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시간, 낯선 소설 속으로: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1913)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때로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너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라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1, 15) 잠들기 전 ‘나’는 언제나처럼 엄마의 ‘저녁 키스’를 기다린다. 하지만 마침 손님(스완 씨)이 와 있어 엄마가 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중대한 용건이 있으니 꼭 ‘나’의 방으로 올라와 달라는 내용의 쪽지를 보내지만 냉대에 부딪친다. 그러나 오늘은 아이가 신경이 날카로운 것 같으니 함께 자주라는 아빠의 권유도 있고 하여 엄마는 ‘나’의 방으로 온다. 엄마가 ‘나’의 곁에서 책을 읽어주는 밤, “나는 이런 밤이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았다.”(1, 83) 한 토막의 이야기가 끝나자 어느 겨울날 추위에 떨며 귀가하는 성인 ‘나’가 등장한다. 엄마는 ‘나’에게 간만에 홍차를 권하고 사람을 시켜 일부러 ‘프티트 마들렌’을 사오게 한다. 과자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입안으로 가져간 순간 “나 자신이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1, 86)라는 것을 잊을 만큼 강렬한 기쁨을 맛본다. 그 진앙을 찾던 끝에 콩브레 시절,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가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준 마들렌의 맛에 도달한다.
여기까지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권 <스완네 집 쪽으로>의 1장 1절의 내용이다. 남편이 죽은 이후 처음에는 콩브레를, 그 다음은 자기 집과 방과 침대를 떠나지 않고 ‘극도의 무기력증’에 빠져 사는 레오니 아주머니, 주인마님 보필과 살림에 열성인 만큼이나 외부인들(노처녀 욀랄리 할멈)과 아랫사람(부엌데기, 즉 지오토의 ‘자비)에게는 매몰찬 하녀 프랑수아즈의 얘기가 흥미롭다. 독립된 소설처럼 삽입된 ‘스완의 사랑’은 물질적인 부와 세련된 몸가짐에 덧붙여 뛰어난 예술 감각을 지닌 사교계 인사 스완이 천박한 화류계 여자 오데트를 사랑하면서 겪는 감정적 흐름을 다룬다. 환희, 의심과 질투에 이어 찾아온 것은 환멸이다. “내 마음에 들지도 않고 내 스타일도 아닌 여자 때문에 내 인생의 여러 해를 망치고 죽을 생각까지 하고 가장 커다란 사랑을 하다니!”(2, 330) 이런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스완은 오데트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그들의 딸 질베르트가 ‘나’의 첫 사랑이 된다. 이렇듯 콩브레의 ‘나’는 두 산책로인 메제글리즈(스완네 집 쪽)과 게르망트 쪽, 즉 ‘부르주아지’와 ‘귀족’의 세계를 오가며 작가를 꿈꾼다. 수시로 재능의 부재를 절감하지만 종국에는 총 500명이 넘는 인물들의 대서사시를 창조하게 될 것이다.
순간과 영원을 오가는 무한대의 시간, 사물과 현상에 대한 세밀화 같은 묘사, 소설적 가공 없이 무심한 척 던져지는 인물들과 야생의 상념들, 학술서 수준의 미학 담론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오직 소비만 하는 상류 사회의 ‘수다의 생리학’(벤야민),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몽롱한 반수(半睡)의 서사를 좇아가기가 만만치 않다. 프루스트의 실제 삶(명망 있고 부유한 집안의 장남, 타고난 감수성과 총명함, 최상의 교육 환경 등)에서도 극적인 사건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장 이브 타디에). 유일한 결핍인 병약한 체질(천식)은 역설적으로 어머니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만년 ‘마마보이’의 호사스러운 삶, 가령 엄선된 식재료로 구성된 식탁, 과민성 피부 관리법, 소음과 외풍과 빛이 차단된 최고급 거처 등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알랭 드 보통).
사진 속의 프루스트 역시 스완처럼 마땅한 직업도 없이 사교계를 드나들며 딜레탕트의 삶을 즐기는 전형적인 ‘댄디’의 모습을 하고 있다. 두 권의 번역서에 미발표 평문, 얄팍한 소설책(<즐거움과 나날들>)이 거의 전부인 허랑방탕한 ‘고급 속물’이 상당한 규모의 소설 한 편을 완성한다. 바로, 우여곡절 끝에(당시 갈리마르-NRF의 편집장이었던 앙드레 지드는 훗날 프루스트에게 이 소설의 출간을 거부한 일을 통렬히 후회하는 편지를 쓴다) 자비로 출간된 <스완네 집 쪽으로>이다. 이어 총 7권에 육박하는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완간되는 것은 1차 세계 대전을 거쳐 작가가 사망한 다음이다.
이 소설을 둘러싼 논의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시간’이다. 시간, 그리고 글쓰기와 인상에 관한 이야기(폴 리쾨르), ‘시간-진리’를 찾아가는, 그 점에서 철학과 경쟁하는 소설(들뢰즈), 욕망을 포함하여 여러 사물-대상의 변형 과정에 주목하는 소설(지라르) 등. 실상 소설의 제목은 물론이거니와 소설 전체의 맨 처음(“오랜 시간(longtemps)”)과 맨 끝에(“시간 속에(dans le Temps)”) ‘시간’이 버티고 있다.
('시인' 이성복의 불문학자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던 책입니다 ^^;)
프루스트는 환시와 환각의 안개가 드리워진 낯선 시간 속을 헤매며 이미 환(幻)이 돼버린 ‘잃어버린’ 과거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런 식으로 ‘되찾은’ 현재-영원을 선보인다. 40년에 이르는 인생의 전반부를 ‘한심한 허송세월’에 바치고 남은 10년을 파리 번화가에 쌓아놓은 자기만의 성에 틀어박힌 채 ‘잃어지고’ ‘살아진’ 시간들과 그 속으로 사라진 ‘이름’, ‘말’, ‘사물’을 살려내는 데 보낸 작가! 모든 것을, 심지어 자기 자식마저도 무자비하게 집어삼키는 크로노스 신으로 의인화되는 시간과 맞장을 떠본들 얻는 것은 패배-죽음뿐이다. “아! 집도 길도 거리도 세월처럼 덧없다.”(2, 407)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시간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이보다 더 고독하고 숭고한 소설쓰기가 또 있을까. 한 시인이 그의 소설을 “인식의 허망함과 허망함의 인식”(이성복)이라고 정의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리라.
-- <책&>
** 이번 호에 실은 건데 편집 과정에서 문장이 너무 심하게 훼손돼서(ㅠ.ㅠ) 부랴부랴 올립니다^^;
작품이 난해하니 참고서(^^;)도 난해하고, 어쩜, 작가의 평전조차 어찌나 지루한지! ㅋㅋ 어쨌거나 머릿속에 애매하게 남아 있는 '스완'과 뭐 여타 인물들이 좀 더 또렷해졌고, 불어 공부할 때 읽었던 앞부분을 훌륭한 번역으로 다시 곱씹을 기회를 가졌습니다. 옛날 판본으론 2, 3권 정도까지 읽었던 것 같은데, 새 번역본이 출간되는 속도에 맞추어 꾸준히 완독(!)해 볼 참입니다. 바로 진입(?)하기 두려우신 분은 만화 버전으로 먼저 보세요! 이것도 계속 나오는 중입니다.
-- 앗, 그리고 이 글의 제목의 출처는, 척 봐도 아시겠죠? 바로 이 분! ^^;
-- 아래, 지라르의 책에도 소개된(?) 프루스트의 사진입니다.^^;
- 크로노스 관련 부분, 물론 염두에 둔 이미지는 고야의 이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