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읽은 단편소설 집 속 엄마는 세상이 가하는 거대한 고통에 당해 그것을 술로 풀고 아들에게 폭력으로 푼다. 고통은 전염된다. 어린 소년은 자기 자신을 학대한다. 뒤틀린다. 망가진다. 어쩌면 너무 단순한 고통의 순환. 폭력의 연결. 소설의 이야기에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정도가 달라 희미하게 느껴질 뿐.

기실 우린 모두 그렇지 않은가. 나의 몸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폭력을 짜증과 화로 신경질로 - 가깝거나 약한 이에게 행사하면서, 이해해줘 오늘 내가 바깥에서 이런 저런 일이 있었어.



사랑스런 나의 매기는 타인에게 자신의 고통을 튕겨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저 고통에 ‘당’하지도 않는다. 그 고통의 절대량이 적어서는 결코 아닐 거다. (객관적으로 재혼한 남편의 전아이들 까지 케어하며 그를 먹여살리고 자기 아이도 키우며 일까지 하는 인생이 어떻게 사연없고 괴로움 없다고 할 수 있겠나..😱)

자책과 원망은 적당히. 휘적휘적 씩씩한 걸음걸이로. 자신이 선택한 것들에 딸려 오는 것들까지 책임지기. 그가 설령 남편의 전 부인이라도 공정하게 바라보고 존경할 부분은 존경하기. 고통을 고통으로 인식하지 않고 삶이 자아내는 문제로 대하며 가능한 선에서 더 망가지지 않기위해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

쉬운 방식으로 누군가를 탓하며 감정을 해소해 버리거나 (일시적으로 해소해 버리면 문제를 근본적으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힘들어도 어린 아이들에게 (자기의 화를 근거로) 분풀이 하지 않는 것도 그녀의 특징.

*

나는 고통과 힘든 것들이 보였는 데, 그녀는 삶을 보는 것 같았다. 고통을 튕겨내거나 고통에 당하는게 아니라 삶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담담히 받아들인 삶에서의 고통이란 조심조심 풀어볼 수 있는 문제로도 대할 수 있구나. (계획대로 풀리지는 않겠지만)

그러던 그녀가 “내가 나로 사는 게 지긋지긋해요”라며 흘리듯 슬쩍 자기를 이야기했을 때, 너무 알 것 같고 너무 이해가 되서 서글펐다. 그럼에도 지긋지긋해 할 정도로 자신을 살아보려 애쓰는 매기에게 반하고 말았다.

‘자기 중심을 지닌 오지라퍼’라는 인종은 아직 지구에 존재하는 가? (당하기만 하는 오지라퍼와 통제욕구를 감춘 오지라퍼만 있는 줄 알았는 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화에는 존재한다. 이런 영화는 살아가는 데 힘을 준다. 고통에 잡아 먹힌 소설 속 개인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자기 개발서 속의 나도, 도식화되고 분류된 교양서 속의 그들 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디서나 당당하게 걷고 때때로 춤을 추는 매기를 만나서 다행이다. 고통들을 마구마구 반사해 주고 싶은 어떤 날, 나는 그녀를 떠올리며 척척 걷고 춤 출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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죤보통 2019-05-25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기스플랜 최애

공쟝쟝 2019-05-25 12:41   좋아요 0 | URL
나도 넘나 최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