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카라마조프>의 아이들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아이들
과연 신 없는 유토피아가 가능할까. 이반의 이성은 그 꿈에 젖어 있지만 드미트리의 감성과 알료샤의 영성은 영원히 신의 품 안에 머물고자 한다. 신의 존재를 상정하든 말든 <카라마조프>에서 영원한 삶을 담보해주는 지상낙원의 은유는 아이들이 아닌가 싶다.
(하나는 내가 번역한 책, 하나는 내가 고등학교 때, 대학교 때 완전 빠져 있던 번역본(옛날 판본을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죠 ^^;), 마지막 하나는 대학원 시절 원문 대조 교열을 본 번역본입니다 ^^;)
일류샤라는 아이가 그야말로 아무런 이유 없이, 이반의 어법을 빌자면 ‘부조리’하게 죽는다. 그리고 그 아이의 무덤 옆에 콜랴 크라소트킨, 스무로프 등 다른 아이들이 모여 있다. 앞서, 이반이 추상적인 아이들의 고통을 근거로 반역을 주장한 것을 상기해보라. 알료샤는 정반대로 구체적인 한 아이 일류샤의 죽음을 근거로 사랑과 용서를 촉구한다. 일류샤의 죽음이 단순한 비극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바로 이 아이들의 존재가 필요하다. 순환논리 같지만, 이들이 살아 있기에 또한 일류샤의 죽음이 유의미하다.
마찬가지로 살아남은 카라마조프들은 아비와 이복형 스메르쟈코프의 죄악과 죽음을 대가로 삶을 선사받는 셈이다. 뒤집어 말하면, 아비와 형제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들들-형제들이 앞으로 아름다운 삶을 일궈나가는 것뿐이다. 요한복음에서 취한 제사가 의미하는 바도 이것이 아닐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복음서 12: 24)
작가가 조시마 장로의 입을 빌어 풀어주는 구약의 「욥기」도 비슷한 전언을 담고 있다. 실상 도스토예프스키가 주목하는 것은 욥의 신실함과 의로움이라기보다는 신의 시험이 종결된 이후 욥이 보이는 반응이다. 성경 속의 욥과 달리 <카라마조프> 속의 욥은 심히 고뇌하며 반문한다. 예전의 아들딸들을 영원토록 잃어버린 상황에서 과연 새 아들딸들과 더불어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 그래도 될까, 하고. 이에 대해 작가는 해묵은 슬픔을 대체할 온화한 기쁨에 대해, 삶의 위대한 비밀에 대해 얘기한다. 음울한 과거를 잊고 이 순간의 삶을 즐기며 밝은 미래를 꿈꿀 것.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생각한 진정한 구원과 부활의 실체이다. 이제 작품의 맨 앞으로 돌아가자.
(도..키의 두 번째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작가보다 스물 네 살이 어렸습니다. 미인은 아니지만, 심지어 러시아 여자치고는 좀 빠지는 얼굴이지만, 야무지고 당차 보이죠? ^^)
도스토예프스키는 환갑을 코앞에 두고 완성한 대작 <카라마조프>를 아내에게 헌정했다. 실제로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는 첫 부인과 사별한 25세 연상의 남자 곁에 머물며 14년 동안 알뜰한 살림꾼이자 뛰어난 조력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른바 가정의 행복을 누리며 도스토예프스키는 <작가 일기>의 다음호를 준비하고 <카라마조프>의 2부를 구상했다. 건강이 악화되긴 했으나 그럼에도 그는 아직 죽을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 역시나 그럼에도 죽음은 그 나름의 원칙대로 그를 찾아왔고, 그는 폐동맥 파열로 이듬해 1월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딸 류보비는 열두 살, 아들 표도르는 열 살이었다.
(그녀가 남긴 회고록은 도..키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소설가의 아내가 되지 않았다면 수필가(^^;)가 되었을 법한 평이하고 균형 감각 있는 문체가 돋보입니다.)
<카라마조프>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여우’ 같은 아내, ‘토끼’ 같은 두 아이와 더불어 인생의 절정을 구가하며 쓴 소설이다. 그 무렵 간질병 발작으로 사망한 막내아들 알료샤에 대한 피 끓는 애도의 감정도 자연스레 작품 속에 스며들었다. 자,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 인간 도스토예프스키를 잠시 떠올려 보자. 임종의 침상에서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이며 그가 가장 애달파 한 것은 물론, 두 아이와의 영원한 이별이었을 것이다. <카라마조프>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곧 그의 아이들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고백록이자 그의 아이들, 그들이 살아갈 미래의 세계 앞에 바치는 유언서이다.
(-- 끝)
안나, 딸 류보비, 아들 표도르입니다. 놀랍게도(^^;), 처음 보는 사진입니다. 류보비는 훗날 (삼류) 작가가 되는데, 편파적이기로 유명한(특히 도..키의 첫 부인에 대한 '모함') 회고록을 남깁니다. 간질병은 유전이 돼도 천재성은 유전이 안 되나 봅니다...-_-;; 톨스토이 집안에서는 계속 나름대로 걸출한 인물들이 나오는데(그래서 인물 사전에서 '톨스토이' 항목은 항상 긴데) 도...키 집안은 앞뒤로 다 그 도..키 밖에 없으니...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