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신앙과 지식]은 모두 55개의 단문으로 되어 있고, 전반부인 1~26번은 주로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라는 책을 통해 종교가 이성의 한계 안에서 도덕적으로 사유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밝히고 있다.

27번 이후부터는 '추신(POST-SCRIPTUM)'이라는 제목 하에 끝까지 이어지는데, 그중 37번까지는 <지하 납골당>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아쉽게도 아직까지 이 부제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정확히 파악을 하지 못 했다. 다만 데리다의 글 주에서 이 부제의 의미를 암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벌판에 널려 있는 동일한 수의 지하 납골당과 같다. 때로는 불모지대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는 사막처럼, 아니면 잔해들과 지뢰와 우물과 동굴 묘와 묘지 터와 종자 즐이 흩어져 잇는 벌판처럼, 우리가 이미 가까이 다가서고 있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은, 심지어 세계로서도 확인되지 않은 벌판의 지하 납골당. P148


이 부분에서 데리다의 종교에 대한 사유를 이끌고 있는 두 가지 개념은 '믿음의 경험'과 '신성함'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의 데리다가 베르그송의 [종교와 도덕의 두 원천]이란 책의 개념에서 가져온 것이다.

베르그송은 [종교와 도덕의 두 원천]이란 책에서 자신의 집단의 이익만을 고집하는 닫힌 사회에서 타인과 세계의 이익을 존중하는 열린 사회로의 도약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또한 정적인 종교에서 동적인 종교로의 도약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도약의 과정에서 종교의 두 원천인 '믿음의 경험'과 신성의 경험'으로 제시한다. '믿음의 경험'이란 반복적인 약속을 위해 물리적인 수단에 의존하는 경험이고, '신성의 경험'은 신비적인 경험이다.(번역자의 해제에서) 베르그송은 정적인 종교에서 동적인 종교로의 도약은 두 경험이 서로 보완하며 발전할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데리다는 이런 종교의 도약 과정을 '세계 라틴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종교의 신성성이, 믿음이의 경험인, 원격 과학기술(현대의 미디어 기술)과 결탁하여 종교성을 확대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이런 '세계 라틴화' 과정에서 '종교의 자기 면역성'이 등장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자기 면역성'이란 데리다 철학에서 사회와 종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인데, 이 개념은 911테러 이후 하버마스와의 대화를 다룬 [테러의 시대]라는 책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개념을 번역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명과 죽음은 단순히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생명 내부에는 죽음의 자리가 처음부터 기입되어 있다. 자가면역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생명 활동을 철학적으로 정식화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자가면역은 의학용어다. 데리다는 [신앙과 지식]에서 이 개념을 종교 현상에 적용하여 종교가 자신의 신성을 보호하기 위해 동원한 면역적 기제, 즉 원격 과학기술을 부지불식간에 신성을 다시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자가면역적 반격을 가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테러 시대의 철학]에서 이 비평적 개념은 국제정치에 적용되어 다시 한 번 그 적절성 및 효용성을 입증받았다. 해체가 하난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것이라면 자가면역성은 하나의 시스템을 스스로 붕괴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자가면역은 자기 해체의 논리를 밝힌 후기 데리다의 핵심적인 비평 개념인 것이다. P47


즉 종교의 자기 면역성라는 것은 종교가 세계 라틴화 과정을 스스로 해체한다는 것이다. 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확장해 가던 종교가 다시금 미디어를 통해 자기를 파괴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것을 현대의 종교전쟁의 원인으로 파악한다.

오늘날 종교는 자신이 전력을 다해 반작용하고 있는 원격 과학기술과 동맹을 맺고 있다. 종교는 한편으로 진정한 세계 라틴화이다. 종교는 자본과 미디어에 의해 원격적으로 전파되는 지식을 생산하고, 받아들이고 활용한다. 그렇지 않다면 교황의 방문과 세계적인 이슈화도,'살만 루슈디 사건'의 국가 간 공조도, 전 세계적 테러리즘도 이런 리듬으로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징후들을 무한히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종교는 곧바로, 동시에 반작용한다. 종교는 자신을 자신의 모든 고유의 장소로부터, 사실상 장소 자체로부터, 자신의 진실의 장소-가짐/일어남으로부터 쫓아내기 위해서 자기에게 이 새로운 권력을 부여하는 것에 전쟁을 선포한다. 종교는 이러한 모순적인, 즉 면역적이면서 자가면역적인 이중의 구조에 따라 자신을 위험하기 위해서만 자신을 보호하는 것에 맞서 끔찍한 전쟁을 수행한다. - 데리다의 [신앙과 지식] P159-160


이 부분의 데리다의 글들은 사실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앞의 글들이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헤겔의 [믿음과 지식],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대한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만 이해가 가능했다면, 이 부분은 베르그송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이라는 책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또한 이 부분에서 제시하는 데리다의 개념들, '세계 라틴화'나 '자기면역성'의 개념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데리다가 말하는 현대의 종교 전쟁의 개념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종교가 미디어와 관련하여 종교성을 발전시키다가 어느 순간 종교 내부 안에 있는 모순으로 인해(데리다는 이것을 유령이라는 개념으로 설명) 스스로를 해체시키고, 이 과정에서 종교 전쟁이 발생한다는 정도만 이해할 뿐이다.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앞에 언급한 책들과 함께 데리다와 하버마스의 대화 책인 [테러 시대의 철학]이란 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데리다의 [신앙과 지식]이라는 짧은 글은 모두 52개의 단문들로 구성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단문들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다. 특히 그 중 앞의 1번에서 26번까지는 주로 과거 철학자들의 이론을 통해 종교에 대해 사유하고, 27번부터 55번까지는 현대의 문화와 종교의 관련성을 사유한다.

 

앞의 종교에 대한 사유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철학자는 칸트이다. 데리다는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라는 책에 대해 주로 언급한다.(이 책의 번역자는 이 책을 [순수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아카넷이나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된 책의 제목은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이다.)

 

이 책에서 칸트는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이성 밖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성 안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도덕성 뿐이다. 칸트의 이 도덕성은 흔히 우리에게 정언명령으로 알려져 있는 보편타당한 법칙이다. 즉 인간은 누구나 자신 안에 있거나 타인과의 관계에 존재하는 정언명령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정언명령은 조건이나 이유가 없는 명령이다. 무엇 때문에나~ 무엇을 얻기 위해서~라는 말이 붙지를 않는다. 정언명령은 무조건적인 명령임으로 조건이나 결과의 보상없이 따를 뿐이다. 따라서 칸트는 우리가 신의 존재를 생각하고 신에게 보상을 받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도덕적인 행동이 아니라고 말을 한다. 칸트는 만약 조건이 있거나 보상을 바란다면 그것은 정언명령에 따르는 도적적 행위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반성적인 신앙'이다. 그리고 데리다 역시 이 칸트의 반성적 신앙을 지지한다.

 

도덕적인 종교로 말하자면 그것은 삶의 바른 행동에 관심을 보인다. 이 종교는 행함을 지시하고, 앞을 거기에 종속시키는 동시에 그로부터 불리시키며, 이러한 목적을 위해 행동하면서 더 선해질 것을 명령한다. 바로 "다음의 원리가 그 가치를 보존하는" 곳에서 말이다. 즉 "누구에게든 본질적이고 필요한 것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혹은 했는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구원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해야 할 바를 아는 것이다." 칸트는 그런 식으로 '반성적신앙', 즉 그 가능성이 우리의 논의 공간 자체를 열어줄 수 있는 개념을 정의한다. 반성적 신앙은 본질적으로 어떤 역사적 계시에도 의존하지 않고 순수한 실천 이성의 합리성에만 부합하기 때문에 지직 너머의 선의지를 장려한다. 따라서 반성적 신앙은 독단적 신앙에 맞선다. 그것은 이런 '독단적 신앙'과 뚜렷이 구별되는 이유는 후자의 경우에는 신앙과 지식의 차이를 안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 데리다의 [신앙과 지식] 중에서

 

데리다는 이성으로 인식할 수 없는 기존 교리에만 집착하는 종교를 '독단적인 신앙'라고 말하고,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도덕을 행하는 종교를 '반성적 신앙'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데리다가 칸트의 주장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는 칸트가 이야기하는 도덕종교가 기독교에만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칸트를 극복하기 위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이론을 받아들인다. 그는 하이데거를 통해 기독교 안에만 갇혀 있던 도덕종교에 대한 논의를 보편종교로 확대한다. 

 

 


개인적으로는 철학자의 사상이 그 뒤의 해석자에게게 오해받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를 칸트라고 생각한다. 칸트는 우리의 순수이성이 신의 존재와 같은 신앙적인 것을 인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그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 도덕을 인식할 수 있고, 그 도덕을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정언명령으로 보았다. 이 정언명령은 인간의 내부 안에 존재하고, 그것의 근원은 '선의지'이다. 이로 인해 기독교학자들은 칸트가 기독교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이성주의자나 이신론자들은 칸트가 신의 존재를 배제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칸트가 이성 넘어의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이, 이성 넘어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칸트에게 있어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해석이 가능하다. '인식할 수 없기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의 세계를 주장할 때 표상의 세계의 기반으로 의지의 세계를 이야기 하듯이, 칸트 역시 이성의 한계에서 인식되는 도덕의 세계를 이야기 할 때 그 기반에는 이성의 한계 넘어의 세계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정언명령'이나 '선의지'는 이성의 기반 위에 서 있는 우연적인 부산물들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의 한계에 넘어 있는 존재론적인 것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칸트 후대의 사람들은 칸트의 전제를 무시한다. 그리고 데리다 역시 예외는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데리다의 글을 읽으며 데리다가 칸트를 무시하기 보다는 칸트에게서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는 부분만 받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남어지 부분은 하이데거나 다른 학자들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데리다는 칸트, 헤겔, 하이데거와 같은 학자들의 글을 해체해서 자신만의 종교에 대한 사유를 진행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공하는 남자는 수트를 입는다 - 장미라사의 남자옷 이야기
이영원 지음 / 버튼북스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나라에도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양복 명가의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주는 책이네요. 수트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추천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은 누구나 다중인격 - 내 안의 숨겨진 가능성을 발견하는 새로운 자아 관리법
다사카 히로시 지음, 김윤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어린 시절에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교적 무난한 시기를 보냈다. 그러다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커다란 좌절을 맛 본 시기가 군대에서였다. 많은 동기들끼리 논산훈려소에서부터 함께 지내다가 상급부대를 거쳐 하급부대까지 내려갔을 때 남은 동기는 한 명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 둘은 훈련소에서부터 2년이 넘는 군생활을 함께 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나와는 성격이 영 반대인 것이다. 유들유들해야 하다고나 해야 할까. 이 고참, 저 고참 비위를 참 잘 맞추었다. 이 친구 입에서는 보통 이런 말들이 자주 나왔다. "김병장님! 어떻게 이렇게 일을 잘하시지 말입니다!" 후임병들을 다루는데에도 능숙했다. 후임병들에게 하는 말은 "내가 너희들때는 말야..." 주로 이런 말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군대생활에 특화된 인격을 가진 친구였다. 반면에 나는... 이 부분은 글로 쓰면서도 참 미적거리는 부분이다. 고지식하다는 평가를 받는 나는 고참들에게는 버릇없는 후임병이었고, 후임병들에게는 만만한 고참이었다. 그래서 군대있는 동안 내 자신의 인격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다행히 시간에 여유가 있는 업무를 했기에 많은 책들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 때 처음 프로이드와 융의 책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격과 무의식 대한 고민들을 하게 되었다.


이런 심리학 책들을 통해 인격과 무의식에 대한 많은 성찰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학문적인 개념들을 내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다. 일본인 저자인 다사카 히로시가 쓴 [사람은 누구나 다중인격]이란 책을 읽으며 다시금 내 자신의 인격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이 책은 '다중인격'이라는 개념을 인터뷰 형식으로 읽기 쉽게 풀어가고 있다. 특이한 것은 저자가 이야기 하는 '다중인격'이 그동안 우리가 알던 상식과는 다른 방향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다중인격, 한 사람 안에 여러 가지 인격이 있는 사람들을 건강하지 못한사람으로 생각한다. 더 심하게는 정신병자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누구에게나 여러 가지 인격이 있고, 오히려 이런 여러 가지 인격을 가진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는 이렇게 여러 가지 인격을 가진 사람이 사회에서 성공을 하고, 큰 인물이 된다고까지 말한다.


저자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우리는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인격을 유용하게 변화해야 그 상황에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상사로서 너그럽게 부하 직원을 대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강하게 이끌어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말씀하신 그런 인상을 부정할 수는 없어요. 다른 말로 하면 '그릇이 큰 리더'가 별로 없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릇이란 말의 진짜 의미는 '자기 안에 몇 개의 자신, 몇 가지의 인격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전부터 그런 능력을 갖춘 이들을 '그릇이 큰 정치인', '그릇이 큰 경영자'로 불러 온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의 인격만을 가지고, 자연스러운 인격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은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게 된다. 또한 하나의 강한 인격에 의해 다른 인격들이 억압되어 있는 사람은 건강하지 못한 인격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한 가지 입장이나 상황에서 쓰는 가면이 특히 너무 단단하면 다른 상황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거든요. 페르소나가 단단하다는 의미는 어떤 하나의 입장이나 상황에서 쓰고 잇는 페르소나를 변화에 맞추어 다른 페르소나로 유연하게 전환할 수 없다는 뜻이예요. 입장 혹은 상황이 다랄짐에 따라 하나의 인격을 다른 인격으로 유연하게 교체할 수 없다는 의미인 것이죠. 반대로 페르소나가 단단하지 않은 사람, 즉 인격이 유연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하나의 인격에서 다른 인격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갈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다중인격은 심리학에서 이야기 하는 정신적인 해리성장애(한 인격이 다른 인격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증상)과는 다른 것이다. 저자는 한 인격 안에서 다른 여러 가지 인격이 통합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것을 건강한 인격으로 본다. 그러기 위해서 저자는 우리의 숨겨진 인격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택한다. 내 인격과 성격에 맞는 일을 고르고, 그렇지 않은 일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를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행동이 다양한 인격개발을 막고, 자신의 인격을 억압하는 행동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그 일을 해가며 그 일에 맞는 인격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에는 이런 인격을 개발하는 법에 대한 쉽고 자세한 설명들이 이어진다.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하나의 인격을 가진 사람을 정직한 사람으로 보고, 다양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을 이중인격자나 기회주의자라고 비난을 했다. 그러기에 어떤 상황에서나 한 가지 변함없는 인격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을 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때로는 다양한 인격으로 상황과 사람을 대처하는 것이 오히려 건강한 삶이 아닌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물론 뭐든지 과하면 좋지 않다고 생각하다. 너무나 쉽게 다양한 인격을 상황에 맞게 전환시키는 것은 자신이나 타인에게 정직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하나의 인격 안에 여러 가지 인격이 통합되며, 부드러운 전환이 있을 때 그것이 건강한 인격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인격은 저자의 말처럼 자신을 훈련하고 단련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흔히 철학에서 칸트의 인식론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부른다. 칸트의 철학이 태양을 비롯한 하늘이 돈다는 천동설의 기존개념을 깨고,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처럼 획기적이기 때문이다. 다중인격을 긍정하고, 이를 개발할 것을 조언하는 저자의 주장은 심리학적인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기존의 우리가 거부하던 다양한 인격에 대한 개념을 새로운 시각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해 주고 있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심리학 서적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다가 다중인격에 관련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인격의 개념을 완전히 뒤바꾸고 있는 책이다. 철학에서 칸트의 인식론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부른다면, 이 책은 '심리학적 전회'라고 부를만큼 기존의 상식을 뒤업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본 열도는 왜 후진하는가 - 반 글로벌 사회 정치 문화
이만희 지음 / 인간사랑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한참 일본 문화 배우기가 열풍이었다. '국화와 칼'이라는 책, 전여옥의 일본에 관한 책, 그리고 이규형 작가의 일본 사무라이 문화에 관한 책들이 있기였다. 당시는 어떻게든 일본을 배우고, 일본을 따라잡는 것이 국가적인 과제가 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이제는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을 이야기 한다. 이제 일본의 위기를 보면서 우리에게 닥칠 위기를 대비하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책은 오랜 시간 일본에서 교수로 제직한 저자가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 왜 일본이 몰락하고 있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단순히 현재 일본의 모습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시작과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왜 일본이 이런 몰락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야기 한다.


먼저 저자는 일본의 경제적으로 성공한 이유를 '글로벌화'라고 제시한다. 일본이 국가적인 체계를 갖춘 것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야마토 정권이 세워지면서 부터이다. 당시 야마토 정권은 국가로 부르기에는 너무나 작은, 일본의 한 지역을 다스리는 세력이었다. 그런 야마토 정권이 백제를 비롯한 당시 선진국의 문물과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급속이 발전한다. 이 과정에서 불교세력과 토착종교세력, 즉 글로벌화를 지지하는 세력과 수구세력간에 세력다툼이 벌어진다. 결국 글로벌화를 지지하는 세력이 승리하면서 야마토 정권은 국가적인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 후 일본의 역사는 이런 글로벌화를 받아들이는 세력과 이를 거부하는 세력과의 다툼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전자가 승리를 잡을 때 일본이라는 나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메이지유신이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개방 이후 밀려오는 서구세력에 대처하기 위해 일본 스스로가 체제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물론 과거처럼 이 과정에도 글로벌화 세력과 보수세력간의 다툼이 있었지만, 결국 글로벌화 세력이 승리를 햇다. 그리고 일본이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며 급격히 세계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전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패전 이후 일본의 발전방향을 수출중심의 국제주의에서 찾자는 세력과 국내 자원개발을 우선순위로 두는 개발주의의 대립이 있었다. 그러나 전후 첫 수상인 요시다 수상의 국제주의가 승리하면서 일본은 글로벌화를 통해 세계 경제 강국이 되었다.


이런 과거를 가지고 있던 일본이 고도의 경제성장 이후 성공에 안주하면서 점차 반글로벌화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이 과정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왜 일본은 이렇게 추락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5-80년대의 고도 성장에 도취한 나머지 사회, 정치, 문화가 외형적으로는 글로벌화의 길을 걷고 있지만, 실제로는 반 글로벌화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 비교해 보자. 당시는 3위와의 격차가 컸기 때문에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걸어도 2위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안주하여 '제 자리 걸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정보화의 물결을 타고 달려드는 토끼에게 추월당하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P65-6)


저자는 자신이 직접 일본에 살면서 느꼈던 일본의 반글로벌 문화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이 일본의 조직문화이다. 일본은 철저하게 위계질서적 관료문화가 강한 나라이다. 따라서 개인이 어떠한 상황을 결정한 권한이 없고, 개인 역시도 그 결정에 따른 책임을 지기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윗선에서 그 결정이 내려올 때까지 계속해서 기다려야 하며, 이로인해 일처리의 속도가 매우 늦다. 이것은 일본 사회 전반적인 '매너리즘'을 낳게 하고, 일본 사회를 정체하고 후퇴하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저자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사태'를 이야기 한다. 일본에 쓰나미가 닥치고, 원전이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될 때도 일본의 관료들을 이것을 직접적으로 해결하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윗선의 지시를 기다리고, 계속되는 서류작업과 절차작업에 매달리며 시간을 허송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재민들의 숙소를 짖는데도 거이 5-6개월이 걸렸다는 것이다.


이런 문화의 결과 일본의 경제가 침체하면서 더 반글로벌화적인 아베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저자는 아베 노믹스의 성과가 외부에서 보는 것만큼의 효과가 없다고 말한다. 저자가 보기에 아베 노믹스는 인기영합 정책이며, 아베노믹스의 핵심이 금리인하와 엔화풀기는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강하다고 말한다.


그 이후 자리잡은 것이 고객 만족형 모델이다. 기업의 성장으로 전략적 자원 배분은 없어졌으나, 정부가 계속 기업의 행동에 간섭하는 형태이다. 경기가 활성화되면 정부로서는 굳이 특정 고객이나 산업을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 장기 침체로 국가 경영 능력이 의문시되자 정부는 특정 고객을 만족시키는 모델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지지 기반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계산이다. 이 모델은 정경유착, 그리고 취약한 부문(농법과 같은)등의 특정 고객을 배려하는 국가 경영을 낳는다. 어떤 의미에는 인기영합우의에 가깝다.

아베 정궈느이 '아베 노믹스'는 고객 만족형 국가 경영의 단면을 보여 준다. 대기업과 유착하면서 그들의 법인세 감면, 지방의 공공사업 발주 요구, 농업 부분의 구조 개혁 요구를 받아들이고 있다. 국가 경영 능력이 취약한 정권으로서 고객을 만족시키려면 어쩔 수 없느 ㄴ선택이다. 이것이 일본이 재정 악화를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2014년 현재 일본의 공공부채는 GDP의 235%에 달하고 있다. 그 반면에 한국의 공공 부채는 2014년 현재 GDP의 64.5%정도에 달하고 있다. (P82-3)


전 경제 산업성 고위 관료는 아베 노믹스가 아베를 중심으로 한 매파 폭주조이 주도하는 잘못된 국가 경제의 표출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것은 국민적 관심을 불러 모으려는 정치화된 수단에 불과하다고 본다. 아베 수상은 매력적인 비전을 보얏으나, 전혀 소용없는 정책들을 남발하고 있따. 예컨대 국민의 높은 기대를 유지하기 위하여 제시한 지방 경제의 부활이 그것이다. 불경기는 개선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도교 중심의 주가 상승을 업적으로 제시한다. 그 관료는 아베 수상이 아벡 노믹스를 통하여 국민을 마약 중독자로 내몰고 있다고 비판했다. 나아가 분명히 아베 노믹스는 잘못된 정책으로 실패할 것이고 시장졍제를 왜곡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다른 경제학자는 아베 노믹스를 사기극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비정동적인 양적 완화는 자기 파괴적 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아베 노믹스를 마약과 같은 것이라고 조롱했따. 역설적으로 양적 완화 이후 수출은 감소하고 불황은 더욱 심각해졌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사실 그렇다. 또 다른 학자는 아베 수상이 아베 노믹스를 통하여 국가 경제를 고위험 도박에 빠뜨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P194)

 

저자는 아베 정권이 계속해서 정권을 잡고 있는 한 일본에는 미래가 없다고 말한다. 일본의 성장과정과 침체 과정,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들을 보면서 이 모든 과정이 너무나 우리와 닮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경제성장 이후 일본사회가 빠져 있던 위계질서적인 관료사회, 그리고 이로 인해 오는 매너리즘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지금 우리의 분위기이다. 이런 일본사태의 위기가 동일본지진과 원전사태로 나타났다면, 우리 사회의 위기는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사건에서 나타났을 것이다. 아베 정권이 이렇게 나타난 사회적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기 위해하기 보다는 금리인하나 엔화풀기 등 기업이나 지지세력의 이익에 맞춘 인기영합정책을 쓰는 과정 역시 우리와 닮아 있다. 마지막으로 아베 노믹스의 금리인화를 통한 내수진작과 같은 정책의 부작용이 우리나라에도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 우리가 일본의 성공을 배웠으면, 이제 일본의 위기를 보고 대처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