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
장휘옥.김사업 지음 / 더북컴퍼니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종교(宗敎), 소위 ‘큰(높은) 가르침’을 따르며 살겠노라고 자처하는 내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절감하게 되는 결핍은 바로 ‘수행(修行)’에 있다. 20대 초반에 내가 전통적 기독교와 결별하고, 사회적 실천에 내 신앙의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면, 20대의 후반에 접어든 지금, 나의 온 관심은 이처럼 수행의 문제에 가닿아 있지 싶다. 

 사실 이러한 관심의 전이(轉移)는 사회나 제도를 변화시키겠다는 열망 뒤에 찾아오는 내적 불안에서 비롯되었다. 종교적 책임이라는 미명 하에 주위를 둘러보고 불의(不義)에 저항할 줄은 알았지만 정작 나의 내면을 들여다볼 틈은 없었고, 때문에 ‘나’는 여전히 불의에 방임된 인생을 살고 있었다. 이와 같은 자가당착적 인생은 의당 불안과 초조, 불만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세상과 수많은 타인들에게 변화를 요구하면서도 나는 변화된 인생을 살고 있지 못했고, 단지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예언자적 소명을 담당한다는 만족감에 자위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거의 거덜 나 있는 나의 내면을 바라보기 시작하였고, 세상의 모든 변화라는 것이 결국 나로부터 정초되어야 할 것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 먼저 변화되어야 할 곳은 바로 나의 내면이었다. 그 내면이 아름답지 않고서는 결코 그 어떤 세상의 아름다움을 논할 자격이 없었다. 

 

 이처럼 수행이라는 개인적 화두를 놓고 고민하던 차에 한 교수님의 추천을 받아 책을 들었다.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라는, 마치 선문답과 같은 제목의 이 책은 오롯이 수행을 위해 정진했던 두 영혼의 기록이다. 장휘옥과 김사업, 이 두 사람은 본래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만나 동국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던 길벗이다. 그러나 이들은 불교학자와 교수라는 자리에 머물지 않고, ‘모든 얽매임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해 모든 ‘자리’로부터 떠난다. 이제 그들은 경남 통영의 오곡도라는 작은 섬으로 들어가 수련원을 짓고, 그곳을 수행처로 삼는다. 그러고는 온전히 수행에만 전념하기 위해, 그리고 수행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세계 유수의 명상 수행처를 방문하기로 작정한다. 이 책은 바로 그 3년간에 걸친 선방 수행의 기록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이토록 수행에 매진하려 하는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이렇게 적어놓고 있었다.

 

“수행을 하면 보잘것없는 일도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고, 툭하면 다투던 주변 사람들과도 웃고 지낼 수 있으며,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살아가면서 겪는 숱한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걸림 없는 대자유를 얻게 된다.”(207쪽)

 

 그렇다. 그들의 수행의 목적은 바로 대자유를 얻어 옹근 해방의 길을 걸어가는데 있었다. 이는 세속의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에 그들은 과감히 자신의 삶을 수행에만 전념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고보면 자신을 둘러싼 세속의 모든 안위들을 내려놓고 오롯이 수행의 길로 접어든 것은 실로 지난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어렵고 힘든 것은 그들이 겪어낸 수행의 여정 속에 있었다. 특히 하루에 단 한 시간 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하면서도 오직 ‘무(無)’에 이르기 위해 며칠을-그야말로-‘죽을 각오로’ 임했다는 일본 임제종에서의 화두 수행은 차라리 처절할 정도였다. 동상에 걸린 발도 무릅쓰고 한기(寒氣)를 감내하며 수행에 정진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경외심마저 느껴질 정도였으니 그들의 수행이 오죽 애면글면했겠는가? 

 뿐만 아니라 ‘알아차림’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2-3시간에 이르는 좌선 수행을 ‘죽을 고통을’ 다해 감내했던 미얀마의 위빠사나 수행, 그리고 참된 쉼과 평화로움의 길을 발견했던 틱낫한의 플럼빌리지 수행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걸었던 수행의 길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삶이 혹여 비종교인들에게는 우둔하게 비추어질 수도 있겠다. 어쩌면 같은 종교에 속해 있으면서도 기독교라는 다른 배를 탄 이들에게조차 가차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수행은 종교인들만의 것이 아니다. 기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아내야 할 화두이기도 하다. 특히 온갖 생명들의 ‘죽음’으로 ‘주검’화된 21세기 지구문명에 있어서 수행의 역할을 재차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듯싶다. 왜냐하면 수행이란 결국 거짓과 탐욕, 이기(利己)로 대변되는 자아를 버리고, 무아(無我), 즉 ‘모든 것과 분리된 나(separate self)란 없다’는 사실을 자각(自刻)하는 길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 자각의 바탕 위에서 모든 개별 생명들은 ‘온생명global life’(장회익)으로 화(和)하게 되는 것이다. 

  

 자못 거창하게 설명했지만 사실 수행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다만 “순간순간 맑은 마음으로 행하는 우리의 모든 활동이 곧 참선이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만질 때, 그 모든 것이 참선이 된다.”(196쪽) 또한 틱낫한 스님의 플럼빌리지의 아름다운 노래말처럼, “타인에 대한 판단을 멈추고 사랑이 듬뿍 담긴 말을 하라. 긴장을 풀고 들어보라. 몸과 마음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라. 듣는 것은 예술이다.”(153쪽)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수행의 ‘때’이며, 머무는 바로 그곳이 수행의 ‘처(處)’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곳에서의 일상이 수행의 순간이 된다면, 그 삶은 비로소 예술이다! 그리고 삶이 예술이 될 때, 온 세상 또한 예술이 될 것이다.

 

 

(추기: 나는 오늘, 지난 몇 달간 동고동락했던 오토바이를 팔아치우고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떼어가며, 온전히 단 하나의 사실을 알아차렸다. ‘내가 걷고 있다!’ 그 단순한 현재에 마음을 모아 알아차리고, 나의 모든 행동에 귀를 기울일 때, 판단은 없어지고 모든 분별은 사라진다. 아직은 온갖 산란한 마음들 때문에 퍽 어렵다. 하지만 언젠가는 판단과 분별을 여읜 마음의 자리에 아름다움이 그윽하게 들어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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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9-04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결님, 글맛에 제가 녹아듭니다. 오늘하루도 아리따이 보내신 듯해요.
오토바이와 이별하고 발걸음을 느끼셨군요. 저도 자꾸 차에 의존하고 내 발걸음을
느끼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되는데.. 걷기명상을 중요시한 틱낫한의 글이 떠오릅니다.

바람결 2007-09-04 20:57   좋아요 0 | URL
아이고...과찬을 그렇게...;; 항상, 못난 글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토바이와의 이별은 참 가슴 아프더군요. 애지중지하며 몇 달간을 함께 했었는데 말이죠. 그렇게되니 걸을 수 밖에 없더군요. 이왕 걸을 바에는 틱낫한 스님이 권면했던 걷기명상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구요. 그런데 아직은...멀었어요. 좀처럼 마음 모으기가 잘 되지 않아요. 무튼 혜경님도 슬슬 발걸음을 느끼는 일에 시간을 할애해보세요. 차는 지구에 해롭답니다.ㅎㅎ
 

꽃 진 자리에

 

생각한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꽃자리에 앉는 일

 

그립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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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4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04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9-04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득하고 좋은 시네요 가을에 어울리는.

좀 걸어보세요 바람결님. :)
가을은 만끽하기엔 아쉬울만큼 짧은 계절이거든요...~

바람결 2007-09-04 16:12   좋아요 0 | URL
오늘 아침, 학교에 다녀오며 꽤 걸었답니다.ㅎㅎ 오늘부터는 걷기명상을 좀 해보기로 작정했거든요. 사실 걷기에만 집중을 하다보니 거리의 풍경들을 놓치게 된다는 아쉬움도 있더군요. 그래도 가을냄새가 진하게 느껴졌어요.

체셔님, 시가 참 좋죠? 소리내서 몇 번 읽다보면 더 아득하게 느껴진답니다.^^

프레이야 2007-09-04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결님, 가을이 물씬 느껴지는 시에요. 빈자리 하나 마음속에 품고살고 싶어요.
가을은, 훌훌 벗고, 비워두고, 떠나버리니, 참 좋아요.^^

바람결 2007-09-04 19:01   좋아요 0 | URL
빈자리 하나 품고 사는 삶, 저도 그러한 삶이길 소망합니다.
이 허허로운 가을에 참 좋은 시를 만나서 저도 참 좋은 하루였답니다.^^
 

9월 3일

당신은 꿀.

우리는 식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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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9-04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꿀'은 그대로 먹는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써 완전하다.
하지만 '식초'는 그렇지 못하다. 무언가와 결합이 되어야 좋다.

꿀이 사랑이라면, 식초는 이별이다.
사랑이 완전이라면, 이별은 불완전이다.
완전이 만족이라면, 불완전은 결핍이다.

결핍은 불우하다.
불우는 눈물을 짓는다.
눈물은 진실하다.
진실함 속에서 거짓은 사라진다.
거짓이 사라지니 자아(ego)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없고, 바다만 남아서 고요하다.

無我海!

프레이야 2007-09-04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결님, 오늘 아침 바람결이 정말 시원상쾌합니다. 9월이 느껴져요^^
님의 해석이 더 와 닿습니다. 무아해, 내가 없는 바다, 거짓이 없는 바다,
고요만이 남은 진실의 바다. 그곳에 한 점으로라도 떠있을 수만 있다면..

바람결 2007-09-04 15:53   좋아요 0 | URL
아침 등교길에 후둑 후둑 잠깐 비가 왔어요. 오늘부터 걷기명상을 하겠다고 멀찌감치에서 하차하고는 걷기 시작했는데, 그 빗방울에 그만 마음이 흔들렸답니다.;; 그곳은 바람결이 '시원상쾌'했군요. 정말 9월인가 봅니다.

혜경님, 글에 담긴 마음이 느껴집니다. 무아의 바다와 하나가 되어 진정 고요한 인생이 된다면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운 인생이겠지요. 공감하며, 잠깐 기도했습니다.
 

"언제 알아차려야 하는가? 일어나는 그 순간에 바로 알아차려야 한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도 아니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알아차려야 하는가? 좋다, 나쁘다 등의 분별이나,

'원하는 것은 일으키거나 지속시키려 하고,

싫은 것은 없애려고 하는' 의지작용도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 144쪽에서>

 

'알아차림', 화두.

'그냥 있는 그대로'에 강세를 둔다.

얼마나 많은 걱정과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렸는가?

분별지를 버리고 다만, 알아차리라.

그래야만 비로소 구원에 이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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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내 가슴의 산에 메아리치는 저것은 누구의 음성인가?

때로 나는 공명(共鳴)하고

때로 나는 침묵한다.

스승이여, 어진 이여.

당신이 누구든 간에 다시 한 번

당신 메아리로 이 언덕을 가득 채우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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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9-03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몸은 텅빈 목관악기 같습니다. '당신'이 불고 치는 대로 공명하고
침묵하고 때론 메아리치고 싶습니다, 바람결님. 하지만 그 목소리가 안 들리는 저는
몸과 마음을 열어야하는데요.. 오늘 전 가을을 조금 느끼고 5.18민주영령들의 묘역에서
좀 울먹이다 왔습니다. 제 개인적인 피붙이가 있는 곳은 아니지만 비석뒤에 새겨져있는
글귀들이 저를 울렸습니다. 가을볕이 뜨거웠지요. 바람결님^^

바람결 2007-09-03 23:10   좋아요 0 | URL
혜경님, 댓글을 달아주실 때마다 저는 다시 한번 몸서리치며 깨닫게 됩니다. 한줄 한줄 마음을 비끄러맨 글들이 묵직하게 다가 오곤 합니다. 예, 실은 저도 '그분의 피리'가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늘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됩니다. 혜경님처럼 몸과 마음을 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램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종내에는 나는 텅비고, 오직 그 분의 울림만을 내는 피리이고 싶은게지요.

광주에 다녀오셨나보군요. 그 울먹임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같은 것일까요? 혜경님의 마음 저으기 숭고하게 느껴집니다. 저도 평생을 두고 광주란 곳에 제대로 다녀오질 못했네요. 이참에 막 떠나고 싶어집니다. 저도 그곳에서 울음을 삼키며 역사의 그늘을 응시하고 싶네요. 그리고 그분들의 희생으로 인해 뿌려진 씨앗들이 힘차게 돋아날 희망을 품고 싶습니다.

가을 햇볕도 좋았고, 공중에 생겨난 바닥도 보였던 그런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