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가을이 다숩게 익어가도
우리 집 감나무는 허전했다
이웃집엔 발갛게 익은 감들이
가지가 휘어질 듯 탐스러운데
학교에서 돌아온 허기진 나는
밭일하는 어머님을 찾아가 징징거렸다
왜 우리 감나무만 감이 안 열린당가
응 해거리하는 중이란다
감나무도 산목숨이어서
작년에 뿌리가 너무 힘을 많이 써부러서
올해는 꽃도 열매도 피우지 않고
시방 뿌리 힘을 키우는 중이란다
해걸이할 땐 위를 쳐다보지 말고
밭 아래를 쳐다봐야 하는 법이란다
그해 가을이 다 가도록 나는
위를 쳐다보며 더는 징징대지 않았다
땅 속의 뿌리가 들으라고 나무 밑에
엎드려서
나무야 심내라 나무야 심내라
땅심아 들어라 땅심아 들어라
배고픈 만큼 소리치곤 했다
어머님은 가을걷이를 마치신 후
감나무 주위를 파고 퇴비를 묻어주며 성호를 그으셨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허리 굽혀 땅심과 뿌리를 보살펴야 하는 거라며
정직하게 해거리를 잘사는 게
미래 희망을 키우는 유일한 길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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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고 있는 한 해. 매해 세밑에 서면 늘 그러하듯이 올해도 여전히 저는 후회로 얼룩진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박노해의 시, '해거리'를 접하며, 남은 며칠동안이라도 땅심내야겠다고 생각해봅니다. 감나무에도 해거리가 필요하듯이 제 삶에도 해거리가 필요하진 않았었는지요. 오늘의 절망보다는 내일의 희망을 품고 살겠다는 제 자족적 의지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야무진 꿈일지도 모릅니다. 스무날 남은 12월, 12월은 본디 '완성'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하였나요? 비록 미완이 될지라도 오늘만큼은 다짐해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