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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평점 :
1. 하나의 전제 ; 기계론의 산모, 理性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일언(一言)에서 유출된 ‘코기토cogito’, 즉 ‘생각하는 자아’에 대한 인식은 17세기 유럽을 중세의 암흑 속에서 구출하였다. 카톨릭의 권위 아래서 신음하던 중세의 인민들은 더 이상 종교라는 명분하에 공공연히 자행되었던 (한 개인의 사유와 감정과 느낌 등 모든 총체적 의미로써의) ‘수탈’에서 해방되었고, 새로운 인식론적 지평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뉴턴과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은 철학과 신학의 그늘 아래서 숨죽이던 인간의 의식에 한줄기 햇빛과도 같았다. 이로써 소위 ‘근대’는 시작되었으며, 과학과 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간의 이성은 더 이상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실체에 대해 ‘지각 가능한’ 구원의 한 정점이었다. 이처럼 그들의 ‘구원’은 신(神)이라는 이름을 빙자하여 치욕의 세월을 독재했던 저 무지몽매한 종교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지만, 이른바 ‘기계론(mechanistic)’이라는 그들의 사고방식은 ‘기계론적 세계관’을 잉태하였다. 특별히 길게 부연할 것도 없거니와 그 ‘기계론적 세계관’이 결국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세계 인식의 토대 위에 자연과 인간의 공멸을 걱정하게 된 작금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인도한 안내자임은 주지의 사실이다.(이에 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은 캐롤린 머천트의 <자연의 죽음>을 참조하십시오.)
2. 다시 하나의 전제 ; 이성은 실체를 증명하는가?
헤겔의 논리학적 대명제인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현실이 이성과 합치하게 되는 변증법적 미래와 당위를 말하는 것’(이경재)이거니와 인간의 현실이 다분히 이성을 통해 인지되고, 판명되며, 인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부정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일찍이 동양의 직관 속에서 이성, 즉 분별지(分別智)는 근원에 가닿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장자(壯子)도 그렇거니와 ‘늙은 할아버지’(老子)께서도 ‘도(道)’(실체 혹은 실재)란 본디 ‘불립문자(不立文字)’임을 일러주셨으니 이성이 현상이나 물체 따위는 가늠케 해 줄 망정 실체로 인도하는 문은 아니라는 것이다.(글쎄 이 지점에서 후설의 ‘현상학’과의 만남이 일정 부분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동양의 지혜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 현대 물리학이 소위 ‘불가시적 세계’에 대해 인정하게 되면서,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동양의 사상들에 대한 수용과 교류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남긴다. 우리는 과연 서구적 ‘이성’의 도그마가 진정 적실한 것이라 여길 수 있는가?
없다. 나는 당췌 ‘이성’이 궁극의 실재를 증명가능하다고 ‘믿을 수’ 없다. 예컨대, 시멘트 바닥의 갈라진 틈사이로 꽃을 틔운 민들레의 저 질긴 생명을 보면서 나는 도저히 경외의 감정을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시인 김지하는 그 오랜 옥고의 세월을 거치며 감옥의 창틈에서 돋아난 민들레를 통해 ‘생명’이라는 화두와 만나게 되었죠.) 만약 이성의 ‘눈’으로만 파악한다면 그것은 내게 그저 ‘민들레’라는 이름의 풀 한포기일 뿐 일체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하지만 경외의 감정으로 다가오는 민들레라는 이름의 ‘생명’은 ‘신성(divine)’의 깊이로 ‘우리를’ 인도한다.-그리고 나는 철저히 압도당한다.-비단 저 놀라운 자연의 생명력을 통해 소로우를 비롯한 수많은 시인들이 신적 현존을 찬미하였으니 어찌 나 혼자만이 영역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도저히 그 ‘이성’이란 것에 모든 것을 의존할 만큼 한가롭지 않다.
3. <만신>에 응답하며, 하나 - 이성이 진리를 담보하는가
내가 이토록 구구절절 ‘이성’에 대해 논한 까닭은 <만들어진 신>을 읽는 내내 지배했던‘이성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 관한 나름의 심기불편에서 비롯된다. 내가 ‘맹목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가 일관되게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증명가능한’ 과학적 근거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삶의 영역에 대한 해답의 열쇠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이성’이라는 프리즘을 적합하게 통과하지 않고서는 모든 논의들이 가차없다는 식의 언조(言藻)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책을 관통하는 일종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과학자이다. 그 과학이란 것이 정말 완전히 ‘이성’의 탐구로만 한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면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영국 왕립협회 소속 과학자인 루퍼트 쉘드레이크의 경우는 주목할 만하다.
“나는 무신론자였습니다. 내가 열네 살이었을 때, 나의 생물학 선생은 종교는 지난 과거의 것이고, 과학의 미래의 것이라고 내게 확신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을 미신과 성직자와 도그마에 붙들어 놓았지만, 과학은 인간을 해방시켰으며 인간을 번영과 형제됨의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맹목적인 신앙과 미신적 숭배를 통해서가 아닌 인간 이성을 통하여, 기술적 진보는 지상에 이런 천국이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인도와 스리랑카를 여행했는데, 이것은 정말 눈이 휘둥그래질 만한 경험이었습니다. 아시아에 머무르면서 나는 세상을 보는 전혀 새로운 방식을 배웠습니다.(......)나는 기계론적 접근이 살아 있는 유기체의 성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매튜 폭스, 루퍼드 쉘드레이크, <창조, 어둠, 그리고 영혼에 관한 대화>, 27-29쪽.)
그에게 있어서 과학은 단순히 인간 이성과 기술적 진보로 담보되지 않는다. 아시아에서의 여행 경험은 그가 기계론적 접근, 즉 이성을 통한 분절(分節)의 방식을 통해서 모든 것이 증명가능하다고 여길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킨스의 경우는 ‘오직 이성으로만’ 모든 것이 분별된다. 종교도 ‘이성적 접근’ 속에서 확실한 법칙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폐기처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4. <만신>에 응답하며, 둘 - 도킨스의 ‘이분법적’ 징후; 과학이라는 일방통행?
이처럼 그의 책에서 이성의 도도한 흐름을 감지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성이 그 모든 실체를 밝혀주는 척도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이 사라진 종교의 자리를 마뜩치 않게 여기는 나로서는 그의 문제의식에 일정 부분 동의와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다. 근대를 거치며 이룬 과학의 경이로운 성과들이 분명 우리의 삶을 (지적으로) 풍요롭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자연선택’이라는 다윈의 ‘코페르니쿠스적’ 발견은 몽매의 그늘에 갇혀있던 인간의 탄생과 역사를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 창문이었다.
물론 저자인 도킨스는 이 ‘자연선택’-과 함께 맹목적 우연-이 생명을 읽는 가장 정확한 설명이며 독해방식이라고 주장한다. 호트(John F. Haught)의 분석처럼, “진화와 종교에 대한 도킨스의 방대한 설명 전체는 생명이 자연선택과 유전자 생존의 차원에서 가장 깊이 읽힐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을 전제로 한다.” (존호트, <다윈안의 신>, 165쪽.) 때문에 생명과 진화의 문제는 더 이상 일체의 신학적․섭리적 설명도 허용되지 않으며, 다윈주의와 신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종교와 과학의 대화는 불필요한 것이며, 나아가 종교 자체의 폐기를 주장함이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도킨스의 주장이 ‘이분법적 오류’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음은 분명하다. 본디 이분법은 ‘제3의 길’을 허용하지 않는 차원으로써 일체의 대화나 관용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명징한 과학적 법칙-과 종교의 해악-을 통해 종교의 폐기로까지 나아간다는 점은 그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모든 이분법이 사라진 곳에 낙원이 있다”고 말했던 롤랑 바르트의 주장처럼, 각 나름의 역할과 차이에 대한 존중의 소통이 사라진 자리는 결국 불통(不通)난 ‘지옥’일 수밖에 없으며, 또 다른 ‘독재’의 혐의를 지닌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분법은 누구의 소산인가? 내가 보기에 이분법은 인간의 무수한 역사와 그 질곡 가운데 ‘근본주의’라는 유령이 낳은 사생아였다.
5. <만신>에 응답하며, 셋 - 근본주의가 아닌 종교의 문제라고?
근본주의는 보통 ‘어떤 이념 체계에 대한 광신적 신념과 그에 따른 행동을 보여주는 종교 운동이나 세속 운동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특히 오늘날 이 ‘근본주의’라는 용어는 종교와 관련하여 빈번히 사용되는데, 이를 테면 기독교의 ‘인격신의 절대성’, ‘성서무오류설’과 같은 주장들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근본주의라는 용어가 단지 종교에만 국한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오히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여하한의 ‘광신적 신념’과 그에 따른 행동들이 모두 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근본주의의 이념상 특징들은 보통 선악의 이원론, 나르시시즘적 욕망, 불관용 등으로 압축할 수 있는데, 사실상 도킨스의 주장은 (앞서 언급했듯이) 이분법적 징후를 보인다는 측면에서 불관용의 문제와 긴밀하게 잇닿아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책에서(583-585쪽 참고.) 그는 근본주의의 혐의와 관련하여 부인하고 있지만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근본주의란 단지 종교적 범주로써 규정된다. 하지만 근본주의를 종교에 예속시키지 않고, 하나의 광(신)적 신념의 문제로 그 범주를 확대하면 분명 근본주의의 카테고리 안에 존재할 측면이 없지 않다. ‘지젝(Slavoj Zizek)은 자유주의자들은 최상의 ‘관용적 윤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신적 열정을 결핍하고 있는 반면에 근본주의자들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최악의 ‘불관용적 윤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신적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이경재) 이와 관련하여 ‘종교가 없어져야 한다’는 도킨스의 주장은 적어도 자유주의자들의 ‘최상의 관용적 윤리’를 담지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에게서 ‘광신적 열정’을 보게 된다고 말한다면 그건 무리일까?
그의 주장이 보여주는 근본주의적 성격을 뒤로 하고서라도 도킨스의 여러 가지 주장을 종합해보건대, 그의 주된 비판의 대상은 종교적 근본주의가 되어야함이 옳다. 왜냐하면 그가 종교 비판을 위해 사용했던 여러 가지 논증들은 분명 기독교 근본주의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지적되는 창조론, 인격신, 성서무오류설 등에 관한 내용들은 대개가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에 일치하며, 대신에 기독교 일반의 문제로는 그것을 확대시킬 수 없다. 물론 그가 ‘최악의 사례’를 공격한다는 점을 밝히고는 있지만 결론이 ‘종교의 폐기’를 향한다는 점에서, ‘최악의 사례’를 공격함으로써, (정작 결론에서는) ‘최선의 사례’ 또한 그에 복속 된다는 점은 심각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왜냐하면 ‘최선의 사례’나 ‘최악의 사례’나 종교라는 얼개 하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참’ 종교, ‘거짓’ 종교라는 식의 구분이 더 낫지 않았을까?) 근본주의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종교를 믿고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참된 가르침’에 따라 살려고 애쓰고 있고, 또 이성과 과학의 공헌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수용하는 입장에 서있음을 감안할 때, 종교(기독교)에 대한 도킨스의 단일선적인 이해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6. <만신>에 응답하며, 결론 - 과학과 종교의 상생을 생각한다
“신학자들은 가치 있는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 (92쪽)
나는 물론 신학자가 아닐뿐더러 ‘신학’에 관하여 많이 안다고도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간의(7년간) 신학 여정 속에서 신학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을 족히 경험하였다고는 말할 수 있다. 굳이 틸리히나 본회퍼, 불트만과 같은 훌륭한 신학자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신학은 분명 인간의 궁극을 추구해간다는 깊은 관심 속에서 참된 지혜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러한 와중에 ‘참된 가치’라는 종교적 본질에의 탐구는 더할 수 없는 고민과 번뇌를 안겨주었고, 나는 적잖이 방황하였다. 그러나 몇몇 신학자들의 수혜로 말미암아 정직한 이성의 추구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고, 그러한 때문에 나는 존 캅(J.Cobb)의 표현처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내기 위해 여전히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간디의 ‘샤티아그라하’가 ‘진리 파지’, 즉 진리를 향한 실험의 운동이었던 것처럼 나 또한 그와 같은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이러한 나에게 누군가가 ‘신’에 대해 묻는다면 분명 나는 ‘초자연적 유신론’의 시대는 종언하였다고 말할 것이다. 대신 틸리히의 표현처럼, ‘존재의 근거(혹은 기반)’이라거나 ‘생명의 바탈’, 그리고 너무나도 거창하겠지만 ‘사랑’이라 이름 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신학적 문제들에 대하여 일정 부분은 ‘전통적 기독교’(인격신론, 창조론, 선악이원론 등)와의 결별을 고할 수밖에 없다고도 밝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다른 이의 신앙 또한 무의미한 것이라고 가차 없이 재단할 수 없다. 종교는 (이성과 감정이 응축된) 경험이며, 분명 그들의 경험을 나는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 때문이다. 물론 무신론 또한 내게는 험담의 여지가 없다. 그들의 ‘믿음’ 또한 나는 인정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나의 신앙으로서는,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전적으로 내 경험이며, 내 생각이다.
결론을 맺으며 분명히 밝혀두고 싶은 것은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분명 (리쾨르의 해석학적 용어인) ‘우상파괴의 해석학’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약간의 경의를 표하고 싶다는 점이다. 그의 문제제기는 분명히 온당하며, 시의적절하다. 물론 미숙한 신학적 견해들은 상당히 많다. (성서에 대한 입장에서 여지없이 드러나는데, 아주 보수적인 신학자를 제외한 모든 신학자들이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으며, 일종의 문학적 형식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말의 실체 혹은 표면이 아니고 ‘말의 중심’이며, ‘의미’이다.-그러한 점에서 구약성서를 통해 무한한 상상력을 보았다라는 진중권의 말은 의미심장하다.-또한 기도의 행위는 개인적 청원의 차원보다는 오히려 우주적 사랑의 원칙에 근거한다. 그 모델은 예수이며, 그의 기도는 복음서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그 누구도 도덕적 요청으로써 종교를 믿지 않는다. 다만 ‘사랑’이신 하나님과, 예수가 보여준 ‘사랑’의 태도에 주목할 때, ‘사랑’으로 세상을 보고, ‘사랑’으로 살아갈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다. 이 사랑 역시도 이성적 판단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마음의 영역이며, 실재의 한 측면이다. 증거는 그 삶의 행위로써 분간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근본주의’의 해악이 오늘날과 같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상황 속에서 그의 주장을 경청할만한 하다. 하지만 광고 카피에서처럼 종교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본디 악의 근원은(유신론자든 무신론자든) 모든 인간의 내면(혹은 자아ego)에 존재하는 것 아니던가? 정말 그렇지 않은가?
<만신>열풍이라고 할 만큼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종교 비판’의 대열에 합세하는 추세이다. 좋은 비판이다, 좋은 견해이고. 하지만 견해가 진리를 담보하진 않는다. 그러므로 견해가 진리라고 주장할 때, 비로소 또 하나의 ‘근본주의’가 탄생한다. 독자들의 세심한 글읽기와 더불어 마음읽기, 세상읽기가 함께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또 다른 근본주의를 만드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성’을 절대우월의 가치로써 상정할 때, 그래서 그것이 진리의 자리로 등극할 때 (‘장미의 이름’의 등장하는 수도사인) 또 다른 ‘호르헤’가 출현할까 나는 두렵다. 다만-진리와 무리를 뛰어넘은-‘일리’(김영민)적 상생의 만남이 종교와 과학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