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謹弔 민주노동당
 
  2008-02-04 오전 9:39:39

 

예상했던 결과다. 비상대책위원회의 혁신안은 불필요한 수순이었지만, 아무 의미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중의 눈앞에 이른바 '자주파'의 정체를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제 당의 상황을 CD로 구워 북한 공작원에 넘겨주는 해당 행위를 해도, 민주노동당에서는 결코 제명당하지 않는다. 이른바 자주파는 그냥 당기위에 올려 조금 제재나 하자는 자기들 측의 중재안까지도 부결시켰다.
  
  1.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른바 평등파들이 퇴장하면서 다음 안건 하나가 의결 정족수 부족으로 상정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북핵자위론을 주장했던 어느 간부에 대한 징계안이다. 하지만 혁신안의 대부분의 내용이 부결되었으므로, 설사 의결이 이뤄졌어도 징계안은 부결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게 정당하다는 것이 민주노동당의 공식 입장이라는 얘기다.
  
  비대위에서 혁신안 부결을 불신임으로 간주한다고 했는데도 부결시킨 것을 보면, 입에 '대동단결'을 달고 사는 그들도 충실한 종북이라는 원칙(?)이 문제가 되면, 대동단결을 안 하고 싶은 모양이다. 박용진 전 대변인이 '혁신안이 부결되면 당이 깨진다'고 울먹이며 호소를 해도, 종북파들의 태도는 단호했다. 당을 깨면 깼지, 북핵의 정당성과 '본사'에 보내는 보고의 의무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 태도의 분명함은 평가해줄 만하다. 사실 내가 걱정했던 것은 이들이 대충 혁신안을 받아들여 사태를 무마한 후, 숨을 고르다가 기회를 봐서 다시 튀어나와 이제까지 했던 짓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이번에 자신들의 색깔을 명확히 드러냈으니, 앞으로도 대중들 앞에서 거짓말하지 말고, 제 정치적 목표와 정체성을 숨김없이 분명히 밝히기 바란다.
  
  '종북노선이 문제가 아니라 패권주의 문제'라는 의견도 있다. 종북노선과 패권주의의 관계를 몰라서 하는 얘기다. 주사파들이 패권적 행태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종북노선의 관철을 위해서다. 당내에서 자신들의 종북행위에 제동을 거는 세력이 존재하니,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벌이는 작태가 바로 패권주의가 아닌가. 따라서 종북노선이 존재하는 한 패권주의는 영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손석춘 씨가 "통일운동에 찬물 끼얹지 말라"고 했던가? 북한에서 핵무기 만드는 것을 옹호하는 것이 그가 원하는 '통일운동'이라면, 그런 통일운동에는 앞으로 찬물이 아니라 똥물을 끼얹을 것이다. 그는 또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말한다. 그의 독특한 윤리 감각에 따르면, 제 동지들 신상 파악해 북한에 보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이고, 그걸 비판하면 인간에 대한 예의를 져버린 패륜 행위다.
  
  옆에서 김민웅 씨도 거든다. 내 기억에 2002년인가? 제 동생이 서울시장 선거에 나왔을 때,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전쟁난다며 민주당에 표를 몰아달라고 해서, 나와 설전을 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쟁 위기까지 고취하며 민주노동당에 표주면 사표가 된다고 했던 그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갑자기 민주노동당에 대한 살가운 애정을 드러낸다. 그새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종북파의 정체를 몰라서 그런 발언 했다면 용서가 되겠지만, 그들을 접해 본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상황을 설명해주었고, 이번 대회에서 종북파의 정체가 명확히 드러났는데도 앞으로 계속 이 그들의 행태를 옹호하고 정당화한다면, 앞으로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종북파에게 갖춰야 할 인간적 예의가 있겠지만, 내게는 통일 되는 날 김정일 정권 아래 고생했던 북조선 인민들에 갖춰야 할 인간적 예의가 앞서기 때문이다.
  
  3.
  
  굶주린 북한 주민들이 먹을 것을 찾아 압록강을 건너다가 익사했다고 하자, 태연히 "남한에서도 여름에 익사 사고 나지 않냐"고 대꾸하던 이들. 동성애에 대해 묻자 버젓이 "자본주의적 퇴폐"라고 대답하던 이들. 북한에 갔을 때 안내원에게 노래를 하나 불러달라고 하자 지도원 동무에게 허락을 받고 노래를 하더라며, 이를 "집단주의의 미덕"이라고 찬양하는 이들. 미선이 효순이 끔찍한 사체 사진을 연하장(?)만들어 돌리는 이들. 이런 이들하고 같이 '진보'를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몇 년 전에 내가 당에 절대로 주사파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을 때, 민주노동당 내의 모 인사가 "그들도 언젠가 변할 것"이라며 주사파들과 나의 화해(?)의 자리를 주선한 적이 있다. 그때 만난 주사파는 내게 자신이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민주노동당 가입을 권유하는지 자랑을 했다. "동지, 김 주석이라면 이 상황에서 무엇을 했을 것 같소. 내 생각에 김 주석이라면 남조선 상황에서는 민주노동당을 했을 것이요."
  
  도대체 이런 사람들하고 진보정당을 같이 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 내가 얼마나 참담했겠는가. 종북주의자들이 온갖 편법으로 민주노동당의 조직을 장악해 들어와도 징계 하나 제대로 못하는 것을 보고, 나는 이미 당시에 민주노동당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그때 내가 탈당으로써 경고했던 일이 지금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운동을 해 봤다는 사람들이 결국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말인가? 이것도 이해가 안 간다.
  
  이른바 평등파도 한때 망해가던 소련을 모델로 삼은 적이 있지만 동구의 몰락을 보고 생각을 바꾼 것처럼, 북한을 모델로 삼는 자주파도 언젠가 생각을 바꿀 것이다. 이게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언젠가 변할 것'이라는 기대는 주사파의 본질을 모르는 얘기다. 주사는 이성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 어떤 경험적 증거, 어떤 정합적 논리, 어떤 상황적 변화를 들이대도 깨지지 않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4.
  
  오늘로써 민주노동당은 죽었다. '본사'와 연락을 방해하던 세력이 다 나갈 터이니, 이제 이름도 자기들이 애초에 원하던 대로 '민족자주당'으로 바꾸는 게 어떨까? 그들은 드디어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 그들에게 축하의 말을 보내는 바이다. 앞으로 '본사'와 더 긴밀한 협력 아래 '조국은 하나다', '당과 인민도 하나다' 철학을 힘차게 구현해 나가며, 앞으로 진보진영과 아무 관계만 없어 주기를 바란다.
  
  '북한에 정말 아사자가 생겼는가?' '아니면 미제의 공화국 모략 선동인가?' '북한의 핵무기가 정당한가?', '북조선에서는 정말 당과 인민이 하나인가?' '그래서 조선노동당을 비판하면 곧 북조선 인민을 모독하는 것이 되는가?' 이젠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제로 논쟁하느라 정력 낭비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평생 그렇게 믿고 살다가 죽게 내버려두고,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여는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의제를 향해 진보를 하면 그만이다.
  
  민주노동당의 분열을 끝까지 막아보려고 남아 있었던 이들. 당신들의 생각과 충정을 존중한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으니, 더 이상 쓸 데 없는 노력을 접고 진정으로 현대적인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길에 나서라. 그리고 자신이 최소한 주사파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 남한의 진보정당이 최소한 조선노동당의 지사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이제 미련을 털기 바란다.
  
  진보정당을 재건하는 과제가 생겼다. 다시 시작하려니 모든 것이 막막할 것이다. 하지만 8년 전의 상황을 기억해 보라. 그때는 지금보다 더 절망적이었다. 운동권 내에서 변화와 혁신을 거부하는 수구세력에 대한 기대는 접어버리자. 그리고 앞으로 진보정당의 새로운 토대가 될 이들에게 눈을 돌리자. 사회에 진보적 역량은 충분하다. 그 역량은 이제까지 낡은 운동권 방식, 낡은 주사파 형식으로 표현되기를 거부해왔을 뿐이다.
  
  이미 수많은 이들이 새로운 진보정당에 참가할 뜻을 밝혔다. 남한의 진보운동이 드디어 거추장스런 주사파의 족쇄를 풀어버렸다. 몇 년 전에 버렸던 진보정당의 당원증 다시 주워들고 싶다. 오랜 세월이 걸릴지도 모르는 힘든 길이다. 하지만 진보하기를 포기할 수 없다면, 끝을 알 수 없는 길이라 하더라도 걸음은 내디뎌야 한다. 거대한 위기는 동시에 위대한 기회다. 건설될 새로운 진보정당에 입당을 신청한다.

진중권/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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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치유 > [퍼온글] 영화음악들

파란블로그 기냥아찌님의 블로그에서 퍼왔답니다.감사해요^^

 
 



        추억속의 영화음악



        Love Theme - 시네마 천국
        Life in mono - 위대한 유산
        Gabriels Oboe - 미션
        Piano Solo - Love Affair
        Adagio Concerto - Last Concert
        Moon River - 티파니에서 아침을
        Un Homme Et Une Femme - 남과 여
        Sunrise Sunset - 지붕위의 바이올린
        Lara's Theme - 닥터지바고
        Romance d'amour - 금지된 장난
        Snow Frolic - 러브스토리
        Ludlows - 가을의 전설
        The Last Waltz - 올드보이
        A Lovers Concerto - 접속
        Cavatina - 디어헌터
        She - 노팅힐
        Goodbye - 약속
        Creep - 씨클로
        Shape of my Heart - 레옹
        Lascia ch'io pianga - 파리넬리
        Deborah's Theme -Once Upon A Time In America
        My Heart Will Go On - 타이타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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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치유 > [퍼온글]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 알프레드 디 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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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와 부침(浮沈)을 같이 한변호사 100년은 영욕의 세월이었다.’ 올 7월이면 한국에서 변호사란 직종이 생겨난 지 꼭 100년이 된다. 지난 세월 동안 변호사는 변함없이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다. 그런 만큼 사회적 책임도 무 거웠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법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자에 대항 했던 이들도 있었다. 반면에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기 위해 보신주 의에 급급하거나 온실 속의 화초처럼 나약한 모습을 보였던 변호사도 적지 않았다. 특히 최근에는 법률시장 개방을 앞두고 변호 사들은 살아남기에 혈안이 돼있고, 변호사수도 대폭 증가해 “변호사가 좋은 시절은 지나갔다”는 자조의 목소리가 나올 만큼 변호사업계는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영욕의 세월 변천사=국내 변호사 제도는 1905년 11월 ‘변호사법’이 공포·시행되면서 도입됐다. 한국 최초의 소송대리인은 일본에서 법률학을 배워 온 장훈으로, 그는 1900년 3월 당시 서 울의 법원 격이던 경성이사청에서 처음으로 소송대리 허가를 받 았다. 장훈은 서울 광교의 실업가 이재필에게서 일본 상인으로부터 6200여원을 돌려받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소송을 맡아 원고 승소 판결을 이끌어냈고, 이자(186원)까지 받아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변호사법 시행 이듬해인 1906년에는 홍재기가 판 ·검사 퇴직 4개월 만인 7월2일 서울에서 처음으로 변호사 등록 을 했다. 순수한 의미에서 국내 ‘1호 변호사’가 공식적으로 탄생했다. 1907년 9월23일에는 서울지방변호사회의 전신인 ‘한성변 호사회’가 창립 인가를 받았다. 경성변호사회(1909년), 조선변 호사회 서울분회(45년), 서울변호사회(48년), 서울통합변호사회(80년) 등을 거쳐 83년 서울지방변호사회로 변경됐다. 52년에는 지방변호사회의 연합체인 대한변호사협회가 창립됐다.


1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호사는 ‘권력’과 맞서 싸우거나, ‘권력’과 함께 호흡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두가지 유형으 로 나눠진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가담한 변호사들이 다수 있었다. 허헌 변호사는 3·1운동 지도자들을 위해 무료 변론을 했고 신간회 간부로 활동하다 징역형을 선고받는 등 4년간 옥고 를치렀다. 안병찬 변호사는 안중근 의사 변론을 한 것으로 유명하 다.


이승만 정권 시절엔 다른 분야만큼이나 변호사들의 부패도 심했 다. 사례금, 공탁금을 가로채는가 하면 법조 브로커가 횡행해 이들을 통해 사건을 수임했다가 징계를 받은 경우가 잦았다. 당시 벌금은 5000~1만원 정도. 광복 이후 권력의 편에 섰던 판·검사 들은 변호사로 개업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전국 변호사 수가 1000명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이해다툼이 늘어 소송 건수도 증가했다. 이들 중 상 당수는 다시 정·관계로 진출해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웠던 변호사 들도 적지 않았다. 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비상계엄이 선포 되자 계엄 해제와 구속자 석방을 건의했다가 구속된 이병린 변호사는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 꼽힌다. 인권변호사의 수요는 신군 부가 들어서면서 더욱 늘어났다. 시국·공안사건이 증가하면서 이들의 활동 영역도 넓어진 셈이다. 지금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모태가 된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가 만들어진 것도 이때다. 이돈명, 조영래, 박원순 변호사 등이 주축이었다. 이후 이들 변호사는 87년 6월항쟁에 일조하면서 88년 5월 민변을 창립했다. 김진욱 서울변호사회 홍보이사는 “변호사들이 사회 정의 실현과 민주주의 확립에 나름대로 기여해왔고,앞으로도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위기의 변호사들=지난 100년간 변호사 업계는 양적 성장을 거 듭해왔다. 1906년 1명으로 시작해 현재 전국적으로 변호사수가 8000여명에 달한다. 변호사들은 “사법개혁에 치이고, 로스쿨 설 립에 얻어맞고, 변리사나 법무사 등 유사 직역에 또 당하면서 영 살맛이 안 난다”고 자조한다. 그러나 질적 성장은 예전만 못하다는 지적이다. 법조계 안팎에선 변호사들이 지나치게 직역이기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한다.


변화하는 세상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그동안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 급급하다는 것이다. 매년 1000명씩 사시합격자가 배출되는데다 법률시장이 본격적으로 개방되면 변호사업계는 그야말 로 약육강식의 전쟁터로 변할 것이란 예상이 많다.


또 윤상림사건에서 드러나듯 변호사들이 법조계 주변의 브로커들과 공생관계를 형성하면서 돈벌이에 급급할 경우 변호사에 대한 거부정서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변호사들이 서민들을 상대로 무료 법률서비스를 확대하고 공익적 역할을 확대할 때 사회 지도층으로서 진정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지적이 많다.


이현미기자 always@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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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발바닥 2006-03-26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호사를 권력에 맞서 싸우거나 권력과 함께 호흡하는 두 부류로 나누는 것은 적어도 요즘 같은 때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다. 마치 세상에 빨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부류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과 같이...변호사에 대한 단편적 시각이 조금 아쉽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런 시각을 불식시키는 일은 변호사들의 몫이란 생각이 든다.
 

세상에서 가장 터무늬없는 사기 - 우리 존재에게 주어진 순간에 우리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제를 잃게 되고, 결국 운명에 지배당한다는 이야기

"만물의 정기는 사람들의 행복을 먹고 자라지. 때로는 불행과 부러움과 질투를 통해서 자라나기도 하고. 어쨌든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세상 만물은 모두 한가지라네.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연금술사 p47-48)

"우리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목숨이나 농사일처럼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것들을 잃는 일이오. 하지만 이러한 두려움은, 우리의 삶과 세상의 역사가 다같이 신의 커다란 손에 의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단숨에 사라지는 거라오." (p130)

"명심하게.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자아의 신화를 찾아가는 한 남자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네.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만물의 언어를 말하는 사랑,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지." (p197)

"고통 그 자체보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더 나쁜 거라고 그대의 마음에게 일러주게. 어떠한 마음도 자신의 꿈을 찾아나설 때는 결코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것은, 꿈을 찾아가는 매순간이란 신과 영겁의 세월을 만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라고 말일세."(p21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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