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오베 얘기가 처음(혹은 제대로) 나오는 것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인가. 이 책을 제법 꼼꼼히 읽었지만(그래서 작은 글도 하나 썼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 정도 나에겐 재미가 없었던 얘기. 요지인즉, 아들 딸이 골고루 무척 많은(7명씩이었나, 10명씩이었나, 암튼 많이도 낳았다!) 어머니(이자 동시에 테바이(?)의 왕비)인 니오베는 자신의 행복을 떠벌리며 오만하게 굴어 신들에게 혹독한 벌을 받는다. 결국 그렇게 자랑스러워한 모든 자식들을 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화살에(맞나?) 잃게 된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물론 '신'에 대한 인간의 오만에 대한 응징이다. 이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신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존재. 인간이여, 니 주제를 알라.

 

지금 니오베 얘기는 다른 식으로 의미심장하다. 여자에게 엄마, 그 이름과 자리는 무척 놀라운 것이다. 지금도 가능하다면 최소 둘은 낳고 싶은 욕심, 어느 여자에게나 있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한다. 둘이 뭐냐, 낳을 수 있다면, 키울 수 있다면 니오베처럼 많은 아이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으면 얼마나 뿌듯하겠는가. 니오베가 왕비니 그 새끼들은 모두 왕자, 공주다. 이미 남아선호 사상은 거의 없어졌고, 동생들 부부를 봐도, 아들 혹은 딸에 대한 욕심도 말하자면 이렇게 자식을 많이, 두루두루 갖고 싶은 욕심의 연장인 듯하다. 아들이 있으니 딸고 갖고 싶고, 딸이 있으니 아들도 갖고 싶고, 심지어 빨리 결혼해 이십대에 두 아이 낳은 어느 후배 말대로, 아들딸 다 있으니 한 '세트' 더 갖고 싶고. 엄마로서의 여자의 욕심도 끝이 없다.  그 다음, 아이 낳고 나면, 극성 엄마 아닌 엄마 없다. 아닌 경우는 친모가 아니거나 아니면 믿는 구석이 있거나.

 

애초 엄마의 자리를 꿈꾸지 않았던 탓인지, 엄마로서의 내 자리에 깜짝 놀라곤 한다. 더 정확히, 내 안의 모성애에. 아마 세상에서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해온 여동생이 더더욱 놀란다. 자기처럼 성격 좋은 사람도, 평생 좀처럼 화를 안 내는 사람도 두 아이 엄마로서는 매일 짜증의 연속이라고. 반면, 나는 걸핏하면 화를 내는 성격인데, 오히려, 애 낳고 (적어도 아이에겐) "보살"됐다고. 맞다, 아이가 너무 좋다. 하지만 이건 동생도 나의 24시간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아이에게 엄마가 절대적인 존재인 건, 절대적으로 맞다. 엄마와 아이는 원래 한 몸이었다. 정자 한 방울에 어떻게 비기랴.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사랑은 아이를 키워가며, 아이와 상호 작용하며 형성된다.  제삼자는 한마디로 못 알아듣는 아이의 말을 엄마는 다 알아듣는다. 심지어, 말이 아닌 표정이나 몸짓으로만 표현되는 의사도 엄마는 다 이해한다. 아이는 어릴 수록, 약할 수록(정신 박약 포함), 아플 수록 더 엄마만 찾는다. 우리 아이가 엄마한테 많이 집착하는 것도, 발달 지연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진즉 인정한 터이다. 옛말 다 맞다. 눈 먼 놈이 효도하고, 못난 놈만 내 자식이다. 잘난 놈은 결국 부모 품을 떠나게 돼 있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최대한 멀리. 적당히 잘난 놈은 국가의 자식, 더 잘난 놈은 세계의 자식, 예수같은 자는 한 여자 마리아의 자식이 아니라 온 인류의 자식이다.

 

아이는 무한히 사랑스럽지만 육아는 너무 힘들다. 모성, 모성애는 물론 본능이지만,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언젠가 읽은 권보드래 교수의 칼럼대로, 사회가 은연중에 작당, 모의를 한 건지도 모른다. 엄마인 네가 다 책임져, 넌 엄마잖아, 모성은 위대해! 이런 식으로. 더 극단적으로, 부모자식간의 범죄를 일개인의 잘못으로 몰아가면 문제는 단순해질 수 있으나, 이 역시 비겁한 일일 수 있다. 요즘 부모가 어린 아이를 학대하거나 심지어 살해하는 뉴스가 빈번하다. 대부분의 반응은 경악인데, 특히 엄마가 범행의 주체라면 더 경악한다. 엄마란 그런 존재이다. 하지만 요즘 생각은 좀 다르다.

 

 

 

 

 

 

 

 

 

 

 

 

 

 

 

통상 살부(살모)에 대한 논의는 제법 활발하다. 세계문학사의 대표적인 텍스트 세 편, 위의 것이다. 그 반대(?)는 어떠냐. 즉,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것 말이다. 이 역시 연원이 깊다. 크로노스(시간)가 가이아(땅/대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자식을 삼키는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도 <변신 이야기>던가. 아무튼 유명한 일화. 고야의 소름 돋는 그림으로 더 유명하다.

 

아마 저 신화 자체는 시간에 대한 인간의 공포를 표현한 것일 터이다. 여기에는 또 남자 대 남자, 즉 부자 간의 권력 다툼이 개입되니 문제는 또 복잡해진다.(헐, 우리의 사도세자!) 잘했다는 것이 물론 아니고, 불가피했으리라 여겨지는 어떤 지점은 분명히 있다. 아무렴, 아버지가 자식을 집어삼키는 것의 공포는 정말, 후덜덜이다.

 

돌도 안 된 아이, 심지어 백일 전후한 아이를 그냥 방치한 것에 덧붙여 사실상 폭행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엄마들이 있다. (최근의 그 냉장고 냉동실 사건은, 참, 소설의 내용이라고 해도 어처구니없다..ㅠ.ㅠ 토막 이후에 치킨이라는 이 도저한 산문성은 뭐냐...ㅠ.ㅠ)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나도 응당 "세상에, 엄마라는 사람이!"라고 쉽게 말했을 터이다. 하지만 막상 아이를 낳고 4년 반 정도  키워 보니 "오죽하면!"이라는 소리도 나온다. 내 뱃속에서 나와 호흡하며 키운 아이를 세상 밖으로 빼내고, 오직 나밖에 몰라 죽자사자 나한테 매달리는 핏덩어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기까지  분명히 몇 단어로 요약이 안 되는 복잡한 정황이 있었을 것이다. 엄마 자체의 몸과 마음의 건강, 주변 인간들의 무성의(심지어 폭력), 때론 아이 자체의 문제(심지어 장애에 가까운 질환이 있거나) 등등. 마지막 요소도 무척 심각하다. 많이 보채고 떼를 심하게 쓰는 것도 어느 지점에서는  약물 치료까지 요하는 장애이다. 가령 흔히 말하는 adhd는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그 심각성을 모른다. 학동기, 이미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되는 나이에서 아이의 인성이나 행동이 지나치게 문제적일 때는 엄마로서 더 좌절할 것 같다.   

 

'모성'의 메타퍼들이 있다. 지난 번에도 얘기한 울리츠카야의 소설 중 하나는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형상화한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박경리의 <토지> 역시, 굳이 작가가 여성이어서라기 보다는(물론 이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겠다 - 그리고 여자가 여자처럼 쓰는 건 나쁜 게 아니다) 소설의 문체나 어떤 분위기 때문에 항상 그런 느낌이 들었던 듯하다. 겸사겸사, 어떻든 이 소설은 최서희의 일대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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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에 낮잠이 들면 어떡하나, 정말 난감하다. 내 몸도 힘들지만, 남의 몸, 즉 아이의 몸을 건사하는 것은 그에 비길 바 아니다. 컨디션 조절이 잘 안 되는 것도 역시나 발달 지연의 일부일 터. 요즘은 모든 것을 다 여기에 갖다 붙이는 비겁한(?) 버릇까지 생겼다 -_-;; 아이의 지연 혹은 장애보다 더 무서운 것은 타인의 시선을 자꾸만 의식하는 나의 소심함인가, 에효. 그러게 '맷집'이 필요하다.

 

몇 달 전,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을 곧잘 듣던 아이와의 대화. 1인칭 대명사를 잘 못 쓰던 때의 일이다.

- **아, 싸우자! 엄마는 황산벌에 계백할 테니까 너는 맞서 싸운 관창 해.

- 싫어. **는 역사할 거야. 역사는 흐른다~

 

한 일주일쯤 전, 잠자리에 들어 뭔가 열심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런 말을 한다.  

- 엄마, 고추는 매운데 왜 내(**이) 고추는 안 매워? 먹는 고추는 매운데 사람 고추는 왜 안 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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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결핵, 특히 폐결핵하면 낭만주의 퇴폐와 연결되어 어딘가 미학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각종 낭만주의 시인들을 생각하면 된다. 암에 관한 한, 동정의 여지가 없다. 종양 덩어리, 썩어지고 문드러지고 그렇게 추악하게 죽음에 이르는 것. 가까운 예론,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반 일리치의 여러 증상으로 미루어, 췌장암(?)으로 추정한다. 에이즈는 더하다. 이것은 어떤 미학도 허용치 않는다. 이 병을 둘러싼 각종 메타포-은유들이 너무 불결한 탓이다. 이런 유의 생각은 수잔 손택의 명저를 읽으며(이 책에서) 나온 것이다.

 

 

 

 

 

 

 

 

 

 

 

 

 

 

수잔 손택의 하고 많은 고급 에세이 중 유독 이 책에 꽂힌 것은 수시로 상기되는 저런 내용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병과 더불어 살고 있고, 더 무서운 것은, 그 메타포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잠시 그녀와 관련하여, 그녀는 훌륭한 에세이스트였지만 끝까지 소설가이고자 했다. 그녀의 소설을 읽지 않아 뭐라고 판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평판만 놓고 보면 그리 대단한 소설을 쓴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왜 그토록 소설을 쓰고자 했는지. 우리를 옥죄는 이 창작(특히 소설-이야기 창작)의 욕망은 당최 무엇인지.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이 국내에 번역, 소개되기 전에 그 내용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은 대학 시절 김윤식 교수 덕분이다. 한국비평론 강의에 이런 얘기가 왜 나왔는지^^; 아무튼 그때 주워들은 몇 마디가 무척 강하게 각인되었다. 곁들어, 그 시절의 국문학자임에도 영어를 잘 했고(요즘이야 국문과 학생들이 영어 공부 더 열심히 하는 듯^^; 심지어 몇 권의 책을 번역하기도 한(지라르 소설론,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등) 김윤식 선생은 이 점에서도 나름 선구자이다. 손택의 이론을 처음(!) 소개함과 동시에 이상 연구에 적용, 청년 이상의 결핵과 그 문학 간의 상관성을 풀어내었다. (<이상 소설 연구>도 좋은 책인데 이미지 검색이 안 된다.) 그러리라 추정했는데, 그렇다고 확증해준 것은 방민호 교수의 최근 이상 연구서.

 

 

 

 

 

 

 

 

 

 

 

 

 

 

겸사겸사 방민호 교수의 한 논문에 한복을 입은 이상 사진이 있어 깜짝 놀랐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우면서도 멋있었기 때문이다. 모방과 창조(?)를 향한 엄청난 욕구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든 조선인이고 덧붙여 장남(!)이기도 했다. 아무튼, 오랫동안 외국문학 쪽만 보다가 한국문학을 보니 마음이 설레는 것은 물론이고, 학자들의 몸가짐과 마음가짐(?) 역시 다르다는 사실에 자극을 받는다. 외국문학 전공자의 몫 중 하나는 번역이기도 하지만, 국문학자의 연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해석(논문 및 저서 쓰기)인 듯하다. 어쩌면 이것이 굴레이자 억압일 수도 있겠으나 어떻든 그들이 더 부지런한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다시 은유로서의 질병. 이반 카라마조프식 화법으로, 성인은 차치하자. 그들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어서, 즉 환경적 요인을 비롯한 각종 원인에 침윤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그나마 덜 억울할 터이다. 가령, 술담배 많이 해서 위암, 폐암, 대장암 걸리고 등. 하지만 너무 어려서 미처 선악과를 따먹을 여유조차(!) 없었던 아이들의 질병(장애)은 당최 뭐냐는 거다.  

 

출생 직후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조산아도 생각보다 많아 놀랐다.(우리 아이도 생후 1개월에 입원했는데 마침 병실이 없어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이런 경우 각종 질환이나 (아직 단정하긴 이르지만  장애가 적지 않다. 유전자 이상(우리가 제일 흔히 아는 건 다운 증후군)은 물론 증상이 심할 수록 조기에, 거의 생후 몇 개월에 발견,진단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런 장애(질환)는 다른 장애를 동반한다.

 

"애들이 한 번씩 경기도 하는 거지, 무슨 mri야."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못한 정황도 많다. 증세가 심하거나(우리 아이도 눈이 뒤집어지고 병원에 도착한 시점에서 산소포화도가 아주 낮았다) 두세번 이상 반복된다면 더 그렇다. 보통은 약으로 조절하지만 드문 경우 (주로 간질파가 발견되는 뇌의 특정 부분을 잘라내는) 수술도 한다.  대개는 커가면서 좋아진다고 하지만(나도 그런 경우이고) 일단 약을 복용하면 증상이 없어도 3년은 계속 복용한다. 계속 증상이 있다면 그것이 간질병이고 평생 약을 먹는다.

 

 

 

 

 

 

 

 

 

 

 

 

 

 

주지하다시피 카이사르, 나폴레옹, 플로베르 등도 간질을 앓았다고 한다. 우리가 간질에 대해 갖는 극히 양가적인 인상은 이런 사실에도 기인한다. 즉, 그것을 '지랄병'(-서양에서는 '악마'가 들린 것)이면서 동시에 어딘가 천재적인 것이라는 것. 나의 경우, 경기를 많이 했으나 발달에 문제가 없어서, 오히려 너무 빨라서 후자처럼 생각했던 듯하다. 우리 아이의 경우는, 유감스럽게도, 반대. 하지만 전에 쓴 글에서 강조했듯, 이것은 그저 질환일 뿐이고, 이 질환과 특정 분야의 천재성 사이에 어떤 인과 관계가 있지는 않을 터이다. 심지어 프로이트조차도 <도..키와 살부(친부살해>라는 글에서, 기억나는 대로 조잡하게 정리하면, '몸'의 간질과 '정신'의 간질을 구분하고 도키를 후자에 넣는다. 하지만 이런 것은 있을 수 없다!  특발성(별 이유 없이 그냥^^;) 간질은 결국 증상이 문제이지, 원인(뇌의 구조에 어떤 확실한 문제, 기형 등)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치료도 항간질약을 통해 발작을 최대한 억제하는 쪽으로 맞추어지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의학.

 

 

 

 

 

 

 

 

 

 

 

 

 

 

 

 <백치>의 유명한 부분 중 하나. 므이시킨이 간질발작에 대해, 발작이 시작되기 직전의 아주 짧은 순간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을 한 번 옮겨보자. 엄청 길어서(그대의 수다-력이란!) 중간에 왕창 잘랐다.

 

"그의 간질병 증후 중에는 거의 발작 직전에 오는 어떤 단계가 있었다(물론 의식이 분명한 상태에서 발작이 올 때에 한해서지만). 그 단계에 들어서면 우수와 정신적 암흑과 억압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그의 뇌는 불꽃을 튀기고 모든 활력은 폭발적으로 긴장한다. 삶의 감각과 자의식은 번개처럼 이어지는 매순간 거의 10배로 증가되었다. 그의 모든 감정, 의심, 걱정은 지극한 평온함으로 바뀜과 동시에 빛을 발하는 기쁨, 조화, 희망이 되고, 그의 이성은 결정적인 원인을 이해하는 데까지 이른다. (...) 만약 그 1초 동안, 즉 발작이 일어나기 직전의 의식이 깨어 있는 마지막 순간에, 그가 분명히 의식적으로 <그렇다, 이 순간을 위해 나의 모든 생을 내줄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물론 그 순간은 그의 전 생애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백치>, 상권, 350-52쪽.)  

 

한데 의학자들은 이것이 판타지라고 말한다. 간질의 전조로 흔히 얘기되는 증상(오심, 구토, 환청, 환시 등)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라는 것. 하지만 간질병환자였던 도...키는  거의 전적으로 자기 나름의 경험에 기대어 자신의 인물로 하여금 저런 얘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문학은 의학과 완전히 결별한다. 

 

 

 

 

 

 

 

 

 

 

 

도...키 소설의 또 한 명의 간질환자는 (<악령>의 키릴로프를 빼면) 스메르쟈코프이다. 그의 간질병은 소설의 플롯 진행에 큰 역할을 하지만(발작이 난 것처럼 연기하다가 틈을 봐서 표도르를 죽인다), 작가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병을 통찰하는 페이지를 마련해주지 않았다. 이 점에서 스메르-프는 애초부터 '미학적 죽음'을 선고받은 인물이다. 백치-병신조차 자신의 질환을 그토록 깊숙이 응시하건만!  

 

한편 뇌전증과 무관하지 않고 아이의 발달이 너무 늦어 관심을 갖게 된 발달 장애(자폐 스페트럼 장애). 그것의 가장 큰 특성은 (아주 중증이 아닌 다음에는!) 출생시 문제가 없었던 것은 물론,두 돌 정도까지는 별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각종 검사에서도 이렇다 할 원인이 발견되지 않는다. 혹은 발견되도(더러 뇌파에 잡히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냥 그렇다, 하는 정보만 줄 뿐, 증상의 개선에 별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아동발달센터를 봐도 한국 나이로 네다섯에서 일고여덟 정도 되는 아이가 제일 많다. 즉, 두 세돌 부터 의심을 하다가 병원 혹은 센터를 다니기 시작, 여사여사 진료 예약, 치료 스케줄 잡으면 이렇게 되는 거다.  다른 한편, 대략 초등 1, 2학년 정도까지(만 7, 8세) '늦음'이 잡히지 않으면 그것은 '장애', 즉 영구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이른바 좀 모자란다, 좀 덜 떨어졌다, 라는 것이 실은 자폐성 발달 장애, 지적 장애이다. 어릴 때는 '자폐'(autism)라고 하면 뭔가 굉장히 철학적으로 생각한 듯한데, 아이가, 사람이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것이 자신의 의지와 취향에 의해 선택된, 특정한 성향(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지와 감각 처리 능력의 문제 탓이기 때문에 그것은 장애인 것이다. 이것을 둘러싼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양육 과정을 비롯한 환경적 요인 탓이라는  것이다. 환경이 문제라면 그것을 개선할 시 1년 안팎이면 아이의 문제가 사라진다. 그렇게 되지 않으니 장애인 것이다. 그 다음, 고소득 전문직(특히 의사) 부부에게 이런 아이가 많다는 것 역시 속편한 오해다. 오히려 부모가 그렇기 때문에 더 빨리 인지(발견)하고 치료에 적극적이고 때문에 통계에 잘 잡히는 것 뿐이다.

 

부산에 있는 부모와 두 동생과 떨어져 살며 거창 외갓집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1984년 4학년 1학기, 우리 반에 엄마와 이름이 똑같은 여자애가 있었다. 키가 무척 크고 얼굴이 무척 선하게 생긴 아이였다.(생각해 보면 또래보다 나이가 많았을 확률이 높다.) 눈썹이 길고 눈매가 여리고  미소가 은은했다.  학교도 드문드문 나왔던 것 같고. 그 아이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제법 친했던 기억은 있다. 그 아이를 회상하면 왠지 청신한 초록빛 논과 밭이 떠오른다. 시골 학교였고 운동장 뒤로 전부 논밭이었으니 그럴 법도 하고. 아무튼 교실에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은 거의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다. <고슴도치>를 쓸 때도 그랬지만, 요즘 곧잘 그 아이가 떠오른다. 거의 한 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였던 것이다! 그 아이도 사십을 거뜬히 넘겼을 텐데 어떤 모습일지... 

 

아무리 낙서라도 완결이 되어야 하는데 사방에서 떠들어대는 통에 집중이 안 된다. 역시나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정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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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업(?!)으로 가기 전에 잠시 수다를 떤다. 나도 아이 엄마이기에 결코 지나칠 수 없는 것.

 

지금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문제의 동시집. 문제의 동시인 <학원 가기 싫은 날>을 읽고 물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다 읽지는 않았으나, 여기 실린 동시를 대충 훝어보곤 또 다른 의미로 놀랐다. 시가 상당히 훌륭하다는 것! (표제작인 <솔로 강아지>를 포함하여.) 초등학교 3학년(?)이 썼다니, 더더욱 놀랍다. 저 무렵 내가 일기장에 "아빠가 또 술을 먹었다. 엄마가 울었다. 정말 살기 싫다" 이런 유의 문장들 밖에 쓰지 못했음을 상기한다면, 이것은 무엇의 힘이냐. 과연 화자(시인)가 그토록 가기 싫어한 '학원'(=사교육+좋은 학군)의 힘이냐, 그 많은 교육비와 생활비와 주거비를 감당할 수 있는 돈의 힘이냐, 이 모든 것의 저변에 깔린 유전자(=계급)의 힘이냐.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지! 가령 (이번 연휴 때도 다녀온) 거창군 ** 초등학교 학생이 이런 시를 썼을 리도, 또 출판이 가능했을 리도 없을 테니 말이다. 

 

 

 

 

 

 

 

 

 

 

 

 

<학원 가기 싫은 날>은 삽화까지 들어가서 그 잔혹함이 더 두드러진다.(너무 무서워서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 때 잔혹함의 근거는 리얼함이다.  뭔가가 싫을 때 가장 확실하고 단순한 해결방법은 그 대상을 없애는(=죽이는) 것이다. 근데 왜 학원을 안 없애고(죽이고) 엄마를?? 또 다른 시를 보니,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으로 꼽힌다.

 

-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친구들과 내기를 했어 /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말하기 // 티라노사우르스 / 지네 / 귀신, 천둥, 주사 // 내가 뭐라고 말했냐면 / 엄마 / 그러자 모두들 다같이 / 우리 엄마 우리 엄마 // 엄마라는 말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결국 책을 다 절판시키기로 한 모양인데, 이건 당최 뭐냐. 똘똘하고 잔망스러운 아이 앞에서 어른이 느끼는 복잡다단한 정서(수치심이 제일 크겠다)를 이렇게 두루뭉수리, 덮어버리는 건 좀 비겁해 보인다. 살부(살모: 존속살해)의 연원은 상당히 깊은데, 계속 파다 보면 '부/모'에 도달한다.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똑똑하다. 정말 "시근이 멀쩡하다." 즉 철이 다 들어 있다. 그들을 언제까지 '순수', '천진난만'의 화신, 정신의 최고 단계 등 어쩌고 하며 신화화할 것인가. 아무리 발달이 늦는 아이도 한 돌, 두 돌 지나면 비단 배 고프고 잠 오고 이런 생리 현상 뿐만 아니라, 특정 대상에 대한 특정 취향을 피력한다. 듣기 싫은 노래가 있고 가기 싫은 장소가 있고 입기 싫은 옷이 있고 등등. 말(=인지)이 늘어나면 더더욱 감당이 안 된다. 아이가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도, 아니 그러니까 더더욱 상대하기가 힘들다.(어제도 허벅지를, 그것도 맨살을 손바닥으로 두 대나 때렸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생각도 안 난다-_-;;)

 

 

 

 

 

 

 

 

 

 

 

 

 

 

나이 들고 고전 동화를 다시 읽으면서 새삼스러운 것이 "잔혹함"이다. 이상하다. 오히려 어렸을 때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듯한데,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듯한데. 아무튼 이 "잔혹함"의 정서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결국 리얼함, 이라는 결론이다. <라푼젤>도 각색을 해서 그렇지, 라푼젤이 성 안에서 왕자(?)와 아이도 만든다. (이 리얼한 현실이 잔혹의 근거이다.) 연초에 새로 읽은 안데르센 동화의 리얼함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빨간 구두>의 다리 절단 장면은 하드고어의 극단이다.)

 

*

 

젖을 뗀 뒤로 아이 키우는 것이 수월해졌다.(그걸 증명하듯 체중이 조금씩 는다ㅠ.ㅠ) 아이의 운동발달이 너무 늦어 업어주고 안아주는 일을 하는 시간도 남들보다야 길었지만 이것도 얼추 끝난 듯하다. 여전히 비틀대며 걷고 밥도 혼자 잘 안/못 먹지만(가위질도 못하고 종이도 못 접고 풀칠도 못하고ㅠ.ㅠ) 그래도 살 만하다.

 

하지만 이제 슬슬 다른 난관이 나를 향해 달려온다. 한글이야 초등학교 들어가면 배우는 것인 줄 알았건만(나는 유치원도 다니지 않았다-못했다), 네다섯살 짜리도 한글과 영어를 배운다. 어차피 때 되면 할 것을, 뭐하러 1, 2년씩 앞당겨 하냔 말이다 ㅠ.ㅠ 이렇게 투덜대면서도 주위의 압박에 불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애를 그렇게 방치(?)하다가 나중에 후회한다, 라는 식의 때론 애정어린, 때론 진짜 살벌한 협박들! 과연 어떤 것이 정녕 아이를 위한 길이냐...

 

"우리 **이 이제 똘똘해질 거지?" - "더 띵돌해질 거야. 계속 계속 띵돌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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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정의와 자비를 찬미함: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 <신곡>(1321)

    

 

<신곡(神曲)>의 첫 곡의 첫 세 행이 익숙하다.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 어두운 숲에 처했었네.”(1, 7) 서른다섯 살(당시 인간의 이상적인 수명은 70세였다고 한다)의 단테 앞에 표범(음욕), 사자(오만), 늑대(탐욕)가 나타난다. 이 짐승들을 물리치며 등장한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그는 저승 순례에 나선다. 지옥의 문에 새겨진 도발적인 글귀 역시 익숙하다.

 

나를 거쳐서 길은 황량의 도시로 / 나를 거쳐서 길은 영원한 슬픔으로 / 나를 거쳐서 길은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 // () 나 이전에 창조된 것은 영원한 것뿐이니, / 나도 영원히 남으리라. /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1, 26)

 

지옥은 총 아홉 개의 감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소위 림보(Limbo)는 마땅히 지은 죄는 없으나 기독교 신앙을 갖지 못한 자를 위한 곳이다. 이들의 벌은, 말하자면, 구원의 희망이 없다는 절망이다. 그리스도 탄생 이전, 즉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시인과 현인들(“시인들의 왕호메로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히포크라테스, 세네카 등)이 갇혀 있다. 2원에는 시동생과 형수지간인 파울로와 프란체스카처럼 애욕의 죄를 범한 자들이 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죄는 더 무거워지면서 세분화되고 또 가벼운 죄는 주로 자연현상에 의해, 무거운 죄는 악마에 의해 기술적으로 응징된다. 흥미로운 것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즉 동해보복(同害報復)의 원칙에 따른 죄와 벌의 상응관계, 심지어 인과관계이다. 예수 책형을 주도한 유대인의 대사제 가야바는 땅바닥에 붙은 세 개의 말뚝에 못 박히는 독특한 책형을 당한다. “불화와 분열을 조장한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턱부터 방귀 뀌는 곳까지 찢어졌고 두 다리 사이로 내장이 드러나 있다. 제일 밑바닥인 제9원에서는 배반의 죄를 범한 자들(유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이 악마의 수장 루키페르(루시퍼)의 입에 물린 채 참혹한 고문을 당한다.

 

 

 

 

 

 

 

 

 

 

 

 

 

 

 

 

이렇듯 지옥편에서 가장 부각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절대성이다. 죄의 유무에 앞서 신앙의 유무를 문제 삼는 림보의 존재가 단적인 예이다. 벌 받는 죄인들을 향한 연민을 참다못해 울음을 터뜨리는 단테를 베르길리우스는 멍청하다며 꾸짖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죽어야 좋을 연민을 살리고 있으니! / 하느님의 심판에 인정을 느끼는 것보다 더 큰 죄가 무엇이겠느냐!”(1, 194) 나중에는 단테도 복수를 위하여각종 벌을 주시는 하느님의 전능을 찬양하기에 이른다. 요컨대 󰡔신곡󰡕은 그 무엇에 앞서 유일신을 찬양하는 중세 기독교 문학의 백미이다. 지옥편과 그것을 잇는 연옥편, 천국편은 공히 삼위일체의 이념을 구현한다. 각 편은 33곡으로, 각 곡의 한 연은 3행으로 되어 있고 여기에 전체의 서문격인 1편이 더해져 총 100곡의 시가 완성되는 것이다.

 

지옥편의 서사적 긴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연옥편역시 흥미롭다. 연옥은 지옥과 반대로 무거운 죄(밑바닥)에서 가벼운 죄(산허리)를 거쳐 위로 올라가는 모양새이고 각각의 고비는 저 유명한 칠거지악(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음욕)을 형상화한다. 연옥도 죗값을 치르는 공간이지만 정죄의 성격을 지닌 유한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무한의 지옥과 구별된다. 시간의 존재, 즉 성장과 희망의 가능성이 전제된다는 점에서 역시나 무한의 공간인 천국과도 다르다. 지옥과 천국의 엄정한 이분법 사이에 상정된 일종의 중간계를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이성과 기술의 힘으로 여기까지 단테를 데려온 베르길리우스는 연옥의 끝에서 그를 베아트리체에게 넘겨준다. 한데 오직 신앙(영성)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천국 역시 지상의 세계처럼 엄격한 위계질서(열 등급의 하늘과 천사)를 갖추고 있다. 어떻든 이 천국편은 하늘과 땅이 서로 손잡는 이 거룩한 책의 절정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 33, 정화천(엠피레오)에 다다른 단테는 이런 감탄을 내지른다.

 

그때부터 나의 봄[]은 말함이 보여 주는 것보다 / 더 컸다. 말함은 그런 시각 앞에서는 실패한다. / 기억은 그러한 한없음 앞에서 굴복한다. // () 비록 나의 눈은 흐릿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내 눈으로 본 / 그 달콤함은 가슴속에 아직도 방울진다. //() 아 인간의 지성이 다다르지 못할 / 지고의 빛이시여!”(3, 289)

 

궁극의 밝음에 이르러 끝나는 이 기나긴 곡에 작가는 희극”(Comedia)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행복에서 시작하여 불행으로 끝나는 비극과는 달리 불행에서 행복으로 간다는 점을 지적했다. 신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사의 모든 희로애락이 희극이라는 함의도 없지 않겠다. 이는 또한 단테가 림보에 안치한 거장들, 가령 호메로스나 베르길리우스의 근엄한 서사시-비극(<일리아스>, <아이네이스>)에 비할 때 자신의 서사시는 한낱 희극에 불과하다는 겸사이기도 하겠다. 실제로 탐관오리를 응징하는 부분(악마가 방귀를 낀다)처럼 문자 그대로 웃긴 장면도 적지 않다. 대체로 중세 문학의 단골 소재였던 저승 여행을 다룸에 있어 단테는 인간의 본래 속성과 현세의 체제를 보존한다. 내세가 현세의 연장임을 문학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정녕 미메시스의 최고봉(아우어바흐, <단테>)이다. 이러한 희극신성한”(divina)이라는 말을 붙인 자는 <데카메론>의 저자로서 단테의 전기를 쓴 보카치오이다. 경위야 어떻든 후대의 독자들은 단테 알리기에리의 희극보다 신곡을 선호해왔다. 그렇다면 더더욱, <신곡>이 당시 고급 문학(종교 문학)의 언어이자 유럽 공통어였던 라틴어가 아니라 여자도읽을 수 있는 피렌체 속어, 즉 현지어(지역어)로 쓰였다는 사실을 강조해야겠다. 신의 준엄한 정의와 무한한 자비의 세계로 입문함에 있어 그 문턱을 최대한 낮추어야 한다는 생각은 혁명적일뿐더러 갸륵하기 그지없다. 과연 시성(詩聖)답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난 단테의 일생에서 통상 두 가지 사건을 꼽는다. 첫째, <신곡>에서 신의 섭리의 현현이자 천상의 연인으로 신비화된 베아트리체와의 만남이다. 단테가 아홉 살 때 처음 만나 반해버린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을 뿐더러 스물네 살에 요절하고 만다. “그녀에 관해 여태껏 어느 여인에 관해서도 써진 적이 없는 바를 쓰는 것이 나의 희망이다. 그런 후에 은총의 주인이신 주님의 선하심으로() 그 복된 베아트리체를 바라볼 수 있기를 기원한다.”(<새로운 인생>) 둘째, 경건한 시인임과 동시에 정의를 추구한 정치가로서 단테가 겪은 수모이다. 종교 권력(겔프당-교황파)과 세속 권력(기벨린당-황제파)이 대립하는 가운데 정쟁의 희생양이 된 단테는 1302년 사형선고를 받고 사실상 피렌체에서 영구 추방된다. “인생길의 반 고비부터 이탈리아 전역을 떠돌게 된 유배자의 정황과 <신곡> 속 순례자의 정황이 물론 유비를 이룬다.

 

 

 

 

 

 

 

 

 

 

 

 

 

 

 

 

 

<신곡>의 단테는 지옥은 저녁에, 연옥은 새벽에, 천국은 정오에 오른다. 우리의 인생은 지금 어느 지점에 와 있는가? 이십여 전 관악산의 기숙사에서 처음 읽은 <신곡>은 지금도 여전히 공부의 대상이지만 그때는 실패한 천국진입에 성공한 감회가 새롭다.

 

- <책앤>(2월호?)

 

 

- 날씨가 무척 좋고, 오후의 커피숍이 조용하다. 

단편소설 하나 마감하여 보내고 강의 준비도 하고 오랜만에(!) 번역도 재개했다. 집에 가면 청소, 설거지, 요리, 뭐 이런 거 해야 하니까 좀 꾸물댄다. 정말  산 것 같지도 않은데(체호프의 <벛꽃 동산>의 피르스 말대로) 마흔도 넘겼으니 약 오른다. (암과 치매 없는 노년을 꿈꾼다, 정녕!) 소위 '반고비길'에 들어온 기념으로, 오랫동안 미루어 두었던 <신곡>에 (재)도전했다. 명불허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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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정간(폐간), 동업자이기도 한 형 미하일의 죽음 및 조카들 부양의 의무, (사실상 별거 중이었으나) 아내 마리아의 죽음과 그녀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부양의 의무, 젊은 '해방된 여성' 폴리나 수슬로바와의 연애 및 퇴짜 등 40대 초중반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은 한마디로 '쉬-잇'이었을 법하다. <죄와 벌>이 발표되기 시작한 시점이지만, 어쩌나, 돈이 한 푼도 없으니.   

 

 

 

 

 

 

 

 

 

 

 

 

 

 

 

 

빚더미. 이 단어가 딱 적합하다. 빚더미에서 해방되기 위해 도..키는 한 편집업자와 소위 '악마'의 계약을 체결한다. 돈 먼저 받는 대신 작품 판권 넘기고 한 달(?) 안에 새 소설을 하나 써주기로 한 것. 현재, 소설은 하나도 쓰이지 않은 상태이다.  (한편으론, 이 사실 자체가 그 당시 그가 이미 엄청나게 높은 주가의 소설가였음을 증명해준다!) 문제의 소설을 쓰기 위해 도..키는 다급하게 속기사 한 명을 고용한다. 그의 집에 들어선 속기사는 이십대 초반의 '초짜' 속기사, 영 시원치 않아 보이지만 어쨌거나 그녀와 함께 도...키가 27일만에 소설 한 편을 완성한다. 바로 이 소설.

 

  

 

 

 

 

 

 

 

 

 

 

 

 

 

소설의 줄거리인즉, 나름 먹물인 젊은 청년 '나'(알렉세이)는 유럽('룰레텐부르크', 함부르크, 파리 등) 체류 중, 마음을 홀딱 빼앗긴 폴리나의 부탁으로 도박판을 드나들기 시작한다. 그녀가 돈을 따달라고 부탁한 것. 실제로 그렇게 엄청난 거금을 따주고 심지어 하룻밤을 보내기에 이르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다음날 아침, 그녀에게 최후 통첩을 받아버린다. (제대로 차인다!)

 

이 스토리와 나란히, 폴리나를 사랑하는 영국인(미스터 에이슬리), 폴리나의 양부인 늙은 장군, 그가 홀딱 반해버린 프랑스 여자(블랑슈 양) 등 사각, 오각, 육각의 연애 라인이 복잡하게 형성된다.  얼키고설킨 연애 놀음(도박!)과 나란히 진짜 도박판에 대한 묘사가 나름 흥미진진하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장군의 75세 이모(숙모)가 나오는 부분. 장군은 이제나저제나, 러시아에서 할머니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전보를 기다리지만, 어느 날 갑자기 전보 대신 할머니가 직접 출현해준신다. 그리고 유럽의 도박판을 돌면서 거금을 몽땅(!) 탕진하고 돌아가신다. 러시아로 돌아가신 다음에는 진짜로 세상에서 영영 돌아가주신다. 덕분에 장군은 유산을 받을 수 있게 되고,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던 블랑슈 양은 결국 이 영감한테 붙기로 결정한다.   

 

다시, '나'의 스토리. 폴리나에게 버림 받는 나는 있는 돈, 없는 돈을 돌고 여기저기 도박판을 전전한다.(감옥신세를 지기도 한다.) 우연찮게(실은 우연이 아닌데) 만난 미스터 에이슬리로부터, 폴리나가 정녕 사랑한 건 바로 너였다, 라는 식의 이야기를 듣는다. 역시 이와는 무관하게, 다시 강원랜드로~

 

단 한 번도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없는데,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이번에는 소설을 둘러싼, 소설 바깥의 얘기가 흥미롭다. 이른바 "도...키의 세(가지) 사랑".

첫 부인 마리야 이사예바의 초상. 개인적으론 도..키의 여자 중 제일 마음에 든다. 도..키의 입장에서 많이 사랑했으나 결혼 생활은 참, 불행했던 경우.(이런 아이러니가 가능하단 말이다!) 이사예바의 입장에서는 초혼도 실패(남편과 사별)했는데, 재혼도 이런 식이고, 무엇보다도 삼십대 요절(폣병)이라니, 과연, 그녀는 도..키 소설의 모든 비극적(=청승) 여인의 모델이었을 법하다. (특히, 마르멜라도프의 부인 카체리나.) 

 

 

 

두 번째 여자, 아폴리나리야(폴리나) 수슬로바. <노름꾼>(도박자)가 그녀에 의해 촉발된 소설임을 아예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도...키는 여주인공의 이름마저 '폴리나'로 짓는다. 조르주 상드와 같은 해방된 여성을 자처한, 장신에 미모의 여성, 이라고 하지만, 초상화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해주는 것 같다..-_-;; 그녀와 유럽 여행을 하며 밀고 당기고 옥신각신(수슬로바가 스페인(?) 청년에게 반해버린다) 하느라 녹초가 된 도...키는 말하자면, <노름꾼>을 쓰면서 그녀를 마음 속에서 완전히 떨쳐버린 듯하다. 거의 매일 만나, 바로 이 이야기를  쓰면서(정확히, 불러주면서) 만난 여자, 그녀가 그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여자가 된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트키나(도스토예프스카야). 여러 기록이나 정황을 참조할 때, 그녀가 먼저, 또 더 많이 도..키를 사랑한 것 같다. 이런 유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결혼이 흔히 그렇듯. 아주 미인은 아니지만, 무척 똘똘하고 야무져 보이는 얼굴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연인보다는 아내, 내 아이(들)의 엄마로 더 어울리는 얼굴. 실제로 그녀는 이후 15여년에 걸친 도..키의 인생을 황금 시대로 이끈다. 어쩌면 우리는 반쯤은 그녀 덕분에 이런 소중한 대작을 갖게 되었다.

 

 

 

 

 

 

 

 

 

 

 

 

 

 

한편 도..키는 사십대 중후반에 이르러서야 가정, 안락, 아이 등 지금껏 몰랐던 기쁨을 알게 된다. (샤토프가 돌아온 아내 마리의 출산(그것도 스타브로긴의 아이를 낳는 것인데! ㅠ.ㅠ)에 열광하는 장면을 보라.)  도박벽, 간질병, 신경증 등 모든 것이 여전하지만, 안나는 이 모든 것을 관리, 감독(?!)하는 타고난 '주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도키는 빚더미 아니면 페테르부르크의 길바닥 위에서 죽었을 것이다. 물론, 그녀가 도..키에게 선사한 가장 큰 선물은 이것.   

 

 

태어나서 일년도 살지 못하고 간질발작으로 세상을 떠난 알렉세이는 도..키의 최고작 속에서 말하자면 영생을 얻는다. 

 

 

 

 

 

 

 

 

 

 

 

 

 

 

 

안나는 도...키가 죽은 이후에 작가의 유고 정리와 같은 작업에 평생을 바친다. 그런 그녀조차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질투, 더욱이 이미 죽은 여자에 대한 질투였다. 어쩌면 '대작가' 도..키의 여인으로 남고 싶은 욕심 탓도 있었겠으나, 아무튼 그녀는 삼십대(-사십대 초반)의 도..키가 자신의 아내 마리야 이사예바와 주고받는 연애 편지를 없애거나(몇 줄을 아주 못 알아보도록 몽땅 지우거나) 하는 일 정도는 서슴치 않았다. 물론 이건 사소한 거고. 그녀가 쓴 회고록은 도..키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기도 한데, 번역이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보시길. 그녀의 문장은 무척 정갈하며 단정한데, 어렸을 때 읽은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이런 수필집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과연 인생이란 도박은 그 부침이 얼마나 심한 것이냐. 그리고 짝짓기(!)의 시간 역시 전체 인생을 놓고 보면 얼마나 짧은 것이냐. 도..키의 인생에서 이 부분을 다룬 시리즈(전에 언급했듯 총 8부이다)는 사실상, 톨스토이의 가정 소설(불륜 소설)을 연상시킨다. 어쩌면 소설은 그 이후에, 모든 것이 종료된 시점에 쓰이는 셈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역시나, 황혼녘에야 나래를 편다!) 때문에 그의 대작들이 탄생하는 마지막 부분은 겨우 두 개의 부 밖에 되지 않는 것. 

 

아래 사진은 각각 시리즈물(연속극) <도...키>에서 가져온 것인데, 척 보면  누구인지 보인다. 수슬로바 역을 맡은 배우는 십여년 전에 찍은 <닥터 지바고>에서 라라 역을 맡은 배우. 정말로 예뻤는데, 어느덧 중년의 원숙미를 풍긴다. 다들 연기를 너무 잘 하는데, 수슬로바 역, 안나 역 모두 다 좋다. 수슬로바는 당차고 변덕스러운 젊은 여자의 내면을 잘 표현해준다.(정사 장면이 많다.) 안나는 묘령의 처녀에서부터 삼십대의 관록 쌓인 아줌마-주부 역을 무던히 잘 소화한다. 물론 가장 놀란 건, 미남도 아니고 키도 상당히 작은 예브게니 미로노프의 연기. 그는 십여년 전 <백치>에서 므이시킨 역을 맡아 열연하기도 했다.

 

 

 

 

 

 

 

 

 

아래, <백치>의 미로노프와 <도...키>의 미로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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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몸살로 이틀을 반쯤 죽다 살아났다. 아이의 감기가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나한테로 옮겨온 것. 옛날엔 몸이 회복되면 담배를 다시 피울 수 있음에 제일 감사했는데, 이제는 무엇보다도 아이,이다. 맛있는 것도 해줄 수 있고, 부쩍 늘어난 말에 힘들게나마(목이 너무 잠겨 벙어리 신세다) 대꾸도 해줄 수 있고, 안아줄 수도 있고...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나의 삶의 풍경 중 하나. 이러나저러나, 만으로도 마흔을 코앞에 둔 요즘, 세돌을 조금 넘긴 아이와 함께 하는 지금의 내 인생을 자축한다! 정녕 한 번 지나간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음을, 너는 어쩌면 이리도 절절히 보여주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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