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변 십자가 모중석 스릴러 클럽 31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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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디버는 매우 매력적인 스릴러 작가이다. 인기있는 스릴러 작가들마다 모두 자신만의 색깔이 지니고 있는 매력이 있다. 데니스 루헤인의 묵직함, 할렌 코벤의 예상치 못한 반전,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북유럽 스릴러 작가들의 어두운 심리 묘사까지... 개인적으로 제프리 디버의 매력은 사건의 현장 속으로 독자들을 빨아들이는 흡입력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을 읽는 순간 독자는 마치 마법처럼 제프리 디버가 창조한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인질사건을 다룬 [소녀의 무덤]을 읽다가 내가 그 인질현장에 있는 듯한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 이처럼 제프리 디버의 소설이 현장감이 있는 것은 그만큼 그가 소설을 쓰면서 치밀하게 그 상황을 준비했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도로변 십자가]라는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주변에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소설을 꼭 읽어보라는 소리를 여러 차례 들었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소설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인터넷 공간이 얼마나 왜곡되고 있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범죄로 이어지는지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런 배경을 표현하기 위해 제프리 디버가 들이고 있는 노력은 너무나도 세밀하며 치밀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들였을 노력보다, 그 배경을 위해 들였을 노력이 몇 배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정도이다. 아마 10년이 지나도 이 작가의 현장감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제프리 디버가 창조한 '링컨 라임'형사와 그의 파트너 '아말리아 색스'등과 함께 알려진 '캐트린 댄스'이다. 링건 라임 시리즈의 [콜드문]이란 작품에서는 이 세 명이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그녀는 뛰어난 동작분석가로서 대화 중 상대방의 몸짓을 보고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사건은 켈리포니아 1번 도로를 순찰하던 경찰이 도로 주변에 조잡하게 세워진 십자가와 그 앞에 놓이 장미꽃 다발을 발견하면서 시작한다. 그는 이 곳에서 사고로 죽은 사람을 추모하기 위한 십자가로 보고 무심히 지나친다. 다만 십자가에 적힌 날짜가 내일이라는 것에 조금 꺼림직할 뿐이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사건에 대한 예고였다. 다음 날 근처에서 테미 포스터라는 매력적인 여학생이 자동차 트렁크에 갇혀 살해될 뻔 하다가 간신히 구조되었다. 캐트린 댄스는 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테미 포스터와 인터뷰를 한다. 테미 포스터는 모르는 사람의 범행일 거라고 추측하지만, 댄스는 그녀의 언어와 몸짓에서 무언가를 감추며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 후 댄스는 테미포스터의 노트북을 조사하다가 그녀가 칠턴 리포트라는 곳에 글을 남긴 것을 발견한다. 그곳은 칠턴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블로그로서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칼럼들과 그에 대한 댓글들이 실려져 있다. 테미는 그곳에서 얼마전 같은 학교 여행생들을 태우고 운전을 하다가 숨지게 한 '운전자'로 불리는 남학생에 대한 비난의 글을 올렸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금 도로변에 십자가가 세워지고 같은 불로그에 운전자에 대한 비난의 글을 올린 켈리가 살해될 뻔 한다. 댄스는 운전자로 불리는 '브리검'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그를 쫒지만 그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이다. 그리고 칠턴의 블로그에 글을 올렸던 대상들이 차례로 살해를 당한다.



제프리 디버는 이 소설을 통해 살인범을 쫒는 스릴러적 재미와 함께 현대 인터넷 문화가 얼마나 왜곡되더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현대의 대중들은 인터넷에 올라 온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그래서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감정적으로 사건을 해석한다. 우리나라 역시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건, 얼마 전에 발생한 캣맘 살인사건 등에서 대중이 얼마나 단순하고 감정적으로 사건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지를 보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흔히 이야기 하는 신상털기를 통한 마녀사냥식의 피해자가 발생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대중들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 자신의 블로거의 인기만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점점 지면 신문들이 사라지고 인터넷 기사가 그것들을 대치하면서, 자극적이고 왜곡된 기사들만이 넘쳐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기사들이 올려져 있는 블로거가 인기를 끄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 사회에서는 알게 모르게 많은 피해자들이 발생하고 있다.


제프리 디버는 이 소설에서 이런 사회의 어두운 면을 그리고 있다. 현대의 블로거 문화와 인터넷 문화의 어두운 단면을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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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니체의 사상을 세 가지로 요약할 때 '초인사상', '힘에의 의지'(예전에 많은 책들에서는 '권력의 의지'라는 단어로 번역햇었는데, 이 책은 '힘에의 의지'라는 단어로 번역한다.), '영원회귀'로 이야기 한다. 이 세 가지 사상 중 가장 논란이 많은 사상이 바로 '영원회귀'이다.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그 반복되는 삶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없이 그대로 반복되는 삶인가, 아니면 자유의지에 의해 매 번 바뀔 수 있는 삶인가? 단지 이것은 니체의 생각 속에만 존재하는 삶인가? 그렇다면 이런 삶을 생각함으로서 우리가 얻는 심리적 효과는 무엇인가? 영원회귀는 이런 끊임없는 질문들을 이끌어 낸다.


 

이런 영원회귀의 사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학자가 우리에게는 정치철학자로 잘 알려진 '한나 아렌트'이다.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연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기에 그는 하이데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 사상을 조화를 시켜서 해석한다. 많은 학자들은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비판한다. 왜냐하면 힘을 가진 사람이 영원히 반복되는 삶에 갇힌다면, 그는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진정으로 힘에 의지를 가진 사람만이 반복되는 과거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탄생에서부터 지금에 이르는 과거 전체를 긍정할 때는 특정한 이유나 원인도 없이 현재의 순간을 긍정할 때이다. 이러한 대긍정의 순간은 강렬한 기쁨을 수반한다. 그때 우리는 이러한 기쁨이 존재하기 위해새서 과거에 경험했던 모든 고통과 고난이 반드시 필요했다고 느끼며, 나아가 자신이 그러한 것들을 원했다고 느낀다. 이 경우 우리는 자신의 힘이 최고도로 증대되었고 의지가 자유롭다고 느낀다. 최고의 힘 감정은 과거의 모든 일을 자신이 '그렇게 의욕했던 것'으로 재창조함으로써 주어진다. 이를 통해서만 우리는 니체가 말하는 과거에 대한 원한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 [니체를 읽는다] P120-1


그러나 이렇게 한나 아렌트처럼 영원회귀를 해석하면 결국 영원회귀는 심리적인 것이 되게 된다. 그래서 '알렉산더 네이하마스'는 이런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심리적인 것이라고 해석한다.


니체에게 우리의 삶이 정당화되는 때는 우리가 현재를 긍정하면서 또한 모든 과거도 긍정하는 순간이다. 그때 우리는 비록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일이 당시에 원하지 않았다 하더라고, 이제는 그 당시에 일어났던 것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러헥 과거를 긍정하는 자는 과거건 미래건, 우연적이건 의도적이건, 선이건 악이건, 세계의 모든 것의 영원회귀를 원한다. - [니체를 읽는다]P237


더 나아가 '아이반 솔'은 영원회귀가 역사적으로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심리적인 효과도 없다고 말한다. 솔은 똑같은 사건을 겪는다고 해도, 똑같은 사건을 알고 겪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똑같은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똑같은 사건이 반복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영원회귀가 실제로 존재한다 해도 당사자는 그 반복된 삶을 기억하지 못해야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것이 심리적으로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접할 때마다 나는 란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의 첫 부분이 생각난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찬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중에서


밀란 쿤데라는 니체의 영원회귀를 이야기 하지만 그것을 믿지는 않는다. 대신 그 영원회귀를 통해 실제 우리가 사는 삶을 대비시킨다. 밀란 쿤데라에게 영원회귀의 삶은 무거운 삶이고, 일회적인 삶은 가벼운 삶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사는 삶은 가벼운 삶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가벼운 삶에서 무거운 삶을 추구한다.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에서 가벼움이 옳은지, 무거움이 옳은지를 결론을 내지는 않는다. 다만 토마시라는 인간을 통해 가벼움과 무거움 속에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줄 뿐이다.



나는 니체 역시 토마시처럼 매 순간을 괴로워하고 갈등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초인이 되고 싶어하고, 힘에의 의지를 추구하는 니체에게 일회적인 삶이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삶이 일회적이고, 모두 죽음을 향해 가고, 죽음 후에 철저한 무(無)의 세계로 떨어진다면, 삶은 가볍다 못해 존재 가치가 없을테니까... 개인적으로 니체에게 영원회귀란 사상은 초인이 살아갈 수 있는 세계관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일회적인 삶이라면 초인도 영원회귀의 삶도 모두 허무한 것이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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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던트 모중석 스릴러 클럽 39
프레드 바르가스 지음, 양영란 옮김 / 비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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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게이션이 보편화 되기 전까지 주변사람들에게는 나는 '길치'로 유명했다. 한 두 번 간 길은 어김없이 헤매였고, 같은 길을 열 번 정도는 운전을 해야 어느 정도 길에 익숙할 정도였다. 심지어 새로운 일터에 출근할 때는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잘못된 길을 헤맨 적도 있었다. 이런 내게도 희한한 능력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지도를 보는 능력이었다. 어떤 위치에서도 지도를 보면 내가 있는 곳을 단번에 손가락으로 집을 수가 있었다. 이런 내 능력에 놀란 사람들은 내가 왜 길치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독도법의 소유자가 옆 사람의 복장을 터지게 하는 길치라니...


곰곰히 내 자신을 분석한 결과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뛰어난 직관능력 때문이었다. 나는 어디를 운전하든지, 이미 머리 속에 지도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내가 갈 길을 이 길이라고 확신을 한다. 그 다음에는 어떤 것도 무시한다. 표지판도, 주변 사람의 잔소리도... 오직 내 직관 능력만 믿고 간다. 그러다보니 전혀 엉뚱한 길을 들어서도 그 길이 맞다고 계속해서 앞으로 가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나도 반성을 할 줄 아는 인간이기에 어느 순간 내 직관능력에 대해 점점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내 차로 동료들과 함께 모임의 장소로 가던 중이었다. 이 날도 역시 내 직관 능력은 나에게 지금 가고 있는 길이 확실하다고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로 인해 여러 번 고생을 한 동료들은 목적지가 나오지 않자 분명히 길을 잘 못 들어섰다고 차를 돌리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결국 나도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차를 돌렸다. 한 시간이나 길을 헤매인 후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서야 차를 돌린 지점이 바로 목적지를 코 앞에 두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역시 내 직관능력은 틀림이 없었는데... 주변 사람들의 우격다짐에 스스로의 직관능력을 믿지 못한 결과였다.



프레드 바르가스의 [트라이던트]라는 소설의 서평을 쓰는 과정에서 서론이 길었다. 여기 또 한 명의 뛰어난 직관능력을 가진 수사관이 있다. '아담스베르그'형사이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아니라고 할 때도 뛰어난 직관 능력으로 수사를 밀고 나가 사건을 한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직관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고, 동료들도 그의 직관능력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런 그의 직관능력을 자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어느 날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한 여성을 살인사건을 발견한다. 그런데 그 사건이 갑자기 그의 뇌를 자극한다. 그 날 저녁 그는 도시의 골목을 걷다가 우연한 공연 포스터를 발견한다. 그리스 신화의 바다의 신 포세이돈(또는 넵툰)이 세발작살(크라이던트, 개인적으로는 삼지창이라는 표현이 더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한다.)을 들고 바다에서 나오는 장면의 포스터였다. 이 두 이미지가 그의 직관능력을 자극하고, 그는 신문의 살인현장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죽은 여성의 시신에서 배에 세 군데 상처가 나 있음을 발견한다. 그는 이 사건이 오래 전에 자신의 동생을 살인자로 누명을 씌었던 퓔장스 판사가 저지른 것이라고 확신한다. 


퓔장스 판사는 어린 시절 자신의 고향의 대저택에 살던 노인이었다. 그는 세발작살로 동생의 애인을 살해하고 동생에게 누명을 씌웠다. 그는 워낙 막강한 권한을 가진 판사 출신이기에 누구도 그를 범인이라고 의심하지 않았지만, 아담스베르그는 그가 범인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퓔장스판사의 행적을 쫓으며 그가 가는 곳마다 세발작살 자국의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18년 전 퓔장스판사가 죽은 후부터 그 사건을 잊어버렸다. 아담스베르그는 이 두 가지 이미지를 통해 죽은 퓔장스판사가 다시 부활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믿는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직관을 믿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가 퓔장스판사에 집착하다가 망상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수사가 교착 상태에 빠지던 중 그는 동료들과 함께 캐나다로 연수를 간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오솔길을 산책하던 중 미모의 '노엘라'라는 여성과 만나게 된다. 어느 날 저녁 그는 술기운에 정신을 잃고, 2시간 반의 기억을 잃어버린다. 그 시간에 노엘라는 세발작살 자국을 남긴채 살해 당한다. 아담스베르그는 퓔장스판사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캐나다까지 쫓아와 노엘라는 죽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아담스베르그가 퓔장스판사에 집착하다가 자신이 퓔장스판사의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그는 살인자로 몰려 도망을 다니게 되고, 점점 자신의 직관 능력에 의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과연 지금까지 내가 확신하고 있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내가 그녀를 죽였는가? 퓔장스 판사는 내 안의 무의식이 만든 또 다른 나인가? 마치 바다 속에서 넵툰이 세발작살을 가기고 나타나듯, 내 무의식에서 퓔장스 판사가 세발작살을 들고 노엘라는 죽였는가? 아담스베르그는 점점 자신의 직관능력을 믿지 못하고, 자신이 살인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과연 퓔장스 판사는 죽은 후 부활을 했을까? 아니면 그는 단지 아담스베르그가 만들어낸 망상일 뿐일까?



어설픈 직관능력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얼마 전까지도 친구들끼리 모이면 마피아 게임이라는 것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피와와 경찰과 시민으로 나뉘어지고, 누가 마피아인지를 밝혀내는 게임이다. 여기서 주변 사람들의 논리력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논리보다 직관을 중요시한다. 나는 논리적인 증거보다 나만의 직관으로 범인을 지적한다. 내가 마피아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마피아인 것이다. 결론은? 대부분 틀렸다! 그럼에도 다음 게임에서 나는 또 내 직관을 믿는다. 어설픈 직관으로 인해 그렇게 곤욕을 치루고서도...


모두들 뛰어나다고 인정하는 아담스베르그 형사를 보면서 왜 나는 어설픈 내 직관능력이 떠오르는 것일까? 헤어진 연인인 '카미유'가 부하 형사인 당글라르와 만나는 장면을 보고, 그는 당글라르가 카미유의 숨겨둔 남자라고 믿는다. 그러다가 카미유가 아이가 있는 것을 보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고 믿는다. 순간의 직관을 전부로 믿는 모습이다. 그런데 사건해결에서는 왜 그 직관력이 맞는 것일까? 


프레드 바르가스의 아담스베르그 형사 시리즈는 [트라이던트]로 처음 접했다. 그러기에 아직 그의 뛰어난 직관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다만 트라이던트에서는 그의 직관능력보다는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그의 직관능력을 보완하는 논리적인 보조관 당글라르, 누나처럼 그를 보호해 주는 한 덩치 하는 부하직원 르탕쿠르, 항상 그의 마른 엉덩이에 관심이 있는 클레망틴 할머니와 할머니 해커 조제트, 그를 감싸는 상관인 브레지용까지... 그의 어설픈 직관능력이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빛을 발한다. 물론 사건의 해결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그의 직관능력에 있지만...그의 어설픔을 훌륭한 부하인 당글라르나 르탕쿠르 조제트....클레망틴, 브레지용... 물론 이 모든 도움은 아담스베르그가 끝까지 자신의 직관 능력을 믿었기에 가능했을 테지만... 이것이 프레드 바르가스의 다른 작품에서의 아담스베르그의 활약이 더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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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철학의 해석에서 가장 권위있는 현대 철학자를 이야기 한다면 당연히 '마르틴 하이데거'를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이데거 철학은 어렵기로 소문이 나 있다. 젊은 시절에 개인적으로 존경하던 노교수님이 계셨다. 독일까지 가서 학위를 받으신 분이였는데도 하이데거를 이야기 하면서 자신은 아직도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셨다. 당시에는 참 겸손하신 분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하이데거의 책을 접해 본 후 그 말이 이해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니체의 해석에서 있어서 하이데거는 들뢰즈와 함께 독보적인 인물로 꼽힌다. 오래 전에 읽은 프랑스학자 앨런 슈프리트가 쓴 [니체와 해석의 문제]에서는 주로 하이데거와 데리다의 니체 해석에 대해 언급하는데, 두 학자의 상반된 니체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저작들에서 하나의 '총체성'을 발견해서 니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를 밝히려 하고 있다면, 데리다는 그 총체성이 니체를 해석하지 못하게 하는 병폐라고 이야기 한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니체의 저작들에서 나타나는 총체성이란 기존의 형이상학적 세계를 부정하고, 니힐리즘의 세계를 긍정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말 역시 인격적인 신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세계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니체를 읽는다]에서는 하이데거는 니체철학이 기존의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을 거부하고 '힘에의 의지'에 의해 니힐리즘적인 세계관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니체의 철학이 '힘에의 의지'를 통해 지배하는 철학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광기에 의해 지배당하는 철학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현대인은 자신을 힘에의 의지의 주체로 간주하지만, 사실은 힘에의 의지의 수단에 불과하다. 현대 기술사회에서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자들만이 인간을 위한 에너지를 내놓도록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마저도 존재자들에 대한 지배를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다 발휘하도록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존재자들에 대한 지배를 위해서 자신의 심신을 혹사한다. - 니체를 읽는다 P192


이 글을 읽으면서 아무 것에도 지배당하지 않는다고,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자부하던 니체와 그가 창조한 '차라투스트라'가 사실은 그 안에 있는 힘의 의지, 다른 말로 하면 '광기'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저자는 하이데거의 해석이 니체 자체의 사상이 아닌, 파시즘 사상가인 '윙거'의 해석에 영향을 받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주로 니체의 '초인사상'과 '권력의 의지'에 관심을 가졌다면, 칼뢰비트는 니체 사상의 '영원회귀'에 관심을 가졌다.(칼 뢰비트의 책도 민음사에서 출간된 책으로 읽었는지만, 그 방대함과 난해함 속에서 길을 잃었다.) 그는 고대에 기독교적 신관과 그리스적 자연관이 대립했었는데, 니체에 의해 후자가 다시 부활한 것으로 본다. 그는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은 세계의 근거를 신의 존재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게서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뢰비트는 니체의 사상이 공개적인면과 비교적인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한편으로는 니체가 김나지움 학생이었을 때부터 가졌던 "인간의 우연적 존재를 구원하는 것은 세계(자연)인가 인격적 하느님(비자연)인가"라는 고민, 혹은 자유의지와 필연성의 종합에 관한 고민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상이다. 그러나 고민에 대한 답변으로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윤리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인 명법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공개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반그리스도교적 복음으로서 이교주의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종교의 창립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적인 성격을 갖는다. 다시 말해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단순히 윤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죽음'이 후 우연한 운명만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새로운 종교를 건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 [니첼를 읽는다] P203-4



얼마 전 읽은 아지트 바르키의 [부정본능]이란 책에서는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진화할 수 있는 이유를 현실에서 죽음과 소멸을 부정하고, 현실 이후의 세계를 생각할 수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말을 한다. 이 말은 결국 인간의 존재와 문명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과 그 존재의 근거가 되는 본질에 대한 사유가 인간을 살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이란 존재자체는 자신이 서 있을 수 있는 세계관, 다른 말로 하면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세계와 세계 밖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생을 이어갈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망치의 철학자'라는 별명처럼 모든 것을 부순 니체는 그 텅빈 공간에 혼자 서 있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의 '영원회귀'사상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부수고 난 뒤에 찾아오는 그 허무함과 고독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세계관이 아니었을까? 비록 니체의 직접적인 생각은 들을 수 없지만, 니체의 해석자들을 통한 니체의 사상을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니체의 저작을 읽는 것과는 다른 또 다른 매력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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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제국사 - 고대 로마에서 G2 시대까지 제국은 어떻게 세계를 상상해왔는가
제인 버뱅크.프레더릭 쿠퍼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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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변치 않는 진리들을 발견됩니다. 우리가 이 진리들을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로마와 중국으로 대표되는 제국들의 역사를 이 책에서는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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