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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 데리다 들뢰즈 ㅣ 지식인마을 33
박영욱 지음 / 김영사 / 2009년 9월
평점 :
개인적으로 데리다와 들뢰즈라는 철학자는 정복하다가 실패한 성과 같다. 몇 년 전인가 한국에서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이란 책이 매우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나 역시 그 독특한 제목에 이끌려 이 책을 읽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내 능력으로는 독해 불가능한 책이었다. 그 후 이 책에 대한 해설서인 [노마디즘]이란 책이 다시 인기를 얻었었다. 역시 이 책을 구입했었지만 방대한 양과 당시의 부족한 시간으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들뢰즈란 성의 정복은 멀어져 갔다.
올해 다시금 니체 철학에 관한 책을 읽으며, 데리다와 들뢰즈의 니체 해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들뢰즈 역시 데리다처럼 읽기가 어려웠다. 특히 그의 아포리즘적인 글들을 거의 독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데리다 역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이런 두 번의 실패가 결국 데리다나 들뢰즈가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는 것을 깨닫고, 둘의 사상, 특히 용어 부분을 쉽게 해설한 책들을 찾는 중에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책은 김영사의 '지식인 마을'시리즈로 나온 데리다와 들뢰즈의 해설서로서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라는 부제 목을 가지고 있다.
데리다와 들뢰즈에 대한 책을 구입하기에 앞서 인터넷 서점을 비롯한 여러 포털 사이트에서 이와 관련된 책들의 서평을 읽어 보았다. 대부분 철학서적에 대한 서평은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혹독한 서평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이 책의 서평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너무나 좋지 않은 평가로 인해 이 책을 구입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러나 일부 철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는 타인의 저작을 너무 간단하게 평가 절하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알기에, 고려하고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난 개인적 평가부터 말하자면, 접근 방법이 매우 신선하고, 철학의 초보자들, 특히 데리다와 들뢰즈의 철학에 처음 접근하려는 사람들에게 매우 쉬운 방법으로 이들의 철학을 소개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런 시도가 인문학적으로 매우 유익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어느 그룹이든 울타리 밖의 외부와의 대화를 위한 시도가 없어지며 결국 자기 울타리 안에서 갇혀서 영영 외부와의 소통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이런 시도는 매우 신선한 시도이며 일반인들도 철학을 이해하기 쉽게 하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책이 데리다와 들뢰즈의 철학을 쉽게 소개했다 뿐이지, 데리다와 들뢰즤의 철학은 워낙 난해하기에 그들의 철학은 쉽게 소개했다고 해도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다만 이 책에서 너무 예술적이고 미학적인 부분에 맞추어 이들의 철학을 소개한 부분은 조금은 당황스럽게 하는 부분이었다.
이 책은 주로 데리다와 들뢰즈가 주로 사용한 용어들을 현대 예술과 건축 등에 비추어 설명하고 있다.
1. 먼저 이 책은 들뢰즈의 철학의 핵심인 '차이'의 개념에 대해서 설명한다. 들뢰즈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용어인 '차이'는 기존의 도식화된 개념에 대한 반발로 사용되었다. 칸트는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인식 작용으로 이성과 감성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사물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감성을 통해 도식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원의 개념을 '한 점에서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라는 이성적인 개념보다는 원이라는 모양으로 도식화하여 개념적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도식적 이해는 다른 이해를 모두 함몰시킨다. 일단 원이라는 하나의 대표적인 도식으로 원들을 인식하게 되면, 다른 원들이 가진 개성들은 그 개념에 모두 함몰되게 된다. 들뢰즈는 이것이 서구 사상이 진부함이라는 틀에 갇히게 된 원인을 보고, 개념에 묻히지 않는 다양성, 차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 데리다는 '차이'라는 단어 대신 '차연'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프랑스어의 'differance'를 번역한 것이다. 원래 차이라는 프랑스 단어는 'differance'이다. 데리다는 기존의 차이라는 단어의 거부감 때문에 새로운 단어를 만든다.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이란 언어의 현재 진행성을 포함하고 있다. 언어가 하나의 개념을 가지게 되면, 모든 의미가 그 개념에 갇히게 된다. 생각이 말에 갇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은 이기적이야!'라는 말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의 모든 다양성이 '이기적'이라는 개념에 갇혀서, 그 사람에 대한 생각 중 다른 면들을 사라지고, 오직 '이기적이'라는 개념만이 대표하게 된다. 그러나 데리다는 개념의 의미들은 계속 바뀌고 변화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런 의미에서 '차연'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3. 들뢰즈는 존재를 '다양체'로 본다. 칸트는 개념(Begriff)과 이념(dee)을 구분한다. 개념이 사물에 대한 보편적인 어휘라면, 이념은 그 사물 안에 포함된 여러 가지 성질 들을 이념이라고 한다. 들뢰즈는 우리들이 사용하는 개념들이 다양한 이념들을 사라지게 한다고 보았다. 이런 들뢰즈의 생각은 베르그송에게서 영향을 받았는데, 베르그송은 인간의 지각 작용을 도려냄 (뺄셈 과정)으로 보았다. 즉 우리가 한 가지 사물을 개념으로 지각한다는 것은 그 사물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다양성을 모두 제거하고, 한 가지 개념으로만 이해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사물에 다양성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4. 데리다는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허문다. 기존의 철학은 칸트의 합목적성과 관련하여 무언가가 의미가 있으려면 그것이 목적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데리다는 의미와 무의미는 상호 연관되어 있을 뿐 경계가 없다고 보았다. 저자는 이것을 예술 작품을 통해서 설명한다. 하나의 예술 작품은 단지 그 작품 내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의 전시 공간이나 배경을 통해서도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5. 데리다는 세계와 인간을 '기계적' 존재로 이해한다. 여기서 기계적이란 것은 단지 자동차나 로봇 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감각적으로 보는 세상의 표면의 밑에는 시계 부품처럼 정밀한 체계로 이루어진 세계가 존재한다고 보았다.(수학적 세계관) 들뢰즈는 세상과 존재하는 것은 나름대로 내면에 체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기계적 존재를 '절단'과 '연결'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기계적인 존재는 표면적인 것과 심층적인 것의 절단을 통해 존재한다. 특히 현대사회로 갈수록 이 절단은 심해진다. 그럼에도 이 절단은 완전한 절단이 아닌 표면적인 것과 심층적인 것의 연결 속에 존재한다. 이것을 다시 '수목적인 것'과 '리좀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수목적인 것'은 표면에 드러나는 것이고, '리좀적인 것'은 심층적인 것이다.
이상이 이 책으로 이해한 데리다와 들뢰즈의 사상적이 용어들이다. 이 책은 처음에는 쉽게 데리다와 들뢰즈의 사상을 출발점을 이야기하다가 점점 그들의 사상 깊숙이 들어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데리다와 들뢰즈의 서구 사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상들을 전개하다가 그 결론으로 예술작품이나 건축으로 끝맺는다. 쉽게 말하면 데리다가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허물었는데, 그래서 어떠 어떠한 현대 미술작품이 나왔다는 식이다. 데리다와 들뢰즈가 서구 사상과 문화에 끼친 전반전이 영향을 알고 싶었던 개인적인 의도와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데리다와 들뢰즈라는 성을 공략하기 위한 공성 단계를 시작하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하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