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가을이 다숩게 익어가도

우리 집 감나무는 허전했다

이웃집엔 발갛게 익은 감들이

가지가 휘어질 듯 탐스러운데

 

학교에서 돌아온 허기진 나는

밭일하는 어머님을 찾아가 징징거렸다

왜 우리 감나무만 감이 안 열린당가

 

응 해거리하는 중이란다

감나무도 산목숨이어서

작년에 뿌리가 너무 힘을 많이 써부러서

올해는 꽃도 열매도 피우지 않고

시방 뿌리 힘을 키우는 중이란다

해걸이할 땐 위를 쳐다보지 말고

밭 아래를 쳐다봐야 하는 법이란다

 

그해 가을이 다 가도록 나는

위를 쳐다보며 더는 징징대지 않았다

땅 속의 뿌리가 들으라고 나무 밑에

엎드려서

나무야 심내라 나무야 심내라

땅심아 들어라 땅심아 들어라

배고픈 만큼 소리치곤 했다

 

어머님은 가을걷이를 마치신 후

감나무 주위를 파고 퇴비를 묻어주며 성호를 그으셨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허리 굽혀 땅심과 뿌리를 보살펴야 하는 거라며

 

정직하게 해거리를 잘사는 게

미래 희망을 키우는 유일한 길이라며

 

......................................................

 

저물고 있는 한 해. 매해 세밑에 서면 늘 그러하듯이 올해도 여전히 저는 후회로 얼룩진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박노해의 시, '해거리'를 접하며, 남은 며칠동안이라도 땅심내야겠다고 생각해봅니다. 감나무에도 해거리가 필요하듯이 제 삶에도 해거리가 필요하진 않았었는지요. 오늘의 절망보다는 내일의 희망을 품고 살겠다는 제 자족적 의지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야무진 꿈일지도 모릅니다. 스무날 남은 12월, 12월은 본디 '완성'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하였나요? 비록 미완이 될지라도 오늘만큼은 다짐해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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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12-11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결님의 시와 단상이 지금 제게 힘이 됩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 제가 늘 바라는 것이죠. 12월은 '완성'을 뜻하나요?
몰랐네요. 전 완성을 바라지 않을래요. 그저 조금씩 나아질래요^^
바람결님에게도 저에게도 남은 이 해의 나날이 알차게 영글면 좋겠어요.

바람결 2007-12-11 20:49   좋아요 0 | URL
혜경님께 힘이 되었다니요! 정말 감사한 일이네요.
완성은 바라지도 않겠다는 님의 말이 얼마나 겸손한지요.
저 또한 그저 조금씩 나아지기만을 바랄 뿐이지요...

남은 며칠동안의 이 한 해 잘 해거리하시고,
잘 마무리하시길 빕니다.^^
 

12월 8일

깨침의 순간은 아름다운 신부의 너울을 벗기는 것이요,

영원한 깨달음은 신부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혼인 잔치에 온 하객들 모두 너울 벗은 신부를 보겠지만,

신방에 들어갈 사람은 그를 사랑하는 신랑뿐이다.

많은 수피들이 너울 벗은 그분을 흘낏 보았으나.

그 침상에 초대받은 자, 극히 드물다.

 

12월 10일

그는 바로 네 앞에 있다.

한데, 이 무슨 말인가?

영혼에 '앞'이 어디인가?

'앞'이니 '뒤'니 하는 것들은

육신한테나 있는 것들이다.

빛인 영(靈)에는 공간이 없다.

공간 없는 너의 내면을 탐색하라.

육신이 존재한다는 착각의 가위에 눌려 허덕이는

짧은 안목의 몽상가가 되지 말라.

실재 안에서(in Reality) '너'는 없다.

있지도 않은 물건에

'앞'이 무엇이고 '뒤'는 또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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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12-11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피들 뿐인가요? 목사들은요? 아니, 종교인들은요?
다들 당신을 흘끗 봅니다만, 정작 당신과는 사랑하지 못하는 것 같군요.
저 또한 마찬가지 일테지요.
지금 이 순간, 당신과 사랑하게 되길 원합니다.
너른 침상에서 당신과 깊고, 고요하게 사랑하길 소원합니다.
 

12월  4일

밤마다 너는 육신의 감옥에서 영혼을 풀어주고, 머리에서 기억들을 지워버린다.

밤마다 새는 새장에서 벗어나고, 번잡한 이야기들은 중단된다.

 

감옥에는 죄수가 없다.

통치자들은 힘이 없다.

고통도 번뇌도 없다.

얻음과 잃음에 대한 걱정도 없다.

이 사람 저 사람에 대한 환상도 없다.

 

이것이 넓게 깨어 있는 영지(靈知)의 상태다.

 

12월 5일

잠은 죽음의 형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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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12-11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지의 상태. 제게는 너무나 먼 얘기로군요.
여전히 미천하고, 미약합니다. 죄송합니다...
 

12월 2일

심장을 불 위에 올려놓은 자들은 냄새나 색깔에 반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순간 모든 곳에서 아름다움 자체를 본다.

견해의 껍질을 벗겨내고 직접 경험의 알속을 맛본다.

생각들을 찢어버리고 의식(consciousness)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들은, 영지(靈知, Gnosis)의 근원을 향해 바다를 건넌다.

 

12월 3일

자선가는 돈을 내놓는다. 그러나 영지자(the Gnostic)는 자기 영혼을 굴복시킨다.

네가 만일 알라의 이름으로 빵을 내어준다면,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네가 만일 알라를 위해서 생명을 내어준다면, 진실로 살아있음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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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12-11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엑카르트는 마음의 가난을 그토록 중시했던 것인가요?
돈을 내어놓는 것은 언제든 변심할 수 있는 '행위'에 불과하지만,
자기 영혼을 굴복시키는 일은 다시는 변할 수 없는 '존재'의 깨침이겠지요.

저, 명심하고 살겠습니다!
 

겨울은 죽음의 계절이다. 너는 죽음을 나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아직 죽음을 모른다는 얘기다. 너는 끝없는 진화의 과정 안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삶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죽음을 겪어왔다. 모든 죽음이 너에게 더욱 풍성한 삶을 가져다준다. 죽음 없이는 환생도 없다. 궁극의 죽음은 육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 신(神)에게서 떨어져나간 자아(自我), 그것이 죽음이다. 너는 지금 그분의 사랑의 바다 기슭에 서 있다. 파도 아래로 내려가라. 그 신비스런 깊이에 잠겨들어라. 너 자신을 바다에 녹여라. 촛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합일(合一)의 지옥 불에 삼켜질 때까지 빛에 빨려들어라. 사랑이 불을 택하는 것은, "꿀은, 침에 쏘일 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의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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