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와 사랑 ㅣ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35
헤르만 헤세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3년 3월
평점 :
품절
얼마전 그녀가 나에게 지와 사랑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할 것이라고 하면서 한참 곰곰이 생각하더니 나는 나르치스와 유사하다고 했다. 그리고 소설을 읽고나서 골드문트와 나르치스중에 누가 더 마음에 드는지 말해달라고 했다.
지금 그녀에게 연락을 할 수는 없지만, 소설을 막 읽은 지금도 그녀가 소설에 관해 나에게 남긴 물음에 나는 단정적으로 대답할 수가 없다. 내가 나르치스와 유사하다는 그녀의 지적에는 대체로 동감한다. 나에게 골드문트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 사람을 골드문트로 대표되는 감성, 자유로움, 예술성, 방랑자적 이미지, 체험적 생활 등과 나르치스로 대표되는 지성과 사색, 구도자적 삶의 자세, 날카로운 직관 등의 특성으로 나누어 판단하자면 나는 분명히 나르치스적인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 물론 나르치스만큼 훌륭하게 내 자신을 성장시키지 못했지만,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고 가능한 위험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행동하기전에 생각부터 하는 나는 자유롭게 발 닿는대로 길을 떠나 수많은 여자들과 무수한 경험을 하고 숲과 들판에서 수많은 밤을 보내면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골드문트와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나르치스와 같이 내 삶의 방향을 이끌어주는 친구를 만나지 못해 나의 본성과 다르게 일상생활과 사회가 짜놓은 틀에 따라 잘못된 길을 추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도원에 학생으로 들어온 소년 골드문트와 그 수도원의 젊은 교사인 나르치스간에는 학생과 교사인 지위의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하지만 그러한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르치스가 골드문트의 본성을 꿰뚫어 본 후 그에게 그가 가야할 길을 알려주어 골드문트가 수도원을 나와 방랑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둘의 삶의 모습은 크게 달라진다. 각자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세월이 흐른뒤, 감옥에서 교수형을 기다리는 죄수가 되어있는 골드문트와 참회를 들어주러온 신부인 나르치스가 재회하는 장면만으로도 골드문트와 나르치스의 서로 다른 삶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골드문트가 욕정에 사로잡혀 수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고 살인까지도 했다고 해서 골드문트가 천하의 죄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성직자인 나르치스가 성자로 그려지는 것도 아니다. 난잡한 정교나 살인 그 자체만으로 보면 죄가 될 수도 있겠지만, 골드문트는 자기 마음, 즉 사랑이 이끄는대로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그 나름의 삶의 의미를 찾아간 것이며 결국은 진정한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나르치스는 그런 골드문트의 죄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기도나 성사를 게을리한 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나르치스 또한 구도자적 삶의 태도를 견지하면서 스스로 삶의 의미를 발견해나간다. 수도원에서의 이별이후 둘은 각자 서로 다르지만 정말로 충실하게 자신의 본성에 맞게 삶을 개척해나간 것이다.
골드문트와 나르치스, 둘 중 누구의 삶이 더 올바른 것인가 하는 평가는 내릴 수 없다. 오히려 헤르만 헤세는 양자의 융합을 진정한 가치로 제시하는 것 같다. 그녀의 물음에 대한 정확한 답은 아니지만, 그녀에게 답을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나는 좀더 골드문트적인 삶을 살고 싶다고. 나의 나르치스적인 특질이 내가 골드문트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을 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지만, 양자의 융합이 반드시 불가능하지 않다는 전제가 있다면 나는 정말로 골드문트처럼 내 마음이 이끄는대로 자유롭게, 사랑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그렇게 그녀에게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