P13
JR(존 롤즈) 저는 『정의론』 자체가 모든 현실적 문제에 답을 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적 문제를 분석하여 대안을 제시할 때 『정의론』이 이론적 차원에서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등대가 배를 직접 끌지는 않지만, 광활하고 어두운 밤바다에서 배가 방향을 잃지 않고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돕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이론적 기여는 철학을 공부하는 후학들의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 P17
둘째는 차등 원칙 the difference principle으로 최소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돌아가야 하다는 원칙이다. 상위 원칙을 충족한다는 조건 아래 사회적 이익의 배분은 최소수혜자의 처지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체계적으로 조정되어야 한다. (중략) 차등 원칙이 담고 있는 보상, 상호성, 박애 정신 덕분에 차등 원칙은 정의의 두 가지 원칙의 사회가 불운한 사람들이 경쟁에서 뒤처지도록 내버려 두는 식의 형식적 차원의 평등한 기회에 입각한 실력주의 사회meritocratic society로 가지 않게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정신을 담고 있기에 차등 원칙은 최소수혜자에게 조금의 이익이 있는 것만으로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수혜자를 포함한 사회 전체 구성원의 자존감이 유지될 수 있을 정도에 해당하는 적정 수준 이상의 경제적 수준을 유지하게 하는 기능을 할 것이다. - P34.35
롤즈의 이론이 복지이론인 복지국가 자본주의에 적합할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생각했지만, 롤즈는 자신의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실현될 수 있는 사회 체제를 재산소유 민주주의 체계property owning democratic system라고 천명하고 있다. 재산소유 민주주의는 경쟁적 시장 체제를 인정하지만 시장의 불완전성을 바로잡고 분배적 정의의 토대가 되는 배경적 제도들을 유지하기 위한 적정 수준의 정부 개입을 옹호한다는 특징이 있다. 재산소유 민주주의의 배경적 제도들은 부와 자본의 소유를 분산하고 이를 통해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 영역까지도 독점 지배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막는다. 이러한 특징은 롤즈의 두 가지 원칙 가운데 차등 원칙이 갖는 성격과 부합한다. 차등 원칙은 사후적 재분배를 옹호하기보다는 사회 기본구조를 정의롭게 만드는 배경적 제도들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이런 성격은 누진세를 적용하는 부분에서 재산소유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자본주의의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 준다. 복지국가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의 독점화 등과 관계없이 최종적인 총소득에 누진 과세를 적용하여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 기금을 마련하는 사후ex post 재분배 정책이다. 그러나 재산소유 민주주의는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정신에 따라 자유와 공정한 기회의 평등을 유지하기 위해 협동의 최초 상황을 공정히 하고자 상속, 증여 등의 불로소득에 대한 사전ex ante 재분배 정책으로 누진 과세를 부여한다. 재산소유 민주주의에 따른 이러한 사전 재분배 정책을 통해 사회 구성원은 상호성 원칙에 걸맞게 상호 이익을 위해 협력하게 된다. - P37.38
롤즈는 시민 불복종을 법이나 정부의 정책에 변혁을 가져올 목적으로 행해지는 공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양심적이지만 법에 반하는 정치적 행위로 정의한다. 이런 점에서 시민 불복종은 개인적 차원에서 직접적인 법령이나 행정적인 명령에 불순종하는 양심적 거부와는 차별화된다. 시민 불복종 행위는 비록 해당 법을 위반하긴 하지만 그 행위는 정의롭다고 해당 공동체 성원들의 정의감에 호소하는 사회적 방식이다. 롤즈는 시민 불복종 운동의 대상은 정의의 제1원칙인 평등한 자유의 원칙에 대한 심각한 위반이나 제2원칙인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에 대한 분명한 위반에 국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제2원칙인 차등 원칙은 심각한 부정의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시민 불복종은 합법적인 다른 방식이 존재하지 않을 때 적용하는 최후의 대책임을 명시한다. 롤즈는 거의 정의로운 사회 체계를 전제한 비이상론을 전개하면서도 사회 기본구조가 심각할 정도로 부정의하다면 극단적인 변화나 혁명을 위한 방도까지 마련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이런 경우에는 무력에 의한 행위나 다른 종류의 저항도 분명히 정당화될 수 있다고 롤즈는 주장한다. - P39.40
롤즈는 자신의 정의론이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갖는 심리 상태와 가치를 통해 지지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이 중 하나가 자유와 자존감에 대한 논의이다. 롤즈 정의론의 토대가 되는 다양한 개념 중 하나는 자유가 어떤 가치보다 우선한다는 자유의 우선성 개념이다. 롤즈에게 자유는 사회적 기본재화로서 모든 사회 구성원이 더 많이 갖기를 바라는 가치이지만 동시에 다른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하고 양보될 수 없는 가치이다. 이러한 자유의 우선성은 사회 구성원의 가장 고차원적인 이해관심이 자유라는 논변에 근거를 둔다. 롤즈 논의에서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계획하고 구성하며 추진하는 존재인데, 이와 같은 논의는 자유를 전제로 한다. 롤즈는 또한 자유의 우선성을 자존감 논의를 통해 정당화하고자 한다. 자존감이 없다면 어떤 것도 할 만한 가치가 없어 보일 것이며, 또 어떤 것이 우리에게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추구할 의지를 상실할 것이라고 말한다. 롤즈에 따르면 자존감은 대단히 중요해서 원초적 입장의 합의 당사자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존감을 침해하는 사회적 조건을 피하길 바랄 것으로 전망한다. 이렇게 중요한 자존감이 확보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가치가 바로 자유이다. 사회 구성원은 평등하게 분배된 자유로 인해 사회에서 동일한 공적 지위를 갖게 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많은 자유로운 공동체에서 충실하고 다양한 내적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어 자존감을 충족할 수 있다. - P44.45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롤즈의 정의론은 사회를 전제하며 그러한 사회에서 사람들의 정의감이 고양된다고 주장한다. - P46
비슷한 맥락에서 피케티Thomas Piketty는 교육을 통한 학문적 노력과 능력을 맹신하는 새로운 엘리트를 "브라만 좌파"로 명명하며 이러한 실력주의의 문제를 분석한다(토마스 피케티 2020:815-819), 새로운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업적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에 특권 의식을 고집하는 과거 엘리트들을 경멸할 뿐만 아니라 성취를 이루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노골적인 경열을 드러내고 자존감을 훼손하게 하는 차별주의 태도로 새로운 민주주의적 불평등을 심화한다. - P59
예를 들어, 공부할 분위기가 갖춰진 가정에서 자란 아이와 그렇지 않은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는 공부에 대한 태도와 습관, 노력하려는 자세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가정환경이 학생의 자기학습량과 학업성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경험연구는 이를 뒷받침한다(손진희, 김안국 2006:256-259). 롤즈는 "도덕적 응분의 몫을 보상하는 데 직관적으로 가까워 보이는규칙은 노력에 따른 분배, 아마도 더 나은 표현으로 양심적인 노력에 따른 분배이다. 그러나 재차 말하지만, 한 개인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노력도 타고난 능력, 숙련된 기술,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라고 강조하여 노력이 우연성과 관련 깊음을 강조한다(Rawls 1999a:274). - P59
뒤에서 검토하겠지만, 교육과 관련해서 노력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검토가 중요한 이유는 롤즈의 논의에서 노력이 우연성이 아니라 개인의 책임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면 노력의 대가인 부나 권력이 응당한 몫으로 도덕적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공부를 잘하여 획득한 부는 정당하다고 여기는 배경에는 이러한 논리가 작동한다. 한국 사회에서 실력주의는 노력의 대가가 도덕적 응분의 몫이라는 공평성 개념과 결합하여 정당화되는 분위기이다. 그래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을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노력의 대가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에 형식적 차원의 기회균등만을 추구하려고 한다. 그런데 롤즈는 자신의 공정성 개념을 통해 노력이 도덕적 응분의 몫이라는 개념을 비판하며 실력주의 사회를 『정의론』에서 거부하고 있다(Rawls 1999a:91-92). - P60.61
롤즈에 따르면, 자존감이 상실되면 파괴적 감정인 시기심의 경향성이 강화되어 사회의 정의와 공정성이 훼손되기 쉽다. 이런 측면에서 롤즈는,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다른 어떤 정치 이론보다도 자존감을 한층 확고하게 지지해 준다고 주장한다(Rawls 1999a:470) - P70
롤즈는 "천부적인 재능의 분배를 가정할 때, 동일한 수준의 재능과 능력, 그리고 이러한 자질을 이용하려는 동일한 수준의 의욕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출신 사회계급, 즉 그들이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하는 계급과 관계없이 동일한 성공의 전망을 가져야 하는 것이 공정한 기회라고 언급하여 자아실현을 위한 교육을 강조한다(Rawls 2001:44). - P72
공정한 기회균등 원칙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자신의 재능을 실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교육과 관련해서 롤즈가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부정의인 불공정함은 자신의 능력을 사회적 여건으로 인해 계발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적 우연성에서 유리한 사람에게 더 많은 재화를 투여하는 것은 공정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이러한 공적 재화 투여가 자연적 우연성에 토대를 둔 교육 혜택에서 더 많은 격차를 나타낼 수 있겠지만, 롤즈는 이러한 격차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격차가 교육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경제적 특권으로 전이되어 불평등을 야기한다면 부정의하다는 것이 롤즈의 입장이다. 예를 들어, 교육을 통해 더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 그러한 많은 교육이 필요한 직업을 갖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그러한 직업을 통해 지나치게 큰 경제적 혜택을 독점하고 사회적 권력을 갖는 것은 부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롤즈의 민주주의적 평등은 공정한 기회균등 원칙의 이러한 부수 효과side-effect를 차등 원칙을 통해 교정하고자 한다. - P76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실질적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렇다면 롤즈의 정의론에서 볼 때, 한국 교육에서의 진정한 문제는 대학의 학벌이 가져오는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 사회 최소수혜자에게 혜택이 되지 못하는 사회 기본구조이다. 일부 교육 시민단체가 출신학교 차별금지법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것이 차등 원칙의 구체적인 전략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최저임금을 높이고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방식, 그리고 직업군들 사이의 소득 격차를 낮추는 방식 등도 교육의 민주주의적 평등을 실현하려는 구체적인 전략이 될 것이다. - P81.82
따라서 롤즈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필요로 하며,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는 것, 즉 완성하는 것은 타인과의 적극적인 협동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Rawls 1999a:460). 이러한 협동이 꼭 임금 노동이나 일일 필요는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임금 노동에서 배제되는 사람들, 예를 들면 가정주부나 가족을 돌보는 사람 등은 인간으로서의 사회성 자체를 갖지 못한 존재로서 자기실현을 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 P94
따라서 정부가 의미 있는 일자리를 충분히 제공할 수 없다면 사회 구성원은 여전히 일자리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율성을 보장받아야 한다. 이를 보장할 효과적 방법 중 하나는 기본소득 정책이다. 임금 노동에 참여하는 사회 구성원이 자존감이 훼손되지 않은 채 의미 있는 일을 추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소득에서 차지하는 노동 소득의 비율을 낮추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Hsieh 2009:412). 더욱이 의미 있는 일이 앞에서 본 것처럼 단지 경제적 활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성을 갖는 다양한 비경제적 활동까지 포함한다면 이러한 기본소득은 의미 있는 일을 위해 더욱 필수적일 것이다. 정부가 제공하는 것에 이러한 비경제적 일이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는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최소치가 보장될 때 사회 구성원은 사회적 기여를 하는 다양한 활동, 예를 들면 취미 활동이나 예술 활동, 사회봉사 활동 등을 통해 자신의 자존감을 고양하고 사회성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 P116.117
셋째, 정의로운 저축의 원칙이 없다면, 롤즈 정의론의 기본 정신이 훼손되는 것이다. 기후변화 시대가 원하는 정의의 요구는 미래 세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현세대가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자연을 보존하라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이러한 정의의 요구는, 롤즈가 『정의론』 제1장에서 밝힌 직관적인 정의와 일치한다. 롤즈는 영미 전통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해 온 공리주의를 거부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공리주의는 직관적인 정의와 배치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사람들의 직관적인 정의에서 보자면, 설령 다수라고 하더라도 일부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일부의 이익이 희생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듯이 현세대의 이익을 위해 미래 세대의 이익이 희생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Freeman 2007:136). 따라서 롤즈의 정의론은 논리적 일관성을 위해 기후변화 시대에 적합한 정의의 원칙을 제시해야 한다. - P138.139
롤즈는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가 합리적이고 합당한 존재라고 전제하는데, 합리성의 성격 중 하나가 상호 무관심성이다. 롤즈는 자신의 합리성 개념이 기존의 사회과학에서 사용되는 합리성 개념과 동일하지만, 그러한 합리성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상호 무관심성이라는 특징이 추가되었다고 기술한다(Rawls 1999a:123-124). 그런데 합의 당사자의 상호 무관심성은 다른 합의 당사자에 대한 것이지 그외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Freeman 2007:149), 합의 당사자가 상호 무관심적이라는 것은 다른 합의 당사자의 목표aims와 헌신commitments을 고양하는 것에 직접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지, 합의 당사자가 다른 사람의 목표와 헌신을 고양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롤즈는 원초적 입장의 합의 당사자를 고립된 개인으로 보지 말아야 하며 다른 사람, 특히 자신의 후손에 대한 애정과 헌신을 갖는 존재라고 주장한다(Rawls 1999a:181). 롤즈의 합당성 개념은 정의감을 포함하는데, 정의감에는 후손에 대한 고려나 상호성에 대한 강조 등이 포함될 수 있다. - P145
더 나아가서 부정의한 현실 속에서 규범적 이상론 없이 특정 부정의를 제거하기 위해 취해진 행위는 더 심각한 부정의를 초래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 취업에서의 불이익이라는 부정의를 시정하기 위해 군복무한 남성에게 주어지던 군가산점 제도는 규범적 이상론의 방향성 없이 단기적 관점에서 이루어져 실제로 남녀 차별과 장애인 차별 등의 심각한 부정의를 초래했다. 만약 이러한 사안에 대해 공정한 기회의 평등이라는 장기적 관점, 즉 규범적 이상론을 고려한다면 부정의를 시정하기 위해 모병제라든지 대체 복무와 같은 다른 식의 공정한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면서 부정의를 시정하기 위한 단계적 조치를 취해야 했을 것이다. - P165.166
기본적인 정의의 조건으로 간주될 수 있는 교육이나 참여의 기회 등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적 토론을 진행하는 것은 자칫 부정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의를 정당화할 우려가 있다. - P189
복지국가 자본주의와 POD(재산소유 민주주의property-owning democracy)는 생산 자산에 대한 사적 소유를 허용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복지국가 자본주의는 생산 자산에 대한 소수의 독점을 용납하는 반면에 POD는 이러한 독점을 방지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소유하는 방식으로 분산하려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복지국가 자본주의에서 초래할 수 있는 소수의 사적 소유 독점은 경제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는 정치적 삶까지 통제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복지국가 자본주의는 성장 위주 정책을 추구하면서도 이에 따른 부작용을 보완하기 위해 실업수당이나 의료 혜택을 제공하고자 한다. 이는 사회 구성원이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보장하고 사고와 불운에 대한 보호로서 취해지는 조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복지에 의존하는 하층계급을 형성하고 정책 과정에서 항상 수동자라는 배제의 인식을 낳게 된다. 더욱이 사고나 불운으로 손해 보는 이들을 지원하려는 복지국가 자본주의의 사후 재분배 정책은 수혜자로 하여금 의존적이고 굴종적인 태도를 갖게 하여 자존감을 훼손할 수 있다. 롤즈는 『정의론』에서 "자존감 없이는 어떤 것도 할 만한 가치가 없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존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자존감 훼손을 초래할 수있는 복지국가 자본주의는 정의론을 반영하는 제도로 보기 어렵다(Rawls 1999a:386). - P210.211
자유롭고 효과적이며 의무적인 기본 교육은 천부적 능력과 재능, 그리고 사회적 여건의 차이가 숙련도의 불평등으로 나타나는 정도를 감소시키는 방식에 기여해야 한다(Van Paris 2003:221). - P222
롤즈는 가족에게 사적이면서 공적이라는 독특한 이중적 위치를 부여한다. 가족은 롤즈가 정의의 대상으로 삼는 사회 기본구조basic structure에 포함되어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가 적용되는 영역인 동시에 합당한 포괄적 교설reasonable comprehensive doctrine이 허용되어 자유로운 가치관이 향유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 P240
롤즈는 『정의론』 초판에서 정의론이 성평등을 지향하고 있음을 명시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실수였다고 이후의 저작에서 자인한다(Rawls 1993a:466). - P242.243
비슷한 맥락에서 (샤론) 로이드는 다원주의에 관심을 갖는 롤즈에게 중요한 것은 특정 가족의 형태가 아니라 정의로운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을 효과적으로 양육하고 준비할 수 있는 역할을 어떤 형태의 가족이 할 수 있는가라고 분석한다(Lloyd 1994:358-359). 이런 의미에서 롤즈는 가족의 역할인 사회적·문화적 재생산과 상호부조 기능을 한다면 어떤 형태의 가족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롤즈의 논의는 동성애 가족, 생활동반자 법에 대한 입장도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P246
비슷한 맥락에서 밀John Stuart Mill은 『여성의 종속』(1869)에서 가족 영역이 소년들에게 성차별적 특권을 소유했음을 가르치는 "폭정의 학교school of despotism"라고 언급한다(Mill 1998:47). - P250
초기 논문인 「분배정의 Distributive Justice: Some Addenda」(1968)에서 롤즈는 자존감의 사회적 토대를 제공하려는 롤즈적 정치 체계의 경향은 "항상 인간을 목적으로만 간주하고 결코 수단화하지 않으려는 칸트적 정신의 더 강한 변형"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러한 부분은 자존감이 칸트적 의미를 가진다는 해석을 뒷받침한다(Rawls 1999c:171). - P277.278
오히려 자존감의 공동체주의적 특성은 자중감, 즉 평가적 자존감 개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롤즈가 자존감이 다른 사회 구성원의 존중에 의존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존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발적으로 속한 소집단, 즉 롤즈식으로 표현하면 사회적 연합체social unions 구성원의 존중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적 연합체로서의 집단은 구성원의 자연적 자산, 등력, 이해관심, 사회 경제적 지위 등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상대적 평등을 유지하는 집단, 즉 공유된 가치와 문화를 전제하는 집단으로 볼 수 있다(Rawls 19992:388). 이런 맥락에서 롤즈는 "이해관심을 공유하고 자신의 노력이 동료에게 인정받는 공동체가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Rawls 19992:388). - P282.283
이러한 동적으로 해석한 자존감의 구체적인 내용은 러셀Daniel Russell의 설명에서 일부 엿볼 수 있다.
"자존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일종의 조화, 즉 자신을 자신이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어떤 사람은 진정한 우정을 위해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자신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자존감은 도덕적 성숙함의 한 형태인데, 이러한 성숙함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의 핵심 성품이며, 사람이 잘 살기 위해 필요한 성품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자존감은 인간의 바람직한 측면이고 좋은 사람의 성품이기 때문에 자존감은 그 자체로 도덕적으로 적합하다"(Russell, 2005:120). - P285
자존감의 중요성은 『정의론』에서 "자존감이 없다면 어떤 것도 할 만한 가치worth가 없어 보이며, 또한 어떤 것이 우리에게 가치value가 있더라도 그것들을 추구할 의지를 상실하게 된다. 모든 욕망과 활동은 공허하고 헛된 것이 될 것이며, 우리는 무감각하고 냉소적인 상태에 빠질 것이다. 따라서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존감을 침해하는 사회적 조건을 피하길 바랄 것이다"라는 문학적인 표현을 통해서도 강조된다(Rawls 1999a:386).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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