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용서]라는 대담집에서 자크 데리다는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안켈레비치의 [공소시효 없음]이나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에서 말하는 인간성을 해치는 범죄는 용서할 수 없다거나, 용서에는 먼저 가해자의 참회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배제한 '순수한 용서'이다.

그렇다고 해서 데리다가 무조건적인 용서를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데리다가 이야기하는 '순수한 용서'는 가해자의 참회나 제 삼자의 개입 등이 먼저 고려되지 않는다. 피해자 당사자가 진정으로 용서할 마음이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그리고 그때만이 그 용서가 '순수한 용서'라고 말한다.

프랑스 역시 우리나라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나치의 비시정부가 몰락하고 해방된 프랑스에서는 비시 정부에 협력한 사람들을 모두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강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대항해야 하는 시대적 상황에 의해서 정부는 극단적인 가담자 외에 대부분을 사면하게 된다. 데리다는 이런 용서가 주권에 의한 용서, 제 삼자의 용서로서 '순수한 용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잔혹한 살인과 고문이 있었지만 사회의 안정과 화합을 위해 백인 가해자들에게 사면권을 주게 된다. 이때 한 자신의 남편이 고문되고 살해당한 한 흑인 여성이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위원회 또는 정부가 용서를 할 수는 없다. 나만이 어쩌면, 그것을 할 수 있다. 나는 용서할 혹은 용서하기 위한 준비가 안 되어 있다.(P238) "

어쩌면 이렇게 용서를 매게로 한 정치적 타협은 역사와 시대의 변화에도 바뀌지 않는 것일까?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위안부 문제를 두고 박근혜 정부와 아베 총리의 내각 간에 협정이 있었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다음부터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그 협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국제적인 관계나 시대적인 상황이 한일간의 화해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누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을까?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고, 정치적인 고려로 인한 용서가 과연 순수한 용서일까? 이에 대해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다시 주권의 역사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우리가 용서에 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때로 "나는 너를 용서한다"라는 말을 참을 수 없거나 가증스러운 것, 더 나아가 외설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주권의 주장입니다. 그것은 종종 위로부터 아래로 말을 걸어오고, 자신의 고유한 자유를 확언하거나 용서의 능력을 부당하게 가로채 버립니다. 그것이 제아무리 희생자로서 혹은 희생자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희생자 만들기, 다시 말해 피해자로부터의 삶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혹은 "내가 용서할게"라는 입장에 이를 수 있게 하거나 허용하는 이 자유와 힘과 권한을 박탈하는 희생자 만들기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거기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은 피해자로부터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말 자체를, 모든 표명의 가능성을, 모든 증언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때 피해자는 거기에 더해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라라고 잠재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가능성마저 빼앗긴 상태가 된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범죄는 오로지 살인의 형상으로만 도래하는 것이 아닙니다.(P261)


데리다는 국가나 제 삼자가 피해자를 대신해서 정치적인 상황이나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을 피해자의 용서할 수 없는 권리를 빼앗는 살인과 같은 절대적인 범죄라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 사회는 용서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폭력을 행하고 있지는 않은가? 권력에 의해, 타인에 의해 피해를 당하고도 용서해만 한다는 또 다른 권력에 떠밀려 자신의 용서할 권리마저 빼앗기고, 용서가 아닌 용서하는 사람들... 그들이 그 용서를 한 후에 가졌을 그 허탈감과 상실감을 누가 알까? 용서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피해를 가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용서의 의미가 회복되고, 용서의 권리가 다시금 피해자에게 돌아오는 세상을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