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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피델리티
닉 혼비 지음, 오득주 옮김 / 문학사상사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연애 이야기, 이별 이야기는 흔하다. 내 연애 이야기와 내 이별 이야기는 겪는 나에게는 특별할 수 있겠지만 그게 이야기가 되는 순간 흔한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까 그 흔한 걸 안 흔한 이야기처럼 쓰는 것은 필력. 그 흔한 걸 재미있게 연출해서 내가 특별해지던 사적인 경험들을 떠올려지게 만든다면(세상 모든 찌질 남들의 영화라고 불리는 <500일의 썸머>처럼) 그게 바로 연출력, 입담. 이야기 꾼. 재담 꾼 그런거 아니겠나. 올해에 만난 두번 째 대머리(첫 대머리는 푸코) 닉 혼비는 이 소설로 인해 내게 그런 작가가 된 듯 하다.
20대 때 나의 영화 메이트인 동생과 여러번 심심할 때 마다 보면서 큭큭댔던 한국 로맨스물이 있는 데 이시영, 오정세 주연의 <남자 사용 설명서>다. 이 영화 혹시 아는 사람 있나요? 이거 진짜 약빨고 만든 미친 영환데… 지금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아마 지금봐도 재밌을 것 같긴 함) 오정세가 진짜 드럽게 찌질하게 나온다. 지금이야, 오정세가 연기의 신이되어 모르는 이가 없지만 그때는 그다지 알려진 배우가 아니었다. 뭐랄까… 하지만 그 영화를 보고 난 배우 오정세를 좋아(?)하게 되었는 데(배우로서 좋다는 거지 그 역할이 좋다는 건 아니다)… 하.
글로 쓸까 하다가... 짤로 대신한다.
그리고… 잠자냥 추천의 <하이피델리티>에서 나는 이승재(오정세 분)의 원본(?)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올해의 OOO페이퍼를 맞이하여, 올해의 찌질남도 뽑아보는 추세인듯 한데
다 덤벼라. 나에겐 롭이 있다.
자. 별로 중요한 부분은 아니니까 그냥 소설 287페이지를 긁어와 보자.
p.287
"상관없어. 그냥 알고 싶어."
"뭘 알고 싶은데?"
"그게 어땠는지."
로라가 벌컥 성을 냈다. "그 섹스는 섹스 같았어. 그게 달리 뭐같았을 거라 생각해?"
이런 대답조차도 나에겐 상처가 됐다. 난 그게 전혀 섹스 같지도않았길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것이 훨씬 더 지루하고 불쾌한어떤 것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게 좋은 섹스 같았어, 아니면 나쁜 섹스 같았어?"
"뭐가 다른데?"
"그 차이를 알 텐데."
"난 네가 딴 여자랑 잤을 때 어땠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았잖아."
"아니, 물었어. 난 기억한다고. '그래서 즐거웠나 보지?' 했잖아."
"그건 진짜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잖아! 있지, 우린 이제 잘 지내 좀 전에도 아주 좋았고, 여기까지만 하자."
"좋아, 좋아. 우린 좀 전에 아주 좋았는데…… 몇 주 전에 다른남자랑 잘 때보다 더 좋았어, 아니면 딱 그만큼만 좋았어, 아니면덜 좋았어?"
로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발, 로라. 그냥 아무 말이라도 좀 해봐. 거짓말을 해도 좋아. 그걸 들으면 내 기분이 한결 나아질거야. 너한테 더 이상 질문도 하지 않을 거고."
지난한 주인공 롭의 잤냐잤어잤냐잤어어땠냐어땠어가 지쳐갈 무렵 우리의 여주인공 로라는 말해준다. 니께 더 작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읽은 지 좀 되서 기억은 잘 안나지만, 아마 롭은 니께 더 작다고 하는 순간 그 질문을 그만 뒀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대답을 289페이지에서 했다는게 문제 ㅋㅋ (이 소설은 1인칭 시점이다. 말 다했지?)
그러나 이 진부하고 찌질한 이야기를 눈 흘기면서 읽더라도 끝까지 읽을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 작가 닉혼비의 장점이라면 장점인 것 이다. 닉혼비의 다른 책 <어바웃 어 보이>에서는 결혼 이야기나 질척임이 필요없는(?) 안전한 연애를 하기위해 싱글맘 들이랑만 사귀는 한량 윌이 등장한다. 롭 역시 도통 발을 뺄 수 없는 일에 연루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윌과 비슷하다. 무엇도 책임질 생각이 없는 심드렁한 이 치들은 삼십대 중반이 넘었지만 비혼이고, 자신이 루저인 걸 알지만 개선할 의지가 별로 없다. 윌은 아빠의 인세로 먹고 살고 롭은 잘나가는 변호사 여친한테 빈대 붙어서 산다. 근데 참 뭐랄까… 이 인간들… 둘다 찌질하긴 한데, 뭐랄까 내면에 뒤틀림이 없다. 찌질하다는 데에 있어 아주 번듯하다ㅋㅋㅋㅋㅋ. 번듯한 찌질함이라고나. 참, 내, 이거.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해. 설명하지 말자.
여자 주인공 로라는 롭 보다 한 다섯 수 정도 더 보고 있는 것 같고, 아주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찌질함을 탑재한 롭을 다 내려다 보면서 한심스러워 하면서도 귀여워하는 듯 했다. 음. 그게 귀여우면 안되는 데. 이미 성공한 변호사 궤도에 오른 자신의 성취가 있는 그녀는 그만 눈이 발바닥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오, 불쌍한 로라.
책은 시종일관 팝뮤직 애호가인 롭의 미춰버린 입담으로 끝없이 씌여있기 때문에 계속 큭큭 거리면서 읽게 된다.
내 경우 아, 이 청순하게 찌질한 새끼.. 이러면서, <남자 사용 설명서>의 승재를 보는 것 처럼 보고 읽었다.
여자친구에게 차이고 주말에 부모님 본가에 갔다가 꼼짝없이 가족과 함께 영화를 보러가게 된 롭. 싱글. 36살.
p.156
“픽앤믹스에서 사탕을 종류별로 다 쓸어 담는 이본과 브라이언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난 무시무시하고 소름 끼치고 뼈가 덜덜 떨리는 경험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남자가 내게도 자기도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보낸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남자’는 뻐드렁니에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고, 더러운 황갈색 겨울 점퍼와 무릎 부분이 닳아 반질반질해진 코듀로이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그 또한 이십 대 후반임에도 부모 손에 이끌려 <하워즈 엔드>를 보러 왔다. 그는 내게서 동병상련을 느꼈기에 그 가공할 엷은 미소를 보냈던 것이다. 난 그게 너무 심란해 에마 톰슨에게도 바네사 레드 그레이브에게도, 그 밖의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을 땐 이야기를 따라 잡기 어려울 만큼 영화가 흘러가버렸다. 어쨌든 끝에 가서는 누군가의 머리 위로 책꽂이가 쓰러졌다.
‘세비남’의 미소가 ‘내 인생의 밑바닥 순간 톱5’에 들었다는 것까지만 말하겠다. 나머지 네 가지는 잠시 머릿속에서 달아났다. 내가 그 ‘세비남’만큼 비참하지 않다는 건 안다. 요점은, 그와 나의 차이점을 그는 대번에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고, 난 안다는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또 나만 웃긴건가) 이렇게 웃기게 쓰는 데, 아무리 화자가 별로라도 끝까지 안 읽을 수가 없지 않나? 그리고 … 아니, 이렇게 쓰다니 아니?! 이런 부분들도 진짜 많았다. 내가 소설의 문외한이라서 그럴 수도 있는 데,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쓴 소설을 본적이 없어가지고요. 예시 하나.
p. 297
난 우리가 예전처럼 서로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며 우리 사이에 틈이 생겼고 하는 등등의 얘기를 다른 식으로 말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우린 예전처럼 서로 같은 사람들이 아니에요. 우리 사이에 틈이 생겼어요.’”
“왜 그렇게 바보 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거야?”
“따옴표를 붙였다는 뜻이야. 새롭게 이야기하는 법을 찾는 중이라고. 네가 아기를 갖든가 헤어지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을 돌려서 할 방법을 찾는 것 처럼 말이야.”
“내가 언제 그랬어?”
“농담이야.”
ㅋㅋㅋㅋ 이것도 나만 웃겨? ㅋㅋㅋㅋ
기억 나는 에피소드. 롭의 본업은 ‘열혈 음반 수집광’들을 위한 음반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인데 (돈을 당연히 못번다. 이것은 마치 누구도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알라딘 서재에서 즐겁게 놀다가 인구 30만 미만의 지방 소도시에 동네 서점을 열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 데, 그게 뭐냐면 15년 후에 어렴풋이 내가 살고 싶은 삶이다. 굶어 죽겠지.) 다른 건 다 심드렁해도 음악 취향 하나 만큼은 너무도 확고한 나머지 자기같은 음악광 너드들하고만 놀다가 어느 날 번듯한 로라의 변호사 친구들네 집에 초대 받게 되고.
따뜻한 환대와 진심 어린 대화 속에서 로라의 지인들이 정도라면 “내 남은 평생 매주 두 번씩 만나고 싶을 정도”라고 까지 호감을 느끼지만, 집안에 꽂힌 티나 터너, 빌리 조엘 등등의 컬렉션을 보고 “독성이 강하고 너무 끔찍해서 무쇠 상자에 담에 제3세계 매립장으로 떠나는 배에 실어야한다”고 생각하며 어떤 신념을 시험받고 마는 데.
내가 독서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책을 선물해주며 (다섯 페이지 읽고 팔고 말았다. 인스타 감성의 에세이였다. 제목도 기억 안남.) 자기도 독서를 좋아한다고 했던 어떤 사람 생각이 나네. 그래서 무슨 책을 좋아하는 데요? 인생 책이 <미움받을 용기>였던 그와의 대화를 위해 난 그 책을 읽어보았지만(좋은 책이었다. 그런데 인생 책이라고 할 것 까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책 읽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던 것 같다. 책은 내가 읽으면 되는 것이기도 하고… 살면서 내가 만난 책 많이 읽는 사람들은 대체로 나이 지긋한 학자들이었는 데, 학문 빼고는 별로(어쩌면 하나도) 존경스럽거나 훌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이 배운 인간과 배우지 않은 인간 사이에서 어떤 질적 다름이 있다고 생각되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주로 성실하고 착실하며 시간 약속을 잘지키는 사람, 자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이성을 좋아했다.
그런데, 그건 어떤 취향이라는 세계가 확고하지 않을 때의 이야기 인 것 같고. 이젠, 아무리 그래도 한달에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사람이나 오로지 베스트 셀러만 읽는 사람하고는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했다. 이 소설은 취향이 확고한 사내의 취향 만으로는 살 수 없는 나이 36세에 겪는 성장 소설(얘도 성장소설..)이다. (근데 성장 맞니? 이건 반성장… 아니니…?)
롭이 느꼈을 당혹스러움을 나에게 빗대면 이런 거다. 어떤 대화가 잘 통하고, 번듯하고, 시간 약속을 잘지키며, 성실하고, 섹시한(ㅋㅋㅋ) 남자를 만나서 그 사람 집에 초대 받아 놀러갔는 데. 그의 책장에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 유시민의 <나의 한국현대사>, 이지성의 <꿈꾸는 다락방>과 함께 읽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정의란 무엇인가>가 꽂혀있는 거지. 소설은 김훈의 <칼의 노래>와 무라카미 하루키꺼 아무거나 한 권으로 하자. 저기요... 우리 (만난적도 없지만) 헤어지자.
뭐 주절 주절 이런 저런 이야기를 썼는 데, 재밌게 읽은 소설이었고 덕분에 수 백곡의 오래된 팝송들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이 책의 가장 큰 반전이자, 찌질한 너드남들을 귀여워만 해서 안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의 마지막 <작품 해설>에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