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플라이트 오늘의 젊은 작가 20
박민정 지음 / 민음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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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실검 1위는 조선일보 사장 10살 손녀의 운전기사 폭언이다. 얼마 전에 읽은 책 <미스 플라이트>속 주인공과 겹쳐 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현실 속 재벌가의 자제는 너무도 당연히 가진 것을 휘두르고, 소설 속 ‘대령의 딸’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 마저 ‘미안해’ 한다.

“(p.160) 누구의 잘못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도 없겠지만, 나는 미안했어요. ... 마지막 날 밤, 나는 아줌마를 안아 줬어요. 아줌마를 안고 아저씨에게 머리 숙여 사과드렸어요. 미안해요. 두 분께. 아줌마는 무슨 소리냐며 나를 꾸짖다 울어 버렸고 아저씨도 울고 있었어요. ”

유나는 운전병이었던 영훈이 안타까워 할만큼 “단 한 번도 뒷자석에 앉은 적이 없”는 아이였다. “너무 조숙”해서 “불쌍하게”까지 여겨졌던 소녀는 자라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길지 않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몇번이고 목에서 올라오는 것 같은 울음을 삼켜야 했다. 유나야, 죽지마, 죽지마, 유나야 안타까워 했지만 유나는 죽었다. 소설의 처음부터 이미 죽어 있었다. 페이지를 넘길 수록 계속해서 멋져지는 그녀의 성장은 무럭무럭 자라서 훌륭한 어른이되었다로 결말로 이어지지 않았다.

“(p.123) 아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상처를 주는 것 같아요. 멀리 있는 사람들은 상처를 줄 수 조차 없죠.”

모든 성장이 ‘무언가를 더 해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 않는 결단’ 또한 성장의 한 종류라면, 더는 상처주지거나 받지 않기 위해 삶을 중단하는 행위 역시 유나에겐 성장(혹은 성장의 결론)일지도 모른다.

이 훌륭하지 못한 세상에서 유나와 같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의 자살이란건. ‘사회적 타살’이라는 말도 부족한 일종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사’ 이지 않을까. 물론 너무 너무 가슴이 아프지만.

그러고 보면 다들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이미 병든지 오래라 새삼 ‘병든’이라는 말을 담기도 어색한 그런 사회에서. 병들지 않기 위해 아프지 않기 위해, 병들지 않은 척 하기 위해 아프지 않은 척 하기 위해. 그래 거기까지는 어떻게든 살아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누군가를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싸울 에너지도 없고 싸우지 않아도 무력한 이 곳에서.

“(p.30) 저, 대답하지 않았어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앞만 보고 걸어갔어요. 그가 어떤 표정으로, 어떤 자세로 그런 말을 했는지 전부 잊어버렸습니다. 그 부분이 아예 까맣게 지워져있어요. 그 순간 나를 지워버렸고, 그와 내가 함께 있는 공간의 물성을 전부 지워버렸어요. 단지 걸음을 멈추었을 때, 내 의지와 관계없이 걸음을 멈춰야 했을 때 그곳이 내게는 세상의 끝 같았고, 모서리 같이 뾰족하게 느껴졌다는 것만 기억나요. 늘 가지고 다니던 빨간 통 연고를 꺼내서 천천히 볼에 발랐어요. 마치 의식처럼. B항공의 직원이 되고, 비행을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습관처럼 그런 의식을 치르곤 했어요. 마치 신경안정제에 의존하듯 물건들에 의존하고 있었어요.”

존엄을 감각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이 곳에서 우리들은 대부분 유나처럼 사는 것 같다. 그 순간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거나, 물건들에 의존하거나 하면서. 그렇게. 다들. 지겹도록 자신을 지우고 또 지우면서.

그조차 가능해지지 않을 때는 누군가를 헐뜯거나, 위해를 가하기도 하고 정근처럼 당연하다고 합리화할 것이다. 합리화는 커녕 아예 들여다 볼 생각도 않는 이들이 더 많겠지만...

*

-릿터 13권, 작가 박민정 인터뷰 중에서-


“(p.93) 영화 <테이큰>처럼 아빠가 딸을 구하는 장르가 있잖아요. ‘피해자 아버지의 서사’라고나 할까요. 그걸 한번 비틀어 다뤄보고 싶었어요. 또하나는 딸이 살아있을 때 신경을 못쓴 아버지를 등장시키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어쩔 수 없이 세월호 이야기를 하게 되는 데요. 세월호 참사 이후에 유민 아빠 김영오 씨를 둘러싼 ‘유가족 자격’ 논란이 있었죠. 10년 전 이혼했고 그 뒤로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았으면서 왜 갑자기 나타나서 유족행세를 하느냐. 세월호 유가족 중 한 아버지가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딸에게 무관심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싸우는거다’라고 한 말도 마음에 남았어요. 이 소설을 구상하면서 아빠 생각을 많이 했는데요. 저희 아빠는 오랫동안 저와 사이가 안좋았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내가 사고가 난다면? 만약에 내가 살아 있을 때 일기에다 ‘아빠가 너무 싫다.’라고 썼다면? 그렇다고 해도 우리 아빠가 유족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았어요. 제가 소설 속 정근에게 동의하는건 아니에요. 정근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여전히 이 사람에게 공감하기 어려워요.”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두가지 생각을 했더랬다. 하나는 아빠 생각. 하나는 세월호 생각.

몇 년 전 ‘딸이 잘못되었다’는 보이스 피싱을 받고 고래고래 악지르며 생존 확인 전화를 했던 아빠와의 통화가 기억났다. 엄마의 증언에 의하면 경찰서로 바로 뛰어갈 정도로 흥분상태였다고. 내가 평소에나 잘하라며 막 웃었더니, 아빠 왈 정말 눈앞이 캄캄해졌다고.

평소에 그런 극진한 사랑을 표현하시는 분이 아니므로 “아빠가.. 날 사랑하긴 하는 구나. 그동안 몰랐네.”라고 좀 무뚝뚝하게 대답했었다. (그 날은 아빠의 진한?! 사랑을 태어나 처음 느껴본 날 이었습니다...) 참 사람이 얄궂은 것이. 소중한 것을 잃은 후에야, 혹은 잃기 직전에서야 그것을 소중했음을 안다. 사람으로 이뤄진 ‘사회’도 다르지 않은 듯.

*

이 책은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소설이기도 하다.
내가 한국 소설을 거의 읽지 않은 십여년 동안 대체 문학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일단은 여성 소설가들이 대거 등장한 것 같다. 그것도 엄청난. 한강, 황정은, 김애란 그리고 (나의 최애~) 최은영까지.

생각해보니 드문드문 한국 소설을 읽곤 하던 십년 전에는 신경숙, 공지영 정도 말고는 여자 소설가 찾기도 힘들었던 것 같은 데..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너무 기쁘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더더 좋은 것은 그들이 써낸 소설들이 10년전의 소설들 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깊어진 느낌이라는 것. 문장이나 서사도 그렇지만, 뭔가 철학적으로!! 그렇다.

내가 변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변한 ‘시대’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지난 십년간.. 우린 이명박그네를 살아 버렸던 것이다. (역시... 고난은 사유를 깊어지게 하는 것인가.)

그리고, 작가님 역시 언급하기 꺼리긴 했지만, 큰 사건도 함께 지나왔다. 바로. 세월호.

어마어마한 큰 슬픔이 지나간 이후 아직 사회외 사람들이 만족할 만큼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적어도 영화나 문학작품 세계는 정말 많이 변한 듯. 요즘의 한국 문학들을 읽다보면 어느 페이지에서든 세월호의 흔적들이 보인다. 딸의 죽음의 이유를 찾는 아버지. 이번 소설 역시 그랬다.

유나의 아버지(정근)가 변할 수 있을까. 이 상실과 슬픔을 겪었다는 것이, 우리의 성찰이, 모두의 뉘우침이 ‘유나’와 같은 소녀가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나게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으로 가는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소설은 열린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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