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퀸 : 적혈의 여왕 1 레드 퀸
빅토리아 애비야드 지음, 김은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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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미국의 YA 문학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소개되고 있다. 흔히 영 어덜트(young adult) 문학이라고도 불리는 이 장르는 미국에서는 주로 10대 후반을 경향하고 있지만, 70프로 이상 성인 독자라는 보고도 나올 만큼 청소년과 성인의 폭넓은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YA 문학이 많이 알려진 것은 [헝거게임] 이후일 것이다. 그 후 [트와일라잇]이나 [메이즈러너], [다이버전트], 그리고 최근에는 '클로이모레츠'가 주연해서 화제가 된 [제5의 침공]까지 인기를 얻고 있다. YA 문학은 주로 판타지적이거나 SF 적인 세계관과 함께 남녀 주인공의 사랑, 그리고 주인공의 성장과정을 다루고 있다. 안타깝게도 [헝거게임]의 흥행 이후 주로 번역되는 YA 문학이 헝거게임적인 세계관과 스토리를 많이 모방하고 있어 큰 인기를 끈 작품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레드 퀸' 시리즈의 1부로 번역되어 출간된 [적혈의 여왕]은 독특한 세계관과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먼저 [헝거게임]이나 다른 YA 문학에서 다루고 있는 디스토피아적인 암울한 미래적 세계관이 이 소설에서는 더욱더 심화되고 있다. 또한 단순한 미래사회가 아닌, 왕국 중심의 권력 구조와 왕권을 향한 암투, 그리고 은혈들이 사용하는 특별한 능력들이 우리에게는 '왕좌의 게임'이라는 미드 제목으로 잘 알려진 마치 조지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소설의 세계관은 미래 사회에서 단순히 권력이나 부로 계급을 나누는 것이 아닌, 피로 계급이 구분되는 사회이다. 이 소설에서는 은혈과 적혈로 나누어지는데 은혈은 은색 피를 가지고 있으면서 여러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어찌 보면 엑스맨 시리즈의 등장인물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특별하다는 생각으로 자신들만의 왕국을 만들고, 붉은색 피를 가지고 있는 적혈들은 그들의 밑에서 봉사하며 지배를 당하고 있다.

여주인공 '매어 베로우'는 이런 은혈들이 다스리는 노르타 왕국의 빈곤한 적혈들의 마을 '스틸츠'라는 곳에서 산다. 그의 세 오빠들은 모두 전쟁터로 끌려 나갔고, 손재주가 좋은 어린 여동생 지사의 자수 공예를 통해 가족들이 먹고산다. 그에게는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인 킬러이라는 친구가 있다. 매어는 주로 소매치기로 하루하루를 먹고살며, 그녀 역시 군대로 끌려갈 암울한 미래만을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킬런이 군대로 끌려 가게 되자, 매어는 킬런을 구하기 위해 동생 지사의 도움으로 은혈의 거주지로 들어가 소매치기를 한다. 마침 '적혈의 군대'라는 적혈들로 이루어진 집단에 의해 테러가 일어나고, 은혈들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적혈들을 살해한다. 이와 중에 매어를 돕던 지사가 손이 망가지고, 매어는 죄책감으로 집을 나와 방황하게 된다. 그때 그는 칼이라는 한 남성을 만나는데, 이 남성의 도움으로 은혈들의 궁전에 일자리를 얻게 된다. 후에 매어는 칼이 노르타 왕국의 왕자임을 알게 된다.

왕궁에서 일을 하던 매어는 우연히 은혈 왕국의 왕자비를 뽑는 퀸트라이얼이라는 게임을 보게 되고, 본의 아니게 그 싸움에 말려들게 된다. 그때 그녀도 모르는 능력이 나타나고, 적혈이면서도 은혈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녀로 인해 모두들 당황하게 된다. 결국 그녀는 사악한 '엘라라 왕비'의 강요에 의해 은혈의 귀족인 '매리어나 타이나토스' 행세를 하게 된다. 그리고 엘라라 왕비의 아들이자, 둘째 왕자인 메이븐의 약혼녀가 된다.

이제 매어는 암투와 정쟁이 가득한 노르타 왕궁에서 은혈 왕자비 행세를 하며, 칼과 메이븐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또한 오래전 친구인 킬런과의 관계까지... 화려한 은혈들의 왕궁에서도 매어는 은혈들과 적혈들의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진홍의 군대'에 가입해 그들을 돕는다. 소설은 끝으로 갈수록 점점 속도감을 더하고, 마지막에서도 모든 상황을 뒤엎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미국의 청소년 문학과 로맨스가 우리나라와 많이 다름을 느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인터넷 포털사이트와 인터넷 서점 등을 중심으로 로맨스 문학 등이 다시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평범한 소녀가 왕이나 왕좌를 만나서 신분상승을 하고, 그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구조이다.

반면 [적혈의 여왕]은 미래 사회의 암담한 계급 사회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고, 군림하는 자의 허영과 학대 당하는 자의 비참함을 날카롭게 묘사한다. 주인공 매어는 이런 구조 속에서 은혈 들의 사회에서 왕자비가 되지만 그곳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혁명의 일원이 되어서 사회를 개혁 하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싸운다.

이런 구조는 이 소설뿐만 아니다. 헝거게임을 비롯한 다른 소설들에서도 비록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주인공이 사회의 모순을 처절히 경험하고 인식한 후, 그것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최근에 미국 사회에서도 계층 간의 간격이 넓어지고, 계층 간의 이동을 자유롭게 하는 계층 간의 사다리가 끊어졌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이런 사회적인 문제와 위기감이 젊은 세대에도 많은 공감을 얻고 있기에 이런 소설들이 인기를 얻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이 책의 저자인 빅토리아 애비야드는 25살의 여성 작가이다. 이 소설이 작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하니, 이 소설은 그녀가 20대 초반에 구상하고 집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20세 초반에 이런 세계관을 상상해 내고, 또한 이런 세계관의 변혁을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을 창조해낸 작가의 생각이 감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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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 독점계약 번역 개정판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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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렸을 때 읽은 '삼국지'의 영향이 컸다. 어릴 적 책을 좋아하시던 외 할아버지가 읽다가 놓고 가신 삼국지 전집 10권을 줄거리와 인물들을 다 외울 만큼 반복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어린 마음에 영웅들의 허망한 죽음과 각 나라의 흥망성쇠를 보면서 나름 역사 사적 의문을 던지곤 했다. '왜 유비는 저렇게 허망하게 죽었을까?' '그때 제갈공명의 조언을 들었으면 어땠을까?' '그때 바람이 불지 않았으면 전쟁의 결과가 바뀌었을까?'와 같은 생각이었다. 청소년이 되면서 역사소설에 관심을 가지며 월탄 박종화나 이병주 작가의 역사소설 등을 읽기 시작했다.

대학에 온 후로는 철학과 역사에 관심을 가지며 역사 속에 흐르는 거대한 법칙에 대해 알려고 했다. 헤겔이 말하는 '세계 이성'이나  칸트가 말하는 '이성의 간계' 등이 실제로 존재하며 이것들이 역사를 어떠한 목적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깨달으면 세상과 개인의 삶을 좀 더 지혜롭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몇 년 전 고 노무현 대통령과 부림사건을 다룬 [변호사]라는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 그 영화 속에서 이적단체를 구성한 것으로 누명을 쓴 피고인의 죄명 중 하나가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은 것이었다. 그때 내가 찾는 법칙들이 어쩌면 이 책에 들어 있을지도 모르고, 군사독재 정권이나 권력자들은 그 법칙을 대중들이 아는 것을 싫어해서 이 책을 금서로 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나서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책에는 그런 역사의 법칙이나 역사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 역사가 흘러가는 목적 등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오히려 이 책은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을 역사와는 다른 것으로 본다. 이 책은 너무나 냉철하게 역사가와 역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대면하게 해 준다. 그럼에도 그 역사를 통해 우리가 교훈을 찾고, 세상과 삶이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게 해 준다.

이 책은 먼저 근대까지 가지고 있었던 아래와 같은 역사에 대한 환상을 제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첫 번째는 '역사는 과거의 사건들을 사실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는 환상이다. 우리는 흔히 과거의 사실들을 그대로 글로 옮기는 것을 역사라고 생각하고,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을 '역사왜곡'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카는 마치 시장 자판대의 놓여 있는 생선을 고르는 사람처럼, 역사가는 수많은 사실들 중에서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역사적 사실을 선택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과거에는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수많은 사건들이 있을 것이다. 그 사건들이 모두 역사일 수는 없다. 역사가가 그 사건을 선택해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때 그것이 비로소 역사가 되는 것이라고 카는 말한다.

두 번째는 '역사가는 자신이 속한 시대와 사회와 동떨어져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다'는 환상이다. 우리는 역사가란 자신의 속한 시대와 사회에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카는 개인은 사회 속에 속해 있기에 그 사회의 생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역사가는 자신이 속한 시대와 사회의 관점으로 과거의 역사를 조망하는 것이다.

세 번째 '역사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환상이다. 구약성경의 히브리 역사관과 중세의 기독교 역사관, 그리고 근대의 헤겔과 칸트에 이르기까지 역사에는 신적인 섭리가 있고, 그 섭리가 역사를 일정한 목적으로 이끌고 간다고 믿었다. 헤겔은 그것을 '세계 이성'이라고 말했고, 칸트는 '이성의 간계'라고 말했다. 아담 스미스 역시 '보이지 않는 손'을 이야기하고, 마르크스 역시 '역사의 발전 단계'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카는 이런 신적인 법칙에 기대어 역사를 조망하는 것은 역사가로서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카는 역사를 탐구하는 것을 조커가 없이 포커게임을 하는 것으로 비유한다. 신적인 섭리에 기대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이성의 사고로 역사를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카의 관점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역사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이리저리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게 된다. 결국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아베의 역사왜곡,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도 모두 자신의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면서, 역사의 진리성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입시교육 때나 평상시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던 카의 유명한 역사에 대한 명제가 나온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P46)


카는 역사가란 과거와 대화하면서 과거의 사실들을 현시대를 위하여 선택하여 역사적인 해석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해석의 과정이란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왜 그 사건이 일어났을까? 왜 그 시대는 그렇게 허망하게 종말을 맞이했을까? 왜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렇게 고통을 당했을까? 카는 이 '왜?'라는 질문의 대답을 앞에서 이야기 한 신적인 법칙이나 우연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역사가가 '왜?'라는 질문의 대답을 찾는 것은 그 대답을 통해 현 사회의 발전을 주기 위해서이다. 예를 들어 스미스라는 사람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스미스의 사고의 원인은 다양한다. 우연히 그 시간 그 장소에 간 것, 또는 교통 체계의 문제, 운전자의 미숙, 차량의 결합, 어쩌면 우연이나 신적인 계획 등이 사고의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사고조사자들은 그 많은 요소 중에서 교통사고와 사망자를 줄일 수 있는 원인을 이성적으로 찾아서 그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카는 역사가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역사의 수많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중에서 이 시대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대답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카가 말하는 역사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결국 우리는 과거의 사건들을 선택해서 현시대와 사회의 관점으로 역사를 해석하지만, 그 해석은 시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한 유용한 해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카는 당시 역사의 발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팽만한 시기에도 역사의 발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는 역사가가 이성을 통해 역사의 교훈들을 발견해 나간다면, 결국 점진적으로나 사회가 발전할 것임을 믿었고, 그것을 역사가가 사명으로 보았다. 그러기에 그는 당시 시대의 보수적인 역사관을 비판한다.

그러나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영어 사용권 세계의 지식인들과 정치사상가들 사이에 이성에 대한 신념이 약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에 대한 그 충만한 감각이 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 중략- 정치 및 경제 전문가들이 처방을 내릴 대, 그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란 급진적이고 원대한 이념은 믿지 말라는 훈계, 혁명의 냄새가 나는 것은 모조리 피하라는 훈계 또는 가능한 한 천천히 조심스럽게 전진하라는 훈계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P210-1)


그리고 '그래도 역사는 움직인다'는 말로서 그의 글을 마무리한다.

그렇기 때문에 루이스 네이미어 경이 나에게 강령이나 이상을 피하라고 훈계할 때, 오크셔트 교수가 나에게 우리는 특별히 어떤 곳을 향해서 항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아무도 배를 흔들지 못하게 살펴보는 일만이 중요하다고 말할 때, 포퍼 교수가 하찮은 점진적 공학이라는 엔진의 힘으로 애지중지하는 T자형 고물차를 길 위로 계속 끌고 다니기를 원할 때, 트레버-로버 교수가 소리쳐대는 급진주의자들의 콧잔등을 후려갈길 대, 모리슨 교수가 역사는 건전한 보수적인 정신으로 쓰여야 한다고 주장할 때, 나는 경고하는 세계, 진통하는 세계를 내다보고 나서 진부하기조차 한 어느 위대한 과학자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 '그래도 - 그것은 움직인다.' (P211)

E.H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던지는 질문들과 고민들은 아직도 이 시대에도 우리에게 유효하며, 이 책은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역사를 탐구하고 정립해야 할지를 안내해 주는 역사의 교과서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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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롬 심플한 살림법
장새롬(멋진롬) 지음 / 진서원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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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일들과 많은 짐들에 쌓여서 낑낑거리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네요. 자신의 주변을 심플하게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이 타인의 관계나 인생에 있어서도 심플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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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온 스노우 Oslo 1970 Series 1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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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네스뵈의 신간 [블러드 온 스노우]가 출간되었다. 원래 이 책은 요 네스뵈가 쓰고 있던 [납치]라는 소설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납치]에서 주인공은 스릴러 작가인데 1970년대에 [블라드 온 스노우]와 [미드나잇 선]이라는 소설을 섰던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요 네스뵈는 소설 속의 소설을 실제로 출간하려는 엉뚱한 생각으로 이 책을 섰다고 한다. 결국 허구의 소설 안에 있는 허구의 소설을 다시 허구의 소설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은 평상시의 요 네스뵈답지 않다. 우선 요 네스뵈의 책은 두껍다. 그리고 그 두꺼운 소설 안에 치밀한 구성과 반전이 촘촘히 얽혀 있다. 보통 스릴러 소설과 다르게 두 가지 사건이 얽혀 있고, 반전 역시 두 번 이상 일어난다. 그런데 이 소설은 매우 심플하다. 살인청부업자인 올라브가 보스에게 자신의 아내를 처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보스의 아내를 살해하려다가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이다. 어찌 보면 단순한 이 구조이지만 앞에 이야기 한 것처럼 그 단순한 구조 속에 허구의 세상이 존재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떠오르는 영화 이미지가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상영된 이병헌 주연의 [달콤한 인생]이란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보스인 강 사장(김영철)은 자신이 신임하는 부하인 선우(이병헌)에게 자신의 젊은 애인(신민아)을 감시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선우는 보스의 애인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빼앗겨 거짓 보고를 하고 이로 인해 보스에게 버림받게 된다. 이 영화의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주인공이 죽으면서 독백처럼 떠올리는 이야기 속의 스승과 제자의 대화 내용이다.

어느 날, 제자는 달콤한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난 제자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스승은 걱정이 되어 제자에게 물었다.
"왜 우느냐?"
"꿈을 꾸었습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그럼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그럼 어떤 꿈을 꾸었느냐?"
"아름다운 꿈을 꾸었습니다."
스승은 기이하여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이하여 눈물을 흘리느냐?"
그러자 제자가 답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요 네스뵈의 소설 속의 주인공인 올라브와 달콤한 인생의 영화 속의 이병헌은 모두 아름다운 꿈을 꾼다. 그것은 보스의 여인을 사랑한 것이다. 여기서 이들의 사랑은 성적인 욕망과는 조금 다르다. 자신의 삶이 너무나 처절하기에 그 처절함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처절함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욕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욕망은 허구를 향한 욕망이다. 실제로 있지는 않는 그들의 환상 속에서 존재하는 세상과 인물과, 사랑을 욕망한다.

주인공 올라브의 사랑을 소설 속의 이야기 구성이 아닌, 그의 성장과정으로 분석하면 크게 세 명이다. 첫 번째는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에게 매를 맞으며 고통을 당한다. 올라브가 컸을 때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고통해서 해방시켜 준다. 그 후 그는 포주나 살인청부업자를 하지만 여자를 때리는 것을 참지 못한다. 학대 당하는 여성을 보면 못 견뎌한다.
그래서 마리아라는 여성을 사랑한다. 마리아는 농아이면서 창녀인데 마약쟁이 남자를 만나 그 빚을 갚기 위해 구타를 당하며 몸을 판다. 올라브는 그 광경을 못 견뎌 마리아를 구해주고 대신 빚을 갚는다.
마지막 대상은 보스의 애인이다. 흰 눈처럼 하얀 피부와 고양이와 같은 우아한 자세를 가진 그녀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그녀 역시 보스와 보스의 아들에게 학대를 당한다. 결국 올라브는 그녀를 구하고, 그녀를 구하기 위한 목숨을 건 대결을 한다.

문제는 이 세 명의 여성에 대한 올라브의 욕망이 모두 허구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했고, 마리아도 마약쟁이 남자를 사랑했다. 보스의 애인 역시 앞 의 두 명의 여인처럼 올라브의 도움을 바라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올라브가 꿈꾸던 사랑은 자신만의 환상 속에서 만들어진 사랑이며, 그만이 꾸었던 달콤한 꿈이었다. 그리고 올라브는 그 달콤한 꿈속에서 죽어간다.  달콤한 인생의 마지막 독백처럼 이 소설에서도 올라브는 죽으면서 어머니에게 마지막 독백을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이젠 죽을 수 있어요, 엄마.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더는 이야기를 지어낼 필요가 없어요. 이보다 더 좋은 이야기를 지어낼 순 없을 거예요."(P192)


결국 올라브 역시 달콤한 꿈을 꾸었고, 그 달콤한 꿈속에서 죽어간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달콤한 꿈이 슬픈 인생일까? 비록 결말은 슬프지만 눈과 피, 그리고 꿈과 현실의 이중적 대비가 색다른 아름다움을 구성해 내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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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와 용서]라는 대담집에서 자크 데리다는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안켈레비치의 [공소시효 없음]이나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에서 말하는 인간성을 해치는 범죄는 용서할 수 없다거나, 용서에는 먼저 가해자의 참회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배제한 '순수한 용서'이다.

그렇다고 해서 데리다가 무조건적인 용서를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데리다가 이야기하는 '순수한 용서'는 가해자의 참회나 제 삼자의 개입 등이 먼저 고려되지 않는다. 피해자 당사자가 진정으로 용서할 마음이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그리고 그때만이 그 용서가 '순수한 용서'라고 말한다.

프랑스 역시 우리나라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나치의 비시정부가 몰락하고 해방된 프랑스에서는 비시 정부에 협력한 사람들을 모두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강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대항해야 하는 시대적 상황에 의해서 정부는 극단적인 가담자 외에 대부분을 사면하게 된다. 데리다는 이런 용서가 주권에 의한 용서, 제 삼자의 용서로서 '순수한 용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잔혹한 살인과 고문이 있었지만 사회의 안정과 화합을 위해 백인 가해자들에게 사면권을 주게 된다. 이때 한 자신의 남편이 고문되고 살해당한 한 흑인 여성이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위원회 또는 정부가 용서를 할 수는 없다. 나만이 어쩌면, 그것을 할 수 있다. 나는 용서할 혹은 용서하기 위한 준비가 안 되어 있다.(P238) "

어쩌면 이렇게 용서를 매게로 한 정치적 타협은 역사와 시대의 변화에도 바뀌지 않는 것일까?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위안부 문제를 두고 박근혜 정부와 아베 총리의 내각 간에 협정이 있었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다음부터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그 협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국제적인 관계나 시대적인 상황이 한일간의 화해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누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을까?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고, 정치적인 고려로 인한 용서가 과연 순수한 용서일까? 이에 대해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다시 주권의 역사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우리가 용서에 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때로 "나는 너를 용서한다"라는 말을 참을 수 없거나 가증스러운 것, 더 나아가 외설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주권의 주장입니다. 그것은 종종 위로부터 아래로 말을 걸어오고, 자신의 고유한 자유를 확언하거나 용서의 능력을 부당하게 가로채 버립니다. 그것이 제아무리 희생자로서 혹은 희생자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희생자 만들기, 다시 말해 피해자로부터의 삶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혹은 "내가 용서할게"라는 입장에 이를 수 있게 하거나 허용하는 이 자유와 힘과 권한을 박탈하는 희생자 만들기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거기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은 피해자로부터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말 자체를, 모든 표명의 가능성을, 모든 증언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때 피해자는 거기에 더해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라라고 잠재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가능성마저 빼앗긴 상태가 된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범죄는 오로지 살인의 형상으로만 도래하는 것이 아닙니다.(P261)


데리다는 국가나 제 삼자가 피해자를 대신해서 정치적인 상황이나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을 피해자의 용서할 수 없는 권리를 빼앗는 살인과 같은 절대적인 범죄라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 사회는 용서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폭력을 행하고 있지는 않은가? 권력에 의해, 타인에 의해 피해를 당하고도 용서해만 한다는 또 다른 권력에 떠밀려 자신의 용서할 권리마저 빼앗기고, 용서가 아닌 용서하는 사람들... 그들이 그 용서를 한 후에 가졌을 그 허탈감과 상실감을 누가 알까? 용서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피해를 가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용서의 의미가 회복되고, 용서의 권리가 다시금 피해자에게 돌아오는 세상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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