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신앙과 지식]이라는 짧은 글은 모두 52개의 단문들로 구성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단문들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다. 특히 그 중 앞의 1번에서 26번까지는 주로 과거 철학자들의 이론을 통해 종교에 대해 사유하고, 27번부터 55번까지는 현대의 문화와 종교의 관련성을 사유한다.
앞의 종교에 대한 사유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철학자는 칸트이다. 데리다는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라는 책에 대해 주로 언급한다.(이 책의 번역자는 이 책을 [순수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아카넷이나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된 책의 제목은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이다.)
이 책에서 칸트는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이성 밖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성 안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도덕성 뿐이다. 칸트의 이 도덕성은 흔히 우리에게 정언명령으로 알려져 있는 보편타당한 법칙이다. 즉 인간은 누구나 자신 안에 있거나 타인과의 관계에 존재하는 정언명령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정언명령은 조건이나 이유가 없는 명령이다. 무엇 때문에나~ 무엇을 얻기 위해서~라는 말이 붙지를 않는다. 정언명령은 무조건적인 명령임으로 조건이나 결과의 보상없이 따를 뿐이다. 따라서 칸트는 우리가 신의 존재를 생각하고 신에게 보상을 받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도덕적인 행동이 아니라고 말을 한다. 칸트는 만약 조건이 있거나 보상을 바란다면 그것은 정언명령에 따르는 도적적 행위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반성적인 신앙'이다. 그리고 데리다 역시 이 칸트의 반성적 신앙을 지지한다.
도덕적인 종교로 말하자면 그것은 삶의 바른 행동에 관심을 보인다. 이 종교는 행함을 지시하고, 앞을 거기에 종속시키는 동시에 그로부터 불리시키며, 이러한 목적을 위해 행동하면서 더 선해질 것을 명령한다. 바로 "다음의 원리가 그 가치를 보존하는" 곳에서 말이다. 즉 "누구에게든 본질적이고 필요한 것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혹은 했는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구원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해야 할 바를 아는 것이다." 칸트는 그런 식으로 '반성적신앙', 즉 그 가능성이 우리의 논의 공간 자체를 열어줄 수 있는 개념을 정의한다. 반성적 신앙은 본질적으로 어떤 역사적 계시에도 의존하지 않고 순수한 실천 이성의 합리성에만 부합하기 때문에 지직 너머의 선의지를 장려한다. 따라서 반성적 신앙은 독단적 신앙에 맞선다. 그것은 이런 '독단적 신앙'과 뚜렷이 구별되는 이유는 후자의 경우에는 신앙과 지식의 차이를 안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 데리다의 [신앙과 지식] 중에서
데리다는 이성으로 인식할 수 없는 기존 교리에만 집착하는 종교를 '독단적인 신앙'라고 말하고,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도덕을 행하는 종교를 '반성적 신앙'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데리다가 칸트의 주장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는 칸트가 이야기하는 도덕종교가 기독교에만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칸트를 극복하기 위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이론을 받아들인다. 그는 하이데거를 통해 기독교 안에만 갇혀 있던 도덕종교에 대한 논의를 보편종교로 확대한다.
개인적으로는 철학자의 사상이 그 뒤의 해석자에게게 오해받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를 칸트라고 생각한다. 칸트는 우리의 순수이성이 신의 존재와 같은 신앙적인 것을 인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그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 도덕을 인식할 수 있고, 그 도덕을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정언명령으로 보았다. 이 정언명령은 인간의 내부 안에 존재하고, 그것의 근원은 '선의지'이다. 이로 인해 기독교학자들은 칸트가 기독교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이성주의자나 이신론자들은 칸트가 신의 존재를 배제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칸트가 이성 넘어의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이, 이성 넘어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칸트에게 있어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해석이 가능하다. '인식할 수 없기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의 세계를 주장할 때 표상의 세계의 기반으로 의지의 세계를 이야기 하듯이, 칸트 역시 이성의 한계에서 인식되는 도덕의 세계를 이야기 할 때 그 기반에는 이성의 한계 넘어의 세계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정언명령'이나 '선의지'는 이성의 기반 위에 서 있는 우연적인 부산물들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의 한계에 넘어 있는 존재론적인 것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칸트 후대의 사람들은 칸트의 전제를 무시한다. 그리고 데리다 역시 예외는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데리다의 글을 읽으며 데리다가 칸트를 무시하기 보다는 칸트에게서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는 부분만 받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남어지 부분은 하이데거나 다른 학자들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데리다는 칸트, 헤겔, 하이데거와 같은 학자들의 글을 해체해서 자신만의 종교에 대한 사유를 진행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