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지고 싶다. 세상에서 쉽게 소구하는 강인함과는 다른 의미로.
비감상적이고 분석적이고 냉소적인 건 타고난 성향이라면, 따뜻하고 동정적인 것에 어쩌지 못해함은 배운 것이고 습득된 것이며 양육된 방식이고 놓지 못하는 것이다. 이분법은 아니다. 이것들은 따로 떼어져 나눌 수 없이 섞여있는 채로 나를 구성하고 있고, 이 두가지 모두를 다 포기하고 가장 딱딱한 상태로 스스로를 구축했을 때 (내가 가장 견고하다 믿었지만 동시에 견고하지 못함을 가장 감추고 싶어했을 때) 역으로 나는 가장 취약했었다.


터프한 그녀들을 따라 읽을 것이다. 감응, 공감, 정서적 반응과 지지를 멈추겠다는 것이 아니다. 고통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이것은 당연한 반응 아닐까) 그 것에 공감했다는 사실만으로 슬며시 안도해버리고(합리화 섞인 환상일지도) 그것만으로 할 일을 다 한 것인 듯 사유를 멈추어버리지는 않겠다는의미다. (어쩌면 사유란 기실 노동이고 나를 볶아채는 것일지 모르는 습벽일테지만) 

감상적이지 않으면서도 결코 비정하지 않았던 그녀들을 배우고 싶고 따라서 살고 싶다.



이 여성 작가들은 직접적이고 선명한 시각으로 위로도 보상도 없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는 과업을 자발적으로 떠맡았기 때문에 터프하다. 이들 모두가 "감상적이지 않다"는 비평을 받은 적이 있다. (중략) 이렇게 감정적 스타일이 젠더화된다면, 결과적으로 감상주의를 배제하겠다는 선택을 하고 끝까지 사유를 밀어붙이고 한계를 시험하고 구체적 목적을 위해 이런 선택을 한 것이라 설명되는 이 여성 작가들은 예외적으로 비범하게 생각이 깊었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정도가 부적절하거나 진지하지 못한 감정적 표현과는 거리가 먼 비감상성은 이들 작가/예술가들이 평생에 걸쳐 추구한 기획으로, 엄청난 자의식으로만 추진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 사상 모두에서 그의 성정이나 삶의 경험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자전적 요소는 출발점에 불과하다. 그들이 무엇을 썼는지, 어떻게 썼는지, 어떻게 그들의 실천을 상상하고 방어하고 옹호했는지가 비감상성과 그 윤리학을 활용가능하게 만든다. - P15

감정의 전시를 아예 배제하거나 최소화하면서도 수난에 대해 진지하고 참여적이며 고통스럽게 다가가는 태도다. 포화와 부정 사이에 자리한 이 협소한 영역에서 글을 쓰는 이들은 시대와 어긋난 것처럼 보인다. 고통을 성역화하지도 않고 고통에 무관심하지도 않았던 한편, 비정과 냉정으로 오해받은 대안적 전통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실제로 이 대안적 전통은 전혀 다른 자질이며, 나는 그 자질을 터프함이라 부르고 싶다. 이 여성 작가들은 탐구의 대상으로 고통에 이끌렸지만, 고통의 매혹을 끝까지 매우 미심쩍어했다. 이들의 ‘터프함’은 무관심이나 냉담과 혼동하기 쉽지만 그러면 이들의 프로젝트를 곡해하게 된다. 이 작가들은 고통으로부터 위안을 찾은 게 아니라 소위 "현실"에 대한 고양된 감수성을 추구했다. 도착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나, 친근함, 공감과 유대감에서 고통의 위안을 찾는 것은 ‘마취 효과’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고통의 인내, 심지어 고통이 ‘평범’하다고 주장한 것 역시 이 작가들이 지닌 기벽의 일부이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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