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뇌과학지식 50 - 100년 동안 인류가 뇌에 관해 밝혀온 모든 것
모헤브 코스탄디 지음, 박인용 옮김, 정용 감수 / 반니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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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요즘 들어 인간의 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몇 가지 사건 때문이다. 첫 번째는 주변의 노인분들의 변화이다. 오랜 시절 옆에서 보았던 넓고 예리한 시각을 가지고 있던 분들이, 어느 순간부터 편협하고 좁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심지어는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기억을 잃어가다가 결국에는 치매에 이르는 경우도 보게 된다. 평생을 노력해서 얻은 지식과 인격 등이 단순히 뇌의 노화로 인해 사라진다는 것이 얼마나 서글픈 것인지를 요즘 새삼 느끼고 있다.

두 번째는 아이의 탄생의 과정에서 육아의 책들을 읽다 보니 뇌의 성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유아기 때의 엄마나 아빠와의 관계에 아이의 전두엽 발전에 매우 밀접한 영향을 미치며, 이 전두엽이 충동적인 행동의 절제나 합리적인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또한 전두엽을 통해 '옥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발생하는데 이를 통해 사람과의 유대관계가 형성된다. 그래서 대부분 사이코패스 같은 경우 전두엽이 다른 사람보다 덜 발달되는 것이 관측되는 것이다. 아이의 유아기 때의 양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고 있다.

세 번째는 인문학 서적을 읽으면서 사람의 인지 능력에 대한 사색을 하게 되었다. 현상학과 해석학과 관련된 책들을 읽으며 결국 사람의 외부 세계를 시각이나 청각 등을 통해 인식해 가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의식으로 기억하고 해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의 뇌에 어떤 인식 작용이 일어나는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들게 되었다.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반니 출판사에서 나온 [일사적이지만 절대적인 뇌과학지식 50]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부제는 '100년 동안 인류가 뇌에 밝혀온 모든 것'이라는 제목이었다. 제목만으로 조금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책이지만, 일단 책을 열게 되면 50개의 이론들이 매우 일목요연하게 언어와 그림 등으로 설명되어 있다. 또한 이런 이론들도 일반인들이 알아야 할 기본적인 부분만 쉽게 설명되어 있다.

 

 

 

50개의 이론들을 여기서 모두 설명하기는 불가능하기에 앞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몇 가지 궁금증에 몇 가지만을 나열해보도록 하겠다.

먼저는 일단의 뇌의 손상과 퇴화 부분들이다. 뇌가 손상이 입거나 나이가 들어 세포가 죽으면 뇌의 기능이 저하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니어스 게이지'라는 사람의 뇌에 대한 연구이다. 게이지는 성실한 철도노동자였는데, 어느 날 폭발 사고로 1미터짜리 쇠막대가 머리를 관통하고 날아갔다. 다행히 게이지는 살아남고, 일을 하는데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성격이 변했다는 것이다. 성실한 사람이 폭력적이고 거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후에 그가 죽은 후 그의 뇌를 연구하니 좌뇌의 전두엽 피질이 상당 부분 훼손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P31) 결국 뇌의 손상이 사람의 성격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진화된 근대인의 정신과 더불어 출현한 집행기능은 전전두피질에 결부되어 있다. 전전두피질은 인간과 가장 가까운 유인원 조상들보다 훨씬 고도로 발달한 뇌 부위다. 여기서 이뤄지는 과정들은 목표 지향적인 행동을 끌어내는 한편, 낯선 상황에 대처하는 데도 중요하다. 알츠하이머병, ADHD, 자폐증, 우울증, 조현병 등 광범위한 정신질환이나 신경 질환이 이 기능의 손상과 관계있다고 생각된다. (P96)

 

언어에 관련된 연구로는 브로카와 베르니케의 연구가 소개된다. 이들은 언어 장애가 온 환자의 뇌를 연구한 결과(물론 사후에) 이들의 뇌의 일정한 부분이 손상된 것을 밝혀 내었다. 그래서 연구자의 이름을 따라서 각자가 발견한 뇌의 부분을 브로카 영역과 베르니케 영역이라고 부른다. 이 부분이 뇌의 언어 부분을 감당하고, 이것이 손상되었을 경우 언어장애가 온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최근의 뇌 연구는 이보다 더 복잡하고 다층적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한 부분이 한 가지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뇌의 모든 부분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단순히 어느 한 부분의 문제로 언어장애가 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은 뇌의 성장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유명한 실험이 '마시멜로 테스트'라는 실험이다. 아이들에게 자신들이 좋아하는 마시멜로나 과자를 앞에 놓고 기다리는 훈련을 시켰다는 것이다. 50명의 아이 중 3분의 1이 성공을 했고, 이 아이들을 생애를 추적한 결과 충동을 억제한 아이들이 학업성취도나 자존감, 스트레스 극복에 우월성을 보였다는 것이다.

결국 뇌는 어린 시절에 형성되고, 그렇게 형성된 뇌가 아이의 전 생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런 뇌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스트레스이다. 특히 어린 시절의 뇌의 스트레스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유아기와 사춘기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뇌와 행동 태도에 부정적인 영향이 오래 지속된다. 생애 초기의 생활 스트레스는 뇌 회로의 발달을 방해하고 정신적인 기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생애 후기에 정신질환을 일으킬 위험성을 높인다. 하지만 부정적인 영향 일부는 돌이킬 수 있으며, 이 점은 자녀 양육과 사회 정책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스트레스나 위협적인 상황에 대응하는 능력은 생존에 꼭 필요하다. 그러나 동물과 사람을 대상으로 이뤄진 수많은 연구를 통해, 스트레스에 오래 노출되면 뇌에 유독한 효과가 미친다고 알려졌다. 뇌는 유아기, 사춘기, 노년기에 특히 스트레스에 민감하다. 보통 이 기간에 극적인 변화를 겪기 때문이다. 스트레스가 영향을 미치는 정도는 스트레스가 가해지는 시점과 지속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유아기와 사춘기에 스트레스를 오래 받으면 뇌 회로의 발달에 지장이 생기고, 행동에도 해로운 영향이 오래 지속된다. 연구에 따라면 방치, 아동학대, 궁핍 등과 같이 스트레스가 많은 상황이 거듭되면 뇌 성장이 저해되고, 이후 정신적 기능에 부정적 영향이 지속될 뿐 아니라 정신건강상 위험이 증대될 수도 있다. (P125)



마지막으로 인지 기능의 문제이다. 인간의 뇌는 어떤 기억들을 저장하고, 후에 재생한다. 그런데 이 책은 인간이 기억을 저장하고 기억하는 과정에서 기억은 변한다고 말하고 있다.

바틀릿은 실험에 이 놀이를 이용했다. 사람들에게 귀신 전쟁이라는 미국 원주민의 옛이야기를 읽게 한 뒤 여러 차계에 걸쳐, 때로는 1년 뒤에 그 이야기를 회상하게 했다. 사람들은 회상할 때마다 반드시 이야기 줄거리를 바꿔 말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자기가 부적절함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빠뜨리는가 하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으로 초점을 옮겨 부각하고, 의미가 닿지 않는 부분은 스스로 조리 있게 바꾸었다.
바틀릿에 따르면, 그들이 이야기를 바꾸는 것은 자신이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지식의 틀에 이야기를 맞추기 위해서이다. 달리 말하면 회상을 하는 과정은 우리 자신의 기대와 선입견에 물들어, 기억을 미묘하게 바꿔버린다. 바틀릿은 이제 고전이 된 저서 [회상]에서 이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어떤 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혼합된 정보를 반영한다.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 부호화된 것에 지식, 기대, 믿음,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추론이 덧붙여진다.(P74-5)"



최근의 연구에서는 사람이 자는 동안 기억이 축적되고 재생되는데 이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내 기억이 백 퍼센트 진실이라는 것을 맹신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이 백 퍼센트 맞는다고 이것과 다르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간의 기억은 결국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간과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그동안 뇌과학이나 호르몬 연구에 대한 이론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었다. 이런 연구들이 개인행동의 책임을 유전적 여향이나 호르몬 영향으로 돌려서 회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이 평생 노력하고 닦은 인간의 성품이나 인격 등이 결국의 뇌의 세포나 호르몬의 작은 변화 때문에 바뀔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서글픈가? 그러나 이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일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뇌나 호르몬의 결핍된 부분을 인간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것이다. 마치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이를 알고 더 노력해서 가난을 극복한 것처럼, 자신의 약한 부분을 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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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콘서트]나 [역사콘서트]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황광우에 의해 쓰여진 [철학의 신전]이란 책에서는 플라톤의 철학을 호메로스의 신화에 대립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본다. 저자는 플라톤을 이상주의적 정치적 야심가로 보는 반면, 호메로스는 인간적인 현실주의자로 보았다. 그러기에 호메로스는 인간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정욕적인 신들을 노래한다. 반면 플라톤은 이런 호메로스적인 신화가 그리스 문화와 청년을 병들게 한다고 본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당시 그리스 사회에 현실적인 생각인 생각들이 매우 지배적이었다는 것이다. 1권의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한 소피스트의 괴팍한 주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고대 아테네인의 상식을 반영한 주장이었다. 역사가 투기디테스는 기록했다. "약육강식의 원칙을 존중하십시오. 여러분은 먼저 투항하십시오. 강자에 대한 약자의 증오는 강자의 폭력을 유발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보다 약한 나라이며, 여러분이 독립할 수 없다면 굴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며, 신의 법칙입니다." - [철학의 신전] P49

 

플라톤의 국가 2권에서의 대화에서는 이런 당시의 그리스 사회에 만연한 정의에 대한 회의감을 여실히 볼 수 있다. 2권에서 대화자는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소크라테스 세 명이다. 제일 먼저는 플라톤의 형으로 알려져 있는 동시에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글라우콘이 먼저 대화에 나선다. 그는 앞선 '정의는 강한 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더 밀어붙인다. 이것은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동의해서가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당시에 만연하던 이런 주장들을 더 명확히 논박해 주기를 바라서이다. 글라우콘의 주장은 어찌 보면 홉스의 [사회계약론]을 연상시킨다.

사람들은 분명히 이렇게들 말하고 있으니까요. 본디는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는 것이 좋은 것이요, 올바르지 못한 짓을 당한 것은 나쁜 것이지만, 그걸 당함으로써 입는 나쁨이 그걸 저지름으로써 얻는 좋음보다 월등하게 커서, 결국 사람들이 서로를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기도 하고 또 당하기도 하며, 그 양쪽 다를 겪어 보게 되었을 때, 한쪽은 피하되 다른 한쪽을 취하기가 불가능한 사람들로서는 서로 간에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거나 당하지 않도록 약정하는 것이 이익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씀입니다. 또한 바로 이것이 연유가 되어, 사람들은 자신들의 법률과 약정을 제장하기 시작했으며, 이 법에 의한 지시를 합법적이며 올바르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실로 올바름의 기원이며 본질이라는 거죠, 그건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고도 처벌을 받지 않는 최선의 경우와 그걸 당하고도 그 보복을 할 수  없는 최악의 경우, 이 두 경우의 중간에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P126-7)

 

글라오콘은 이런 주장을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기게스의 반지'이야기를 한다. 기게스라는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반지를 얻고, 그 반지를 통해 왕비와 부정을 저지르고, 왕을 살해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람은 아무도 자신의 불의를 알 수 없다면 결국의 불의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폴 버호벤 감독의 [투명인간]이란 영화가 생각나는 대화이다. 결국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정의는 남의 이목이나 보복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두 번째 대화자로 나선 아데이만토스는 동생 글라우콘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사람들이 정의를 행하는 이유는 타인의 평판이나 죽은 후의 보상 같은 결과적인 것 때문이고, 이런 것이 없이도 정의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사람들은 모두 불의를 저지르고 싶어하지만 그것을 저지를 용기가 없거나, 그 뒷감당을 할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만 용기 부족이나 노령 때문에 또는 그 밖의 다른 어떤 무력함 때문에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를 수가 없어서,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걸 비난한다는 것을 말씀입니다. 사실 이러하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누구든지 맨 먼저 그럴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면, 맨 먼저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를 사람이 그 일 것이며, 그것도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P141)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주장은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생각들과 너무 닮아있다. 정의를 지키는 사람은 손해를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이 결국 이익을 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불의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을 비난하지만, 자신들이 권력이나 부를 가지게 되면 면 똑같은 불의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절대적인 정의를 믿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당시의 이런 생각들에 동의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당시의 정의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함으로서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이에 대한 확실한 반론을 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개인에게 있어서 정의가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국가에서의 정의를 이야기한다.

이 문제의 탐구를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이 내겐 생각되네. 이를테면, 그다지 시력이 좋지 못한 사람들더러 작은 글씨들을 먼 거리에서 읽도록 지시했을 경우에, 어떤 사람이 이런 생각을, 즉 똑같은 글씨들이 어디엔가 더 큰 곳에 더 큰 글씨로 적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먼저 이것들을 읽고 난 다음에, 한결 작은 글씨들이 이것들과 혹시 같은 것들인지를 살피게 된다면, 이는 천행으로 여겨질 거라고 나는 생각하네.(P145)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먼저 국가의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가에 널리 퍼져있는 잘못된 신화를 이야기한다. 신화에서 신들은 다른 사람으로 변신을 해 간통이나 부정을 저지른다. 그러나 플라톤은 신은 정의롭고 완전한 존재이지, 그런 부정을 저지르는 존재는 신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지어낸 거짓 신화가 국가에서 각자의 정의에 맡게 교육받는 젊은 세대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플라톤은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대신 주장하는 사람들이 평판을 염두해 두거나 피해를 당하기 싫어서 정의를 행할 뿐, 능력만 있다면 앞장서서 불의를 행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을 옳다는 생각들은 당시에 그들이 어려서부터 배우는 잘못된 신화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우리 시대의 학생들은 무엇을 배울까? 어떤 잘못된 성공신화를 배울까? 법을 어겨서라도 성공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정의라고 믿지는 않을까? 플라톤이 맞서서 싸우려 했던 것은 일개 소피스트가 아니라, 그 당시에 만연했던 정의에 대한 회의적이고도 상대적인 생각들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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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5-19 2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철학에 관한 장문의 글이네요.
책의 내용부터 현대의 학생들에 관한 물음까지 멋집니다.

가을벚꽃 2016-05-19 23:27   좋아요 0 | URL
오래 전에 읽었던 플라톤의 <국가>라는 책을 다시 읽으며 한 챕터씩 정리하고 있는 중이예요. 2천년도 훨씬 전에 쓰여딘 글이 이 시대의 상황과 너무 비슷해서 나름 쓸 내용이 많네요^^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 르네상스부터 리먼사태까지 회계로 본 번영과 몰락의 세계사
제이컵 솔 지음, 정해영 옮김, 전성호 부록 / 메멘토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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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흥망성쇠와 경제가 어떻게 관련이 되어 있는지를 세밀하게 다루고 있는 책이네요. 과거의 역사를 알고, 현재의 흐름을 알고,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꼭 필요한 책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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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다시 플라톤의 [국가]를 읽기 시작했다. 1권을 읽으며 몇 해전 읽었던 마이클 샌덜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생각났다. 이 책은 국내에서도 인기를 얻으며 인문학 열풍을 일으켰었다. 이 책에서는 저자는 다양한 상황에서 어떤 것이 '정의'인지를 묻는다. 대부분의 상황은 도덕적 딜레마라고 할 수 있는 애매한 상황들이고, 쉽게 판단을 내리기 힘든 상황들이다. 저자는 이런 질문을 통해 과연 '정의'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상황마다 적용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당시 이 책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서평 등을 읽어 보았는데. 대부분이 이 책을 통해 다시금 인문학과 철학, 그 중에서도 윤리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며 긍정적인 글들이었다. 반면 어떤  서평 중에는 복잡한 논리에 머리 아파하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론뿐인 '정의'라고 폄하하는 글도 보았다. 어쩌면 후자의 반응도 이해가 되는 것이 이런 정의에 대한 논의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것들이 그냥 말장난처럼 들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의'에 대한 논의를 이미 서양에서는 2천년도 넘는 시기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정의'에 대한 대표적인 논의를 다룬 책이 플라톤의 [국가]이다.

플라톤의 국가라는 책은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여러 사람들과 논쟁하는 내용이다.(플라톤의 작품의 대부분 '소크라테스'가 등장하고,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자신의 사상을 이야기한다.) 10권까지 방대한 논쟁이 전개되는데,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인 '산파술'이 사용된다. 산파술이란 상대가 주장하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함으로서 상대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방법이다. 1권에서는 주로 정의가 무엇인지를 묻고, 그에 대한 대답에 대한 소크라테스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짐으로서 그들이 잘못 가지고 있던 '정의'에 대한 개념을 변화시키고 있다.

1권의 시작은 소크라테스와 그의 일행들이 아테네의 인심 좋은 부호인 '케팔로스'의 초대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가 케팔로스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자, 케팔로스는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 친구에게는 선으로, 적에게는 악으로 갚는 것을 정의라고 말한다. 이 주장은 그리스의 시인 시모니데스의 말을 케팔로스가 인용한 것이다. 후에 케팔로스의 아들 플레마르코스가 이 주장을 이어서 소크라테스와 논의를 한다.

소크라테스는 플레마르코스의 논의를 계속해서 질문해 가며, 그의 주장의 허점을 지적한다. 소크라테스의 논지는 정의란 각자 자신이 맡은 일을 잘 하는 것이 정의이며, 그런 의미에서 정치인은 정치를, 의사는 의술을, 선장은 항해술을 잘 베푸는 것이 정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정의를 베푸는 사람은 결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정의가 아니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이런 논의를 듣고 있던 트라시마코스가 분노하며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법을 비난한다. 그리고 자신 있게 정의란 '더 강한 자의 편익'이라고 주장한다. (예전에 읽었던 책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번역이 더 부드럽고 이해하기 쉬웠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주장도 아테네 함대사령관이 Kallikese의 말로서 실제로 역사상 인물이자 소피스트로 알려진 트라시마코스가 인용하고 있는 주장이다.(박종현 교수의 [국가]에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없고, 예전의 읽었던 다른 번역서에서 읽었던 내용이다.) 그는 참주정치등을 예로 들면 정치가들은 자신의 이익에 맞게 법을 만들고, 일반인들은 그것을 따름으로 정의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결국 정의란 강한 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정치인이 정치를 맡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보다 더 못한 사람에게 다스림을 받는 모욕을 견디기 싫어서라고 말하며, 진정한 정의는 자신의 통치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자신의 이익만 추구해서 타인의 것을 빼앗는 것은 불의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트라시마코스는 소피스트답게 괴변을 말한다. 그는 작은 불의는 불의로 판단되지만 아예 커다란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은 오히려 정의가 된다는 것이다.

"이건 참주 정치인데. 이는 남의 것을, 그것이 신성한 것이건 세속의 것이건 간에 또는 개인의 것이건 공공의 것이건 간에, 몰래 그리고 강제로 빼앗기를 조금씩 조금씩 하는 게 아니라, 단번에 깡그리 하죠. 이런 올바르지 못한 행위들 중의 일부를 어떤 사람이 몰래 해내지 못할 때, 그는 처벌을 받고 최대의 비난을 받습니다. 신전 절도범이나 납치범, 가택 침입 강도나 사기꾼, 또는 도둑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못된 짓들과 관련하여 부분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시민의 재물에 더하여 그들 자신마저 납치하여 노예로 만들게 될 땐, 이들 부끄러운 호칭 대신에 행복한 사람이라거나 축복받은 사람이라 불리지요. 비단 제 나라의 시민들한테서뿐만 아니라, 이 사람이 전면적인 불의를 저질렀다는 소식을 들은 다른 모든 사람한테서도 말씀입니다. 올바르지 못한(불의)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막상 그걸 비난하는 것은 스스로 올바르지 못한 짓을 행하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피해를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니까요. 소크라테스 선생, 이처럼 올바르지 못한 짓이 큰 규모로 저질러지는 경우에는 그것이 올바름보다도 더 강하고 자유로우며 전횡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처음부터 말씀드렸듯, 올바른 것은 더 강한 자의 편익이지만, 올바르지 못한 것은 자신을 위한 이득이며 편익입니다."(P95-6)


예전에 이 부분을 읽을 때 어린 마음에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심정적인 동의를 했었다. 당시에 우리나라도 구테타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통치를 했었고, 그들의 통치가 곧 정의인 시대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작은 죄를 저지르면 불의지만, 큰 죄를 저지르면 그 사람이 행동이 곧 정의가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아무리 역사가 흘러도 사람의 의식은 쉽게 발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하는 경우가 있음에 씁쓸한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통치자란 자신이 다스리는 대상에게 덕을 베풀게 하는 것이고, 위에서처럼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결국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결국 그 통치는 무너지게 되고, 그의 통치는 정의도 아니고, 자신과 타인에게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트라시마코스가 눈에 보이는 순간을 이야기 한다면, 소크라테스는 더 거시적인 안목으로 역사를 보고, 정의를 이야기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오랫 만에 다시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면서, 예전과 같이 논리적인 논쟁을 따라가기에 뇌가 버거워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1권의 소크라테스의 질문들은 마치 고장난 정교한 기계를 다루듯이, 주장의 잘못된 부분을 사소한 것부터 점검하고 고쳐가는 과정이여서 이런 논의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동안 베스트셀러 위주로 책을 읽느라 고전에 아직 뇌가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다시금 그리스 고전들을 읽는 과정을 계속해 나가려고 한다.

참고로 이 책에서는 '정의'라는 단어를 '올바름'이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래 저자의 각주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 책의 장점은 헬라어 원전을 저자의 박식함으로 해석하고 있는 점이다. '정의'라는 단어와 '덕'이라는 단어와 같은 헬라어 단어와 그리스 문화에 대한 주석들은 이 책을 더 깊게 이해하는 재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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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그리고 엄마
마야 안젤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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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여러 번의 실패를 경험했었다. 그중에서는 너무 큰 좌절을 맛보아서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어떤 때에는 주변의 비난이 너무 심해서 사람을 피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나 자신의 어리석은 판단이 너무 후회가 돼서 스스로 자책감에 빠지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를 찾게 되었다. 낙심하고 지친 모습으로 찾아간 나를 어머니는 그때마다 반겨 주셨다. 그리고 '괜찮다!' '다시 하며 된다!' '나는 내 아들을 믿는다!' 이런 위로와 용기를 주셨다. 그렇게 어머니의 품에서 쉬고 나고, 어머니의 위로의 말을 듣고 나면, 다시금 힘이 나서 세상과 싸울 수 있었다. 결국 어머니는 영원한 내 편이었고, 내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존재였다.

마야 안젤루는 무용가이자 가수이며,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그녀는 또한 흑인과 여성 인권운동에 헌신한 미국 흑인들의 정신적인 스승이기도 하다. '오프라 윈프리'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자신의 멘토로 꼽기도하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에 한 명이다. 그러나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너무나 불우했다. 그녀는 어려서 이혼한 부모님 품을 떠나 세 살부터 13살까지 아칸소에 있는 친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중간에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어머니에게 간 적이 있지만, 그곳에서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이 책에서는 이 부분에서는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16살에는 미혼모로 아이를 낳고, 그 후에도 여러 풍파를 겪으며 이 아이를 키웠다.

사실 그녀가 유명한 예술가이자 문학가, 그리고 세계적인 인권 운동가가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녀는 이 책의 초반에 자신이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지금의 자신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를 '어머니'라는 존재에서 찾는다.

나는 종종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백인의 나라에서 흑인으로 태어났는데, 돈이라면 다들 사족을 못 쓰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자가 되려 하는 사회에서 가난뱅이로 태어났는데, 겨우 대형 선박과 몇몇 기관차에 여성형 대명사를 쓰면서 생색내는 환경에서 여성으로 태어났는데 어떻게 마야 안젤루가 되었느냐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 나오는 흑인 소녀 톱시의 말을 따라 하고 싶어진다. "몰라요, 그냥 이렇게 컸어요." 이렇게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내가 단 한 번도 그렇게 대답하지 않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십 대 초반에 그 책을 읽고 무식한 그 아이를 보며 창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이런 여자로 성장한 것은 사랑하는 할머니와 흠모하게 된 어머니 덕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P9)

사실 그녀가 어린 시절에 '레이디'로 부르고, 장성한 후에 주로 '비비안 여사'로 부르는 마야 안젤루의 어머니는 우리의 시각에서 보기에 그렇게 훌륭한 어머니는 아니다. 그녀는 거친 흑인 가정에서 자랐으며, 남성들과 함께 주먹다짐을 하며 자랐다. 어린 마야와 오빠를 어린 나이에 할머니에게 보냈고, 5살부터 청소년 시기까지 중요한 시기를 어머니와 떨어져 보낸 오빠는 끝내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평생을 마약 중독자로 살았다. 마야와 함께 살면서도 마야의 잘못된 행동에 손이 먼저 나가기도 했고, 도박장과 당구장, 술장사를 하며 거친 삶을 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마야의 어머니는 항상 마야에게는 커다란 그늘이고 우상이었다. 그녀는 흑인이 무시당하고, 여성이 차별받는 세상에 당당하게 맞서 자신의 것의 권리를 찾는 삶을 살았고, 딸에게도 그런 삶을 살 것을 조언했다. 어느 날 마야의 어머니는 그녀를 데리고 갓 흑인의 입장이 허락된 호텔을 찾아간다. 직원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당당히 호텔 로비로 들어가 자신신이 예약한 객실로 딸과 함께 들어간다. 객실에서 마야는 어머니의 가방에 38구경 리볼버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의아해하는 딸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조언한다.

"호텔측에서 인종 통합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으면 본때는 보여줄 참이었다. 얘야, 맞닥뜨리게 될 모든 상황에 대비하는 자세를 길러야 해. 틀렸다고 생각하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마. 옳다고 생각하는 일만 하고, 거기에 네 목숨을 걸 태세를 갖춰라. 네 입으로 한 이야기는 뭐든 다시 한번 반복할 수 있어야 해. 그러니까 한 번은 네 방 벽장 안에서, 또 한 번은 시청 앞 계단에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야. 이십 분 동안 모은 청중 앞에서 말이다. 뉴스감이 되려고 그래선 안 된다. 너와 네 이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언제나 네 이름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리려는 게 목적이 되어야 해. 안 좋은 상황이 닥칠 때마다 폭력을 쓰겠다는 협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란다. 네 머리로 해결책을 생각해낼 수 있을 거라 믿고, 그런 다음 용감하게 그 해결책을 밀어붙이면 되는 거야." (P184)

무엇보다도 마야의 어머니는 이 자신의 딸을 믿고 응원해 주었다. 마야가 17살에 미혼모로서 아들을 낳고 힘든 삶을 살고 있을 때에도 마야의 어머니는 그녀를 믿고, 그녀에게 힘을 준다.

한 블로 반쯤 지났을 대 필모어 스트리트와 풀턴 스트리트가 만나는 모퉁이의 피클 공장에서 풍겨오는 시큼한 식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때 나는 앞장서서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얘"하고 나를 불렀다.
나는 어머니 옆으로 걸어갔다.
"얘, 계속 생각해봤는데 이제 분명히 알겠구나. 넌 지금까지 내가 만난 여자 중에서 가장 대단해."
나는 완벽하게 화장을 하고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걸고 은색 여우털 목도리를 두른 그 아담하고 아리따운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샌프란시스코 흑인 사회의 대다수가 우러러보고, 심지어 백인들까지도 좋아하고 존경하는 여인이었다.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너는 마음씨가 아주 착하면서도 아주 똑똑하잖니. 이 두 가지를 겸비한 사람은 드문데 말이야.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 메리 맥리오드 배순 박사 그리고 내 어머니, 그래. 넌 그런 사람이야. 자, 키스해주렴."
-중략-
입안에서 아직도 빨간 쌀밥 맛이 느껴졌다. 그때 나는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욕을 하는 나쁜 습관을 고쳐야겠다고 결심했다. 술과 담배는 몇 년이 흐른 뒤에야 해결할 수 있었지만, 욕은 그 즉시 고쳤다.
생각해봐. 내가 진짜 대단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잖아. 언젠간 말이지.(P111-2)

마야 안젤루는 어머니의 말에 용기를 얻어 세상과 맞서 싸운다. 어머니의 방식으로... 그럼에도 그 싸움이 너무 지치고 용기가 나지 않을 때면 어머니에게 전화를 한다. 그러면 어머니는 비행기 값을 보낼 테니 당장 내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딸이 오면 항상 딸을 반기고, 딸에게 힘을 준다. 후에 마야 안젤루가 성공을 해서 스웨덴에서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할 때 주변의 사람들에게 너무 심한 반대를 당해 일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비행기 표를 사드릴 테니 당장 내일 이곳으로 와 줄 수 없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렇게 딸에게 달려간다. 어머니가 주는 위로와 용기로 마야는 그 일을 포기하지 않고 마친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 자신의 가능성을 알아주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힘들 때마다 힘이 되어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세상에 한 명만 있다면, 누구나 어떤 진흙 구덩이 속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젠 나도 그런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버이의 날이 포함되어 있는 5월에 어머니의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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