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콘서트]나 [역사콘서트]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황광우에 의해 쓰여진 [철학의 신전]이란 책에서는 플라톤의 철학을 호메로스의 신화에 대립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본다. 저자는 플라톤을 이상주의적 정치적 야심가로 보는 반면, 호메로스는 인간적인 현실주의자로 보았다. 그러기에 호메로스는 인간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정욕적인 신들을 노래한다. 반면 플라톤은 이런 호메로스적인 신화가 그리스 문화와 청년을 병들게 한다고 본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당시 그리스 사회에 현실적인 생각인 생각들이 매우 지배적이었다는 것이다. 1권의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한 소피스트의 괴팍한 주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고대 아테네인의 상식을 반영한 주장이었다. 역사가 투기디테스는 기록했다. "약육강식의 원칙을 존중하십시오. 여러분은 먼저 투항하십시오. 강자에 대한 약자의 증오는 강자의 폭력을 유발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보다 약한 나라이며, 여러분이 독립할 수 없다면 굴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며, 신의 법칙입니다." - [철학의 신전] P49

 

플라톤의 국가 2권에서의 대화에서는 이런 당시의 그리스 사회에 만연한 정의에 대한 회의감을 여실히 볼 수 있다. 2권에서 대화자는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소크라테스 세 명이다. 제일 먼저는 플라톤의 형으로 알려져 있는 동시에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글라우콘이 먼저 대화에 나선다. 그는 앞선 '정의는 강한 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더 밀어붙인다. 이것은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동의해서가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당시에 만연하던 이런 주장들을 더 명확히 논박해 주기를 바라서이다. 글라우콘의 주장은 어찌 보면 홉스의 [사회계약론]을 연상시킨다.

사람들은 분명히 이렇게들 말하고 있으니까요. 본디는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는 것이 좋은 것이요, 올바르지 못한 짓을 당한 것은 나쁜 것이지만, 그걸 당함으로써 입는 나쁨이 그걸 저지름으로써 얻는 좋음보다 월등하게 커서, 결국 사람들이 서로를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기도 하고 또 당하기도 하며, 그 양쪽 다를 겪어 보게 되었을 때, 한쪽은 피하되 다른 한쪽을 취하기가 불가능한 사람들로서는 서로 간에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거나 당하지 않도록 약정하는 것이 이익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씀입니다. 또한 바로 이것이 연유가 되어, 사람들은 자신들의 법률과 약정을 제장하기 시작했으며, 이 법에 의한 지시를 합법적이며 올바르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실로 올바름의 기원이며 본질이라는 거죠, 그건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고도 처벌을 받지 않는 최선의 경우와 그걸 당하고도 그 보복을 할 수  없는 최악의 경우, 이 두 경우의 중간에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P126-7)

 

글라오콘은 이런 주장을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기게스의 반지'이야기를 한다. 기게스라는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반지를 얻고, 그 반지를 통해 왕비와 부정을 저지르고, 왕을 살해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람은 아무도 자신의 불의를 알 수 없다면 결국의 불의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폴 버호벤 감독의 [투명인간]이란 영화가 생각나는 대화이다. 결국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정의는 남의 이목이나 보복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두 번째 대화자로 나선 아데이만토스는 동생 글라우콘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사람들이 정의를 행하는 이유는 타인의 평판이나 죽은 후의 보상 같은 결과적인 것 때문이고, 이런 것이 없이도 정의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사람들은 모두 불의를 저지르고 싶어하지만 그것을 저지를 용기가 없거나, 그 뒷감당을 할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만 용기 부족이나 노령 때문에 또는 그 밖의 다른 어떤 무력함 때문에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를 수가 없어서,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걸 비난한다는 것을 말씀입니다. 사실 이러하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누구든지 맨 먼저 그럴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면, 맨 먼저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를 사람이 그 일 것이며, 그것도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P141)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주장은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생각들과 너무 닮아있다. 정의를 지키는 사람은 손해를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이 결국 이익을 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불의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을 비난하지만, 자신들이 권력이나 부를 가지게 되면 면 똑같은 불의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절대적인 정의를 믿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당시의 이런 생각들에 동의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당시의 정의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함으로서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이에 대한 확실한 반론을 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개인에게 있어서 정의가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국가에서의 정의를 이야기한다.

이 문제의 탐구를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이 내겐 생각되네. 이를테면, 그다지 시력이 좋지 못한 사람들더러 작은 글씨들을 먼 거리에서 읽도록 지시했을 경우에, 어떤 사람이 이런 생각을, 즉 똑같은 글씨들이 어디엔가 더 큰 곳에 더 큰 글씨로 적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먼저 이것들을 읽고 난 다음에, 한결 작은 글씨들이 이것들과 혹시 같은 것들인지를 살피게 된다면, 이는 천행으로 여겨질 거라고 나는 생각하네.(P145)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먼저 국가의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가에 널리 퍼져있는 잘못된 신화를 이야기한다. 신화에서 신들은 다른 사람으로 변신을 해 간통이나 부정을 저지른다. 그러나 플라톤은 신은 정의롭고 완전한 존재이지, 그런 부정을 저지르는 존재는 신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지어낸 거짓 신화가 국가에서 각자의 정의에 맡게 교육받는 젊은 세대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플라톤은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대신 주장하는 사람들이 평판을 염두해 두거나 피해를 당하기 싫어서 정의를 행할 뿐, 능력만 있다면 앞장서서 불의를 행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을 옳다는 생각들은 당시에 그들이 어려서부터 배우는 잘못된 신화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우리 시대의 학생들은 무엇을 배울까? 어떤 잘못된 성공신화를 배울까? 법을 어겨서라도 성공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정의라고 믿지는 않을까? 플라톤이 맞서서 싸우려 했던 것은 일개 소피스트가 아니라, 그 당시에 만연했던 정의에 대한 회의적이고도 상대적인 생각들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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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5-19 2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철학에 관한 장문의 글이네요.
책의 내용부터 현대의 학생들에 관한 물음까지 멋집니다.

가을벚꽃 2016-05-19 23:27   좋아요 0 | URL
오래 전에 읽었던 플라톤의 <국가>라는 책을 다시 읽으며 한 챕터씩 정리하고 있는 중이예요. 2천년도 훨씬 전에 쓰여딘 글이 이 시대의 상황과 너무 비슷해서 나름 쓸 내용이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