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정간(폐간), 동업자이기도 한 형 미하일의 죽음 및 조카들 부양의 의무, (사실상 별거 중이었으나) 아내 마리아의 죽음과 그녀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부양의 의무, 젊은 '해방된 여성' 폴리나 수슬로바와의 연애 및 퇴짜 등 40대 초중반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은 한마디로 '쉬-잇'이었을 법하다. <죄와 벌>이 발표되기 시작한 시점이지만, 어쩌나, 돈이 한 푼도 없으니.   

 

 

 

 

 

 

 

 

 

 

 

 

 

 

 

 

빚더미. 이 단어가 딱 적합하다. 빚더미에서 해방되기 위해 도..키는 한 편집업자와 소위 '악마'의 계약을 체결한다. 돈 먼저 받는 대신 작품 판권 넘기고 한 달(?) 안에 새 소설을 하나 써주기로 한 것. 현재, 소설은 하나도 쓰이지 않은 상태이다.  (한편으론, 이 사실 자체가 그 당시 그가 이미 엄청나게 높은 주가의 소설가였음을 증명해준다!) 문제의 소설을 쓰기 위해 도..키는 다급하게 속기사 한 명을 고용한다. 그의 집에 들어선 속기사는 이십대 초반의 '초짜' 속기사, 영 시원치 않아 보이지만 어쨌거나 그녀와 함께 도...키가 27일만에 소설 한 편을 완성한다. 바로 이 소설.

 

  

 

 

 

 

 

 

 

 

 

 

 

 

 

소설의 줄거리인즉, 나름 먹물인 젊은 청년 '나'(알렉세이)는 유럽('룰레텐부르크', 함부르크, 파리 등) 체류 중, 마음을 홀딱 빼앗긴 폴리나의 부탁으로 도박판을 드나들기 시작한다. 그녀가 돈을 따달라고 부탁한 것. 실제로 그렇게 엄청난 거금을 따주고 심지어 하룻밤을 보내기에 이르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다음날 아침, 그녀에게 최후 통첩을 받아버린다. (제대로 차인다!)

 

이 스토리와 나란히, 폴리나를 사랑하는 영국인(미스터 에이슬리), 폴리나의 양부인 늙은 장군, 그가 홀딱 반해버린 프랑스 여자(블랑슈 양) 등 사각, 오각, 육각의 연애 라인이 복잡하게 형성된다.  얼키고설킨 연애 놀음(도박!)과 나란히 진짜 도박판에 대한 묘사가 나름 흥미진진하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장군의 75세 이모(숙모)가 나오는 부분. 장군은 이제나저제나, 러시아에서 할머니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전보를 기다리지만, 어느 날 갑자기 전보 대신 할머니가 직접 출현해준신다. 그리고 유럽의 도박판을 돌면서 거금을 몽땅(!) 탕진하고 돌아가신다. 러시아로 돌아가신 다음에는 진짜로 세상에서 영영 돌아가주신다. 덕분에 장군은 유산을 받을 수 있게 되고,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던 블랑슈 양은 결국 이 영감한테 붙기로 결정한다.   

 

다시, '나'의 스토리. 폴리나에게 버림 받는 나는 있는 돈, 없는 돈을 돌고 여기저기 도박판을 전전한다.(감옥신세를 지기도 한다.) 우연찮게(실은 우연이 아닌데) 만난 미스터 에이슬리로부터, 폴리나가 정녕 사랑한 건 바로 너였다, 라는 식의 이야기를 듣는다. 역시 이와는 무관하게, 다시 강원랜드로~

 

단 한 번도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없는데,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이번에는 소설을 둘러싼, 소설 바깥의 얘기가 흥미롭다. 이른바 "도...키의 세(가지) 사랑".

첫 부인 마리야 이사예바의 초상. 개인적으론 도..키의 여자 중 제일 마음에 든다. 도..키의 입장에서 많이 사랑했으나 결혼 생활은 참, 불행했던 경우.(이런 아이러니가 가능하단 말이다!) 이사예바의 입장에서는 초혼도 실패(남편과 사별)했는데, 재혼도 이런 식이고, 무엇보다도 삼십대 요절(폣병)이라니, 과연, 그녀는 도..키 소설의 모든 비극적(=청승) 여인의 모델이었을 법하다. (특히, 마르멜라도프의 부인 카체리나.) 

 

 

 

두 번째 여자, 아폴리나리야(폴리나) 수슬로바. <노름꾼>(도박자)가 그녀에 의해 촉발된 소설임을 아예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도...키는 여주인공의 이름마저 '폴리나'로 짓는다. 조르주 상드와 같은 해방된 여성을 자처한, 장신에 미모의 여성, 이라고 하지만, 초상화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해주는 것 같다..-_-;; 그녀와 유럽 여행을 하며 밀고 당기고 옥신각신(수슬로바가 스페인(?) 청년에게 반해버린다) 하느라 녹초가 된 도...키는 말하자면, <노름꾼>을 쓰면서 그녀를 마음 속에서 완전히 떨쳐버린 듯하다. 거의 매일 만나, 바로 이 이야기를  쓰면서(정확히, 불러주면서) 만난 여자, 그녀가 그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여자가 된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트키나(도스토예프스카야). 여러 기록이나 정황을 참조할 때, 그녀가 먼저, 또 더 많이 도..키를 사랑한 것 같다. 이런 유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결혼이 흔히 그렇듯. 아주 미인은 아니지만, 무척 똘똘하고 야무져 보이는 얼굴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연인보다는 아내, 내 아이(들)의 엄마로 더 어울리는 얼굴. 실제로 그녀는 이후 15여년에 걸친 도..키의 인생을 황금 시대로 이끈다. 어쩌면 우리는 반쯤은 그녀 덕분에 이런 소중한 대작을 갖게 되었다.

 

 

 

 

 

 

 

 

 

 

 

 

 

 

한편 도..키는 사십대 중후반에 이르러서야 가정, 안락, 아이 등 지금껏 몰랐던 기쁨을 알게 된다. (샤토프가 돌아온 아내 마리의 출산(그것도 스타브로긴의 아이를 낳는 것인데! ㅠ.ㅠ)에 열광하는 장면을 보라.)  도박벽, 간질병, 신경증 등 모든 것이 여전하지만, 안나는 이 모든 것을 관리, 감독(?!)하는 타고난 '주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도키는 빚더미 아니면 페테르부르크의 길바닥 위에서 죽었을 것이다. 물론, 그녀가 도..키에게 선사한 가장 큰 선물은 이것.   

 

 

태어나서 일년도 살지 못하고 간질발작으로 세상을 떠난 알렉세이는 도..키의 최고작 속에서 말하자면 영생을 얻는다. 

 

 

 

 

 

 

 

 

 

 

 

 

 

 

 

안나는 도...키가 죽은 이후에 작가의 유고 정리와 같은 작업에 평생을 바친다. 그런 그녀조차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질투, 더욱이 이미 죽은 여자에 대한 질투였다. 어쩌면 '대작가' 도..키의 여인으로 남고 싶은 욕심 탓도 있었겠으나, 아무튼 그녀는 삼십대(-사십대 초반)의 도..키가 자신의 아내 마리야 이사예바와 주고받는 연애 편지를 없애거나(몇 줄을 아주 못 알아보도록 몽땅 지우거나) 하는 일 정도는 서슴치 않았다. 물론 이건 사소한 거고. 그녀가 쓴 회고록은 도..키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기도 한데, 번역이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보시길. 그녀의 문장은 무척 정갈하며 단정한데, 어렸을 때 읽은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이런 수필집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과연 인생이란 도박은 그 부침이 얼마나 심한 것이냐. 그리고 짝짓기(!)의 시간 역시 전체 인생을 놓고 보면 얼마나 짧은 것이냐. 도..키의 인생에서 이 부분을 다룬 시리즈(전에 언급했듯 총 8부이다)는 사실상, 톨스토이의 가정 소설(불륜 소설)을 연상시킨다. 어쩌면 소설은 그 이후에, 모든 것이 종료된 시점에 쓰이는 셈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역시나, 황혼녘에야 나래를 편다!) 때문에 그의 대작들이 탄생하는 마지막 부분은 겨우 두 개의 부 밖에 되지 않는 것. 

 

아래 사진은 각각 시리즈물(연속극) <도...키>에서 가져온 것인데, 척 보면  누구인지 보인다. 수슬로바 역을 맡은 배우는 십여년 전에 찍은 <닥터 지바고>에서 라라 역을 맡은 배우. 정말로 예뻤는데, 어느덧 중년의 원숙미를 풍긴다. 다들 연기를 너무 잘 하는데, 수슬로바 역, 안나 역 모두 다 좋다. 수슬로바는 당차고 변덕스러운 젊은 여자의 내면을 잘 표현해준다.(정사 장면이 많다.) 안나는 묘령의 처녀에서부터 삼십대의 관록 쌓인 아줌마-주부 역을 무던히 잘 소화한다. 물론 가장 놀란 건, 미남도 아니고 키도 상당히 작은 예브게니 미로노프의 연기. 그는 십여년 전 <백치>에서 므이시킨 역을 맡아 열연하기도 했다.

 

 

 

 

 

 

 

 

 

아래, <백치>의 미로노프와 <도...키>의 미로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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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몸살로 이틀을 반쯤 죽다 살아났다. 아이의 감기가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나한테로 옮겨온 것. 옛날엔 몸이 회복되면 담배를 다시 피울 수 있음에 제일 감사했는데, 이제는 무엇보다도 아이,이다. 맛있는 것도 해줄 수 있고, 부쩍 늘어난 말에 힘들게나마(목이 너무 잠겨 벙어리 신세다) 대꾸도 해줄 수 있고, 안아줄 수도 있고...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나의 삶의 풍경 중 하나. 이러나저러나, 만으로도 마흔을 코앞에 둔 요즘, 세돌을 조금 넘긴 아이와 함께 하는 지금의 내 인생을 자축한다! 정녕 한 번 지나간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음을, 너는 어쩌면 이리도 절절히 보여주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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