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데리다의 [세기와 용서]는 '미셸 비비오르카'와의 대담 내용으로서 [신앙과 지식]이라는 글과 한 책 안에 실려 있다. 데리다가 [신앙과 지식]에서 주로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란 책에 대해 데리다적인 시각으로 해석을 했다면, [세기와 용서]에서는 주로 '얀켈레비치'의 [용서]와 [공소시효 없음]이라는 책에 대해 데리다적인 시각으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한나 아렌트'의 글들도 언급되고 있다.

얀켈레비치는 이 책에서 용서에 조건을 붙였다.(이것은 한나 아렌트의 시각과도 비슷하다.) 그가 용서가 가능하기 위해서 제시하는 조건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것이 용서 가능한 범죄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홀로코스트같이 인간성을 해치는 범죄는 용서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른 하나는 용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처벌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벌이 불가능한 것을 용서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얀켈레비치에게 있어서 홀로코스트와 같이 인간성을 해치는 범죄는 용서의 대상이 아니며, 용서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는 홀로코스트를 '속죄할 길이 없는 것' 또는 '수선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얀켈레비치는 속죄할 길이 없는 것 혹은 수선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P229


그러나 데리다는 이런 용서의 개념을 자기모순을 지적한다. 데리다는 용서라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용서의 개념 자체를 다루어보자면, 논리와 상식이 이번만은 역설과 일치합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용서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만 합니다. 사실상 그것이야말로 용서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 아닙니까? 용서를 부르는 유일한 것이 아닙니까? ...... 만일 용서해야 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종교적 언어로 사람들이 대죄라고 부르는 것, 최악의 것, 용서할 수 없는 범죄나 과오일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메마르고 무자비하며 가차 없는 형식으로 기술할 수 있는 아포리아가 나옵니다. 즉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만을 용서합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 없고, 용서해서도 안 되겠지만, 만일 용서라는 게 있다면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 곳에만 있을 것입니다." P223


데리다는 만일 우리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만을 조건적으로 용서한다면, 그 죄를 회개한 사람은 우리가 전에 용서해야 할 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미 그는 죄를 회개했기에 그전에 우리가 알던 범죄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용서는 용서 불가능한 대상을 용서하는 것이다.

"죄인이 참회하고, 행실을 고치고, 용서를 구하고, 따라서 새로운 약속에 의해 변화된다는 조건, 그리하여 그가 더 이상 이전에 죄를 범했던 사람과 전적으로 동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조건에서만 용서를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이 경우에도 여전히 용서를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양측 모두의 입장에서 너무 쉬운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 그 자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니까요. 용서가 존재하려면 죄와 죄인을 그 자체로서, 죄와 조인이 둘 다 죄악만큼이나 죄악 그 자체로서 불가역적으로 남아 있어서 전환도, 개선도, 뉘우침이나 약속도 없이 여전히 다시 반복되는,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그 지점에서 용서해야만 하지 않습니까? 용서라는 이름에 합당한 용서가, 만일 그런 것이 존재하다면,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조건 없이 용서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야만 하지 않나요? 그리고 무조건성 역시 그것의 반대항인 회개라는 조건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유산에 기입되어 있다고 주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P233


결국 데리다는 우리가 '용서'라는 이름으로 말하고 있는 모든 용서가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아님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결국 용서란 불가능한 것인가? 데리다에게 있어서 용서란 인간애가 추구해야 할 목표이다. 그 목표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더라고, 우리는 그 목표를 향해 가야 하는 것이다.


한국인의 정서에는 데리다의 말보다 얀켈레비치의 말이나, 한나 아렌트의 말이 더 설득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설득이 있다기보다는 정서적으로 더 공감이 된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그 '용서'에 담긴 진정한 뜻을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데리다의 말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으며 문득 작년에 미국에서 자신의 흑인 아들을 죽인 백인 살해자를 용서하는 어머니의 인터뷰 영상이 떠올랐다. 범죄자는 인종 혐오자로서 흑인 교회에서 가서 총기를 난사했다.(미국 남동부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흑인교회) 이 사건으로 인해 9명의 흑인이 사망했다. 그중 한 흑인의 어머니가 가해자에게 그가 빼앗아 간 것이 얼마나 자신에게  값진 것인지를 모를 것이라며, 그럼에도 자신의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말을 했다. 울면서 진정으로 상대를 용서하는 어머니와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덤덤히 듣던 피해자의 얼굴이 교차되어서 더욱더 마음이 안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어쩌면 이 어머니의 용서가 진정한 용서가 아닐까? 점점 용서라는 단어가 변질되어 가는 시대에 데리다가 말하는 용서의 의미가 너무나 무겁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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