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 독점계약 번역 개정판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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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렸을 때 읽은 '삼국지'의 영향이 컸다. 어릴 적 책을 좋아하시던 외 할아버지가 읽다가 놓고 가신 삼국지 전집 10권을 줄거리와 인물들을 다 외울 만큼 반복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어린 마음에 영웅들의 허망한 죽음과 각 나라의 흥망성쇠를 보면서 나름 역사 사적 의문을 던지곤 했다. '왜 유비는 저렇게 허망하게 죽었을까?' '그때 제갈공명의 조언을 들었으면 어땠을까?' '그때 바람이 불지 않았으면 전쟁의 결과가 바뀌었을까?'와 같은 생각이었다. 청소년이 되면서 역사소설에 관심을 가지며 월탄 박종화나 이병주 작가의 역사소설 등을 읽기 시작했다.

대학에 온 후로는 철학과 역사에 관심을 가지며 역사 속에 흐르는 거대한 법칙에 대해 알려고 했다. 헤겔이 말하는 '세계 이성'이나  칸트가 말하는 '이성의 간계' 등이 실제로 존재하며 이것들이 역사를 어떠한 목적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깨달으면 세상과 개인의 삶을 좀 더 지혜롭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몇 년 전 고 노무현 대통령과 부림사건을 다룬 [변호사]라는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 그 영화 속에서 이적단체를 구성한 것으로 누명을 쓴 피고인의 죄명 중 하나가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은 것이었다. 그때 내가 찾는 법칙들이 어쩌면 이 책에 들어 있을지도 모르고, 군사독재 정권이나 권력자들은 그 법칙을 대중들이 아는 것을 싫어해서 이 책을 금서로 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나서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책에는 그런 역사의 법칙이나 역사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 역사가 흘러가는 목적 등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오히려 이 책은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을 역사와는 다른 것으로 본다. 이 책은 너무나 냉철하게 역사가와 역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대면하게 해 준다. 그럼에도 그 역사를 통해 우리가 교훈을 찾고, 세상과 삶이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게 해 준다.

이 책은 먼저 근대까지 가지고 있었던 아래와 같은 역사에 대한 환상을 제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첫 번째는 '역사는 과거의 사건들을 사실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는 환상이다. 우리는 흔히 과거의 사실들을 그대로 글로 옮기는 것을 역사라고 생각하고,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을 '역사왜곡'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카는 마치 시장 자판대의 놓여 있는 생선을 고르는 사람처럼, 역사가는 수많은 사실들 중에서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역사적 사실을 선택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과거에는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수많은 사건들이 있을 것이다. 그 사건들이 모두 역사일 수는 없다. 역사가가 그 사건을 선택해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때 그것이 비로소 역사가 되는 것이라고 카는 말한다.

두 번째는 '역사가는 자신이 속한 시대와 사회와 동떨어져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다'는 환상이다. 우리는 역사가란 자신의 속한 시대와 사회에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카는 개인은 사회 속에 속해 있기에 그 사회의 생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역사가는 자신이 속한 시대와 사회의 관점으로 과거의 역사를 조망하는 것이다.

세 번째 '역사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환상이다. 구약성경의 히브리 역사관과 중세의 기독교 역사관, 그리고 근대의 헤겔과 칸트에 이르기까지 역사에는 신적인 섭리가 있고, 그 섭리가 역사를 일정한 목적으로 이끌고 간다고 믿었다. 헤겔은 그것을 '세계 이성'이라고 말했고, 칸트는 '이성의 간계'라고 말했다. 아담 스미스 역시 '보이지 않는 손'을 이야기하고, 마르크스 역시 '역사의 발전 단계'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카는 이런 신적인 법칙에 기대어 역사를 조망하는 것은 역사가로서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카는 역사를 탐구하는 것을 조커가 없이 포커게임을 하는 것으로 비유한다. 신적인 섭리에 기대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이성의 사고로 역사를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카의 관점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역사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이리저리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게 된다. 결국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아베의 역사왜곡,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도 모두 자신의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면서, 역사의 진리성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입시교육 때나 평상시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던 카의 유명한 역사에 대한 명제가 나온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P46)


카는 역사가란 과거와 대화하면서 과거의 사실들을 현시대를 위하여 선택하여 역사적인 해석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해석의 과정이란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왜 그 사건이 일어났을까? 왜 그 시대는 그렇게 허망하게 종말을 맞이했을까? 왜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렇게 고통을 당했을까? 카는 이 '왜?'라는 질문의 대답을 앞에서 이야기 한 신적인 법칙이나 우연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역사가가 '왜?'라는 질문의 대답을 찾는 것은 그 대답을 통해 현 사회의 발전을 주기 위해서이다. 예를 들어 스미스라는 사람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스미스의 사고의 원인은 다양한다. 우연히 그 시간 그 장소에 간 것, 또는 교통 체계의 문제, 운전자의 미숙, 차량의 결합, 어쩌면 우연이나 신적인 계획 등이 사고의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사고조사자들은 그 많은 요소 중에서 교통사고와 사망자를 줄일 수 있는 원인을 이성적으로 찾아서 그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카는 역사가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역사의 수많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중에서 이 시대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대답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카가 말하는 역사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결국 우리는 과거의 사건들을 선택해서 현시대와 사회의 관점으로 역사를 해석하지만, 그 해석은 시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한 유용한 해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카는 당시 역사의 발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팽만한 시기에도 역사의 발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는 역사가가 이성을 통해 역사의 교훈들을 발견해 나간다면, 결국 점진적으로나 사회가 발전할 것임을 믿었고, 그것을 역사가가 사명으로 보았다. 그러기에 그는 당시 시대의 보수적인 역사관을 비판한다.

그러나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영어 사용권 세계의 지식인들과 정치사상가들 사이에 이성에 대한 신념이 약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에 대한 그 충만한 감각이 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 중략- 정치 및 경제 전문가들이 처방을 내릴 대, 그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란 급진적이고 원대한 이념은 믿지 말라는 훈계, 혁명의 냄새가 나는 것은 모조리 피하라는 훈계 또는 가능한 한 천천히 조심스럽게 전진하라는 훈계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P210-1)


그리고 '그래도 역사는 움직인다'는 말로서 그의 글을 마무리한다.

그렇기 때문에 루이스 네이미어 경이 나에게 강령이나 이상을 피하라고 훈계할 때, 오크셔트 교수가 나에게 우리는 특별히 어떤 곳을 향해서 항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아무도 배를 흔들지 못하게 살펴보는 일만이 중요하다고 말할 때, 포퍼 교수가 하찮은 점진적 공학이라는 엔진의 힘으로 애지중지하는 T자형 고물차를 길 위로 계속 끌고 다니기를 원할 때, 트레버-로버 교수가 소리쳐대는 급진주의자들의 콧잔등을 후려갈길 대, 모리슨 교수가 역사는 건전한 보수적인 정신으로 쓰여야 한다고 주장할 때, 나는 경고하는 세계, 진통하는 세계를 내다보고 나서 진부하기조차 한 어느 위대한 과학자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 '그래도 - 그것은 움직인다.' (P211)

E.H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던지는 질문들과 고민들은 아직도 이 시대에도 우리에게 유효하며, 이 책은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역사를 탐구하고 정립해야 할지를 안내해 주는 역사의 교과서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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