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테스크 미학과 숭고미: 숙명’, 그것의 이름은 노트르담

- 빅토르 위고, <파리의 노트르담>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은 루이 11세 치하, 15세기 프랑스 파리를 그린 역사소설이다. 실제로 시테 섬과 이른바 뒷골목, 노트르담 대성당을 비롯한 건축물 묘사도 생생하고 소설 속 인물로 등장하는 루이 11세의 형상도 또렷한 편이다. 마녀재판이나 공개처형을 매개로 한, 당시의 사법, 형벌 제도에 대한 작가의 비판도 맹렬하다. 여러 모로 29세의 위고가 품었던 작가적 야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정작 소설은 산만한 구성, 지루한 장광설, 지나치게 환상적인인물과 사건 등 19세기의 여느 프랑스 고전 소설과는 사뭇 다르다. 이런 소설이 거의 200년 동안 우리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파리의 노트르담>은 낭만주의 미학이 십분 발현된 소설이다. 인물들의 성격은 물론 갈등과 사건의 양상 역시 대단히 극적이다. 작품의 중심에 서 있는 라 에스메랄다는 그 자체로 동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충격적일 만큼 뛰어난 아름다움 탓에 끊임없이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금욕과 의지의 화신인 클로드 프롤로 부주교마저 그녀에게 눈이 멀어 상식적으론 납득되지 않는 행동을 보여준다. 대체로 이 인물은 종교와 학문의 빛에 가려진 중세의 암흑을 상징하는 것 같다. 라 에스메랄다를 향한 그의 열정 역시 어딘가 진정성이 결여된, 열정이라기보다는 열정에 관한 수사(修辭)처럼, 억눌린 관능적 욕망의 병리적 분출처럼 보인다.

 

그에 비하면 카지모도는 추()의 극치를 이루는 외모 덕분에 오히려 더 생기롭다. 등뼈가 활처럼 휘고 가슴뼈가 앞으로 툭 불거지고 머리는 양어깨 속에 푹 파묻힌 심각한 곱사등에 두 다리는 제멋대로 뒤틀린 절름발이, 왼쪽 눈에는 무사마귀가 나 있는 애꾸눈. 게다가 열네 살 때부터 종지기로 살아 귀마저 멀었다. 이 흉악한 존재가 곧 성모마리아’(노트르담)의 수호를 받는 성역의 닮은꼴, 심지어 그것과 한 몸이다.

 

그리고 확실히 이 피조물과 이 건물 사이에는 미리부터 존재하던 신비로운 조화 같은 것이 있었다. (중략) 그리하여 늘 대성당의 방향으로 자라나고, 거기서 살고, 거기서 자고, 거의 한 번도 거기서 나가지 않고, 줄곧 그 신비로운 압력을 받으면서, 시나브로 그는 그것과 닮아가고, 말하자면 그 속에 들어박혀, 마침내 그것의 일부를 이루기에 이르렀다. (중략) 그의 툭툭 불거진 각은 건물의 움푹움푹 들어간 각에 끼여 박혀, 그는 이 건물의 입주자일 뿐만 아니라, 그 자연적인 내용물이기도 한 것 같았다.(1, 282)

 

그가 처형되기 직전의 라 에스메랄다를 구출함으로써 성역 안에서 절대적인 미와 절대적인 추가 충돌, 결합한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꼼짝도 않고 말없이 서로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그는 아리땁기 그지없는 것을, 그녀는 추하기 그지없는 것을 보고 있었던 셈이다.” 미추의 대립은 선악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아름다운 것은 선하고 추한 것은 악하다. 라 에스메랄다는 동정심도 많고 마음씨도 착하지만 카지모도는 심술궂고 사납고 거칠다. 그러나 작가가 추구한 미학은 이렇게 경직된 미추의 변증법을 넘어선다.

 

 

 

 

 

 

 

 

 

 

젊은 위고가 숭상한 낭만주의, 소위 그로테스크 미학의 핵심은 세계의 이원성과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통찰에 있다. , 세계와 인간은 본질적으로 아름다움과 추함, 선함과 악함, 빛과 어둠 등 서로 모순되는 가치로 구성돼 있다. 그 날카로운 대조는 대단히 불편하고 아주 자주 비현실적이지만 대신 단순한 아름다움이 결코 줄 수 없는 숭고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팜므 파탈야수-괴물의 사랑은 그로테스크하지만, 아니 그로테스크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숭고하다.

 

그녀가 채광창으로 가서 보니, 가련한 꼽추는 벽 모퉁이에, 고통스럽고 체념한 듯한 태도로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기에게 자아내는 불쾌감을 억제하려고 애를 썼다. “이리 와요.”하고 그녀는 그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집트 아가씨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카지모도는 그녀가 자기를 쫓아내는 줄 알았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물러갔다, 절뚝거리면서, 천천히, 고개를 수그리고, 절망으로 가득 찬 눈을 처녀를 향해 감히 쳐들지도 못하고. “이리 오라니깐.”하고 그녀는 외쳤다. 그러나 그는 계속 떠나갔다. 그러자 그녀는 독방에서 뛰어나가, 그에게로 달려가 그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자기 몸에 닿는 것을 느끼고, 카지모도는 사지를 떨었다. 그는 애원하는 듯한 눈을 들어, 그녀가 자기를 그녀 곁으로 도로 데리고 가는 것을 보고, 그의 얼굴은 기쁨과 애정으로 온통 반짝였다. 그녀는 그를 자기의 독방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 했으나 그는 끝내 문턱 위에 서 있었다. “안 돼요, 안 돼요.” 그는 말했다. “부엉이는 종달새의 보금자리에 들어가지 않는 법이에요.”(2, 250)

 

이 숭고한 열정의 연원은 꽤 깊다. 18년 전, 집시들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천사 같은 계집애를 훔쳐가면서 그 자리에 괴물 같은 사내애를 놓아두었다. 그리하여 노트르담의 안을 구석구석 누비던 사내애와 노트르담 밖의 거리를 누비던 계집애는 먼 훗날 죽음을 통해 완전히 결합한다. 노트르담의 벽 어디에 그리스어로 새겨진 글자 숙명의 실현이랄까.

 

 

 

 

 

(빅토르 위고의 소설 중 지명도는 낮지만, 개인적으론 무척 감동 깊게 읽은 소설입니다. <악령>에도 언급되는데, 좋은 번역이 나와 기뻤지요...^^;)

 

 

 

 

 

 

이 단어는 실상 <파리의 노트르담>의 모든 인물을 다 아우른다. 양자의 손에 목숨을 잃은 프롤로, 파리를 배회하는 거리의 시인 그랭구아르, 경박한 바람둥이의 전형 페뷔스, 잃어버린 딸을 되찾는 순간 영원히 잃어야 했던 자루 수녀귀딜, 노트르담을 공격하는 부랑자와 거지 무리들. 이들은 모두 자기 삶의 주인공이지만 동시에 숙명이라는 거대한 이름에 종속된 자들이다. 숭고한 괴물처럼(카지모도!) 묵묵히 버티고 서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은 결국 그 숙명의 상징이리라.

 

-- 네이버캐스트

 

--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레 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의 또 다른 인기작입니다^^; 두 작품을 비교(?)하면, 아무래도 <레...>가 압권이죠, 여러 모로? 특히, 후반부의 장발장은 소위 할아버지 역할을 맡는 데 재미를 붙인 위고의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코제트와 그의 관계도 감동적이고.) 하기야 우리에게 그는 늘 할아버지네요 ㅎㅎ 

 

 

빅토르 위고와 동갑인 유명 작가, 바로, 모험소설의 대가, <삼총사>, <몬테크리스토 백작> 등을 남긴 (아버지-페르) 뒤마입니다! 위고는 순문학이고 뒤마는 통속문학이었으나(지금도 대략 그렇게 정리되겠으나), 결국 책은 독자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또 오래 받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니까요.

그나저나, 작가도 이미지 관리를 잘 해야겠어요. 적어도 사진은 잘 나온 것만 몇 장 남겨야...-_-;; 뒤마 1세는, 그의 사진은 처음 보는데(!), 언젠가 아들(<춘희>를 썼죠)의 못된(?) 회상대로 참 호탕(?)하게 생겼네요 ㅋㅋ  성인병을 많이 앓았을 것 같아요 @__@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