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니체의 사상을 세 가지로 요약할 때 '초인사상', '힘에의 의지'(예전에 많은 책들에서는 '권력의 의지'라는 단어로 번역햇었는데, 이 책은 '힘에의 의지'라는 단어로 번역한다.), '영원회귀'로 이야기 한다. 이 세 가지 사상 중 가장 논란이 많은 사상이 바로 '영원회귀'이다.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그 반복되는 삶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없이 그대로 반복되는 삶인가, 아니면 자유의지에 의해 매 번 바뀔 수 있는 삶인가? 단지 이것은 니체의 생각 속에만 존재하는 삶인가? 그렇다면 이런 삶을 생각함으로서 우리가 얻는 심리적 효과는 무엇인가? 영원회귀는 이런 끊임없는 질문들을 이끌어 낸다.


 

이런 영원회귀의 사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학자가 우리에게는 정치철학자로 잘 알려진 '한나 아렌트'이다.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연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기에 그는 하이데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 사상을 조화를 시켜서 해석한다. 많은 학자들은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비판한다. 왜냐하면 힘을 가진 사람이 영원히 반복되는 삶에 갇힌다면, 그는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진정으로 힘에 의지를 가진 사람만이 반복되는 과거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탄생에서부터 지금에 이르는 과거 전체를 긍정할 때는 특정한 이유나 원인도 없이 현재의 순간을 긍정할 때이다. 이러한 대긍정의 순간은 강렬한 기쁨을 수반한다. 그때 우리는 이러한 기쁨이 존재하기 위해새서 과거에 경험했던 모든 고통과 고난이 반드시 필요했다고 느끼며, 나아가 자신이 그러한 것들을 원했다고 느낀다. 이 경우 우리는 자신의 힘이 최고도로 증대되었고 의지가 자유롭다고 느낀다. 최고의 힘 감정은 과거의 모든 일을 자신이 '그렇게 의욕했던 것'으로 재창조함으로써 주어진다. 이를 통해서만 우리는 니체가 말하는 과거에 대한 원한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 [니체를 읽는다] P120-1


그러나 이렇게 한나 아렌트처럼 영원회귀를 해석하면 결국 영원회귀는 심리적인 것이 되게 된다. 그래서 '알렉산더 네이하마스'는 이런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심리적인 것이라고 해석한다.


니체에게 우리의 삶이 정당화되는 때는 우리가 현재를 긍정하면서 또한 모든 과거도 긍정하는 순간이다. 그때 우리는 비록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일이 당시에 원하지 않았다 하더라고, 이제는 그 당시에 일어났던 것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러헥 과거를 긍정하는 자는 과거건 미래건, 우연적이건 의도적이건, 선이건 악이건, 세계의 모든 것의 영원회귀를 원한다. - [니체를 읽는다]P237


더 나아가 '아이반 솔'은 영원회귀가 역사적으로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심리적인 효과도 없다고 말한다. 솔은 똑같은 사건을 겪는다고 해도, 똑같은 사건을 알고 겪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똑같은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똑같은 사건이 반복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영원회귀가 실제로 존재한다 해도 당사자는 그 반복된 삶을 기억하지 못해야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것이 심리적으로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접할 때마다 나는 란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의 첫 부분이 생각난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찬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중에서


밀란 쿤데라는 니체의 영원회귀를 이야기 하지만 그것을 믿지는 않는다. 대신 그 영원회귀를 통해 실제 우리가 사는 삶을 대비시킨다. 밀란 쿤데라에게 영원회귀의 삶은 무거운 삶이고, 일회적인 삶은 가벼운 삶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사는 삶은 가벼운 삶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가벼운 삶에서 무거운 삶을 추구한다.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에서 가벼움이 옳은지, 무거움이 옳은지를 결론을 내지는 않는다. 다만 토마시라는 인간을 통해 가벼움과 무거움 속에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줄 뿐이다.



나는 니체 역시 토마시처럼 매 순간을 괴로워하고 갈등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초인이 되고 싶어하고, 힘에의 의지를 추구하는 니체에게 일회적인 삶이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삶이 일회적이고, 모두 죽음을 향해 가고, 죽음 후에 철저한 무(無)의 세계로 떨어진다면, 삶은 가볍다 못해 존재 가치가 없을테니까... 개인적으로 니체에게 영원회귀란 사상은 초인이 살아갈 수 있는 세계관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일회적인 삶이라면 초인도 영원회귀의 삶도 모두 허무한 것이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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