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천년의 기도를 읽는다. 언제나 좋아하는 에릭클립튼의 블루스 앨범을 들으며 가난과 노년을, 한 사람의 일생동안 나타났다 사라졌던 많은 우상들을 생각한다. 28살에 미국으로 이주한 작가는 엄청나게 빠르게 자본주의화되는 세상에, 그만큼 빠르게 변하지 못한 고국 사람들의 삶을 그린다. 탁월한 글쟁이다.


 김혜자 선생이 드라마 눈이부시게 결말에 아름답고 슬프게 - 그래도 살아서 좋았다고 지금을 살라- 말한다. 눈물이 난다. 그러나 마음속 여전히 촌년인 나는 변화하는 세상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며 그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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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교육때문에 늦은 출근인데
뉴스공장에 백기완 선생이 나온다.
많이 아프시다는 얘기만 들었는데
왈칵 눈물이 흐른다.

남북정상은 만나 분단책임자인 미국에게 사과를 요청해야한단다.
그래 기백하면 백기완이지.

이게 보수지.
뭔 보수가 남으 나라 국기를 쳐흔들고
지나라 규범은 입에 담기도 싫게 지편한대로 깨부수고...

백기완선생 새책 제목이 버선발이야기인듯 한데 버슨발은 버선을 신을 발이 아니라 맨발이란다.
하기는 천이 얼마나 귀했는가.

녹색평론 165호 미국의 베네수엘라 공격은 대안경제는 파괴되야하기 때문이라던가 길 잃은 우리나라 경제에 대한 이야기 등 평소 궁금했던 이야기들이라 모처럼 정독중이다.

오버스토리는 두꺼운데 의외로 책장이 잘넘어간다. 문제는 책이 무거워 들고나갈수 없어 더디다.

EH카의 러시아혁명사도 여전히 읽고있다. 베네수엘라 사태와 전시경제 고립이 겹쳐보이는건 이거읽다 저거읽다 해선가.

숨이 차게 살고있다. 어서 이 봄이 지나 제발 인간다운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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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연히 수잔 발라동의 그림을 구글링 하였다.

위에 그림은 르누아르가 그린 발라동이고

이건 자화상이다. 

이건 그녀가 죽음을 맞이한 해의 자화상


그 시절에 가난한 사생아로 태어나 모델 댄서 여러 잡일을 전전한 끝에 화가가된 그녀다.

두번의 결혼과 이혼, 무수한 연애,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살던 사람이다.

르누아르의 그림속 그녀는 그저 관능적이라 화가의 욕망의 표현으로만 보이지만,

아마 현실의 그녀는 자화상처럼 자아가 강한 사람이었으리라.

조금 우스웠다. 모델로서 그려진 그녀와 자신이 그린 그녀 사이의 차이가.

남자들이란.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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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11-09 0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모델을 하던 시기가 달른것도 한 이유겠지만 화가의 입장에선 그림의 판매도 생각해야되니 모델을 아름답게 그린것이 아닌가 싶어요.

무해한모리군 2018-11-19 12:24   좋아요 0 | URL
네 화가는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자기 표현을 하려는 것이니까 당연한거 같아요.
 

배우 이민기가 아저씨나 본부장 역할을 하니, 아 세월이 이만큼 흘렀나하는 생각이 절로든다. 뭐랄까 내 맘속에 정말 소년같고, 청춘같은 배우인데. (옛날에 군대다녀와도 소년으로 있어달라고 알라딘에 쓴 적도 있다)


청춘하니까 생각나는데 최근에 버닝을 봤다. 우울할 때 즐겨보는 영화중에 <완득이>랑 돌아가신 김주혁 배우의 <홍반장>이 있다. 작은 마을에 다정한 사람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워낙 좋아한다. 히어로물도 좋아하고. 그러니까 전혀 내 취향의 영화는 아니다. 심지어 감독의 전작인 시가 더 좋았다. 그래도 영화에서 유아인이 연기한 종수는 인상깊었다. 그 또래 배우중에서 유아인 만큼 가난한 역할을 많이 해본 배우가 있을까 싶게 참 찢어지게 가난한 역할을 많이도 했다. 그중 종수가 가장 유아인이란 배우에 가서 붙은 느낌이 든다. 완득이와 밀회의 선재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정할 수 없어도 받아들이고 있다. 계층의 사다리를 맹렬히 욕하거나, 미친듯이 기어오르려는 자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킥복싱을 하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사랑에 빠지는 그 순수와 반짝임이 아름답다. 버닝에서의 종수는 문창과를 나와서 글을 쓰고, 택배배달을 한다. 시종일관 그는 무표정하고 건조하며 텅비어 보인다. 저런 사람이 글을 쓸 수 있을까? 쓰고는 있을까? 빛이 들지 않은 여자의 방에 짧은 순간 드는 흐린 빛, 그 빛마저 허구로 느껴져 서글퍼지는 영화였다. 누구에게나 꿈에 반짝이던 청춘 한줌 쯤은 있어도 될텐데 스물에 중년의 마음이 되어야 하는 세상인가. 


백리시를 읽고 있다. 스물초중반에 행복한 개인이 되면 된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성공한 여성이니, 페미니즘이니 뭐가 중요한가, 내가 행복하면 된다고. 그런데 살다보니 나의 비폭력에 더욱더 잔인해지는 무리와(나는 간디가 아니라 참을 수가 없다. 애당초 간디가 옳은지도 모르겠지만) 목을 졸라오는 가족주의와 등튀에 꽂히는 칼날같은 비판들이, 내 행복과 이 사회 정치 구조라는 것이 너무나 붙어있어 문득문득 놀랍다. 나는 매사 너무나 불편하다. 그리고 그 불편을 설명하는게 너무 귀찮고 어렵다. 두껍고 매우 작은 글자로 되어있지만 어렵지는 않다. 언제나 내게 수수께끼인 애초 가진 적도 없는데 경상도에 뭔가를 뺏어갔다고 생각하는 경상도 친지들과, 미친듯이 꼴페미라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는 자들의 '이유'를 알게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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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7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19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라진 너를 찾아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읽기 싫었다. (왜 이걸 산걸까?) 꼬맹이시절 만난 옆집 아이와 함께 자라고, 자연스럽게 사랑하고, 미래를 약속했다. 결혼을 앞둔 어느날 사고를 당한 남자는 시체로 돌아온다. 아, 싫다. 첫사랑인 옆집 아이를 생애 한순간도 못놓고 있는 내게 얼마나 끔찍한 이야기겠는가. 생각해본 적도 없던 네가 없는 나의 미래로 억지로 던져졌던 날들의 막막함. 때로 아파도 세상은 끝나지 않고 일하고,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야기. 나는 절대 쓸 수 없는 다정한 이야기.


 교토탐정은 이야기는 소소하고, 교토는 아름답다. (왜 이걸 골랐을까????) 


<행복이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추구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추구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쾌락이다. - 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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