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는 혐오감
이어지는 글 6
논제 하나.
나그네가 숫구렁이를 죽인 행동은 지지될 수 있는가?
나의 의견은 '그렇다'이다.
나그네는 아직 날지 못 하는 아기까치를 구하기 위해 숫구렁이를 죽였다.
동물세계 속 먹이사슬의 구조에 대해 선악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다.
하지만 설화의 세계에서 대개 동물은 의인화된다.
즉 까치 대 구렁이가 아니라 '어린 존재' 대 '힘있는 존재'의 갈등이 더 큰 것이고
두 아이의 어미인 나로선 누구나 '어린 것'을 보호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 아이가 크기 위해서는 마을 하나가 필요한 것이고,
나그네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옳은 일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논제 둘.
숫구렁이의 죽음은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는가.
나그네는 아기까치를 구하는 과정에서 구렁이를 과실치사에 이르게 했으므로,
처벌을 받아야 하되 동기에 대한 정상참작이 반영된 판결을 받아야 한다.
구체적인 양형기준은 모르겠지만 5년 이하의 징역과 집행유예 정도가 아닐까.
논제 셋.
암구렁이의 판결은 적합했는가.
언뜻 보기에 암구렁이는 지나치게 가혹한 탈리오의 법칙을
나그네에게 적용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상원사 종소리라는 제한조건을 스스로 나그네에게 부여해준다.
이는 그녀가 나그네에게 정상참작의 기회를 준 것이라 볼 수 있으며,
객관성과 공정성을 잃은 분노의 화신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하기에 설화라는 대전제 하에 나는 그녀의 판결을 지지한다.
논제 넷.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 숫구렁이가 설화 속 악의 축을 담당하는가.
이에 관해 이미 신지님 페이퍼에 댓글을 단 바 있다.
어디어디서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체로 여성신화학자의 분석에 따르면
원시시대의 인간은 자기가 상대하기 벅찬 존재를 '신'으로 추앙했는데,
원시의 신들은 대부분 자웅동체이거나 여성성을 띄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의 이용과 도구의 발전으로 강해진 인간은
능히 상대하게 된 존재는 악신으로 폄하하고,
여전히 상대하기 벅찬 존재에는 좀 더 강한 신성을 부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신은 가부장제의 발전과 결탁해
유일신이자 남신으로 변모되었고,
버림받은 신의 대표 악의 축이 바로 뱀이라는 것이다.
뱀 입장에선 얼마나 억울한 일일까.
하여 난 앞의 논제 세 가지에도 불구하고 심정적으로는 구렁이편이다.
게다가 치악산 설화를 보면 숫구렁이는 비록 악역을 맡았지만
암구렁이는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음에도 결과에 승복하는 근사함을 보여준다.
에, 또....
원래는 뱀에 대한 혐오가 뱀의 외양 때문인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을 쓰고 싶었는데,
네번째와 중복되는 거 같아 결국 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