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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가넷 > ‘인식’-‘재인식’의 대화 새역사로의 진보 되길

‘인식’-‘재인식’의 대화 새역사로의 진보 되길
카의 정의는 ‘역사는 과학이다’ ‘역사는 진보한다’
현재가 과거에 대해 대화 주도권
미래의 새역사 목표로 과거를 극복 대상 삼는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현재와의 대화 요구하지만
진보가 아닌 보수를 위한 비판적 역사
한겨레
»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모습. E.H.카는 역사를 움직이는 건 뛰어난 개인이 아니라 이름없는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보고, 역사는 발전하며 진보한다고 믿었다.

고전 다시읽기/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누가 나를 역사가로 만든 책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단연코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말할 것이다. 이 책은 나를 포함한 이 땅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거의 모든 역사학도들 뿐만 아니라 1970년대 유신치하에서 반독재 투쟁을 하고 1980년대 우리사회 변혁운동에 온 몸을 내던졌던 청년학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책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주도하는 386세대를 키운 것도 바로 이 책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1966년 길현모 교수에 의해 처음 우리말로 번역 출간된 이래 서점가에 10여 군데가 넘는 출판사의 판본이 나와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테제를 요약하면 크게 2가지다. 하나는 “역사는 과학이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것이다. 과학과 진보는 근대의 전형적인 거대담론이다. 탈근대 역사서술의 집중적인 공격 목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2개의 거대담론이다. 탈근대에서 <역사란 무엇인가>의 핵심을 이뤘던 테제들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이 요구되고 있다면, 이제는 카의 근대 역사학을 넘어서는 역사의 새로운 정의가 나와야 한다.

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어떤 식으로 역사의 과학성과 진보를 논증했는지부터 고찰해야 한다. 역사가 하나의 과학으로 성립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치명적인 약점은 역사라는 말 자체가 과거사건(Geschichte)과 그에 대한 기록(history)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전자의 의미에 강조점을 두었던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레오폴드 폰 랑케는 역사가의 임무는 “과거가 본래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문제는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단지 그에 관한 흔적으로서 단편적인 사료들만이 존재하는 현재에서 과거 그대로를 재현하는 역사를 어떻게 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거가 본래 어떠했는지”는 결국 역사가의 마음속에서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면, 역사가의 주관을 배제한 객관적 역사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현재의 역사가는 자신이 의미 있다고 여기는 과거의 사실들만을 역사로서 서술할 뿐이며, 그래서 이탈리아의 역사철학자인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고 말했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

카의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정의는 위의 양극단적인 입장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기 위한 시도였다. 역사가의 과거와의 대화의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그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다. 그가 ‘왜’라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대화는 시작되지 않는다. 카는 ‘왜’라는 역사가의 질문에는 언제나 ‘어디로’라는 또 다른 질문이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 마치 마르크스가 “문제 안에는 해답이 내재해 있다”고 말한 것처럼. 결국 목적 없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란 성립하지 않는다면, 카는 그 목적은 진보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에 대한 최종적인 정의를 “과거의 사건들과 현재에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미래의 목적들 사이의 대화”라고 수정 보완했다. 과거를 해석하는 목적이 미래의 목표들을 하나씩 드러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미래가 과거 해석의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과거란 실재이고 역사란 그것의 현재적 의미라면, 카는 그 의미와 무의미를 나누는 범주, 곧 역사인식의 패러다임을 진보로 규정했다. 곧 그는 진보를 “역사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전제”로 설정함으로써, ‘과학으로서의 역사’와 ‘진보로서의 역사’ 사이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진보를 구체적으로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의 확대”라고 정의했다. 그는 모든 문명사회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를 위해 현재 살고 있는 세대가 희생하는 것으로 발전했으며, 이러한 진보라는 역사의 대의는 중세에서 신의 섭리와 같은 종교적 명분과 마찬가지의 기능을 한다고 말했다. 카는 이처럼 역사의 진보를 하나의 신앙처럼 믿었던 전형적인 근대주의자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생태계 파괴의 문제에 직면해서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의 확대”가 과연 진보인지를 회의하며, 진보에 대한 믿음을 갖고 혁명을 통한 사회적 실험을 함으로써 초래됐던 역사의 재앙들을 반성한다. 지난 20세기는 홉스봄의 말대로 역사의 진보에 대한 가장 큰 믿음을 가졌다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재난을 맞이했던 ‘극단의 시대’였다. 혁명의 시대로서 근대가 급진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앤서니 기든스가 <좌파와 우파을 넘어서>에서 말했던 것처럼 “역사에 내재한 가능성을 믿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의 가능성을 믿어야 역사가 진보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식으로 그 가능성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가이다. 진보란 과거와 현재를 미래의 인질로 삼는 방식으로 하는 역사의 대화이며,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대화가 아니다.

카는 역사란 현재의 역사가가 과거의 사실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의 사실’과 대화한다는 점을 토로했다. 현재의 역사가가 과거의 특정 사실에만 발언권을 주고, 또 발언순서까지를 결정한다면, 과거와 현재사의 평등한 대화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근대 경험론의 시조인 베이컨이 자연이 숨기고 있는 법칙을 알아내기 위해 실험을 통해 자연을 고문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카는 과거와의 대화를 한 것이 아니라 실제에서는 역사의 진보라는 명분을 갖고 과거를 문초하고자 했던 것이다.

역사에서 현재와 과거의 대화 방식은 진보라는 1가지 방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4가지가 있다. 먼저 전통적인 역사서술에서는 현재보다 과거에 중점을 두는 대화 방식을 지향했다. 니체는 이러한 전통적 역사담론을 ‘기념비적 역사’와 ‘골동품적 역사’로 구분했다. ‘기념비적 역사’란 과거를 현재의 모범으로 삼는 방식이다. 서구에서는 이것을 “역사란 생의 교사다”라는 말로, 동아시아에서는 “역사의 거울(鑑)”이라는 비유로 표현했다. ‘골동품적 역사’란 전통으로서의 역사를 의미한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의 담론이 바로 그것이다. 오래됐다는 것은 그만큼 시간의 시금석을 통해 검증된 것이기 때문에 골동품적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로 역사의 담론적 효과를 발휘한다.

 

4가지 대화방식으로 생산 담론을

위의 전통적 역사담론과 다르게 근대 역사담론은 현재가 과거에 대해 대화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 역시 2 가지 대화형식이 있다. 첫 번째는 니체가 ‘비판적 역사’라고 부른 것이다. 이는 과거를 극복대상으로 삼는 방식으로, ‘과거청산’이라는 역사담론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된다. 두 번째는 ‘생성적 역사’다. 비판적 역사가 목표로 하는 것은 새로운 역사를 생성하는 것, 곧 새역사 창조다. 이러한 새역사에서 역사라는 말의 의미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새역사 창조란 미래로서의 역사, 곧 역사의 진보를 요구하는 담론이다.

최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이하 <재인식>)이라는 한권의 책이 우리사회를 역사의 내전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이 책은 1980년대에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인식> (이하 <인식>)을 과거로 보고, 2006년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대한민국 역사의 재인식을 요구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대화의 방식이 카와 같은 진보를 위한 ‘비판적 역사’가 아니라 반대로 보수를 위한 ‘비판적 역사’라는 점에 있다. 역설적인 사실은 현실의 진보가 이념의 보수화를 낳음으로써, 현재의 보수주의자들이 과거의 진보주의자들에게 ‘진보’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 김기봉/경기대 교수·역사학

1990년대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우파로 불렸던 시장경제주의자들이 좌파로 지칭되고, 공산주의자들이 우파로 불리는 가치의 전도가 일어났다. 따라서 이제는 진보 개념도 더 이상 좌파의 전유물이 되지 않는 탈근대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탈근대의 조건 속에서 <인식>에 대한 <재인식>은 필요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인식>과 <재인식> 사이의 역사논쟁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우려스러운 현상은 우파들이 그 역사논쟁을 정치적 헤게모니 투쟁으로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인식>과 <재인식> 사이의 역사논쟁은 한국사회를 분열시키는 내전이 아니라 우리는 누구인가의 사회적 기억을 합의하고 우리역사의 미래 방향을 정하는 생산적인 담론으로 발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특정 이데올로기에 의거한 1가지 대화 방식이 아니라 4가지 대화 방식이 상호 교차하는 역사담론의 장이 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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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책벌레는 무엇으로 사는가

아이를 유치원 차에 태워보내고 편의점에 가서 '한겨레'를 사들고 왔다. 금요일자 '18도'를 챙겨두기 위해서인데 몇 안되는 일간지가 편의점에는 딱 한 부씩만 들어와 있기 때문에 오후에 가보면 간혹 없을 때가 있다(물론 이런 수고를 하는 건 오늘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출판 칼럼니스트' 표정훈씨 이야기가 '한국의 글쟁이'의 18번째 연재로 실려 있다. 언론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이 대표적인 '탐서주의자'에 대해선 굳이 부연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그의 궁리닷컴을 방문한 지가 꽤 오래됐군). 나도 간혹 '책벌레'란 소리를 듣긴 하지만, 이 '국민 책벌레'에 견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우리 시대에 책벌레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그를 통해서 엿보기로 한다. 한겨레의 기사와 함께 지난달 중앙일보에 게재한 표정훈의 칼럼을 같이 옮겨놓는다(아래 작업실 사진을 내 방구석이 지저분하다고 구박하는 아이나 아이엄마가 봐야 하는데!.. 둘러보니 내가 더 나은 것 같지도 않군^^;).

한겨레(07. 02. 08) 출판 칼럼니스트 표정훈

아주 아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읽고 싶은 책을 사달라 부모를 조르는 게 일이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참고서보다 교양서를 즐겨 읽었으며,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아예 학교 도서관을 구획 나눠 차례대로 정복해 들어가는 사람. 심지어 우리말 책만으로는 성이 안차 궁금한 책이 있으면 원서라도 사서 읽고(물론 자기 전공도 아닌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좋아서 독후감을 쓰고 책을 분류하고 읽고 싶은 책의 모습을 그리는 사람. 책 읽는 게 세상에서 가장 좋으니 책만 읽고 살아가고 싶어하는 이런 책벌레는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

표정훈(38)씨는 그 답을 보여주는 책벌레다. 10여년 전만해도 표씨 같은 책벌레들을 위한 똑떨어지는 직업은 없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책벌레들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직업이 생겼으니, 바로 ‘출판 칼럼니스트’ 또는 ‘출판 평론가’란 직종이다(*내가 궁금한 것 중 하나는 '출판평론가'나 '도서평론가' 등의 직함이 어떻게 구별되는지이다. 같은 지면에 나란히 실린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에서 가령 이권우씨는 언제나 '도서평론가'라고 자신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범위의 문제인가?).

취미가 직업이 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책벌레들에겐 가장 이상적인 직업이다. 물론 책벌레가 아니면서 출판 평론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출판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표씨는 알아주는 책벌레다. 또한 이권우, 박천홍, 최성일씨 등 요즘 활발히 글을 쓰는 다른 출판 칼럼니스트들이 대부분 출판관련 저널리스트 출신인데 견줘 표씨는 거의 유일하게 오로지 책벌레로만 지내다가 자연스럽게 출판 글쟁이가 된 이다.

학창시절을 책과 보낸 표씨는 대학 졸업 후 새내기 번역가가 된다. 때마침 불어온 인터넷 바람 속에서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생생한 책 이야기로 입소문을 탔다(*그게 궁리닷컴이다 http://www.kungree.com/). 한 일간지에서 가볼만한 사이트로 그 홈페이지를 소개했고, 이어 책관련 칼럼을 써보라는 제안을 해왔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표씨는 물만난 고기처럼 책벌레다운 글솜씨를 보여주었다. 그 뒤 여러 매체에서 책과 출판에 대한 글요청이 몰려들면서 표씨는 자연스럽게 이른바 ‘출판칼럼니스트’란 직업을 갖게 되었다.

표씨는 여러 책을 쓰고 번역했지만 저술가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글쟁이에 가깝다. 책이란 보편적인 주제를 글로 쓰기 때문에 <한겨레>부터 <조선일보>까지, 매체의 분야에 상관없이 글 부탁을 받는다(*'한국의 글쟁이'로 이미 소개됐던 역사학자 이덕일씨도 그러하다). 쓰는 글은 서평이 주류를 이루지만 책, 그리고 독서문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를 넘나든다. 또한 우리 출판계에서 책문화 전도사로도 활동해왔다. 책과 출판 관련 전시회를 기획하는 일도 여러차례 맡았다. 삼성출판박물관, 아단문고 전시회를 기획했고, 2005년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참가한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관 기획위원으로 힘을 보탰다. 여기에 꾸준히 번역을 하는 동시에 여러가지 책 기획에 참여해왔다(*해서 들은 바로는 표씨가 언제나 큰 배낭을 메고 다닌다는 것. 출판사들에서 얻은 책들을 잔뜩 담아서).

이 넓은 활동폭이 가능한 것은 모두 그가 ‘책벌레’인 덕분이다. 표씨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는 책은 일주일에 3~4권, 3분의 1 정도 읽는 책이 대여섯권이다. 1만여권의 책을 가지고 있고, 월 50만원 정도를 책 구입에 쓴다(*같은 책벌레로서 잠시 견주어보니, 나보다 많이 읽지만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다. 그가 주로 많이 읽는 역사서들을 나는 그다지 읽지 않는다. 아니 읽을 시간을 내기 어렵다. 그리고, 1만여권의 책을 갖고 있다면 나보다는 약간 많은 수치일 듯하다. 도서구입비 월 50만원은 비슷한 듯하다).

책벌레들의 특징이 ‘박람강기’(博覽强記)라는 점을 감안해도 표씨의 지식은 넓이 면에서 도드라진다. 교수도 아니고 박사도 아닌 그가 이런 지식을 갖게 된 비결은 꼬리를 물며 책을 이어가는 독서습관이다. “책을 읽으면 참고문헌에 있는 책이나 관련있는 책, 거론된 책을 찾아서 읽거나 체크를 해놔요. 저자가 마음에 들면 그 사람 다른 책을 조사해서 알아놓아요. ‘이 짓’을 한 10년 넘게 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책의 그물이 지어지는 거죠. 외국에 가서 책을 보다가도 참고도서 목록이 충실하면 정작 그 책 내용은 별로라도 사는 경우도 있어요.” 이런 모든 조사과정이 지식으로 쌓이는 셈인데,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이런 과정 자체를 즐기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적어도 대학원생 이상이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 최소한 자기 전공에 대해서는). “책이 전경이라면 그 전경을 둘러싼 배경을 조사하고 알아가는 것, 그게 즐겁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 더 잘 볼 수 있으니까요.”

여기에 그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장기인 인터넷 검색능력이 더해진다. 그런데 이 검색의 노하우에는 특별한 비결이 없다. 어떻게 해야 잘 찾느냐고 묻자 답은 맥빠지게도 “책을 읽어라”였다. 그 다음이 표씨가 ‘열쇳말 그물짓기’라고 부르는 검색과정이다. 역시 대단할 것은 없지만 대신 집요한 추적 의지의 중요성을 엿보게 한다. 니콜라스 루만이란 독일 사회학자를 찾은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루만은 사회학 석학이지만 동시에 지식과 정보를 잘 관리, 편집해서 많은 책을 쓴 것으로도 유명한 학자다. 표씨가 찾고자 한 것은 이 사람의 지식관리법. 문제는 단순히 루만의 이름만 검색어로 치면 사회학 업적만 건조하게 화면에 뜰 뿐이다(*나의 관심은 보다 고리타분해서 루만의 '지시관리법'보다는 그의 대저 <사회체계들>에 가 있다. 아직까지 번역/소개되지 않는 게 사회학자들의 직무유기가 아닌가, 의혹을 품으면서).

표씨는 흔히 다작하는 저술가들이 활용하는 도구인 ‘인덱스 카드’ 등을 독일어로 추가해 다시 검색한다. 그래도 역시 원하는 지식관리법은 여전히 안나온다. 다음은 영어로 ‘지식’을 뜻하는 ‘knowledge’와 ‘관리’란 뜻의 ‘management’를 검색어로 보탠다. 이런 식으로 계속 검색어를 더해가며 찾아가면 결국은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 표씨의 지론이다. 이렇게 찾아낸 정보들 가운데 원하는 항목들을 모아가며 계속 연관개념을 찾아낸다. 이런 작업을 오랜 세월 규칙적으로 해오면서 쌓인 지식량, 그리고 노하우가 아니라 정보가 어디에 있을지 알고 유추해내는 ‘노웨어’(know-where)가 표씨 스스로 꼽는 자산이자 강점이다(*그의 책들을 아직 안 읽어봐서 얼만큼의 '강점'인지는 잘 모르겠다. <탐서주의자의 책> 정도는 읽어둘 법한데, 책은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됐었다).

이는 글을 쓰는 원칙에도 적용된다. 최대한 많이 조사하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이 연구자가 아니고 독자의 연장선에서 글을 쓰는 것이니만큼 독자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쓰는 것이다. “글 쓰는 것도 일종의 서비스업”이라고 믿는다. 지식이 담겨 있으면서도 어렵지 않은 글이 그의 지향점이자 특징으로 갖춰진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표씨는 2000년대 초반 등장과 동시에 출판계에서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인터넷이란 새로운 도구를 가장 잘 활용해서 다양한 정보를 찾아내고 조합하는 능력, 그리고 원서를 직접 읽고 기획할 수 있는 외국어실력과 기획력으로 새로운 시대에 가장 적합한 필자로 꼽혀왔다.

그동안 표씨가 펴낸 책은 크게 두가지.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2003)나 <탐서주의자의 책>(2004) 같은 책과 독서에 대한 지적인 교양 에세이, 그리고 <하룻밤에 읽는 동양사상> 류의 가벼운 실용교양서다. 저술한 책은 그닥 양이 많지는 않다. 주된 분야는 역시 방대한 독서량에서 나오는 지식으로 맛깔스럽게 쓰는 고급스러운 에세이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표씨는 그동안 다양한 여러가지 활동을 해오는 대신 저술의 측면에서는 받아온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책에 대한 에세이 <탐서주의자…>와 <책은 나름의…>가 고급 에세이로 호평을 받았지만, 두 책 모두 짧은 글모음이란 점에서 이제는 표씨가 한 단계 더 뛰어넘는 책을 내주기를 출판계는 기대하고 있다. 여기저기 이것저것 분산되게 쓰고 있는 재능을 이제는 한 분야에 집중할 단계라는 충고도 나온다.

표씨 역시 스스로도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활동 폭을 줄이고 출판평론성 글, 각종 에세이 등 토막글을 고사하면서 단행본을 쓰는 데 집중하기로 승부수를 걸고 있다. “당장은 딜레마죠. 들어오는 정기 수입이 토막글이고, 이런 글들이 시간도 적게 들구요. 하지만 글쟁이로서 제가 생산적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기간이 앞으로 길어야 15년 정도일 것을 감안하면 에너지를 집중해서 호흡이 긴 책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출판평론가의 정년은 55세인가?) 

그래서 표씨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주제를 가리지 않고 실용서도 써보려구요. 독자들과 비슷한 비전공자이지만 교양 분야에 대해 연구가 아니라 공부를 하는 거죠. 그래서 공부한 것을 정리해서 소개하고 흥미를 느끼게 해주는 일을 하려는 겁니다.”(글 구본준 기자)

 

중앙일보(07. 01. 12) 자성의 목소리 없는 출판계

불철주야 책 만들기에 여념 없는 출판인들에게 출판계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지만, 일반 독자들이 바깥에서 보기에는 대체로 심심하다. 각종 사건들로 바람 잘 날 없는 정치권이나 연예계와 비교해보라. 그런데 이 심심한 동네가 '내일은 또 무슨 일이?'라는 걱정을 해야 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정지영씨의 '마시멜로 이야기' 대리 번역 의혹, 한젬마씨 저서 대필 논란, 마광수 교수의 제자 시(詩) 도용 혹은 표절 파문, '인생수업' 표지 사진 표절 혐의, 독서단체를 빙자한 책 사재기 대행 웹사이트 의혹….

책에 표시된 저자 혹은 번역자, 대리번역자와 대필작가, 출판사, 그리고 독자에 대한 다음과 같은 책임론이 사뭇 분분하다. 관행을 방패 삼거나 수단을 가리지 않고 책을 많이 팔려는 출판사의 상략(商略)이 문제다. 번역과 저술에서 실제로 맡은 구실이 미미하거나 사실상 없으면서도 제 이름을 걸어놓은 사람들이 문제다. 대리번역자나 대필작가가 지금 와서 나서는 게 볼썽사납다. 유명인이 쓴 책이나 베스트셀러에만 몰리는 독자들이 문제다.

그런 책임론에 대해 출판계 차원의 솔직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게 아쉽다. 출판인도 아닌 필자가 결례를 무릅쓰고 대신 자성하고 싶다. 첫째, 다매체 환경에서 출판의 위상 문제다. 정지영씨는 방송인으로서의 명성을 발판 삼아 번역자(?)가 되고 한젬마씨는 저자(?)로서의 권위와 유명세에 힘입어 방송인으로 입신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영상매체 친화적인 브랜드다. 책이라는 매체 자체의 완결성보다는, 더 인기 있는 다른 매체에 기대려는 출판의 초라해진 자화상을 반성하고 싶다.

둘째, 출판기획의 본말(本末) 문제다. 책도 치밀한 '기획'을 거쳐 시장에 내놓는 '상품'이며 출판업은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활동이다. 그러나 영리 추구 목적의 출판기획에도 본과 말이 있다. 오로지 팔릴 것만을 생각하는 게 그 근본인 것 같지만 책의 존엄에 대한,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착오적인 존중이야말로 진정한 근본이다. 근본을 살피지 못한 점을 반성하고 싶다.

셋째, 베스트셀러의 맹점이다. 베스트셀러 집계의 기술적 공정성과는 별도로 애당초 저자나 번역자 자체가 거짓이거나 교묘한 사재기 상술이 개입할 여지가 있는 한, 베스트셀러 순위는 신뢰하기 힘들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베스트셀러의 요인을 분석하는 글을 쓰곤 했다. 그러나 만일 저자나 번역자 자체가 거짓이거나 사재기로 만들어진 베스트셀러라면 그 요인 분석은 고의가 아니었을지라도 거짓의 공범 구실을 한 셈이니,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리고 반성하는 바이다.

넷째, 겉으로는 고급 문화인 행세를 하면서 속으로는 진작부터 고쳤어야 할 해묵은 관행을 계속 끌고 가는 이중성을 반성하고 싶다. 출판은 마땅히 지원받아야 할 부문이라며 물적.제도적 지원을 요구할 때는 한껏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정작 출판인과 출판계가 먼저 스스로 개선해야 할 것들을 과감하게 고치는 노력에는 인색하지 않았는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진리를 새삼 떠올릴 때다.

'삼국지'의 한 대목을 떠올려 본다(이하 황석영 '삼국지'(창비)에 바탕을 둠). "이 책은 우리 촉땅에서는 삼척동자도 다 외우고 있는데, 새로 지은 책이라니 무슨 소리요? 이 책은 전국시대에 어느 무명씨가 지은 것이오. 조 승상은 도적질에 능하니 그를 표절해 자신이 지은 것처럼 그대를 속인 것이오." 사신으로 파견된 장송이 조조가 지었다는 '맹덕신서'를 한 번 훑어보고 외운 뒤 조조의 신하 양수에게 한 말이다. 이 일을 전해 들은 조조는 언성을 높여 "옛 사람 생각이 나와 우연히 들어맞았던 게지!"하고 즉시 '맹덕신서'를 찢어 불살라버리라 명했다. 저자이자 발행인인 조조가 보여 준 최소한의 자존심이 차라리 그립다.(표정훈 출판평론가)

07. 02. 09.

P.S. 참고로, '출판평론가'의 자녀교육법이 궁금하신 분들은 '여성동아'(2006년 5월호)의 기사를 참조해보시길(http://www.donga.com/docs/magazine/woman/2006/05/08/200605080500037/200605080500037_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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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kleinsusun > 베끼고 또 반복하자!
몸으로 하는 공부 - 강유원 잡문집
강유원 지음 / 여름언덕 / 2005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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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인 나의 知己 P언니는 습작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건
"필사"라고 했다.

신인작가상을 탄 소설가들의 인터뷰를 봐도 습작 시절의 "필사" 얘기를 많이 한다. 선배 작가들의 좋은 소설을 여러 번 베껴 썼다고.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에서 이승우도
"베껴 쓰기"를 "느리게 읽기"의 한 방법으로서 추천하고 있다.

작년 9월 암스테르담 출장 때,
시간을 쪼개 "Van Gogh Museum"에 갔었다.

Van Gogh의 초기 습작들을 보면서 난 큰 충격을 받았다.
왜냐?
밀레의 작품들을 "필사"한 것이 몇 점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밀레의 드로잉을 베낀 다음에(똑 같이!)
페인트 연습을 한 작품이 몇 개나 있었다.

난 그 앞에서 오랫 동안 입을 딱 벌리고 서 있었다.
"아.....고흐 같은 천재도 필사를 했구나!"

고흐의 밀레 필사는 내게 정말.....큰 충격이자 깨달음(?)이었다.
뭐든 혼자 뚝딱 만들어지는 건 없구나!
천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구나!

왜 자꾸 필사 얘기를 하냐면,
좋은 문장이나 그림을 베끼고 또 반복하는 건
공부에 있어서도 기본이기 때문이다.


쩍 팔리지만 내 사례를 들자면....
고등학교 때 성문종합영어 20번 봤다.
그 덕에 "토종"임에도 불구하고
넘쳐나는 교포와 유학파들 사이에서 잘(?) 버티고 있다.

강유원도 이 책 <몸으로 하는 공부>에서
"베끼기"를 "공부하는 방법"으로 강추하고 있다.

"철학 공부도 마찬가지다. 철학 공부에서 베끼는 것은 철학사를 여러 차례 읽는 것이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이문출판사)가 너무 두껍다면 얇은 것이라도 골라서 열심히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다.
베끼기를 할 때는 베낄 책을 잘 골라야 한다. 일테면 서양 근대철학사를 공부하려면 최소한 코플스턴의 철학사를 잡아야 한다....
(중략)......
하여튼 철학사를 50번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죽 읽으면 철학의 기본적인 문제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 왔는지를 알게 되어 맥락이 잡히는데 이 쯤에서 그걸 가지고 뭘 해보겠다고 나서면 안된다. 아직 베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철학의 제문제>(벽호)처럼 주제별로 다룬 책을 읽는 것이다. 이 책은 철학의 근본 문제들을 정확한 문맥 속에서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주제에 관련된 철학자들의 원전을 부분적으로 정확하게 번역하여 덧붙여 주기 때문에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런 책도 50번은 되풀이해서 읽어야 한다. 철학사를 읽든 철학의 제문제를 읽든 주의할 점은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어야 한다. .....(중략)......
베끼기는 초심자 시절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에 걸쳐 해야 한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한 사람들은 더 이상 철학사를 읽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공부에 있어서 균형을 무너뜨리게 된다. ...(중략).....
베끼기는 독학이 가져다주는 폐해도 막아준다. 독학하는 사람은 어떤 분야의 책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기 마련이다. 역사적인 연관이나 주제의 관련성에 유의하지 않고 읽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그 결과 아는 게 많아져서 장광설을 쏟아놓는다. 게다가 그들은 최근의 것에 대한 관심도 지대해서 항상 시대에 맞춰 살아가는 듯하다. 그러나 그 분야에 대해 체계적으로 글을 써보라고 하면, 장광설은 사라지고 말을 더듬게 되며, 그 점을 지적하면 원래 제대로 된 공부는 체계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우격다짐을 하곤 한다. .............(중략).....
베끼기를 열심히 하다 보면 책을 제대로 읽는 법을 체득하는 이점이 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공부를 한다면 대개는 참고문헌 목록을 작성하고 이 책 저 책 들춰보면서 노트에 정리한 뒤 끝내는 것이 가장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그 어떤 책도 기억에 남지 않고 문장 몇 개만 막연한 추억처럼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차라리 가장 표준적인 책을 한 권 정해서 모든 말과 문장을 따져가며 끝까지 읽는 게 낫다."
(p181~184)

이 책을 읽으며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50번 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쭉~ 읽어보겠다고 결심했다. 불끈!

아쉬운 건 <철학의 제문제>도 읽어보려고 결심했는데,
절판되었다는 거다.
인터넷 헌책방을 몇군데 검색해 봤는데도 없고,
동네 도서관에도 없다.
이런.... 공부하고자 하는 의지에 찬물을 끼얹다니!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는 사실 그닥 기대하지 않고 읽은 책인데,
일단 강유원의 시니컬한 글쓰기 스타일 자체가 재미있었고,
공부하는 방법에 있어서 유용한 tip을 많이 얻었다.

새해를 맞아 공부 한번 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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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우리 사단장님이 강연하신 것의 요약이다.

벌써 강연을 들은지는 몇 달이 지났는데 당시 대충 적어 두었던 것을 정리하려 했으나,

본인의 게으름 때문에 지금에서야 정리하게 되었다.

 

4방향 리더쉽

4방향 리더쉽이란 자신을 중심에 두고 위로는 '상관', 좌우로는 '동료', 아래로는 '부하'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군대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가족간에도 기타 사회 생활에서도 이것은 똑같이 적용된다.

4방향 리더쉽이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발견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 선망의 대상이 되라. 윗사람에게는 먼저 베풀어라.

- 책임은 자신이 떠맡고 공은 부하나 상관에게 돌려라.

 

 ○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 이순간이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지금 내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이다.

현재, 바로 이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면 미래에 대한 구상이나 과거에 대한 반성은 무용지물이다.

언젠가 할 일이면 바로 지금 하라. 바로 이 순간의 적극적인 행동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ex) 밥만 먹고 공부하자 → TV만 보고 → 잠만 자고 내일 일찍 깨서 → SHIT!!!

 


○ 열정을 가져라

긍정적, 적극적이 되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중요하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도 성공가능성은 50%다.

실패를 두려워말라.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4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

지금 이순간의 생각이 - 지금 이 순간을 헛되이 할 것인지, 무엇인가를 얻어갈 것인지 -

나의 미래를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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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의 삶은 9.11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질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9.11테러는 미국인들의 삶을 엄청나게 바꾸어 놓았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심장부에 테러리스트의 여객기 자체가 미사일처럼 꽃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을 어떻게 미국인들이 잊을 수 있을까? 물론 9.11테러 자체의 조작가능성을 주장하는 견해들도 많고(대표적으로 마이클 무어의 ‘Hey, Dude. Where's my country?' 등..) 개인적으로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9.11 테러를 계기로 미국의 극우세력들이 미국인들의 공포심을 악용하여 테러를 방지한다는 미명하에 전 사회적인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건이 자작극인지 여부에 관계없이 9.11 테러 현장 또는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 사건은 정말 충격적이고 아마 평생 동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삶의 패턴을 바꿔 놓을 것이다.

논의가 약간 벗어 났는데 9.11 테러나 역사적인 화재나 비행기 참사의 경우 반응할 여유도 없이 죽음을 맞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대피할 상당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여 죽음을 맞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한다. 타임지의 이 기사는 9.11 테러를 중심으로 바로 그러한 대참사의 순간에 살아날 기회가 있는 경우에도 사람들이 얼마나 소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고 그 결과 처참한 결과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9.11 테러 당시 제1타워 73층에 있던 제대뇨씨는 폭발소리를 들었고 건물이 흔들리며 쓰러져버릴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제대뇨씨는 무슨 일이냐고 소리쳤지만-그녀가 본능적으로 재빨리 빠져 나온다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내심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와 ‘아무것도 아니야. 걱정하지마. 그건 니가 착각한 거야.’라고 말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이상한 반응은 9.11 테러에서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 제대뇨씨는 건물 밖으로 재빨리 대피하라는 동료의 고함소리를 듣고 건물을 빠져나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우리의 삶에서 9.11 테러나 큰 화재사건은 지극히 비일상적인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평소에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그런 극히 예외적인 불행이 닥쳐올 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리 없어.’라는 생각으로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의심하고 부인하려는 반응을 보인다. 이것을 정상상황선입견(normalcy bias)이라 하는데 이러한 경향은 사람들이 화재 등의 경우 건물에서 재빨리 빠져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흔히 발생한다.

예상치 못한 재난 상황에서 10-15%의 사람들은 냉정을 유지하고 재빨리 가장 효율적으로 대처한다. 또 다른 15% 정도의 사람들은 냉정을 읽고 울거나 비명을 지르면서 대피를 지연시킨다. 나머지 70-75%의 사람들은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두뇌는 새로운 상황, 특히 그런 상황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경우에는 주어진 정보를 분석하고 상황에 대처하는데 있어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인간행동 전문가의 말처럼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경우에 훨씬 더 적절하게 행동한다. 따라서 화재나 테러와 같은 예상치 못한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그런 돌발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어떻게 할 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에 관한 교육이 필요하다.

화재와 같은 재난상황을 경험해 보지 못한 내가 지하철을 타고 있던 중에 대구 지하철 참사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고 치자. 처음에 연기가 발생하면서 매쾌한 냄새가 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고서도 섣불리 소리를 치거나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지 못할 것이다. 성격이 소극적이라서 먼저 그런 행동을 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불길에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거나 다른 사람들이 대피하는 등 행동을 취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단순한 기계 고장이겠지. 뭐 별일 있겠어?’라는 생각으로 적절한 행동을 취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것이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다. 그런데 그렇게 낭비한 몇 분 또는 몇 십초에 내 생사가 갈릴 수도 있는 것이다.

조그만 연기나 싸이렌 소리에도 극단적인 공포심을 느끼면서 과도한 반응을 보이거나 서로를 불신하게 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현재 미국 사회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보고 있노라면 세계를 선도하는 민주국가 미국이 맞는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많다. 그러나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사건, 수많은 화재 참사 사건을 겪은 우리 나라의 경우 그러한 참사를 겪으면서 실질적으로 어떠한 개선책이 마련되었는가 의문이다. 형식적인 소방규정의 강화 외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그러한 예상치 못한 재난이 발생했을 때 개개인이 어떻게 반응하여야 하는지 교육을 하고 실제로 훈련을 하게 하는 것 아닐까. 전국민에게 공포심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있긴 하지만, 그래서 미국에서와 같은 전문적인 연구나 그에 따른 학교와 현장에서의 교육을 기대하기는 불가능 하지만, 적어도 그런 시각에서의 연구와 교육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재난 상황에 놓고 상상해 보자. 그리고 어떻게 반응할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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