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죄송합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네 번의 자살미수,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자살 시도와 성공. 한 작가의 문학세계의 핵심어가 자살일 수는 있어도 작가의 삶 자체가 이렇게 요약되기는 쉽지 않겠다.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는 왜 그토록 자살에 집착했을까. 일본 문화의 특수성을 고려해도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20세기 기수(二十世紀旗手)라는 유명한 말, 그 기괴한 원죄 의식의 근거가 무엇일까.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13)

 

 

(왼쪽 사진은 처음 보는데, 이미지가 사뭇 다르네요! 웬 훈남의 중년이 ^^;; )

 

오바 요조가 쓴 총 세 편의 수기는 부끄럼으로 점철된 27년간의 생애에 관한 기록이다. 배고픔과 가난을 모르고 보낸 유년기와 익살연기를 시작한 소년기(수기1), 담배여자 등 타락과 이른바 가마쿠라 정사(情死) 미수 사건, 호리키와의 교류, 좌익사상에의 경도로 요약되는 청소년기(수기2), 무명 만화가(‘조시 이키타’)를 자처하며 넙치(시부타), 시즈코 등의 집에 기식하다가 약물 중독, 각혈에 시달리고 결국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청년기(수기3). 여기에 스스로를 자살로써 벌해야 할 만큼 수치스러운 죄가 있는가.

 

 

 

 

 

 

 

 

 

 

 

 

문제는 자기 연민과 자기 비하의 이면에 숨어 있는 가공할 만한 자기도취이다. 나르시시즘은 그 표현 양상은 다양할 수 있으나, 애초 희랍신화가 보여주듯, 지나친 자기애로 인해 죽음 충동에 사로잡히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요조는 마땅히 어떤 죄를 지었다기보다는 죄인(=범인), ‘음지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죄를 조장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죄의식을 더 키워나간다. 주로 여성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일련의 기괴한 행각(가령 자신의 내연녀가 능욕당하는, 그렇다고 생각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도 거의 일부러 방관자의 입장을 취한다), 건강한 생활을 마다하고 굳이 기생충의 삶을 고집하며 집안과 의절하기에 이르는 것 등 그 스스로 익살은 물론 수난을 자처한다.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그것에서는 한없는 강인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히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음지의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비참한 패자, 또는 악덕한 자를 지칭하는 말 같습니다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음지의 존재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에서 떳떳하지 못한 놈으로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다정한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그 다정한 마음은 저 자신도 황홀해질 정도로 정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범인(犯人) 의식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이 인간 세상에서 평생 동안 범인 의식으로 괴로워하겠지만 그것은 조강지처 같은 나의 좋은 반려자니까 그 녀석하고 둘이 쓸쓸하게 노니는 것도 내가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51)

 

어떤 경우든 요조의 관심사는 오직 이며 그 는 죄를 범하고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카인의 표식을 단 이다. 여기에 요조와 호리키의 말장난을 적용해 보자.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언뜻 그 생각이 머리 한쪽 구석을 스치자 흠칫했습니다. 만일 저 도스토 씨가 죄와 벌을 유의어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반의어로 병렬한 것이었다면? 죄와 벌. 절대 서로 통할 수 없는 것. 얼음과 숯처럼 융화되지 않는 것. 죄와 벌을 반의어로 생각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바닷말, 썩은 연못, 난마(亂麻)의 그 밑바닥아아, 알 것 같다.(115)

 

다른 식의 물음을 던져보자. ‘’, 그리고 은 희극명사인가, 비극명사인가. 요조의 삶은 죄와 벌의 희비극성을 극대화하는 쪽에 있는 것 같다. 그는 스스로 죄 많은 광대이고자 한다. 그의 비밀을 꿰뚫어보는 자가 바보이자 외톨이인 다케이시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아니, 그가 어울리는 자들은 대체로 반쯤 날건달인 호리키, 어딘가 타락과 연민의 냄새를 풍기는 여성들 등 소외계층이거나 타락계층이다.

 

 

(다운만 받아놓고 아직 못 본 ㅠ.ㅠ 영화 ^^;) 

 

 

이렇게 낮은 데로 임하여 돈키호테 같은 우스꽝스러운 광인-바보의 역할을 맡음으로써 그는 지상의 그리스도로 거듭난다. 훗날 어느 술집 마담은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어요.”(138) 지상의 그리스도를 꿈꾼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이 현실에서 범죄자, 백치, 광인이 될 수밖에 없던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요조는 스스로에게 인간 실격을 선고한다. 물론 다분히 퇴폐적인 측면이 있다.

 

이젠 저는 죄인은커녕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니요, 저는 결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단 한순간도 미친 적은 없었습니다. 아아, 그렇지만 광인들은 대개 그렇게들 말한다고 합니다. 즉 이 병원에 들어온 자는 미친 자, 들어오지 않은 자는 정상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지요.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중략)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131)

 

몇몇 소설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인간 실격>은 거의 사소설(私小說)에 가까운, 말하자면 가면의 고백이다. 맨손 체조만 좀 했어도 그의 우울증은 치유됐을 것이라는 미시마 유키오의 냉소적인 말은 상당히 일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고통을 향한 그의 집요한 엄살에서 모종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가.

 

-- 네이버캐스트

 

말미에 언급한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도 재밌습니다 ^^; 

 

 

 

 

 

 

 

 

 

 

 

 

 

원래 썩 좋아하지 않은 일본근대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역할이 큰데요, 요즘 가장 다시 보고 싶은 영화는 우울할 때마다 항상 틀어놓았던(일본어 공부도 할겸^^), "필란도노 카모메와 데카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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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미 2013-04-08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통을 향한 집요한 엄살...ㅋㅋㅋ 인간실격에 딱맞는 표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