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나의 여행
임영신 지음 / 소나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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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이보다 더 아름다운 말이 있을까요? 아마 누구라도 이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평화를 갈구하고 희망하겠지요. 하지만 평화에 대한 정의는 모두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 평화는 그저 전쟁이 없는 상태이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전쟁이 평화를 위한 길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인간이 만든 핵무기에조차도 '평화수호자(Peace Keeper)'라고 이름을 붙일 정도니 말입니다. 또한 전쟁이 없다고만 해서도 참다운 평화가 이룩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른바 적극적인 평화의 상태란 개인이나 공동체가 활기차고 복된 삶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평화에 대한 각자의 입장과 개념은 천차만별입니다.

 이 책에서 임영신은 평화를 찾아나섭니다. 누구나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과연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 그리고 평화에 어떻게 다다를 수 있는지를 고민하며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세계 평화의 심장부, 이라크로 떠납니다. 평화가 설자리를 잃어버린 그곳에서 임영신은 전쟁의 잔혹성을 목도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보며 뼈저린 비통을 느낍니다. 이후 그녀는 피스보트를 타고 세계를 일주하는 평화 여행의 장도에 오릅니다.  평화를 여행하는 이 배는 그녀를 인도로, 스리랑카로, 에리트레아로, 그리고 터키로 데려다줍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다른 이들과 만남을 통해, 그리고 그들과의 연대를 통해 평화를 배우고, 느끼고, 실천합니다. 그리고 연이은 여정들 속에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평화'를 묻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순례를 통하여 그녀는 결국 사람과 만나고 그 만남 속에서 사랑을 싹틔우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성과...그건 '관계'인 것 같아요. 이슈는 지나가고 관심은 잊혀지죠. 하지만 관계는 계속되잖아요. 이 여행은 많은 이들의 꺼져가는 관심을 관계로 빚어낸 소중한 만남의 여정이었습니다. 뉴스 속의 이슈가 지나가고 모두의 기억에서 이라크가 사라져도 죽는 날까지 서로를 심장으로 기억할, 그래서 사랑할, 관심에서 관계로 치환된 것. 그것이 가장 소중한 성과입니다."(108쪽)

 하고보면 평화란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이고, 그 만남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완성이었습니다. 그것은 더이상 관심이 아니라 관계이며, 그 관계란 머리로가 아니라 심장으로 기억될 만남의 최고치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평화여행의 이유가 사랑때문이라고,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이 부어준 커다란 사랑때문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있어서의 평화는 다른 무엇이 될 수 없었습니다. 평화는 만남이고 사랑이었지요. 그리고 그 만남, 즉 관계맺음은 토토의 말처럼 전쟁에 저항하는 평화의 몸짓이었습니다.

 때론 아프게, 때론 기쁘게 동참하며 읽어내려간 이 순례의 끝에서 그녀는 이렇게 묻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평화를 믿나요?" 그녀의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평화를  믿지만 이탈리아 아가씨 시모나의 말처럼 평화를 위해서 목숨을 걸만한 용기가 없어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평화를 꿈꿉니다. 평화를 찾아나선 그녀의 길이 곧 평화인 것처럼, 평화를 꿈꾸며 사는 삶이 곧 평화이길 원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 살다가 평화를 위해 죽을만큼 저의 삶 자체가 평화이길 빌어봅니다. 평화의 거처가 바로 나의 삶이길 빕니다. 그녀처럼, 평화는 나의 여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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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 2007-01-20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바람결 2007-01-20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봐주시니 또한 감사합니다.^^;;
 
순례자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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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사내가 있다. 신성한 권능의 상징인 '검'은 이미 그의 목전에서 사라진 터였다. 그 사내가 순례의 길에 오르게 된 것은 바로 그 '검'을 상실한 때문이었다.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검을 찾으라는 '람'의 명령은 검을 되찾기 위해 그에게 부여된 숙제였다. 사내는 산티아고 순례의 장정에 오른다. 검을 되찾기 위한 일념 하나로. 생장피에드포르에서부터 산티아고에 이르기까지 '검'을 찾기 위한 그의 여정은 지난하다. 이미 순례의 길목에는 그를 막아설 역경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선한 싸움'의 순례를 걷는 그에게, 닥친 역경은 기어코 그가 넘어서야할 적이자, 동지였다. 마스터의 권유대로 실행한 훈련들은 그가 이 역경을 넘어서도록 인도해주었고 고통스러운 그 길을 사내는 걷고, 또 걸었다. 골곡진 여정의 끝에는 '검'이 기다리고 있었다. 단지 그가 순례의 길을 끝까지 걸어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순례의 길에서 그가 밝혀낸 진리. '검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었다. 그것이 욕망의 대상이었던 검의 비밀이었고, 그곳은 오만과 탐욕이 사라진 자리였다.

2.

 '결과보다는 과정의 적실함에 천착하라'는 선인들의 경구를 기억한다. 하지만 우리는 과정이 생략된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어떠한 방법이나 수단을 통해서라도 목적을 성취한다면 그 과정의 부정함을 눈감아주는 오늘날. 그러나 참된 삶이란, 오만과 탐욕으로 점철된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의 열정을 믿고 주어진 삶에 겸손하게 도전해가는 '선한 싸움'에 있다고, 고통과 좌절이 어린 산티아고 순례의 길은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한 싸움'은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의 길 위에 있는 비범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해줄 거라고. '우리도 솔로몬 왕처럼 지혜롭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강인해질 수 있다'고,그렇게. 신은 평범한 매일의 삶 가운데 우리를 기적 속으로 초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느끼며, 나는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3.

 한 사내가 있다. 그 사내는 이제 이십 년이 지난 그 길 위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었다.

"선택된 자들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거지? 라고 묻는 대신 마음속의 열정을 깨워줄 무언가를 실행하겠다고 결단을 내리는 사람이었고, 천국문의 열쇠는 열정을 쏟아 행하는 그 일 속에 있었다. 그렇게 사랑은 변화를 부르고, 인간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우리를 신께 한 걸음 더 가까이 가닿게 해주는 것은 열정이지, 수백 수천의 고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고. 비밀의식이나 심오한 교리를 따르는 입문식이 아닌, 삶이 기적임을 믿으려는 의지가 기적을 낳는 것이라고."(337~338쪽)

 우리의 삶 자체가 기적이었고, 기적임을 믿으려는 의지가 기적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 기적 속에는 기어코 우리가 만나야할 '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검은 어떠한 신비로서가 아니라 영예로운 도전, 그 자체였고, 기적같은 우리의 삶을 도도히 관통하는 진리였다. 비로소 산티아고의 길은 우리의 삶에 대한 상징이었고, 순례의 여정은 우리가 살아내고는 말아야할 인생의 내용이었다. 그렇게, 이십 년전 순례자로 산티아고의 길을 걷던 그 사내는 이렇게 우리를 그 순례의 길로 이끌고 있었다. 기적은 늘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하는 진리의 초대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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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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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매순간 마주치는 세계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그 세계를 바라보는 이의 독해능력에 달려 있다. 예컨대 어떤 이에게 있어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 것이 다른 이에게 커다란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독해능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경우다. 물론 누구든 자신이 대면한 세계에 대해 의식하기 마련이지만 대개의 경우는 단순한 감각 작용에서 그칠 때가 많다. 바로 그러한 경우를 독해능력이라고 부르긴 어렵다. 오히려 독해능력이란, 보이는 것에 대한 단순한 감각 작용으로서가 아니라 유심하고 세밀한 관찰 속에서 대상을 파악하고, 심원한 의식의 지평 속에서 그 의미와 본질을 새롭게 창조해내는 것이다. 이러한 독해능력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는 것은 인간이 이 세계와 만나는 한 방식이며, 세계를 더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이자, 삶의 지평을 넓히는 행위이다.


 ‘각기 다른 주파수로 진동하는 수많은 소리를 포착하는 예민한 안테나를 가진 라디오’라는 알랭 드 보통에 대한 헌사는 그가 얼마나 독해능력이 뛰어난 사람인지를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동물원에 가기’에서 그의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9개의 단편들로 구성된 이 책에서 드 보통은 그의 해박한 지적 능력과 예의 그 기민한 관찰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 재미있게도 공항, 동물원과 같이 우리와 친숙한 장소들이 소재가 되기도 하고, 호퍼의 그림이나 샤를 필리퐁의 만화, 버지니아의 일기와 같은 예술작품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사랑이라는 제재 또한 빠지지 않는다. 이처럼 다양한 대상들이 그의 의식의 그물망에 포착되면 마치 조물주의 손처럼 하나하나의 의미들이 생산되고, 부여된다. ‘공항에 가기’에서 한 구절을 보자.


“비행기의 빠른 상승은 변형의 전형적인 상징이다. 우리는 비행기의 힘에서 영감을 얻어 우리 자신의 삶에서 이와 유사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우리 역시 언젠가는 지금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수많은 억압들 위로 솟구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 눈에 감추어져 있었다 뿐이지, 사실 우리 삶은 저렇게 작았다는 것.” <'공항에 가기', 35쪽>


 이제껏 무심코 타왔던 비행기라는 물체는 여기에서 우리의 삶을 고찰하게 하는 매개로 변형된다. 비행기의 상승처럼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는 것은 우리네 삶에 대한 희망의 찬가이다. 그렇다. 이제 비행기는 무의미한 도구나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대한 상징으로 의미를 갖추게 되었다. 이 단적인 예에서 보듯이 드 보통은 마치 수많은 의식의 줄기세포가 무한히 뻗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나, 어디서나 의식의 촉수가 기민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와 같은 그의 독해능력은 읽는 이로 하여금 세계와 새롭게 만나게 해주고, 책의 가치를 재삼 발견하게 해줄 것이다. 마치 그가 설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희미한, 그럼에도 치명적인 떨림을 포착하는 데 모든 관심을 쏟는 책을 읽다 보면, 그 책을 내려놓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뒤에도 작가가 우리와 함께 있다면 반응을 보였을 만한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우리의 정신은 새로 조율된 레이더처럼 의식을 떠다니는 대상들을 포착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는 전에는 지나쳤던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하늘의 음영에, 한 사람의 얼굴의 변화무쌍함에, 친구의 위선에, 이전에는 우리가 슬픔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상황으로부터 밀려오는 축축하게 가라앉은 슬픔에.”<'글쓰기(와 송어)'>,128쪽>


 나는, 마치 자신의 독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느껴지는 이 도전적인 구절에 공감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내가 비로소 의식을 떠다니는 대상들을 포착할만한 레이더를 갖추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동물원에 가기'에서 치명적인 떨림 징후를 읽었으니까. 그렇다면 전에는 지나쳤던 것들이 이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어쩌면 나도 이제 1년치 동물원 자유입장권을 끊을지도 모르고, 슬프고 따분할 때면 공항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동물원에 간 고성능 레이더, 드 보통이 선사한 즐거움을 곱씹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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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연애편지 편지 쓰는 작가들의 모임 서간집 시리즈
김다은 엮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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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의 형식을 빌린 서간문학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이미 소개된 많은 책들이 서간문의 형식을 빌고 있고, 그러한 글들을 마주하며 익숙해진 터였다. 그러나 그것들 대부분이 '광장'으로 나올만한 것들이었고, 그만큼 공개적일 수 있었던데에는 무엇보다 교훈성과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용상 이념성이 드러나는 일단의 '편지'들은 철저히 배제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들 대부분이 공개되었다.) 한편 인간의 가장 사적인 영역이라고 부르는 '사랑'을 매개로한 '편지'가 우리에게 읽혀지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던 듯 싶다.

 우리시대의 문인들이 자신의 내면 깊은 곳, 그 낡은 서랍 속에 간직해두었던 '편지'들을 우리 앞에 내어놓았다. 그것은 허투루 방기할 수 없는 흔적이었고, 부둥켜 안아 살아가기엔 너무나 버거운 상처였으리라. 어느 누군가는 그 누군가를 떠올리며 다시금 회한의 쓴웃음을, 혹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으리라. 추억의 어느 길 모퉁이에서 만지작 거리던 사랑의 편린들은 이제 '내 것이 아닌 열망'(기형도)이리라. 그 잡을 수 없는 것들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을 나르던 한 줌, 한 줌의 '편지'들은 잡을 수 없음을 기리는 '추모'이리라. 그 '추모' 속에서 작가들은 단심과 하여를 노래하고, 사랑의 길에서 우리는 급기야 그들의 방황을 목격하게된다.

 수신자이거나 수신자'들'에게 보내는 그들의 편지에는 각기 다른 방황의 내용이 펼쳐진다. 그들이 부르는 사랑이란 예의 한 대상이 한 대상과 나누는 그것이 아닌 까닭이다. 오히려 사랑은 마르틴 부버의 '참된 삶은 만남이다'라는 말처럼 그들의 의식이 머무는 자리에 존재하는 만남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통적이고 한결같은 대상이란 있을 수 없고, 여성이거나 남성이거나 어느 한 대상으로 귀착될 수 없다. 정해종 시인의 편지가 참 흥미롭다. 그는 그의 '당신'에게 이렇게 묻는다.

"혹시 당신은 소위 명품으로 분류되는 물건들을 한두 개쯤 소유하고 있지 않은가요? 기능에 문제가 없는 물건들을 갈아치우거나 꼭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사들이는 데 돈을 쓰고 있지는 않은가요? 너무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거나, 너무 많은 음식물들을 섭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나요?"(176쪽)

 '당신'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애정을 담고 있다는 차원에서 연애편지에 다름 아니다. 그의 물음은 사랑하는 그 '모-오-든' 사람들의, '사랑하며, 나누는 삶을 향한' 연정의 메시지이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읽는 이로 하여금 맑은 공명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또한 이 책의 전편에서 단연 나를 사로잡은 글이 있다면 다시 사랑의 메모장을 연 김훈의 편지이다. 그는 '기어이 사랑이라 부르는 기억들'을 걷어올리고 있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과 모든, 참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른다.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205쪽)

 그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편지쓰듯 지난 날의 사랑을 되새김질하며, 자신이 사랑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진지한 탐색을 보여준다. 그에게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며, '참혹한 결핍'이다. 사랑은 잇닿을 수 없어서 사랑이다. 그리고 그 아득한 거리는 기억 속에 여전히 '사랑'이라는 메모로 남는다. 나는 김훈의 이 편지를 곡릉천을 건너는 버스 안에서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가슴 뼛 속까지 저려오는 사랑의 정체를 씹고, 또 씹었다. 뿐만 아니라 27인의 편지 도처에서 꿈틀거리는 명문을 만날 때마다 그 소름끼침은 감동과 슬픔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들 개개의 사랑에는 속절없는 것이 없었다. 그 속절없음이 '앓음'다웠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아름다웠다. 그 사랑의 아름다움은 나에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앓음다워라'"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작가의 연애편지를 통해 새로운 문학장르의 가능성을 발견한 엮은이의 수고로움 또한 쨍하다. 이 한 권의 책이 작지만 소중한 초석이 되리라 믿는다. 또한 '작가들의 연애편지'를 통해 사랑에 관한 깊은 사유를 선물받은 나는, 아마도 작가의 연애편지가 문학장르로서 자리매김할 때까지 열렬한 지지자가 될 것이다.

 작가들의 연애편지를 읽고 찬찬히 눈을 감고 곱씹는다. '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라' ...... 루미의 말이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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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32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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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는 영 문외한이지만 적어도 이것만큼은 안다. 시는, 좋은 시는 말보다 빠르게, 생각보다 먼저 고조곤히 살갗에 와 닿는다. 이 겨를없음은 어쩌면 시이기에 가능한 것이고 시가 주는 최대치의 선물이다. 살갗이 서걱거리면 슬픔이라든가 우울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가슴까지 이르고 혈관 곳곳에 깊게깊게 스며든다.

 문태준의 '가재미'를 읽는 내내 나는 그러했다. 연과 연 사이, 행과 행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 그리하여 말과 말 사이의 그 모든 행간을 나는 맨몸으로 받아내며 살갗 어느 곳인가가 쓰라림을 눈치챘다. 그의 시들마다 바닥은, 아래는, 혹은 삶의 언저리는 소름같이 돋아있었다. 그곳은 비어있음이 공간이었고 또한 소멸되었거나 마침내 소멸되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시공 속에 시인은 무심하게도 '나'를 비벼넣고 있었다. 텅비어있거나 급기야는 소멸되어야 할 '나'는, 그렇기 때문에 그대로가 부끄럽고 가난한 존재이다. '나'는 인지되는 그 어떤 사물보다 텅 비어있고, 모자라며, 게으르다. 이것은 어떤 까닭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것처럼 보인다. '바깥'이란 시에서는 그는,

'다시 생각해도 / 나는 / 너무 먼 / 바깥까지 왔다'고 말한다. 안이 아닌 바깥, 중심이 아닌 변방, 나는 그 언저리에 존재하는 것이다. '극빈'이라는 시에서는,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 살아오는 동안 나에게 없었'을 만큼 '나'는 극도의 가난으로 점철되어있다. 이러한 나는 '강대나무를 노래함'이라는 시에서처럼 별 수없이 '강대나무를 서럽게 불러 내 곁에 세워두'고야마는 서 있지만 그대로 말라 죽은 나무 같은 슬픔을, 혹은 아픔을 지닌 존재이다.

 그의 이러한 인식은 사람됨으로서의 겸손을 뛰어 넘어 사람됨으로서의 슬픔이며, 스스로 無와 空을 향해야할 신념처럼까지도 느껴진다. 한참이나 아득한 밑 바닥, 생의 변방에서의 삶이란 기껏해야 모자른 것들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에게 그러한 현실은 비루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 가운데서 주어질 찬란한 슬픔과 '텅 빈 충만'을 선사하는 은총이리라 생각된다.

한참동안 그의 시를 읽고 나는 스윽하고 주위를 둘러본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구나'(65쪽)하고 나도 무릎을 탁 쳐보는 것이다. 이 살갗쓰린 아픔 정도는 어느 '평상이 있는 국숫집'(72쪽)같은데를 생각해보면, 그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위로를 받고 싶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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