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정의와 자비를 찬미함: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 <신곡>(1321)

    

 

<신곡(神曲)>의 첫 곡의 첫 세 행이 익숙하다.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 어두운 숲에 처했었네.”(1, 7) 서른다섯 살(당시 인간의 이상적인 수명은 70세였다고 한다)의 단테 앞에 표범(음욕), 사자(오만), 늑대(탐욕)가 나타난다. 이 짐승들을 물리치며 등장한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그는 저승 순례에 나선다. 지옥의 문에 새겨진 도발적인 글귀 역시 익숙하다.

 

나를 거쳐서 길은 황량의 도시로 / 나를 거쳐서 길은 영원한 슬픔으로 / 나를 거쳐서 길은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 // () 나 이전에 창조된 것은 영원한 것뿐이니, / 나도 영원히 남으리라. /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1, 26)

 

지옥은 총 아홉 개의 감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소위 림보(Limbo)는 마땅히 지은 죄는 없으나 기독교 신앙을 갖지 못한 자를 위한 곳이다. 이들의 벌은, 말하자면, 구원의 희망이 없다는 절망이다. 그리스도 탄생 이전, 즉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시인과 현인들(“시인들의 왕호메로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히포크라테스, 세네카 등)이 갇혀 있다. 2원에는 시동생과 형수지간인 파울로와 프란체스카처럼 애욕의 죄를 범한 자들이 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죄는 더 무거워지면서 세분화되고 또 가벼운 죄는 주로 자연현상에 의해, 무거운 죄는 악마에 의해 기술적으로 응징된다. 흥미로운 것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즉 동해보복(同害報復)의 원칙에 따른 죄와 벌의 상응관계, 심지어 인과관계이다. 예수 책형을 주도한 유대인의 대사제 가야바는 땅바닥에 붙은 세 개의 말뚝에 못 박히는 독특한 책형을 당한다. “불화와 분열을 조장한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턱부터 방귀 뀌는 곳까지 찢어졌고 두 다리 사이로 내장이 드러나 있다. 제일 밑바닥인 제9원에서는 배반의 죄를 범한 자들(유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이 악마의 수장 루키페르(루시퍼)의 입에 물린 채 참혹한 고문을 당한다.

 

 

 

 

 

 

 

 

 

 

 

 

 

 

 

 

이렇듯 지옥편에서 가장 부각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절대성이다. 죄의 유무에 앞서 신앙의 유무를 문제 삼는 림보의 존재가 단적인 예이다. 벌 받는 죄인들을 향한 연민을 참다못해 울음을 터뜨리는 단테를 베르길리우스는 멍청하다며 꾸짖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죽어야 좋을 연민을 살리고 있으니! / 하느님의 심판에 인정을 느끼는 것보다 더 큰 죄가 무엇이겠느냐!”(1, 194) 나중에는 단테도 복수를 위하여각종 벌을 주시는 하느님의 전능을 찬양하기에 이른다. 요컨대 󰡔신곡󰡕은 그 무엇에 앞서 유일신을 찬양하는 중세 기독교 문학의 백미이다. 지옥편과 그것을 잇는 연옥편, 천국편은 공히 삼위일체의 이념을 구현한다. 각 편은 33곡으로, 각 곡의 한 연은 3행으로 되어 있고 여기에 전체의 서문격인 1편이 더해져 총 100곡의 시가 완성되는 것이다.

 

지옥편의 서사적 긴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연옥편역시 흥미롭다. 연옥은 지옥과 반대로 무거운 죄(밑바닥)에서 가벼운 죄(산허리)를 거쳐 위로 올라가는 모양새이고 각각의 고비는 저 유명한 칠거지악(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음욕)을 형상화한다. 연옥도 죗값을 치르는 공간이지만 정죄의 성격을 지닌 유한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무한의 지옥과 구별된다. 시간의 존재, 즉 성장과 희망의 가능성이 전제된다는 점에서 역시나 무한의 공간인 천국과도 다르다. 지옥과 천국의 엄정한 이분법 사이에 상정된 일종의 중간계를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이성과 기술의 힘으로 여기까지 단테를 데려온 베르길리우스는 연옥의 끝에서 그를 베아트리체에게 넘겨준다. 한데 오직 신앙(영성)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천국 역시 지상의 세계처럼 엄격한 위계질서(열 등급의 하늘과 천사)를 갖추고 있다. 어떻든 이 천국편은 하늘과 땅이 서로 손잡는 이 거룩한 책의 절정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 33, 정화천(엠피레오)에 다다른 단테는 이런 감탄을 내지른다.

 

그때부터 나의 봄[]은 말함이 보여 주는 것보다 / 더 컸다. 말함은 그런 시각 앞에서는 실패한다. / 기억은 그러한 한없음 앞에서 굴복한다. // () 비록 나의 눈은 흐릿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내 눈으로 본 / 그 달콤함은 가슴속에 아직도 방울진다. //() 아 인간의 지성이 다다르지 못할 / 지고의 빛이시여!”(3, 289)

 

궁극의 밝음에 이르러 끝나는 이 기나긴 곡에 작가는 희극”(Comedia)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행복에서 시작하여 불행으로 끝나는 비극과는 달리 불행에서 행복으로 간다는 점을 지적했다. 신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사의 모든 희로애락이 희극이라는 함의도 없지 않겠다. 이는 또한 단테가 림보에 안치한 거장들, 가령 호메로스나 베르길리우스의 근엄한 서사시-비극(<일리아스>, <아이네이스>)에 비할 때 자신의 서사시는 한낱 희극에 불과하다는 겸사이기도 하겠다. 실제로 탐관오리를 응징하는 부분(악마가 방귀를 낀다)처럼 문자 그대로 웃긴 장면도 적지 않다. 대체로 중세 문학의 단골 소재였던 저승 여행을 다룸에 있어 단테는 인간의 본래 속성과 현세의 체제를 보존한다. 내세가 현세의 연장임을 문학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정녕 미메시스의 최고봉(아우어바흐, <단테>)이다. 이러한 희극신성한”(divina)이라는 말을 붙인 자는 <데카메론>의 저자로서 단테의 전기를 쓴 보카치오이다. 경위야 어떻든 후대의 독자들은 단테 알리기에리의 희극보다 신곡을 선호해왔다. 그렇다면 더더욱, <신곡>이 당시 고급 문학(종교 문학)의 언어이자 유럽 공통어였던 라틴어가 아니라 여자도읽을 수 있는 피렌체 속어, 즉 현지어(지역어)로 쓰였다는 사실을 강조해야겠다. 신의 준엄한 정의와 무한한 자비의 세계로 입문함에 있어 그 문턱을 최대한 낮추어야 한다는 생각은 혁명적일뿐더러 갸륵하기 그지없다. 과연 시성(詩聖)답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난 단테의 일생에서 통상 두 가지 사건을 꼽는다. 첫째, <신곡>에서 신의 섭리의 현현이자 천상의 연인으로 신비화된 베아트리체와의 만남이다. 단테가 아홉 살 때 처음 만나 반해버린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을 뿐더러 스물네 살에 요절하고 만다. “그녀에 관해 여태껏 어느 여인에 관해서도 써진 적이 없는 바를 쓰는 것이 나의 희망이다. 그런 후에 은총의 주인이신 주님의 선하심으로() 그 복된 베아트리체를 바라볼 수 있기를 기원한다.”(<새로운 인생>) 둘째, 경건한 시인임과 동시에 정의를 추구한 정치가로서 단테가 겪은 수모이다. 종교 권력(겔프당-교황파)과 세속 권력(기벨린당-황제파)이 대립하는 가운데 정쟁의 희생양이 된 단테는 1302년 사형선고를 받고 사실상 피렌체에서 영구 추방된다. “인생길의 반 고비부터 이탈리아 전역을 떠돌게 된 유배자의 정황과 <신곡> 속 순례자의 정황이 물론 유비를 이룬다.

 

 

 

 

 

 

 

 

 

 

 

 

 

 

 

 

 

<신곡>의 단테는 지옥은 저녁에, 연옥은 새벽에, 천국은 정오에 오른다. 우리의 인생은 지금 어느 지점에 와 있는가? 이십여 전 관악산의 기숙사에서 처음 읽은 <신곡>은 지금도 여전히 공부의 대상이지만 그때는 실패한 천국진입에 성공한 감회가 새롭다.

 

- <책앤>(2월호?)

 

 

- 날씨가 무척 좋고, 오후의 커피숍이 조용하다. 

단편소설 하나 마감하여 보내고 강의 준비도 하고 오랜만에(!) 번역도 재개했다. 집에 가면 청소, 설거지, 요리, 뭐 이런 거 해야 하니까 좀 꾸물댄다. 정말  산 것 같지도 않은데(체호프의 <벛꽃 동산>의 피르스 말대로) 마흔도 넘겼으니 약 오른다. (암과 치매 없는 노년을 꿈꾼다, 정녕!) 소위 '반고비길'에 들어온 기념으로, 오랫동안 미루어 두었던 <신곡>에 (재)도전했다. 명불허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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