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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3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ㅣ 한국 현대사 산책 1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2년 11월
평점 :
한국 현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단 한사람의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정희를 꼽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우리 현대사, 더 나아가 현재 우리의 삶에 끼친 영향의 공과의 평가문제는 아직도 우리사회에서 가장 첨예하게 의견이 대립되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수년 전, 내가 우리 현대사에 대하여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이전에 텔레비전에서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에 관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독재자였음에도 아직도 추종자들이 건재하고 사회가 그에 대한 평가와 처리 문제로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칠레라는 나라는 참 한심한 나라라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떻게 독재자, 그것도 수많은 사람을 고문, 납치, 살해한 독재자에게도 추종자가 남아 있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가에 대한 순수한 의구심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현 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인들 중 절대다수가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의 수혜자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시대의 경제발전이 전적으로 박정희 개인 덕분이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수십년에 걸친 사회, 경제적 변화에는 무수한 요소와 변수가 작용하기 마련이고 단적으로 말해서 그 시대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당한 노동자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그와 같은 경제성장은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에 그가 추구한 경제 정책이 수많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70년대 상황에서는 효과적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정부 주도의 선별적, 산업육성 정책과 온 국민을 효과적으로 동원하여 짧은 기간 전세계적으로 유래없는 고도성장을 이룬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적어도 그러한 경제 성장의 결과에 대하여 정책결정의 최고 책임자로서의 박정희의 공은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 아닌 그 누구라도 그와 같은 경제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는 주장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그런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박정희에게 경제성장에 대한 어느 정도의 공을 인정해 준다고 할지라도 그 시대에 그의 직간접적 영향 아래 일어난 수많은 인권탄압과 고문 등에 대한 면죄부를 박정희에게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절!대!로! 특히 박정희 시대 말기의 암울한 단상들을 서술하고 있는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런 생각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박정희의 지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 시대에는 국가 비상사태에 북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 반공을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국익을 위해서, 고문이나 인권탄압은 어쩔 수가 없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고문이나 인권탄압을 정당화해 준다는 그 목적에는 사실 어떠한 것도 들어갈 수가 있다. 그러한 목적에 명확한 실체가 없더라도 권력을 가진 자들은 추상적인 언사로 그럴 듯한 목적을 만들어서 선전하기만 하면 된다. 지금 테러와의 전쟁을 치루고 있는 미국사회를 보면 그 생생한 예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책에 나오는 잔인한 고문에 대한 회고 부분을 읽으면서 며칠 전에 읽은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에 이런 부분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와 관련해서 나는 이런 상상을 해보았다. 그 시대의 국익을 위해서 고문이나 인권탄압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스크루지에 나온 것처럼 그 시대 고문과 인권탄압 피해자들의 상황을 몸소 겪고 그 경험을 머리와 가슴으로 체화할 수 있게 하는 기계가 있다면 그들에게 그러한 체험을 간접적으로, 그러나 뼛속 깊숙이 해보게 했으면 좋을텐데...그런 경험을 하고서도 그들이 고문이나 인권탄압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사람들의 기억은 주관적이다. 박정희의 후계자들은 지금껏 승자로서 우리 사회의 지배세력을 형성해 왔다. 그리고 공식적인 역사, 교육, 문화의 형성을 독점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도 직, 간접적 피해자이면서도 그 시대의 고문과 인권탄압, 박정희의 엽색행각, 박정희 사후 청와대 금고에서 발견된 수백억원의 자금, 자신의 부하 뿐 아니라 야당 국회의원에게까지 자금을 직접 하사했던 박정희의 통치 스타일은 기억하지 않고 청렴하게 생활하며 국민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경부고속도로를 깐 박정희만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지만, 박정희 시대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아직도 그 시대의 권력자, 권력의 하수인들이 사회의 지배계층으로 건재하고, 그 시대가 강요하던 인간형이 우리의 의식구조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사회에서 대놓고 고문이나 인권탄압이 자행되지는 않는다. 자유롭게 원하는 정보에 접근할 수도 있고,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도 있다. 경제발전의 달콤한 열매를 주었지만 암울했던 그 시대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극복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