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 데리다 들뢰즈 지식인마을 33
박영욱 지음 / 김영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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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데리다와 들뢰즈라는 철학자는 정복하다가 실패한 성과 같다. 몇 년 전인가 한국에서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이란 책이 매우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나 역시 그 독특한 제목에 이끌려 이 책을 읽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내 능력으로는 독해 불가능한 책이었다. 그 후 이 책에 대한 해설서인 [노마디즘]이란 책이 다시 인기를 얻었었다. 역시 이 책을 구입했었지만 방대한 양과 당시의 부족한 시간으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들뢰즈란 성의 정복은 멀어져 갔다.

올해 다시금 니체 철학에 관한 책을 읽으며, 데리다와 들뢰즈의 니체 해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들뢰즈 역시 데리다처럼 읽기가 어려웠다. 특히 그의 아포리즘적인 글들을 거의 독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데리다 역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이런 두 번의 실패가 결국 데리다나 들뢰즈가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는 것을 깨닫고, 둘의 사상, 특히 용어 부분을 쉽게 해설한 책들을 찾는 중에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책은 김영사의 '지식인 마을'시리즈로 나온 데리다와 들뢰즈의 해설서로서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라는 부제 목을 가지고 있다.

데리다와 들뢰즈에 대한 책을 구입하기에 앞서 인터넷 서점을  비롯한 여러 포털 사이트에서 이와 관련된 책들의 서평을 읽어 보았다. 대부분 철학서적에 대한 서평은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혹독한 서평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이 책의 서평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너무나 좋지 않은 평가로 인해 이 책을 구입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러나 일부 철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는 타인의 저작을 너무 간단하게 평가 절하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알기에, 고려하고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난 개인적 평가부터 말하자면, 접근 방법이 매우 신선하고, 철학의 초보자들, 특히 데리다와 들뢰즈의 철학에 처음 접근하려는 사람들에게 매우 쉬운 방법으로 이들의 철학을 소개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런 시도가 인문학적으로 매우 유익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어느 그룹이든 울타리 밖의 외부와의 대화를 위한 시도가 없어지며 결국 자기 울타리 안에서 갇혀서 영영 외부와의 소통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이런 시도는 매우 신선한 시도이며 일반인들도 철학을 이해하기 쉽게 하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책이 데리다와 들뢰즈의 철학을 쉽게 소개했다 뿐이지, 데리다와 들뢰즤의 철학은 워낙 난해하기에 그들의 철학은 쉽게 소개했다고 해도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다만 이 책에서 너무 예술적이고 미학적인 부분에 맞추어 이들의 철학을 소개한 부분은 조금은 당황스럽게 하는 부분이었다.

이 책은 주로 데리다와 들뢰즈가 주로 사용한 용어들을 현대 예술과 건축 등에 비추어 설명하고 있다.

1. 먼저 이 책은 들뢰즈의 철학의 핵심인 '차이'의 개념에 대해서 설명한다. 들뢰즈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용어인 '차이'는 기존의 도식화된 개념에 대한 반발로 사용되었다. 칸트는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인식 작용으로 이성과 감성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사물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감성을 통해 도식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원의 개념을 '한 점에서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라는 이성적인 개념보다는 원이라는 모양으로 도식화하여 개념적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도식적 이해는 다른 이해를 모두 함몰시킨다. 일단 원이라는 하나의 대표적인 도식으로 원들을 인식하게 되면, 다른 원들이 가진 개성들은 그 개념에 모두 함몰되게 된다. 들뢰즈는 이것이 서구 사상이 진부함이라는 틀에 갇히게 된 원인을 보고, 개념에 묻히지 않는 다양성, 차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 데리다는 '차이'라는 단어 대신 '차연'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프랑스어의 'differance'를 번역한 것이다. 원래 차이라는 프랑스 단어는 'differance'이다. 데리다는 기존의 차이라는 단어의 거부감 때문에 새로운 단어를 만든다.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이란 언어의 현재 진행성을 포함하고 있다. 언어가 하나의 개념을 가지게 되면, 모든 의미가 그 개념에 갇히게 된다. 생각이 말에 갇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은 이기적이야!'라는 말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의 모든 다양성이 '이기적'이라는 개념에 갇혀서, 그 사람에 대한 생각 중 다른 면들을 사라지고, 오직 '이기적이'라는 개념만이 대표하게 된다. 그러나 데리다는 개념의 의미들은 계속 바뀌고 변화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런 의미에서 '차연'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3. 들뢰즈는 존재를 '다양체'로 본다. 칸트는 개념(Begriff)과 이념(dee)을 구분한다. 개념이 사물에 대한 보편적인 어휘라면, 이념은 그 사물 안에 포함된 여러 가지 성질 들을 이념이라고 한다. 들뢰즈는 우리들이 사용하는 개념들이 다양한 이념들을 사라지게 한다고 보았다. 이런 들뢰즈의 생각은 베르그송에게서 영향을 받았는데, 베르그송은 인간의 지각 작용을 도려냄 (뺄셈 과정)으로 보았다. 즉 우리가 한 가지 사물을 개념으로 지각한다는 것은 그 사물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다양성을 모두 제거하고, 한 가지 개념으로만 이해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사물에 다양성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4. 데리다는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허문다. 기존의 철학은 칸트의 합목적성과 관련하여 무언가가 의미가 있으려면 그것이 목적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데리다는 의미와 무의미는 상호 연관되어 있을 뿐 경계가 없다고 보았다. 저자는 이것을 예술 작품을 통해서 설명한다. 하나의 예술 작품은 단지 그 작품 내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의 전시 공간이나 배경을 통해서도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5. 데리다는 세계와 인간을 '기계적' 존재로 이해한다. 여기서 기계적이란 것은 단지 자동차나 로봇 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감각적으로 보는 세상의 표면의 밑에는 시계 부품처럼 정밀한 체계로 이루어진 세계가 존재한다고 보았다.(수학적 세계관) 들뢰즈는 세상과 존재하는 것은 나름대로 내면에 체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기계적 존재를 '절단'과 '연결'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기계적인 존재는 표면적인 것과 심층적인 것의 절단을 통해 존재한다. 특히 현대사회로 갈수록 이 절단은 심해진다. 그럼에도 이 절단은 완전한 절단이 아닌 표면적인 것과 심층적인 것의 연결 속에 존재한다. 이것을 다시 '수목적인 것'과 '리좀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수목적인 것'은 표면에 드러나는 것이고, '리좀적인 것'은 심층적인 것이다.

이상이 이 책으로 이해한 데리다와 들뢰즈의 사상적이 용어들이다. 이 책은 처음에는 쉽게 데리다와 들뢰즈의 사상을 출발점을 이야기하다가 점점 그들의 사상 깊숙이 들어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데리다와 들뢰즈의 서구 사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상들을 전개하다가 그 결론으로 예술작품이나 건축으로 끝맺는다. 쉽게 말하면 데리다가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허물었는데, 그래서 어떠 어떠한 현대 미술작품이 나왔다는 식이다. 데리다와 들뢰즈가 서구 사상과 문화에 끼친 전반전이 영향을 알고 싶었던 개인적인 의도와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데리다와 들뢰즈라는 성을 공략하기 위한 공성 단계를 시작하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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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
모리 아키마로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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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봄날이 되고, 벚꽃이 피면 가끔은 대학 신입생 시절이 생각난다. 모든 긴장감이 사라지고, 사람을 나른하게 만드는 대학 캠퍼스의 봄날. 당시는 지금 느끼는 삶의 긴장감도,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조바심도 없었다. 50분 수업의 10분 쉬는 시간처럼, 그렇게 쉬는 듯이 봄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황금가지에서 나온 '블랙 로맨스 클럽' 시리즈의 [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라는 소설의 표지를 보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내가 다니던 대학교 앞의 커다란 벚꽃 나무였다. 아침에 강의실로 들어가기 위해서 언덕 위를 걸어가다 보면, 학교 입구에서 오래된 커다란 벚꽃 나무를 만났었다. 벚꽃이 만발할 때는 차마 그곳을 그냥 지날 수 없어서, 나무 밑의 벤치에서 한참을 앉아있다가 강의에 늦곤 했었다. 그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이 소설은 '술잔'이란 별명을 가진 한때 잘 나가던 아역배우 출신의 '사카즈키 조코'가 '취연'이라는 술 마시기만이 유일한 활동인 동아리에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조코는 원래 '추리'동아리에 들어가고 싶어 했지만 이름을 착각해 '취연'에 가입한다. 그리고 두 번이나 유급을 당해 3년 동안 1학년인 동아리 회장인 미키지마 선배에게 약점을 잡혀 계속해서 '취연'에 남게 된다. 조코의 약점이란 그녀가 숨기고 싶은 어린 시절의 연기 경력이다. 어찌 된 일인지 미키지마는 첫눈에 사카즈키 조코를 알아 본다.(이유는 맨 마지막에 나온다.)

그렇게 해서 '취연'과 얽히게 된 그녀는 '취연'을 중심으로 한 사건들에 휘말리게 되고, 미키지마 선배의 도움으로 그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게 된다. 그렇다고 사건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추리소설 마니아인 조코는 살인사건과 같은 큰 사건을 기대하지만 대부분의 사건은 남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해로 인한 황당한 사건들이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누구나 그렇듯 그런 사소한 오해들이 인생의 전부를 담고 있다.

첫 번째 사건은 봄날 벚꽃이 만발한 술자리에서 취연의 미모의 여학생 '에리카'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미쓰토리'라는 선배도 사라져 한참 만에 돌아온다. 그리고 그날 저녁 에리카는 영영 술자리에 돌아오지 않는다. 이런 분위가 너무나 익숙하다. 대학시절 술자리에서 보면 항상 사라지는 남녀가 있다. 그리고 얼마 후 둘이 사귀던지, 어색한 사이가 되던지... 이 사건에 담긴 진실은 무엇일까?

두 번째 사건은 대학 대항의 야구 경기에서 벌어진다. 취연의 삼수생 오야마 선배가 썸을 타는 여자친구에게 함께 야구를 보러 가자고 요청했다가 바람을 맞는다. 대학 캠퍼스에서 벌어지는 스포츠 경기와 얼큰하게 취한 학생들, 그리고 그 가운데 벌어지는 미묘한 남녀 관계...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세 번째 사건은 동아리 MT에서 벌어진 미키지마 선배의 옛사랑이 이야기이다. 항상 추억으로 기억되는 대학 MT. 이때면 꼭 졸업한 선배 한두 명이 방문하는데, 이번에는 미키지마와 사귀었던 미우 선배라는 여자이다. 미우는 지금 잘 나가는 여배우이다. 미키지마와 미우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미키지마를 좋아하는 조코는 조바심이 나고... 동아리 MT에서의 남녀간의 미묘한 감정과 그 감정 속에 숨겨진 사건들... (글 쓰면서 감정이입이 너무 되는 듯^^ )

네 번째 사건은 대학 축제 때 벌어진 사건... 동아리 퇴출 위기에 빠져서 대학 내 주점도 열지 못하게 된 취연이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을 낸다. 대학 축제의 술판? 문화가 생각난다^^

마지막 사건은 대학교라는 배경을 떠난 조코와 미키지마가 낯선 곳에서 만난다. 그리고 미묘한 사건들 속에서 둘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다.

조코와 미키지마를 중심으로 한 '취연'의 사람들은 어쩌면 한심한 사람들이다. 하는 일이라고는 매일 술판만 벌이는 것이다. 모두 취해서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시고, 장래나 미래에 대한 계획은 없다. 조코 역시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렇게 시간 낭비인 것 같은 시간들 속에서 그들은 미래를 찾아간다.

그 시절 그런 낭비 아닌 낭비의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달릴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러기에 봄날이면 그 낭비의 시간들이 그리워진다. 다시금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여유롭게 봄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들이 다시 올 수 있을까? 그때의 그 미묘하고 떨리는 감정들이 다시금 찾아올 수 있을까? 봄날의 캠퍼스의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 이색적인 추리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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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의 [세기와 용서]는 '미셸 비비오르카'와의 대담 내용으로서 [신앙과 지식]이라는 글과 한 책 안에 실려 있다. 데리다가 [신앙과 지식]에서 주로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란 책에 대해 데리다적인 시각으로 해석을 했다면, [세기와 용서]에서는 주로 '얀켈레비치'의 [용서]와 [공소시효 없음]이라는 책에 대해 데리다적인 시각으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한나 아렌트'의 글들도 언급되고 있다.

얀켈레비치는 이 책에서 용서에 조건을 붙였다.(이것은 한나 아렌트의 시각과도 비슷하다.) 그가 용서가 가능하기 위해서 제시하는 조건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것이 용서 가능한 범죄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홀로코스트같이 인간성을 해치는 범죄는 용서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른 하나는 용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처벌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벌이 불가능한 것을 용서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얀켈레비치에게 있어서 홀로코스트와 같이 인간성을 해치는 범죄는 용서의 대상이 아니며, 용서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는 홀로코스트를 '속죄할 길이 없는 것' 또는 '수선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얀켈레비치는 속죄할 길이 없는 것 혹은 수선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P229


그러나 데리다는 이런 용서의 개념을 자기모순을 지적한다. 데리다는 용서라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용서의 개념 자체를 다루어보자면, 논리와 상식이 이번만은 역설과 일치합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용서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만 합니다. 사실상 그것이야말로 용서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 아닙니까? 용서를 부르는 유일한 것이 아닙니까? ...... 만일 용서해야 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종교적 언어로 사람들이 대죄라고 부르는 것, 최악의 것, 용서할 수 없는 범죄나 과오일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메마르고 무자비하며 가차 없는 형식으로 기술할 수 있는 아포리아가 나옵니다. 즉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만을 용서합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 없고, 용서해서도 안 되겠지만, 만일 용서라는 게 있다면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 곳에만 있을 것입니다." P223


데리다는 만일 우리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만을 조건적으로 용서한다면, 그 죄를 회개한 사람은 우리가 전에 용서해야 할 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미 그는 죄를 회개했기에 그전에 우리가 알던 범죄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용서는 용서 불가능한 대상을 용서하는 것이다.

"죄인이 참회하고, 행실을 고치고, 용서를 구하고, 따라서 새로운 약속에 의해 변화된다는 조건, 그리하여 그가 더 이상 이전에 죄를 범했던 사람과 전적으로 동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조건에서만 용서를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이 경우에도 여전히 용서를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양측 모두의 입장에서 너무 쉬운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 그 자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니까요. 용서가 존재하려면 죄와 죄인을 그 자체로서, 죄와 조인이 둘 다 죄악만큼이나 죄악 그 자체로서 불가역적으로 남아 있어서 전환도, 개선도, 뉘우침이나 약속도 없이 여전히 다시 반복되는,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그 지점에서 용서해야만 하지 않습니까? 용서라는 이름에 합당한 용서가, 만일 그런 것이 존재하다면,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조건 없이 용서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야만 하지 않나요? 그리고 무조건성 역시 그것의 반대항인 회개라는 조건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유산에 기입되어 있다고 주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P233


결국 데리다는 우리가 '용서'라는 이름으로 말하고 있는 모든 용서가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아님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결국 용서란 불가능한 것인가? 데리다에게 있어서 용서란 인간애가 추구해야 할 목표이다. 그 목표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더라고, 우리는 그 목표를 향해 가야 하는 것이다.


한국인의 정서에는 데리다의 말보다 얀켈레비치의 말이나, 한나 아렌트의 말이 더 설득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설득이 있다기보다는 정서적으로 더 공감이 된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그 '용서'에 담긴 진정한 뜻을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데리다의 말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으며 문득 작년에 미국에서 자신의 흑인 아들을 죽인 백인 살해자를 용서하는 어머니의 인터뷰 영상이 떠올랐다. 범죄자는 인종 혐오자로서 흑인 교회에서 가서 총기를 난사했다.(미국 남동부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흑인교회) 이 사건으로 인해 9명의 흑인이 사망했다. 그중 한 흑인의 어머니가 가해자에게 그가 빼앗아 간 것이 얼마나 자신에게  값진 것인지를 모를 것이라며, 그럼에도 자신의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말을 했다. 울면서 진정으로 상대를 용서하는 어머니와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덤덤히 듣던 피해자의 얼굴이 교차되어서 더욱더 마음이 안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어쩌면 이 어머니의 용서가 진정한 용서가 아닐까? 점점 용서라는 단어가 변질되어 가는 시대에 데리다가 말하는 용서의 의미가 너무나 무겁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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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여자
마리아피아 벨라디아노 지음, 윤병언 옮김 / 비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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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이가 태어났다. 아내가 밤새 힘들게 진통을 한 후, 결국 수술을 하고 아이가 태어났다. 다음날 저녁에 병실에서 회복 중인 아내를 간호하다가 병원 측으로부터 아이의 호흡수가 빨라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덜컥 겁이 나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아내와 함께 신생아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날 밤 역시 꼬박 세었다. 그렇게 이틀을 거의 잠을 자지 못하면서 아내와 아이를 챙겨야 했다. 어느 순간 무서운 세상 앞에 혼자 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혼자 아내와 아이를 감당해야 한다는 무게감... 그럼에도 피하거나 숨을 수가 없음을 느꼈다. 이것이 내가 감당해야 할 무게라는 것을 처절하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아이는 곧 호흡수가 정상으로 돌아왔고, 아내도 비교적 빠른 회복을 하고 있다.

이 경험을 통해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사랑이란 달콤하고, 짜릿하고,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사랑은 때로는 거친 풍랑 속에서 내 몸 하나 가누기 힘든 상황에서도 상대의 잡은 손을 놓지 않는 것이다. 때로는 숨고 싶고, 때로는 도망가고 싶어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도망가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그 무게감을 견디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 사랑의 무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겁다는 것을 삶을 통해 배워간다.

아내와 육아전쟁을 벌이면서 틈틈이 [못생긴 여자]라는 소설을 읽었다. 마리아피아 벨라디아노는 작가가 쓴 소설로서 칼비노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레베카'(성경의 리브가의 이탈리아식 이름)는 못생긴 아이로 태어난다. 그냥 못생긴 것이 아니라, 보는 이의 얼굴까지 돌리게 할 정도로 끔찍하게 못생긴 아이다. 그것도 남자아이가 아니라 여자 아이다. 아버지는 외면하고, 어머니는 숨어 버린다.

엄마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나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저지른 일생일대의 실수를, 자신이 만들어낸 찌그러진 머리와 잔인한 얼굴 윤관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엄마는 나를 안아보려 하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감히 젖을 먹여보라는 말 한 마디조차 건넬 수 없었다. P12


이렇게 아이는 엄마의 젖 한 번 물어보지 못하고, 커다란 저택의 2층 구석방에서 갇혀서 자라게 된다. 레베카의 부모들은 그녀가 아버지와 바깥세상에 나가면 사람들의 놀림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아이는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며 그렇게 커간다. 아이 역시 자기가 못생겼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리고 그렇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조용히 사는 법을 배워간다.

아주 어릴 적부터 여자아이들은 크면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의사도 될 수 있고 선생님이나 배우, 심지어 공주님도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못생긴 여자아이는 다르다. 그녀가 아는 것은 하나, 자신은 영원히 못생긴 여자로 남으리라는 것뿐이다. P92


아버지는 레베카에게 따스한 손길 한 번 주지 않고, 어머니 역시 그녀를 안 아주지도 않는다. 심지어 그녀가 넘어져서 얼굴에 피멍이 들어도 그냥 멍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점점 그녀는 레베카와 남편, 그리고 주변 사람으로부터 도망을 가서 자신의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다. 그렇게 레베카의 어머니는 우울증에 걸려서 결국 강물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다.

그래도 레베카에게는 부모에게 받지 못하는 사랑을 주는 '에르미니아' 고모와 유모 '마달레나', 그리고 초등학교에 가서 유일하게 사귄 친구인 수다쟁이 친구 '루칠라'가 있었다. 피아니스트인 에르미니아 고모는 레베카의 소질을 일찍이 알아보고 그녀에게 피아노를 가르친다. 음악은 넘어진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고, 또 음악으로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하게 된다.

레베카가 음악으로 소통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피아노 스승인 '렐리스' 선생님의 어머니이다. 렐리스의 어머니 역시 한때 유명한 피아니스트였으나 지금은 피크병(치매의 일종)에 걸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피아노를 치고, 그 피아노 소리를 듣고 레베카는 렐리스의 어머니와 친구가 된다.

레베카는 죽은 어머니의 일기장과 렐리스의 어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이 못생겼기에 자신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어머니와 가정에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되고, 자신의 어머니가 그 모든 것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숨어 버린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처럼 도망가거나 숨지 않기로 한다. 그녀는 인생에 당당히 맞서 그녀만의 삶을 살아간다.

앞에 이야기 한 것처럼 사랑은 그 무게를 감당하는 것이고, 도망가거나 숨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도망가거나 숨은 사람을 비난할 수 있을까? 주변에 가정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포기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주변 사람들은 무책임하다고 그들을 비난하지만, 막상 그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그들 역시 자신의 무책임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그 무게를 감당할 능력이 없기에 그렇게 도망갈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이 소설에서도 가정의 얽히고설킨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자신으로 숨어버린 어머니, 자신에게 둘러싼 미묘한 상황에서 피하기만 한 아버지, 자신의 욕망대로의 삶을 살기만 한 에르미니아 고모... 과연 그들을 비난할 수가 있을까? 그들 역시 자신의 무거운 짐을 견디지 못한 피해자 일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그렇게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사람들과 달리 삶을 당당히 맞선 레베카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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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신앙과 지식]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리고 유탄>이란 소제목이 붙어있다. 이 소제목의 의미 역시도 앞의 소제목인 <지하 납골당>처럼 정확히 파악을 하지 못 했다.  이 역시 데리다의 직접적인 글로 그 의미를 유출해 본다.

"이러한 전제 혹은 일반적 정의가 제시되었고, 정해진 지면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으므로, 이제 최종적인 15개의 제안을 낱알을 떼어내듯, 유탄을 던지듯, 산종된, 경구문의, 불연속적인, 병렬적인, 단호한, 직설적 혹은 가상적인, 경제적인, 한마디로 그 어느 때보다 더 전보문 같은 형식으로 궤도를 띄워 올려보자"(P161)


쉽게 이야기해서 시간이 없으니 앞의 전개보다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압축적으로 주제를 정의하겠다는 말 같다. 그래서일까. 데리다의 [신앙과 지식] 중에서 이 부분이 가장 읽기가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데리다는 앞에서 언급한 종교의 두 가지 원천, 즉 '기계적인 것''성스러운 신성성'을 다시 언급한다.(이 용어는 베르그송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가져왔다.) 여기서 기계적인 것이란 이성의 인식 안에 있는 경험 가능한 것이고, 성스러운 것은 이성의 인식 밖에 있는 경험 불가능한 것이다.(이 두 영역의 구분은 칸트의 이성이 한계에 대한 개념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데리다는 '기계적인 것'이라는 용어를 '원격과학기술'이란 용어로 바꾸어 현대 인터넷 문화에 적용한다. 베르그송은 종교가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정적인 종교에서 동적인 종교로  도약하려면 둘의 관계가 상호공존적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데리다는 이 과정을 '세계 라틴화'라고 부른다.

이런데 이런 '세계 라틴화'의 과정에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종교의 자가 면역 기능'이 발동한다. 종교가 스스로를 해체하면서 종교를 보호하는 미디어가 오히려 종교를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이로 인해 종교 전쟁이 발생한다.


 

앞 부분에서 데리다는 앞 부분에서의 '자가 면역'과정을 이제는 '남근 현상'이나 '남근적인 것'이라는 모티브로 설명한다. 역사상 세계에 존재하는 남근의 모티브는 생명의 생산과 함께 생명의 희생의 이미지를 함께 가지고 있다.

"남근적인 것, 그것은 또한 페니스와는 다르게 일단 자신의 신체에서 떨어져 나가면, 사람들이 일으키고, 전시하고, 물신으로 숭배하고, 행령을 지어 끌고 다니는 꼭두각시 인형이 아닌가? 사람들은 가상의 가상이라고 할 거기에서, 계산 불가능한 것을 가지고 셈하고 계산하면서, 원격과학기술적인 기계, 즉 생명에 봉사하고 있는 이러한 생명의 적을 설명하기에, 종교적인 것의 잠재적 자체, 즉 죽어 있기에 자동적으로 생명을 초과하는/경계 위에 살아 있는 것으로서, 그 유령적인 판타스마안에서 부활한 것으로서 가장 생생한/살아 있는 신앙, 그러니까 신성한 것, 온전히 무사한 것, 무손한 것, 면역된 것, 성스러운 것, 한 마디로 하일리히를 번역하는 모든 것과 동맹을 맺게 하는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히 강력한 논리의 역량 혹은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 아닌가?" (P163)

 

결국 데리다는 '남근적인 것'이란 종교의 신성성이 기술적인 것과 만나서 도약하는 과정에 대한 또 다른 모티브이다. 그리고 이런 종교성은 스스로를 파괴하며, 생명에 대한 희생을 야기한다.

"그렇다면 또한 동일한 움직임에서 명백한 이중의 전제 설정을 설명해야 한다. 즉 한편으로 생명에 대한 절대적 존중, '절대 죽이지 말라'는 명령, 낙태, 인공수정 등 설령 유전자 치료 목적이라 해도 유전적 잠재력에 대한 수행적 개입을 금하는 '체제 유지적인'금지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전쟁, 그들의 테러 행위와 대량 살상에 대해서는 심지어 언급조차 하지 않는) 희생제의적 소명이 있는데, 그것 역시 보편적이다." (P167)

 

데리다는 마치 종교를 하나의 유기체처럼 보고 있다. 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종교가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신성성과 기술성의 결합으로 생성된 종교성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자신을 보존하고, 또한 자신을 파괴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 이 과정에서 우리는 종교와 디지털 문화와 만남을 통해 종교의 자가 면역성, 또는 남근 현상과 만나고 있다. 데리다는 이것이 미디어 문화를 통한 테러와 파괴의 양상을 띄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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