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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매순간 마주치는 세계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그 세계를 바라보는 이의 독해능력에 달려 있다. 예컨대 어떤 이에게 있어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 것이 다른 이에게 커다란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독해능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경우다. 물론 누구든 자신이 대면한 세계에 대해 의식하기 마련이지만 대개의 경우는 단순한 감각 작용에서 그칠 때가 많다. 바로 그러한 경우를 독해능력이라고 부르긴 어렵다. 오히려 독해능력이란, 보이는 것에 대한 단순한 감각 작용으로서가 아니라 유심하고 세밀한 관찰 속에서 대상을 파악하고, 심원한 의식의 지평 속에서 그 의미와 본질을 새롭게 창조해내는 것이다. 이러한 독해능력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는 것은 인간이 이 세계와 만나는 한 방식이며, 세계를 더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이자, 삶의 지평을 넓히는 행위이다.
‘각기 다른 주파수로 진동하는 수많은 소리를 포착하는 예민한 안테나를 가진 라디오’라는 알랭 드 보통에 대한 헌사는 그가 얼마나 독해능력이 뛰어난 사람인지를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동물원에 가기’에서 그의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9개의 단편들로 구성된 이 책에서 드 보통은 그의 해박한 지적 능력과 예의 그 기민한 관찰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 재미있게도 공항, 동물원과 같이 우리와 친숙한 장소들이 소재가 되기도 하고, 호퍼의 그림이나 샤를 필리퐁의 만화, 버지니아의 일기와 같은 예술작품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사랑이라는 제재 또한 빠지지 않는다. 이처럼 다양한 대상들이 그의 의식의 그물망에 포착되면 마치 조물주의 손처럼 하나하나의 의미들이 생산되고, 부여된다. ‘공항에 가기’에서 한 구절을 보자.
“비행기의 빠른 상승은 변형의 전형적인 상징이다. 우리는 비행기의 힘에서 영감을 얻어 우리 자신의 삶에서 이와 유사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우리 역시 언젠가는 지금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수많은 억압들 위로 솟구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 눈에 감추어져 있었다 뿐이지, 사실 우리 삶은 저렇게 작았다는 것.” <'공항에 가기', 35쪽>
이제껏 무심코 타왔던 비행기라는 물체는 여기에서 우리의 삶을 고찰하게 하는 매개로 변형된다. 비행기의 상승처럼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는 것은 우리네 삶에 대한 희망의 찬가이다. 그렇다. 이제 비행기는 무의미한 도구나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대한 상징으로 의미를 갖추게 되었다. 이 단적인 예에서 보듯이 드 보통은 마치 수많은 의식의 줄기세포가 무한히 뻗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나, 어디서나 의식의 촉수가 기민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와 같은 그의 독해능력은 읽는 이로 하여금 세계와 새롭게 만나게 해주고, 책의 가치를 재삼 발견하게 해줄 것이다. 마치 그가 설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희미한, 그럼에도 치명적인 떨림을 포착하는 데 모든 관심을 쏟는 책을 읽다 보면, 그 책을 내려놓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뒤에도 작가가 우리와 함께 있다면 반응을 보였을 만한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우리의 정신은 새로 조율된 레이더처럼 의식을 떠다니는 대상들을 포착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는 전에는 지나쳤던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하늘의 음영에, 한 사람의 얼굴의 변화무쌍함에, 친구의 위선에, 이전에는 우리가 슬픔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상황으로부터 밀려오는 축축하게 가라앉은 슬픔에.”<'글쓰기(와 송어)'>,128쪽>
나는, 마치 자신의 독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느껴지는 이 도전적인 구절에 공감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내가 비로소 의식을 떠다니는 대상들을 포착할만한 레이더를 갖추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동물원에 가기'에서 치명적인 떨림 징후를 읽었으니까. 그렇다면 전에는 지나쳤던 것들이 이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어쩌면 나도 이제 1년치 동물원 자유입장권을 끊을지도 모르고, 슬프고 따분할 때면 공항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동물원에 간 고성능 레이더, 드 보통이 선사한 즐거움을 곱씹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