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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워스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비채 / 2018년 1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일까? 바로 '시간'이 아닐까? 요즘 거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내 나이 또래에 비해서는 흰머리가 나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지난해부터 머리 옆에 하나 둘씩 새치가 생기더니 이제는 어느덧 곳곳에 흰머리가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나이가 든다는 중압감이 밀려온다. 이렇게 이룬 것 없이 시간이 흐른다는 생각이 나를 무기력하게 누른다. 내 몸에서 젊음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주는 우울감과 함께. 그럼에도 시간이 주는 그 무기력감이나 우울감과 계속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나의 운명이며 모든 인간의 운명일 것이다. 그리고 그 무기력감과 우울감에 육체와 정신이 잠식되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또한 인간이 운명일 것이다.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은 싸워야 할 것이다. 삶의 의지가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도록. 그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 [디 아워스]는 바로 시간이 주는 무기력감과 싸우는 세 여인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과 [세월]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한다. 마이클 커닝햄은 이 책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또 원작이 영화화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책은 결코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은 각각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를 살았던 세 명의 여인의 하루의 삶을 묘사한다. 그런데 그 하루의 삶의 외적으로 일어나는 일에 비중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세 명의 여인의 의식의 흐름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읽는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그녀들이 싸우는 치열한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각각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에 살았던 세 명의 여인의 하루의 삶을 교차적으로 반복해서 나열한다. 1923년의 런던 교외의 버지니아 울프의 하루와 194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던 로라 브라운 부인의 하루의 삶과 1990년대 뉴욕에서 살고 있는 댈레웨이 부인으로 불리는 클러리서라는 여인의 하루의 삶을 나열한다.
소설의 등장인물은 시대와 장소도 다르고, 전혀 공통점도 없어 보인다. 물론 세 명 모두 댈레웨이 부인이라는 소설의 주인공과 연관성이 있기는 하다. 버지니아 울프는 댈레웨이 부인이라는 소설을 쓰고 있었고, 로라 브라운은 댈레웨이라는 소설을 읽고 있었고, 클리리서는 자신의 남자 친구인 리처드에게 댈레웨이 부인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그러나 소설을 읽다 보면 세 명의 여인을 관통하는 뚜렷한 주제가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다. 그리고 시간이 주는 무기력함이다. 이들 세 명의 여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면 성공과 행복을 모두 가진 것 같지만, 모두 시간이 주는 무기력함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중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을 쓰면서 계속해서 찾아오는 두통과 무기력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항상 병이 재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겨내며 작업한다. 먼저 두통이 찾아오는데, 어느 모로 보나 일반적인 고통이 아니다. 두통은 그녀에게 스며든다. 단순히 괴롭히는 게 아니라 숙주에 있는 바이러스처럼 그녀 안에 존재한다. 고통의 요소들은 그녀의 눈에 광휘의 파편을 끈질기게 던지며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은 이를 보지 못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야 한다. 고통은 버지니아라는 존재를 점점 더 고통 자체로 바꿔 버리면서 그녀를 집어삼킨다. 그 진행과정이 너무 강렬하고 그 변덕스러움은 너무 선명해서, 그녀는 고통 자체가 하나의 생명을 가진 어떤 물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래너드와 함게 광장을 이잘 때면 그녀는 조약돌 위로 반짝이는 그 은빛 덩어리를,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찌르며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면서도 완전한 하나의 덩어리로 남는 고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P 111-2)
로라 브라운 부인은 남편의 생일날 자신을 잠식하는 무기력과 힘겹게 싸우고 있다.
"그런데 그녀는 뭘 더 바라는가? 자신의 선물이 거절당하고 자신의 케이크가 비웃음 받기를 원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녀는 사랑받기를 원한다. 아이에게 조용히 글을 읽어주는 좋은 엄마가 되기를 바라고, 완벽한 식탁을 준비하는 아내가 되고 싶다. 이상한 여자는 절대로 되고 싶지 않다. 변덕과 분노가 가득하고, 외로움을 타고 뾰로통하며, 참아줄 수는 있지만 사랑스럽지 않은, 여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여자이고 싶지 않다. 버지니아 울프는 코트 주머니에 돌덩이를 집어넣고 강으로 걸어 들어가 물에 빠져 죽었다. 로라는 절대로 자신이 우울해지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침대를 정돈하고 진공청소기를 돌릴 것이며 저녁에 생일상도 차릴 것이다. 그 외에는 다른 어떤 일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P 153-4)
마지막으로 댈리웨어 부인으로 불리는 클리리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개인적으로는 세 명의 여인 중에서 클리러서의 의식이 가장 분명하고 세밀하게 드러나고 있다. 뉴욕의 거리를 걷고, 남자 친구인 리처드의 파티를 준비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그녀의 세밀하면서도 내밀한 의식이 계속해서 드러난다. 마치 봄날에 녹아가고 있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듯한 긴장감이 계속해서 드러난다. 특히 그녀가 싸우는 시간의 무기력은 연인인 리처드와의 관계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에이즈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 소설가인 리처드를 무기력에서 건져 내려 애를 쓰는 그녀 역시 계속되는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러나 이 세 명의 여인들의 싸움의 결과는 어차피 결정이 되어 있는 싸움이었다. 소설의 초반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하는 장면에서 작가는 이미 이들 세 명의 여인의 싸움이 패배할 것임을 확정하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는 클리러서의 애인 리처드가 자살하면서 한 말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내가 이 일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 당신도 알잖아. 파티와 시상식, 그리고 그게 끝나면 이런저런 시간, 그ㄹ게 끝나면 또 이런저런 시간."
"파티에 안 가도 돼. 시상식에도. 당신은 안 해도 된다고."
"그래도 그 시간들을 남아 있어. 그렇지 않아? 하나의 시간, 그리고 나면 또 그런 시간, 그 시간들을 당신이 다 견뎌낸다고 해도 또 그런 시간이 있어. 세상에, 또 그런 시간이라니. 지긋지긋해."
"당신은 지금도 좋은 날을 보내고 있어. 당신도 알잖아."
"별로. 그래도 그렇게 말해주다니, 당신은 참 착해. 그런데 요새 가끔씩 거대한 꽃의 꽃잎들이 나를 옥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괴상한 비유인가? 아무튼 그래. 식물의 숙명 같은 거랄까. 파리지옥을 생각해봐. 숲을 숨 막히게 만드는 칡을 생각해보라고. 축축한 녹색이 어디로 번성해 가는 과정이지. 어딘지는 당신도 알잖아. 녹색의 침묵,. 웃기지 않아? 지금 이 순에도 '죽음'이라는 단어가 말하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P 292-3)
버지니아 울프도 리처드도 죽어가면서 '실패했다!'라고 말을 한다. 그들이 말하는 실패란 인생의 실패가 아닐 것이다. 그들처럼 치열하게 삶을 산 사람도 없으니까. 그들이 말하는 실패는 바로 시간이 주는 무기력함과 싸움에서의 실패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싸움에서의 실패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시간의 문제이지, 결국에는 정해져 있는 숙명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소설 전반에 흐르는 실패와 연결된 죽음의 이미지, 그리고 그 죽음과 맛 서려는 인물들의 의식의 흐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시간에 대한 묘사가 뛰어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