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는 게 이기는 거야, 참고 살아야지. 여기 말고 어딜 가겠어. 너 땜에 산다.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물론 할머니는 대체로 내게는 천사셨다) 관절 마디마디가 부어오르는 병에 걸리도록 같이 사는 시어머니의 구박을 견뎠는데 엄마가 우리에게 했던 아주 많은 조언의 말이 본인 스스로에게 하는 주문이었다는 걸 이젠 안다. 그 말은 딸들에게 겸손의 미덕, 자기 한계 짓기, 엄마 때문에 살아야 할 것 같은 저주로 작용해서. 우리들은 어른이 되어서까지 낮은 자존감과 알 수 없는 분노에 허덕였다.
페미니즘이 필요했다. 엄마를 죽도록 미워하고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 처음엔 엄마의 노동(돌봄)은 안 보였고 나를 억압한 말들이 작용하는 지점들이 보였다. 엄마라는 제도에 묶인 엄마의 말들. 그러니까 언어. 그 자신을 살리기 위해 타이르는 말이 자신을 죽이는 말이 되기도 하며 누군가를 살리는 동시에 죽이기도 한다.
일기 너무 쓰면 자의식이 오만해져서 (주체가 되어버려서) 안되니까 기록 남기지 말고 그냥 물 흐르듯이 사는 것도 방법이라고 서양 철학의 한계 어쩌고 글로 먹고사는 인문학을 한다는 남자들이 실은 자기 삶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한테 하던 말. 들은 삶에 언어가 부족해서 지식인(가끔은 스님…)의 고견을 들으러 온 여자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쳤을까. 여성으로 호명하기도 전에 미리 엄마로 호명하고, 부르는 자신의 위치는 탐색하지 않는 채로 들어주는 대상을 넘겨짚음이 역력한(그때는 몰랐다) 마이크의 말들. 나는 또 불리는 대로 불렸고 유명인의 말을 유명해서 탐욕스럽게 섭취했다. 그 남자들은 나에게 공부를 독려하지 않았다. 그건 지들에게도 힘든 거니까. 아니, 엄마가 될 사람은 엄마를 공부해야지. 오은영 선생님께로 떠밀려진 것 같기도. 여튼 내가 쓰지 않아도 될 까닭은 너무 많았고 넘쳤다. 페미니즘을 만나기 전까지는.
서른 이후의 일기 쓰기. 아니 페미니즘.
가끔, 글을 쓰는 까닭을 거창하게도 살기 위해서라고 썼던 것은. 가부장제라는 판타지, 아버지라는 보호막이 찢어져 버린 imf 이후를… 시어머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엄마의 말들만으로 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다른 말들이. 다른 대타자의 말들이 필요했다. 평범한 한국 여성에게 쏟아지는 아주 많은 무거운 중력을 지닌 말들은 돌처럼 날아와서 나를 퍽퍽치고 휘청이게 하였다. 보호하기 위해서는 다른 말로 일기를 써야 했다. 그 인문학자의 말처럼 주체가 되기 위해서 자의식을 갖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칫하면, 내가 나를 돌보는 말이 없으면. 타인의 말들에 자기를 검열하다가 뼈를 말리면서도 베이글녀가 돼야 하고. 너무 똑똑하면 안 되지만 개념은 장착해야 했던 20대를 지나.
남부럽지 않은데 취직은 하되 특정 나이 대부터는 일하지 않기를 독려 받으며… 혹… 안정적 직장이라면 워킹맘이라는 이중 노동을 감당하면서도 자책하고, 전업주부라는 사실로는 기생충 취급을 받고, 노처녀라서 히스테리인가 봐. 시집가 시집이나 가. 좋은 남자 만나야지. 사랑 못 받는 여자들은. 그런 너를 누가 사랑해 주니. 여자는 여자는 여자는…. 그것도 아니면 돈 성공 돈 성공.
<서른 이후의 일기장들. 많이도 썼다.>
나를 말에 맞게 더 바꿨다간 흉측한 히드라가 될 것 같아서. 공부. 모든 말들을 어쩌면 30년 치를 한꺼번에 급속하게 찢어내는 과정에서 내 삶은 유달리 심각해졌고 결과적으로는 남들이 뭐라든 무서울 게 별로 없다. 120살까지 80년. 이제는 공처럼 날아오는 말들을 라켓으로 팡팡 튕겨내면서. 그렇게 살면 되는 거라. 다만 억압이 여성 하나만은 아닌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성별은 정말 거대하고도 기본적인 억압이다. 여남 모두에게.) 겹겹이 싸인 다른 담론들.
나는 나를 잘 보호하고, 나의 곁을 이루는 나와 손잡은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듣고. 분석하고 사유하고 적합한 저항의 말을 함께 찾아보고 싶다는 나름의 욕망이 생기게 되었다.
저 말들에 포획되지 않기 위해 셀프 자아 규정을 해야겠다 / 주체가 되어야 합니까? 해체되기 위해서? / 주체가 되고자 하는 나는 본질주의자인가? / 정체성의 정치는 불가능 한가?
라고 좌충우돌 물었던 질문들을 지나.
1월에는 책으로 라캉과 바디우를 만났고. 사건으로서의 주체에 대해 힌트를 얻고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일기를 쓰지 말라는 인문학자들의 말은 (부분적으로) 맞다. 모두를 끊임없이 소비자로 호명하는 자아 중독의 시절, 근대적 의미의 주체는 인류세의 원흉이며 해체되어야 한다. 그래도 나는 감히 쓰고 싶다. 재현의 윤리, 잘 모르지만 그것도 탐사해가면서 읽고 쓰면서 내게 맞는 말들을 찾는 재미, 쾌락. 내 공부. 인생은 생각보다 더 길고. 이 재미를 멈출 수는 없으니. 찬찬히 더듬더듬 읽는 나는 진지하고 쓰는 나는 좀 허심해지자고 같이 읽고 쓰고자 하는 친구들과 말했다.
지금의 최선. 나의 적정선.
2024.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