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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ㅣ 리라이팅 클래식 4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07년 8월
평점 :

"응원단"이란 게임을 아는가? 바로 위에 올려져 있는 사진이 응원단이란 게임 사진이다. 이 게임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펌프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요즘 내가 흠뻑 빠져서 즐기고 있는 게임인데, 모든 음악 게임이 그렇듯이 이 게임도 박자 감각을 요구한다. 그래서 처음에 해보고선 도무지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이런 식의 음악 게임에선 도무지 박자를 따라잡지 못해서이다. 그래서인지 비트박스도 몇 번하다가 관두곤 했었다. 하지만 그 때 읽게 된 책은 이진경씨가 쓴 "노마디즘"이란 책이었다. 그 책을 읽으며 느꼈던 것들은 여러가지이지만, 나의 신체를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게 그 중 하나였다. 이를 테면 손이 필기도구와 만나면 '필기도구-되기'를 이뤄 글로 나의 생각을 풀어내며, 운전대랑 만나 '운전대-되기'를 이뤄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운전을 한다. 이렇듯 어느 구심점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사물을 만나 새로운 신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에 음악에 있어서도 새로운 눈을 뜰 수 있었다. 음악이야 말로 우리의 감정을 극단점에서 풀어낸 것이니 말이다. 그런 깨달음 뒤에야 마음을 먹고서 게임에 매달릴 수 있었다. 그 결과 이젠 능숙하다 못해 아예 몸에 익어서 아주 쉽게 깰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게임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면서 깨달은 점은 두 가지이다. 바로 음악의 흐름을 타라는 것과 부드러운 손동작으로 게임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마음이 앞서서도 안 되며, 흐름을 무시하고 마구잡이 해서도 안 된다. 그저 팔근육의 긴장을 풀고 음악의 흐름을 타서 자연스럽게 하나 하나씩 터치해나가면 게임을 깰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경지에 오르고 나니, '-되기'의 본의가 보이는 것 같았다. '되기' 또한 내가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타고 나를 비워나가는 과정 속에 이뤄져야 하는 것이란 이야기이다.
굳이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하 장자)'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거창하게 서두를 전개한 이유는 무얼까. 바로 그 차이와 한계를 넘어서는 존재, 이 책에서는 바로 그런 존재에 관한 탐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미 그린비에서 발간한 바 있는 '리라이팅 시리즈(열하일기...., 자본을 넘어선......, 니체의 위험한 책)'의 책들을 보았거나, '수유+너머'의 저작들을 보았던 분이라면 이 책 또한 그런 친근함으로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이미 장자 관련 서적을 읽었던 사람이라도 다시 한번 읽어볼 것을 권한다. 어떤 책이든 그렇듯이, 책을 읽는 사람에 따라 그 느낌은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다. 물론 같은 책을 읽고서 이야기를 나눠도 내가 느낀 바와 타인이 느낀 바는 다르듯이, 동일한 텍스트를 어떤 관점과 사상에서 풀어내서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노장의 사상에 대해 관심이 있었고 어느 정도 안다고 자신했던 나조차도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관점에서 기존의 관념들을 뒤집어 볼 수 있었다. '아는 것' 그건 자부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만의 생각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남에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그런 나만의 생각이라는 그런 독창성이 있기 때문이겠지. 이 책 또한 장자를 설명한 것이지만 여느 장자 책보다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니, 이미 장자를 안다할지라도 꼭 읽어봐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크게 주장하는 것은 바로 노장 사상이라 묶어져 있던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사실이었다. '당연히 노장 사상 아니야?'라고 반문하며 책을 펼쳐봤던 나이기 때문이다. 노자가 만든 無의 사상을 장자가 완성했다고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연하다는 것에 매몰되는 순간, 우리의 사유의 범위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장자를 장자 자체로 이해하기보다 노자의 사상을 토대로 장자의 사상을 구속지으려 하기 때문이다. 난 저자의 노장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왜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했는지 궁금한 사람은 이 책을 사서 보길^^) 그리고 더 급진적인 주장으로 장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자'라는 텍스트마저 벗어나야 한다는 거다. 물론 텍스트를 완전히 벗어나면 그의 존재감 조차 사라진다. 그렇기에 이 장자란 책을 기본으로 삼아 그의 사상을 살펴봐야 하는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게 장자라는 주체를 알게 되었을 때, 거기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건 곧 또 하나의 귀결점, 하나의 편견을 만들 뿐이니까. 그런 점에서 새로운 논의가 가능하다. 텍스트마저 벗어나, 장자와 나와의 대화를 통해 '장자화된 내 자신'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곧 노자와 결별한 장자, 그리고 그 텍스트마저도 벗어난 장자를 만나야 하는 것이 우리의 독서 목적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이 책을 구성하는 가장 큰 논리는 '잊어버려라, 그리고 소통하라'이다. 바로 내 자신을 비워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노자의 無사상이 떠오를만하지만, 그 차이는 책에서 상세히 말하고 있다. 나라고 규정된 것들의 대부분은 주위에서 정의한 것일 뿐이다. 그건 나에게 그런 사람이 되길 바라는 희망이거나, 무언가를 하질 않길 바라는 어떤 것일 거다. 그런 규정들에 나의 삶을 한정 지을 때,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탈을 쓴 타인이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결국 그런 규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걸 '잊어버려라, 즉 비워냄'이란 논리로 풀어낸 것이다. 그렇게 나를 비워낼 때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 바로 내가 응원단을 할 때 '난 할 수 없어'라는 스스로 결정지은 한계를 제거함으로써 몰입할 수 있었듯이 말이다. 그렇게 맘껏 소통함으로 자유로운 신체의 조건을 형성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응원단-되기'를 이뤄낼 수 있었듯이, 우리 또한 어떤 타인적인 것들에 구속된 내가 아닌 자유로운 신체 조건을 형성하여 타인과 맘껏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나라는 주체의 틀에 갇힌 자, 그에겐 세상이 하나의 감옥일 뿐이다.
응원단은 나에게 소통의 부재에서 벗어날 것, 바로 나라는 신체의 한계성을 벗어날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딱딱하고 무감각해진 신체를 벗어나 자연의 흐름에 몽땅 몸을 맡길 줄 아는 부드러운 신체가 되라는 것도.. 그건 곧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일치하는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기반으로 앞으로 어떤 무수한 사유들, 무수한 인연들 속에 소통의 자유를 누리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