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다시 플라톤의 [국가]를 읽기 시작했다. 1권을 읽으며 몇 해전 읽었던 마이클 샌덜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생각났다. 이 책은 국내에서도 인기를 얻으며 인문학 열풍을 일으켰었다. 이 책에서는 저자는 다양한 상황에서 어떤 것이 '정의'인지를 묻는다. 대부분의 상황은 도덕적 딜레마라고 할 수 있는 애매한 상황들이고, 쉽게 판단을 내리기 힘든 상황들이다. 저자는 이런 질문을 통해 과연 '정의'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상황마다 적용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당시 이 책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서평 등을 읽어 보았는데. 대부분이 이 책을 통해 다시금 인문학과 철학, 그 중에서도 윤리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며 긍정적인 글들이었다. 반면 어떤  서평 중에는 복잡한 논리에 머리 아파하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론뿐인 '정의'라고 폄하하는 글도 보았다. 어쩌면 후자의 반응도 이해가 되는 것이 이런 정의에 대한 논의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것들이 그냥 말장난처럼 들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의'에 대한 논의를 이미 서양에서는 2천년도 넘는 시기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정의'에 대한 대표적인 논의를 다룬 책이 플라톤의 [국가]이다.

플라톤의 국가라는 책은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여러 사람들과 논쟁하는 내용이다.(플라톤의 작품의 대부분 '소크라테스'가 등장하고,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자신의 사상을 이야기한다.) 10권까지 방대한 논쟁이 전개되는데,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인 '산파술'이 사용된다. 산파술이란 상대가 주장하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함으로서 상대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방법이다. 1권에서는 주로 정의가 무엇인지를 묻고, 그에 대한 대답에 대한 소크라테스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짐으로서 그들이 잘못 가지고 있던 '정의'에 대한 개념을 변화시키고 있다.

1권의 시작은 소크라테스와 그의 일행들이 아테네의 인심 좋은 부호인 '케팔로스'의 초대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가 케팔로스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자, 케팔로스는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 친구에게는 선으로, 적에게는 악으로 갚는 것을 정의라고 말한다. 이 주장은 그리스의 시인 시모니데스의 말을 케팔로스가 인용한 것이다. 후에 케팔로스의 아들 플레마르코스가 이 주장을 이어서 소크라테스와 논의를 한다.

소크라테스는 플레마르코스의 논의를 계속해서 질문해 가며, 그의 주장의 허점을 지적한다. 소크라테스의 논지는 정의란 각자 자신이 맡은 일을 잘 하는 것이 정의이며, 그런 의미에서 정치인은 정치를, 의사는 의술을, 선장은 항해술을 잘 베푸는 것이 정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정의를 베푸는 사람은 결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정의가 아니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이런 논의를 듣고 있던 트라시마코스가 분노하며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법을 비난한다. 그리고 자신 있게 정의란 '더 강한 자의 편익'이라고 주장한다. (예전에 읽었던 책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번역이 더 부드럽고 이해하기 쉬웠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주장도 아테네 함대사령관이 Kallikese의 말로서 실제로 역사상 인물이자 소피스트로 알려진 트라시마코스가 인용하고 있는 주장이다.(박종현 교수의 [국가]에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없고, 예전의 읽었던 다른 번역서에서 읽었던 내용이다.) 그는 참주정치등을 예로 들면 정치가들은 자신의 이익에 맞게 법을 만들고, 일반인들은 그것을 따름으로 정의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결국 정의란 강한 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정치인이 정치를 맡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보다 더 못한 사람에게 다스림을 받는 모욕을 견디기 싫어서라고 말하며, 진정한 정의는 자신의 통치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자신의 이익만 추구해서 타인의 것을 빼앗는 것은 불의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트라시마코스는 소피스트답게 괴변을 말한다. 그는 작은 불의는 불의로 판단되지만 아예 커다란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은 오히려 정의가 된다는 것이다.

"이건 참주 정치인데. 이는 남의 것을, 그것이 신성한 것이건 세속의 것이건 간에 또는 개인의 것이건 공공의 것이건 간에, 몰래 그리고 강제로 빼앗기를 조금씩 조금씩 하는 게 아니라, 단번에 깡그리 하죠. 이런 올바르지 못한 행위들 중의 일부를 어떤 사람이 몰래 해내지 못할 때, 그는 처벌을 받고 최대의 비난을 받습니다. 신전 절도범이나 납치범, 가택 침입 강도나 사기꾼, 또는 도둑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못된 짓들과 관련하여 부분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시민의 재물에 더하여 그들 자신마저 납치하여 노예로 만들게 될 땐, 이들 부끄러운 호칭 대신에 행복한 사람이라거나 축복받은 사람이라 불리지요. 비단 제 나라의 시민들한테서뿐만 아니라, 이 사람이 전면적인 불의를 저질렀다는 소식을 들은 다른 모든 사람한테서도 말씀입니다. 올바르지 못한(불의)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막상 그걸 비난하는 것은 스스로 올바르지 못한 짓을 행하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피해를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니까요. 소크라테스 선생, 이처럼 올바르지 못한 짓이 큰 규모로 저질러지는 경우에는 그것이 올바름보다도 더 강하고 자유로우며 전횡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처음부터 말씀드렸듯, 올바른 것은 더 강한 자의 편익이지만, 올바르지 못한 것은 자신을 위한 이득이며 편익입니다."(P95-6)


예전에 이 부분을 읽을 때 어린 마음에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심정적인 동의를 했었다. 당시에 우리나라도 구테타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통치를 했었고, 그들의 통치가 곧 정의인 시대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작은 죄를 저지르면 불의지만, 큰 죄를 저지르면 그 사람이 행동이 곧 정의가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아무리 역사가 흘러도 사람의 의식은 쉽게 발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하는 경우가 있음에 씁쓸한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통치자란 자신이 다스리는 대상에게 덕을 베풀게 하는 것이고, 위에서처럼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결국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결국 그 통치는 무너지게 되고, 그의 통치는 정의도 아니고, 자신과 타인에게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트라시마코스가 눈에 보이는 순간을 이야기 한다면, 소크라테스는 더 거시적인 안목으로 역사를 보고, 정의를 이야기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오랫 만에 다시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면서, 예전과 같이 논리적인 논쟁을 따라가기에 뇌가 버거워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1권의 소크라테스의 질문들은 마치 고장난 정교한 기계를 다루듯이, 주장의 잘못된 부분을 사소한 것부터 점검하고 고쳐가는 과정이여서 이런 논의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동안 베스트셀러 위주로 책을 읽느라 고전에 아직 뇌가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다시금 그리스 고전들을 읽는 과정을 계속해 나가려고 한다.

참고로 이 책에서는 '정의'라는 단어를 '올바름'이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래 저자의 각주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 책의 장점은 헬라어 원전을 저자의 박식함으로 해석하고 있는 점이다. '정의'라는 단어와 '덕'이라는 단어와 같은 헬라어 단어와 그리스 문화에 대한 주석들은 이 책을 더 깊게 이해하는 재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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