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죽음
캐롤린 머천트 지음, 이윤숙.전규찬.전우경 옮김 / 미토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400년 전, 영국의 문학가인 에드먼드 스펜서는 ‘가장 위대한 여신’ 대자연은 창조주의 부관처럼 행동한다고 말했다. 스펜서는 또한 자연을 어머니이자 심판자로 묘사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대자연은 생물들 간의 관계를 심판한다. 자연은 모든 것들의 ‘공평한 어머니’이며 ‘각각의 개체들을 형제처럼 엮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펜서의 관점에서, 생산력과 질서라는 자연의 원칙은 정의의 원칙과 정확하게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르네상스 시기의 자연관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자연은 양육하는 어머니이자, 언제든 인간에게 공황사태를 가져다줄 수 있는 심판자이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약 400여 년이 흐른 오늘날, 지구와 인간, 혹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염려하며 공생을 꿈꾸는 일군의 무리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연을 정복과 이용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철저히 인간 삶의 안락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보고 있다. 인간이 원한다면 언제든, 그리고 무엇이든 자연은 제공할 수 있으며,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인식이 마치 주술처럼 기저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한성장이라는 기치 아래 사람들은 끊임없이 개발하며, 그것만이 유일한 진보의 조건처럼 여긴다. 고욤나무가 뿌리내리던 산들은 골프장으로 둔갑했고, 백합 조개가 가득했던 개펄은 황무지로 변했다. 끊임없이 자연은 -좋게 말해서-변하고 있다.(엄밀히 말해서 파괴되고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도 허천난 듯이 보이는가?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 길래? 성장 못해서 안달난 이들에겐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구는 지금 성장통(?)을 앓고 있다. 아니 오히려 성장암 정도라고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만큼 자연은 훼손되었고, 더 이상 복기가 불가능하다는 전망이 나올 정도로 손상되었다. 따라서 더 이상 인간의 생활의 조건 또한 확단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지금-당장 생활의 방식에 제동을 걸든지, 아니면 죽음의 길로 가속페달을 밟던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나와 모두, 지구와 내가 공존할 수 있는 길이요, 또 하나는 공멸로 가는 것뿐이다.

        말 그대로 자연의 죽음(임)을 당한 오늘날, 캐롤린 머천트는 우리에게 전자의 삶을 택할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이 요청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고 배반되어온 인간과 자연의 온당한 관계를 재정립하는 시도이다. 그것은 합리화된 자기주장이 아닌 인간의 생존과 미래를 위한 공공의 제언인 것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자연의 죽음(임)에 이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들을 여성-생태학적(Eco-Feminism)인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과학혁명에 대한 일련의 맥락들과 그에 의해 형성되었던 세계관들을 조명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저자는 16~17세기 사이의, 살아있는 여성적 지구를 중심으로 한, 유기적 우주라는 이미지는 자연을 죽어있고 수동적이며, 인간에 의해 지배되고 통제되어야 할 것쯤으로 구성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의 의해 뒷자리로 밀려났다고 인식하고, 이같은 거대한 전환이 생겨나게 된 경제, 문화, 과학적인 변화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나아가 그녀는 과학혁명의 시기에 사람들은 자연을 대체 어떻게 개념화했는지 이해하려는 것이며, 어떤 불변의 본질에 대해서가 아닌, 사회 변화와 자연의 변모하는 구성간의 연관성에 관해 탐색보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여성적 지구에 대한 이미지로 인해서 이 책을 이른바 ‘어머니’ 자연에 대한 헌사쯤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철저한 오해에 비롯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저자는 여성과 자연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찬양이 고유의 모순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여성이 자연과 과도하게 동일시될 때, 그것은 곧 여성 스스로의 해방에 대한 전망에 역행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단지 자연과 여성이라는 개념은 그녀의 언급대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구성물이다. 따라서 여성으로서의 관점은 필연적 선택이며, 나아가 페미니스트의 역사가 곧 역사에 대한 인간 평등의 관점을 요구하는바, 주류적인 가치에 반하여 읽는, 말하자면 “사회의 아래로부터 보는” 사관史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자연의 죽임을 초래한 발전상들, 그리고 문화와 진보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인간 및 자연 자원의 가속화된 착취를 설명하기 위한 생태주의 관점을 정교화를 시도하고 있다.

        저자는 먼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유기적인 세계였다”라고 선포하면서 16세기 유럽인들에게 투영되었던 유기체라는 메타포를 설명하고 있다. 유기체 이론에 있어 핵심은 자연 특히 지구와 양육하는 어머니의 동일시에 있으며, 질서 잡히고 계획된 우주 내 인류의 필요 사항들을 제공하는 친절하고 자비로운 여성, 그러나 이와 대조적인 여성으로서 자연의 이미지 또한 널리 유행하였다. 이러한 지구 이미지는 인간의 행동을 제약하는 기제로 작동하게 되는데, 이를테면 광산 채굴과 같은 행위는 인간의 윤리를 벗어난 것으로 치부되기 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과학 혁명으로 인한 기계화와 합리화 과정은 양육하는 어머니라는 메타포를 사라지게 하였고, 이 사라진 자리를 기계론과 자연의 지배라는 두 가지 사상이 대체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대체 과정의 근간에는 자연과 물질은 모두 여성적인 것으로, 반면에 이데아는 남성적인 것으로 환원시켰던 플라톤이나 여성성을 수동성과 연관 지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인 틀 구조가 존재하였다. 이는 사회적인 관점에 있어서도 여성을 가정으로, 즉 남편의 지배하에 복속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이제 유럽의 농장과 소택지, 그리고 숲은 협동과 상호 의존의 생태체계로부터 분리-붕괴되었고, 초기 산업의 성장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약탈되었고, 파괴되었다.

        물론 사회에 관한 중세의 이론은 부분에 앞서 전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며, 전체적 통일성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유기적 개념이 강하였다. 여기에서는 공동체의 완벽함과 공통의 도덕적 선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졌다. 따라서 당시의 사회 공동체는 유기적인 형태를 띠면서 공동의 이익과 집단의 선을 추구하였다. 예컨대 안드레아의 크리스티아노와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는 재화와 재산, 지식이 거주민들 사이에 공유된 이상적 공동체였다.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으며, 모든 재화들이 수익의 목적이 아니라 이용의 목적으로 생산되었다. 그들에게 과학은 자연스런 조화의 연관 속에서 이용되는 것이었고, 공동체 내에서 여성은 평등한 존재로 그려졌다. 요컨대 캄파넬라와 안드레아의 유토피아는 자연과 사회 공동체의 모든 부분들이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성 속에서 상호 연결되었으며,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요소는 전체의 기능 속에서 둘 다 동등한 가치를 지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 사회에 대한 희망도, 르네상스의 유기적 체계도 그렇게 간단치 만은 않은 것이었다. 저자는 당시의 유기체적 질서로부터 이탈된(되어진) 여성의 존재에 주목한다. 근대 초기에 있어서 중요해진 자연의 이미지는 정복하거나 통제해야 할 무질서하고 혼돈스런 영역이었는데 이는 곧잘 여성과 연결되어 마녀의 이미지로 인식되었다. 먼저 이러한 사유의 형성 원인에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의 발견이 그 중심에 놓인다. ‘지동설’의 발견은 여성적인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부터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남성적인 태양으로 대체하였다. 이 쇠락의 징조 속에서 자연은 마치 운명이 그러한 것처럼, ‘예측할 수 없고 난폭하고, 그래서 정복해야만 하였다.’ 여성들은 통제하기 어려운 자연과 상징적으로 연관되면서 마녀화(化) 되었다. 물론 그것은 ‘사회적 질서와 유지 그 안에서의 여자들의 위치를 유지, 통제하는 것’이 이유 중 하나였다.

        저자는 사회적으로 격화되고, 심지어는 부당하게 점지된 여성의 위치에 관해 ‘자연-문화의 이원론’을 작동 기제로 보고 있다. 이것은 자연의 희생을 담보로 한 서구 문명의 진보 관념의 핵심요소로서 자연 자원의 착취 뿐 아니라 위계적으로 설정된 자연의 질서에서 여자들을 남자의 아래에 두는 것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남자들은 산파의 지위까지 획책하게 되면서 여성의 재생산 기능을 남성 우월성의 자리에 가두게 되었다.

        이제 여성과 같이 ‘무질서한’ 자연은 새로운 과학적 질문들과 실험적 방식에 굴복하여야만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물질을 ‘공공의 매춘부’로 묘사하며, 허용이라는 언어로 포장된, 자연에 대한 강간과 착취를 정당화한 베이컨에 의해서, ‘우리 자신을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로 만들’수 있다고 한 데카르트에 의해서, 성적 은유로서-이제는 발가벗겨진 자연을 암시한 그란빌에 의해서 일종의 원칙-즉 과학적 질문과 실험적 방식의 패러다임-으로 기획되고, 건설된 것들이었다. 이러한 원칙들을 기반으로 메르센느와 가센디, 데카르트에 의해서 담론화된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인해 프랑스 내에서의 자연은 인간의 통제 하에 종속된 자원으로 간주되었고,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기계론적인 사회모형을 정치철학의 전면에 부각시켰다. 이로써 기계론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를 규정하고 자연을 죽은 불활성의, 외부로부터 조작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는 곧 자연의 죽음인 것이다.

        풍차와 수차와 시계와 같은 기계의 등장은 신의 창조행위에 버금가는 산출능력으로 이해되었고, 종교개혁과 관련하여 신의 의지와 능동적 힘을 강조하는 것은 세속적인 일들에서 인간의 힘과 활동을 정당화하였다는 것을 보았을 때, 바야흐로 인간은 지구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이제 유럽의 이데올로기적 주류는 기계의 특성과 경험적 힘에 의해 지배되어갔고, 질서화된 권력은 자연을 포박하게 되었다.

        기계론에 의해 점령된 1500~1700년 사이의 서구 세계는 ‘모던하고 진보적인 것처럼’보이면서 발전(?)해 왔지만 아사상태에 처한 자연은 역설적이게도 유기적으로 인간의 위기를 초래했다. 자원의 부족과 심각한 건강 악화는 이제 자연과의 유기체적인 문화를 재생하기에 이른다. 자연을 식물로서 규정하고, 인간은 정복자가 아닌 신으로부터 위임받은 관리자를 자처하게 되면서 관리주의적 생태학의 유형을 띠게 되었다. 이는 곧 오늘날의 자연-인간관계의 양상과도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본래 관리주의적 생태학이란 본질상 자연을 이용 가능한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장기적 이용 가능한 분석 대상으로 간주한다.

        저자는 이제 관리주의적인 윤리에 대항하는 대안을 앤 콘웨이를 비롯한 일군의 페미니스트들과 뉴튼과 라이프니츠를 통해 발견하고 있다. 앤 콘웨이는 ‘서로 상호의존하고 그래서 타자 없이 살 수 없는......특정 사회 또는 공동체 속에서’ 신 아래 살고 있는 모든 피조물의 상호의존성에 자신의 체계를 두었다. 이것은 이른바 일원론적인 생기론으로써 모든 피조물 안에 무한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견해였으며, 라이프니츠 역시 이와 같은 그녀의 견해에 동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의 지배원리로 점철된 사회 속에서 새로운 철학의 구성을 시도하였을 뿐 아니라 과학에의 참여로 인해 우주와 사회의 이미지를 새롭게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사물에 빠짐없이 골고루 영향을 미치는 생명과 지각력이라는 사고방식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철학과 기계론자들의 철학을 구별하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물질은 생명에 있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사고방식에 있었다. 이것은 곧 ‘자연의 죽음’과는 정면으로 대립하는 가치 체계로써 자기충족적인 내적 발전의 원리였다고 할 수 있다. 뉴튼의 경우는 특히 ‘발효’라는 단어에 천착하였는데, 그것은 정치적으로 선동의 의미를 내포할 수 있으며, 능동적인 원동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발효작용이라는 것은 수동성 위에 성립되고, 쇠퇴와 붕괴, 그리고 필연적인 죽음으로 향하도록 운명 지워진 기계론적 우주에 가려진 ‘자연의 죽음’에 대한 대항 수단이 된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머천트는 결론적으로 지난 1500~1700년대 서구 문명을 다음 몇 줄에서 ‘아이러니’로 평가하고 있다.

“생생하게 숨을 쉬던 자연이 죽음을 맞이했다. 반면, 생명을 갖지 않는 죽은 화폐에 생명이 주어졌다. 자본과 시장의 시장이 차츰 성장과 강한 능동성, 풍요, 약함, 붕괴, 파멸이라는 유기적 특성을 보이게 되고, 경제 성장 및 발전을 가능케 하는 생산과 재생산의 사회 관계를 모호하고 신비한 것으로 만들었다. 자연이라든지 여성, 흑인, 임금노동자라고 하는 것들이 새로운 세계 체제를 위해 ‘천연의’ 인적 자원이라고 하는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이러한 전환이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아마도 최대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이 책의 에필로그 제목을 보고 나는 문득 슬퍼졌다. 인간과 자연이 살아가기도 아니고 공생하기도 아니고, ‘인간과 자연이 살아남기 위해’라니. 어쩌면 그것은 ‘극단의 시대’(홉스봄)를 살면서 자연과 인간의 ‘한 살이’를 외치는 벼랑 끝에 선 존재들의 절규 같은 것은 아닐까?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계속하고 있는 자본의 끝없는 자기 증식 운동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하고, 그 빛을 따라가기 위해 탈주를 감행하는 존재들의 벅찬 숨소리는 아닐까?

“참으로 죽어가고 있고, 참으로 썩어문드러져 있는 병든 지구는 오로지 주류의 가치관이 역전되고 경제 제일주의가 개혁됨으로써 장기적으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계는 또다시 천지가 뒤집히는 변화를 겪어야 할 것이다.”

        그녀의 의미심장한 이 말처럼 지구의 건강은 주류 가치관의 전복과 동의어이다. 경제 제일주의 극복과 매 한가지이다. 아니 어쩌면 지구의 건강이란 비로소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는 ‘주류 가치관=자기중심성’을 허물고, ‘경제 제일주의=물신주의’를 허물어야 비로소 회복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한 삶은 그녀의 제안처럼 새로운 사회 스타일을 만드는 초석이며, 대우주를 회복하는 소우주의 자기 각성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바로 머천트가『자연의 죽음』에서 말하고자 했던 공공의 제언-즉 기계론으로 점철되었던 가치 체계를 물질의 각 부분에 피조물의 전 세계가 있고, 각각의 피조물 안에는 전 세계가 포함되어 있다는 식의 유기체적 가치 체계로의 전환-을 존재론적 근거로 선택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인식과 주체적인 결단이 ‘인도어 라이프indoor life’에서 ‘아웃 도어 라이프outdoor life’로 향하는 첫 발걸음이 될 것이다.

        끝으로 지난 수 세기동안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설정하여 자연을 착취하고 파괴하거나, 그 행위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주류 기독교 가치관에 던지는 작은 파장이랄까,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이야기 모음집 『나락 한알 속의 우주』에서 나오는 말씀 하나 실으며 마친다. 자연이 죽은 시대, 자연의 살림에 이바지를 꿈꾼다.


“......나락 한알 속에도, 아주 작다고 하는 머리털 하나 속에도 우주의 존재가 내포되어 있다 그 말이에요. 불교의 화엄경 같은 데서 보면 ‘일미진중 함시방 시방일우주(一微塵中 含十方 十方一宇宙)’ 조그마한 티끌 안에 우주가 있느니라 하는 말씀이에요. 예수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너희들이 생명에 대한 믿음이 좁쌀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저리 가라 하면 저리 가고 저 바다를 비켜라 하면 비킬 것이다’라고 한 말씀이 그 모범이에요. ‘너희들 나처럼 살아라’하는 말 하셨지? 너희들 속에 생명에 대한 신념이 요만큼이라도 있다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들에 피는 그 조그만 꽃속에 무한함이 있다는 걸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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