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적 - 식민주의하의 자아 상실과 회복, 개정번역판
아시스 난디 지음, 이옥순.이정진 옮김 / 창비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 책을 읽을까, 벌렁 누워잘까 고민하다가 밀린 독후감을 쓰기로 결단했다. 이번에도 잘 쓸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의 물음표를 내일의 느낌표로 바꿔두기 위해서 짧게라도 (과연?) 적어둔다.


이 책을 두 번째로 읽었으나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책에 나오는 인도의 문화적 특성은 내 경험치를 벗어나는 너무도 불가해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간디가 이렇게 심오한지 몰랐다. 키플링보다 오로빈도가 더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만큼 내가 서구화되었다는 것일 테지. 뱅킴찬드라 차터르지의 양가적 애씀에서는 단재 신채호가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처음 읽을 때는 내 안의 식민주의적 심성에 꽂혀있었다. (약간의 통증은 덤) 이번에는 스피박을 함께 읽고 있어서… 식민통치가 약속하는 세속적 위계질서의 재배치와 신자유주의(각자도생)가 여성에게 약속한 능력주의가(99.9%의 결론은 대출금 or 번아웃) 비슷하다는 심증을 확보했다. 물증은 없다. 심증만 있다(ㅋㅋㅋㅋ).



책의 주장을 요약한 부분을 요약하겠다.

“(236) 식민주의는 그 무엇보다도 심리-정치적인 현상으로서, 문명의 가치지향을 규정하는 범주들 간의 재배열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서구(영국)의 그것은 특별히 ‘젠더화’되어 있었다. “식민통치를 정당화는 문명 간의 위계 확립의 과정”에서 이상적인 성격 유형은 “합리적이고 성숙한 남성성”으로 묘사할 수 있는 서구 근대의 자기상이다. 지배자들도 나름의 대가를 치렀다. (그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231) 남성성을 훼손하는 여성성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과 경직된 성별 위계, 오로지 성년의 준비로만 아동기를 규정하는 것, 진보와 생산성을 절대화 하는 세속적인 관념으로 인한 살아있는 우주의 속화 desacralization, 급진적인 다양성과 미래에 대한 다원적 비전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협소하고 경직된 자아. 그러나 이 책은 한 문화를 다른 문화의 반대항으로 여기지 않는다. 식민지 사회는 식민지를 운영하는 사회의 반(反)자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정치경제학적인 관점이 아닌 심리적 관점으로만 식민주의를 읽어내는 부분도 독특하지만, 책의 백미는 서구가 서구화시킬 수 없었던 인도인들의 세계관(?)이다. 어지간한 SF 판타지보다 더 급진적이기 때문에 내 깜냥에 설명은 불가능하다….

내 생각에 책의 탁월한 지점은. 식민주의의 심리구조를 다루고 정신 분석 이론에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저자가 프로이트를 상대화해버린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푸코를 떠올리는 그대는 공쟝쟝의 친구! 땡큐~) 나는 절반은 벙쪘고, 절반은 동의할 수 없었다. 이 역시 내가 (동양 여자 주제에) 서구화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인도-영국에 비하면 한국과 일본의 식민주의(심리)는… 아, 여기서 일본은 조선을 식민화한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라… 뭐랄까… 책의 말대로 “(28) 심리적 부패가 더 진전된 단계의 희생자”처럼 여겨진다. 근대화 코인에 뒤늦게 탑승한 나머지 제때에 발 못 빼서 미쳐 돌아가셔버린? ㅋㅋㅋㅋ

2024년, 서구 관점에서 극동에 위치한 두 국가는 완전히 서구화(식민화)가 끝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상황이 특별히 안됐다고도 생각은 들지 않지만 썩 자랑스럽지도 않다. 그건 세계 최고 자살율과 최저 출생률이 실증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함. 지난 100년간 지나치게 도입(해?)되어버린 서구화는 한반도에 살고 있는 인류에게 무엇을 저질렀나. 계속 탐구해 보자.

“(41) 정신 상태로서의 식민주의는 외부의 힘에 의해 촉발되지만 식민지 내부의 과정이며, 그 근원은 지배와 피지배자의 정신 깊숙한 곳에 자리한다. 아마도 인간의 정신에서 비롯한 것은 역시 인간의 정신 안에서만 종식될 수 있을 것이다. (42) 궁극적 폭력이란 바로 식민주의가 식민지인들이 끊임없이 지배자들이 설정한 심리적 한계 내에서 그들과 투쟁하게끔 유혹하는 문화를 창안해냈다는 것이다.”

우리는/나는 왜 벗어나지 못하는가. 스스로는 스스로를 볼 수 없다. 타자에 비춘 상만 볼 수 있는 거라면. 거울을 깨버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꼭 자신을 ‘보아야만’ 하는 것일까.


어쨌든 나는 이 책이 참 좋았다. 책을 덮는데. “왤케 썽이 나있냐”던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핀잔이 떠올랐다. 나는 그에 비하면 사투리도 쓰지 않고 이제 완전히 도시의 여성이 되어버린 듯도 한데.... 그런데 그런 내 모습이 썩 맘에 들지 않았다. 과거의 나는 단순하고 털털하고 천진했고 발 닦고 잠만 잘 잤었는데. 또 다 그렇지만도 아니었지만서도. 아 모르겠다. 인도의 브라만 사제들에게서 배우기로 했다. 나는 “위선적이고 비겁하며 교활하게 타협해서 살아남”아 보는 것으로. 꼿꼿하지 않겠어. 물렁해지겠어. 킁킁.



나를 재단하는 평가의 말들, 부족하다고 아직 온전하지 못하다고 광고하는 미디어, 무언가를 위계로 나누고, 거기에 속하지 않는 나 자신에게 끈질긴 열등감을 느끼고... 그 비교하는 마음조차도 내면화된 지배의 일종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참 많은 책이 필요했다. 아직도 더 필요하고.

나 스스로를 변화시킬 각오 없이 타자를 쉽게 재단하는 사고방식을 경계하고 싶다. 타자들에게 착하게 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의 평안을 위해서. 나는 그들을 알 수 없다. 마치 이 책 속의 인도인들처럼.

끝으로 이 책을 추천해 주신 정희진 선생님의 문장을 한 스푼 첨가하며 리뷰를 마치겠다.


“(303) 세상은 나를 버리는 과정에서만 해방되는 어려운 곳이다.

인간은, 우리는 아무것도 nothing 아니다. 자아는 갑옷이다.

- 정희진, <밀양> 각본집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4-07-04 09: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식민주의를 읽을 때 솟아나는 억울함을 어떻게든 ‘처리‘해야할 필요를 느낍니다.
피해자의 위치에 있겠다는 게 아니라(제가 그러지 않다는 걸 쟝쟝님은 이해하고 있겠죠? ㅎㅎ) 날벼락과 같은 피해자라는 함정의 책임 일부가 피해자에게 있다는 그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고요. 이건 임지현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와도 연결되기는 하는데, 오늘은 바쁜 날이 예상되기에 더 이상 생각할 여력이 없네요.

오늘도 화이팅! 전 유시민 책을 읽고 있습니다. 메렁!

공쟝쟝 2024-07-04 10:36   좋아요 2 | URL
그 마음 내 마음처럼 이해합니다. 가만히 있는데 왜 죽이냐고요.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그러나 규명이 되고 처벌이 되어도 피해는 이미 끝났으므로. (물론 희진샘 말에 의거하면 피해자체가 경합하고 투쟁해야하는 위치가 되어버리는게 지금이지만 ㅠㅠㅠ 피해 호소인ㅠㅠㅠㅠ) 다른 이야기를 하자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고요, 임지현식의 이야기라면 안 읽어봐서 모르지만 ㅋㅋㅋㅋㅋ 저는 지금의 저는 국가와 민족보다 기업이 더 나를 많이 부른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나를 부르면 나는 돌아본다 ㅋㅋㅋㅋ call me by your name~~ (zzzz) 나를 부르지마라 마켓컬리 쿠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