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아름답다 - 은퇴할 사람들과 은퇴한 사람들에게 띄우는 세 번째 지리산 통신
구영회 지음 / 나남출판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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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일터에서 사람과의 관계에 지치고, 육체적인 고단함까지 겹쳐져서 하루 하루 견디기가 쉽지 않았었다. 무작정 휴가를 내고 아내와 함께 지리산으로 떠났다. 그리고 계획도, 순서도 없이, 지리산 둘레길의 한구간을 마음대로 정해서 걷고 싶은 만큼 걸었다. 한참을 걷고 나니 산 아래로 마을들이 보이며 절경이 펼쳐졌다. 그제서야 내가 세상에서 아웅다웅하는 문제들이 사실은 별것이 아닐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경험이 있은 후 몇 해 동안 휴가때마다 지리산을 찾았다. 지리산 둘레길은 1한 코스씩 걸으며, 주변의 경치들이나 절경등을 구경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렇게 지리산을 다녀오면 마음에 무거운 짐들이 조금은 가벼워짐을 느꼈다.



구영회 작가의 [사라져 아름답다]라는 글을 읽으며 다시금 지리산의 추억이 생각났다. 구영회 작가는 나 역시 몇 번 이름을 들었을만큼 방송계에서 이름이 알려진 저명인사이다. 30대부터 지리산을 들렀고, 은퇴 후에는 아예 지리산에 내려가 산지 7년이 되었다고 한다. 가끔 볼 일이 있어 서울에 들르지만 주로 생활하는 곳이 지리산이다. 그에게 있어서 지리산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인생을 리셋하는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서울 볼일을 마치고 산골에 되돌아올 때 남원 땅에서 멀리 지리산이 보이기 시작하면, 언제나 전혀 다른 세상에 들어서는 느낌이 되살아나곤 한다.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에서 다시 벗어나 '나 홀로 상태'로 모든 것이 초기화되는 기분이 든다." (P 221)


"지리산에 들어서면 아까 서울 집 대문에서 나를 배웅하던 가족들도 어느새 눈앞에서 사라지고 안 보인다. 바로 어제 저녁 정답게 소주잔을 기울이던 서울의 벗들도 안 보인다. 나를 둘러싸고 주변 가까이 있던 지인들도 모조리 어디로 가고 이곳엔 없다. 그야말로 인간이라곤 나 하나뿐이다." (P222-4)



저자는 70이 넘은 나이에 지리산에서 세상을 돌아가는 것을 관조한다. 산 속에서 생활하다가 선거철에 읍내나 서울에 나와서 선거운동을 보면서 위로만 오르기 위해 아웅다웅하는 인간세계를 바라본다. 그리고 얼마만큼 힘겹게 올랐든지, 결국은 내려와야 하는 인생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지리산엔 봄이 왔고 정치판엔 대목이 왔다. 나 없이도 잘 굴러가는 곳이기에 부질없는 호기심을 발동할 이유는 없지만, 내 인생의 이런저런 길목에서 인연을 맺은 낯익은 꽤 여려 명의 얼굴들이 국회의원 서거판에 보였다." (P29)


"이제 머지않아 이들 중 몇 사람은 목에 화환을 걸고 두 손을 높이 치켜들어 맹령히 손을 흔드는 뒤에 옷깃에 황금색 배지를 달고 거대한 돔 지붕 건물 앞마당에서 뒷자석 차문을 려고 내려 대히석 바닥을 저벅저벅 울리며 보란 듯이 걸어갈 것이다. - 중략 - 그러다가 어느 날 사람들의 식어 버린 관심에 머쓱해하면서 풀 죽은 모습으로 지푸라기를 찾다가 그마저 여의치 않게 되면, 마침내 평범한 군중들 사이로 썩여 들 것이다." (P32-3)"



저자는 바다로 흘러가 섬진강이란 이름을 버리고 이름없는 물이 되는 망덕포구에서, 쓸쓸이 떨어져 생을 마감하는 지리산 계곡의 벚꽃들에게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제 하나 둘씩 떠나가는 친구들의 장례식장에서 인생을 떠나감을 체험한다. 때로는 시끌벅적하게, 때로는 외롭게 생을 마감하는 장소에서 저자는 결국 인생과 죽음은 사람이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의 것임을 깨닫는다.


"따라서 당신과 내가 알고 있는 죽음이란 것은 그저 한낱 '해석'에 불과하다. 해석이란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자기 생각을 곁들여 지가 멋대로 단정하는 것이다. 진실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 말이다. 이런 점에서 그 친구의 마감이 외로웠을 것이라거나 빈소가 쓸쓸해 보인다는 나의 '해석'은 크게 빗나간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감은 당신과 나에게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일 뿐 '해석'이 섣불리 허용되지 않는 저 너무에 있다." (P189)


우리는 흔히 장례식에서 입구의 화환 숫자나 조문객의 숫자로 그 사람의 인생이 어떠했는지를 판단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시각일뿐, 인생이나 죽음은 그런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저자의 글을 통해 깨닫는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의 죽음은 해석 바깥의 세계일지도... 그럼에도 가끔은 내가 아는 사람이나, 나의 죽음이 너무 쓸쓸하지 않기를 바래본다.



인생의 산전수전을 겪고 70의 나이에 지리산에서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을 이제 겨우 인생의 초반을 달리며 작은 문제로 아웅다웅하고 있는 내가 어찌 다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게 아웅다웅하는 삶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는 저자의 글귀에서 잊고 있었던 인생의 다른 부분을 보게 된다.


지금 주어진 싸움이 전부인 것 같고, 이것에서 패하면 인생을 다 잃을 것 같은 절박함도 결국에는 지나가는 인생의 한 단면임을 저자의 글귀에서 깨닫게 된다. 글로는 이해되지만, 인생으로는 아직 그 깊이를 다 이해할 수 없는 저자의 글들을 새기며, 다시금 지리산에서 여유로운 인생을 바라볼 그 휴식 시간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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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정치인과 지도자들은 초기에는 대중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의견을 잘 경청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지위에 올라가고, 최고의 통치자가 되는 순간부터 대중들의 의견에 귀를 닫기 시작한다. 대중들의 반대의견을 묵살하거나 자신의 통치 스타일을 힘으로 밀고 나가는 경우가 많다. 이런 리더십은 단지 정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크고 작은 기업 조직이나, 지역 공동체에서도 이런 스타일의 리더십은 쉽게 접하게 된다. 권력이 사람을 변하게 해서 일까? 아니면 원래 권력이란 그런 것일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런 리더십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도자나 리더가 되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그들의 불만에 공감하며, 함께 윗선의 실책을 비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자신이 지도자가 되니, 이렇게 사람들의 의견만 듣다가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지도자의 위치에 서니 일이 추진되려면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밀어 붙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의외로 많은 리더들과 대화하다 보면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정말 대중들은 불평불만하는 것일까? 그들은 오직 비판을 위한 비판만을 하는 것일까? 그들의 의견을 들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일까?

 

 



차인석 교수의 [근대성과 자아의식]이라는 책의 다섯 번째 주제는 '공동체적 탐구 논리와 진보적 사회사상'이다. 제목은 조금 복잡하지만 내용은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과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사상의 연결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미국의 실용주의(Pragmatism)가 독일의 관념론이나 프랑스의 합리론, 영국의 경험론과 같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사상을 대표하는 철학이라고 말한다. 실용주의는 그 독특한 색깔 때문에 철학 사상에서는 많은 배척을 당했었다. 실용주의는 '반본질주의'적인 성격이 강하다. '본질주의'란 변치 않는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정통적인 철학 사상이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일상의 삶에서 유익한 것이 진리라는 상대적인 진리관을 가지고 있다.



 

"실용주의는 처음부터 고정된 지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는 데서 새 지식이 얻어지고 문제 해결의 방법이 고려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은 무한히 열려 있다고 여긴다. -중략- 실용주의가 고정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의 실현을 믿기 때문에 비판자들은 실용주의가 보편적 진리를 무시하는 상대주의에 지나지 않으며,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이 미국인들의 참 철학이 될 수 없다고까지 단정하기에 이른다." - P 144

 

 

개인적으로도 그동안 실용주의에 대한 이런 비판에 어느 정도 동조해 왔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실용주의의 다른 면을 보게 되었다. 실용주의는 단순히 개인들이 자신들의 방식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상대주의나 개인주의와는 다르다. 그들은 삶의 과정에서 진리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단순히 개인이 고립되어 만들어낸 진리가 아니다. 실용주의는 공동체적인 관계 속에서 진리를 발견해 나간다. 실용주의자들은 사회나 공동체와 분립되어 개인의 의식 속에 혼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란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진리란 공동체 속에서 관계를 관계를 맺어가며, 그 공동체가 발견해 나가는 것이 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발견해 나가는 진리가 결국 우주적인 진리에 접근하게 된다는 것이다.



 

"듀이에 의하면, 인식하는 개인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개인이며, 절대적이고 고립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은 어디까지나 이 사회적 개인의 의식이다."  - P 162

"퍼스의 공동체론은 사랑의 공동체론으로 설명된다. 공동체를 통해서 개인들은 자신들의 사적 이해관계와 편견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특수성으로부터 독립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은 퍼스의 기독교적 공동체관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중략 - 퍼스는 나름대로 자신의 우주론을 편다. 절대적 우연과 기계적 필연성, 그리고 사랑의 법칙이 우주 안에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 우연과 필연을 넘어서서 목적을 향해 전진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 P 165

 

 

저자는 이렇게 공동체적인 탐구와 반성을 통해 진리에 도달해 가는 과정을 인정하는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이 미국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었다고 본다. 그들은 인간의 성장, 공동체의 도덕적 진화를 믿는다. 교육과 토론을 통해 인간이 성장하고 공동체가 진화한다고 믿는 것이다.

저자는 그동안 [근대성과 자아의식]이란 책에서 근대성이란 개인의 자아의식이 성장하는 것이고, 그 자아의식이란 개체성이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얼핏 오해하면 개인주의적인 사상으로 오해하기 쉬웠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며 진정한 자아의식이란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이제 결론을 맺으며 다시금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도록 하겠다. 과연 지도자는 대중을 믿을 수 있는가? 리더는 공동체를 믿을 수 있는가? 정말 리더가 공동체원들과 상의를 하다보면 더 나의 진리를 도출해 낼 수 있을까? 아직도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생각을 이상이나 환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심지어는 좌파적인 생각으로 매도를 하기도 한다. 어쩌면 한 고위공직자의 술자리 농담처럼 '민중은 개와 돼지'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백성은 그냥 통치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적인 민주주의는 독재가 더 효과가 있다는 생각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지도자나 리더가 자신이 속한 대중이나 공동체를 믿지 못한다면, 과연 그들은 무엇을 위해 지도자나 리더가 되었을까? 단순히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일까? 비록 더디기는 하지만 대중과 공동체가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지도자나 리더가 되야 하지 않을까? 미국의 실용주의철학과 정치사상을 접하면 이런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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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걷다 - 당신은 아직 더 갈 수 있다, 니체가 들려주는 용기의 말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시라토리 하루히코 엮음, 이신철 옮김 / 케미스토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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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한 소설가를 좋아해서 그 소설가의 어린시절에 살았던 장소와 소설의 배경이 된 장소를 여행했던 적이 있다. 그가 직접 뛰놀며 놀았던 장소와 그의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도시들을 직접 발로 걷고, 눈으로 보면서 마치 내가 그 작가의 삶과 소설 속으로 드러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았던 장소를 알아간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내가 니체라는 철학자를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니체는 위험한 사상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책을 접하면서 니체는 내게 위험한 사상가가 아닌, 인간의 연민을 일으키는 사상가였다.


니체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를 반기독교적이고, 반문명적인 사상가로 보는 것이다. 특히 그의 사상이 히틀러와 나치즘에 영향을 주었다고 해서 금기시하는 분위기까지 있다. 다른 하나는 전혀 다른 평가로서 니체를 새로운 시대를 연 초인적인 사상가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흡모하고 그의 사상을 숭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니체는 한 인간으로서 만나야 할 사상가라고 생각한다. 그는 남들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환경이나, 성향에 대해 수긍하지 않고, 당당히 맞섰던 사상가였다. 그래서 삶이 찢기고 아플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이었다.


그러기에 니체의 삶과 그가 여행했던 지역의 아름다운 사진들을 담은 이 책은 니체를 위대한 사상가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이다.



 


이 책의 처음 등장하는 장소는 니체가 태어나고 자랐던 독일 남동부의 나움부르크라는 마을이다. 한눈에 봐도 종교적인 색체가 짙게 나타난다. 니체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성장과정을 아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한다. 부모님 양가 모두 오랜 기간 성직자였고, 니체의 아버지 역시 목사였다. 그래서 어린시절 사색적인 성격과 목사의 아들이란 배경으로 인해 많은 놀림을 당했고, 어쩌면 니체는 그렇게 연약한 자신을 싫어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로 어린 시절로 인해 연약함에 대한 강한 경멸, 힘에 대한 강한 의지가 생겼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추즉을 해 본다.



니체의 생가 사진이다. 저자는 생가 사진 위에 니체의 초기 사상이 가장 잘 담겨 있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란 책의 구절을 인용한다.


"잘못된 평가를 받는 것이

보통이다

자산이 생각하듯이,

바라는 대로

평가받는 일 따위

거의 없다

평판이나 평가에

신경 써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관심을 기울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젊은 시절 기독교 신앙을 잃고, 대신 당시 유행하던 진화론과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을 흠모하던 그는 군대에 입대한다. 그러나 말에서 떨어져 가슴 근육을 다쳤고, 이로 인해 제대를 한다. 결국 그는 흠모하던 군인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반면 그의 지적인 재능은 이미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아 25세의 나이에 바절 대학의 교수로 인명된다.

바젤대학 사진은 너무나도 멋진 강가 옆에 오래된 고전양식의 건물들이 서 있다. 이런 환경에서라면 저절로 공부가 될듯하다. 저자는 이 사진 옆에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라는 책의 구절을 인용한다.


"다른 이들에게 믿음을

얻고 싶다면,

말로 강요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꾸밀 수 없는 상황에서 한

진지한 행동만이

사람의 믿음에 호소한다."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되어 성공의 가도를 누릴 수 있었지만,

대학교수가 된 후 얼마 후부터 그는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린다.

그리고 이를 피하기 위해 많은 여행을 다닌다.

그 중 가장 많이 찾은 곳이 바로 '스위스'이다.

이 책의 초반부에는 아름다운 스위스의 도시와 자연의 사진들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스위스의 '루체른'이란 도시는 그가 자주 방문한 곳이다.

그가 존경과 흠모에 마지 않았던 '바그너'가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초기 사상은 쇼펜하우워와 바그너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특히 바그너의 음악에서 그는 그가 추구하던 그리스 정신, 힘과 육체에 대한 찬미인 디오니소스를 발견하였다.



여행과 함께 지필을 하던 니체는 여류 음악가인 마틸데 트람페다하와 루 살로메와 같은 여성들과 교제한다.

그러나 모두 청혼했다가 거절을 당하고, 가장 존경하던 바그너에게도 인간적으로 실망에 교제를 단절한다.

이런 인간적인 상처와 건강의 악화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권력의 의지]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같은 대작들을 집필한다.

이탈리아 라파로라는 도시는 바로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부를 집필한 장소이다.

니체의 나이 39세인 1883년에 이 곳에서 머물렀고,

이해 바그너가 죽었다.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초인을 추구하는 차라투스트라는 그렇게 탄생했다.

라팔로 오래된 성곽과 그 뒤에 보이는 도시의 불빛을 배경으로 저자는 니체의 [아침놀]이란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허물을 벗지 않은 뱀은 파멸한다.

인간도 전적으로 마찬가지다.


낡은 생각의 허물을 언제까지 뒤집어쓰고 있으면,

머지않아 안쪽부터 섞기 시작해

성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죽고 만다.


언제나 새롭게 살아가려면

새롭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침놀]




마지막으로 니체가 자주 방문해 산책했다는 스위스의 실바폴라나 호수의 사진이다.


"함께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그럼녀 친구가 생긴다.

그러나 질투와 자부심은

우정을 망치기 때문에

부디 주의하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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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2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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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스뵈의 해리홀레 시리즈는 매번 즐겨 읽는 스릴러이다. 대부분의 스릴러에서 주인공은 천재적인 두뇌와 철저한 자기통제, 그리고 뛰어난 전투능력 등을 가졌다. 그러나 요네스뵈의 해리는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해 알콜중독에 빠져 살며,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쉽게 흥분하고 좌절한다. 싸움실력도 별로여서 대부분의 격투기에서 때리는 경우보다 맞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저자의 탄탄한 구성과 함께 해리만이 주는 독특한 인간미가 해리 홀레 시리즈만의 매력을 발산한다. 이번에 해리 홀레 시리즈의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바퀴벌레]가 번역되어서 출간되었다. 원래 해리홀레시리즈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박쥐-바퀴벌레-레드브레스트-네메시스-데빌스스타-리멤버(미출시)-스노우맨-레오파트-팬덤(미출시)-폴리스(미출시)


개인적으로는 네메시스를 가장 먼저 읽고, 레드브레스트, 박쥐, 데빌스타 순으로 읽어서 이야기의 순서가 무척 뒤죽박죽되어 있었다. 해리 홀레 시리즈는 다른 스릴러 시리즈에 비해 과거의 사건과 연관된 이야기가 비교적 많이 등장하고, 특히 오슬로 3부작이라고 부르는 레드브레스트, 네미시스, 데빌스스타는 연결된 이야기이기에 순서대로 읽지 않아서 조금 혼란스럽기는 했다. 그럼에도 해리 홀레는 시리즈는 각 시리즈마다 독특한 색깔이 있고, 그래서 매번 시리즈마다 읽는 재미가 다르다.



이번에 출간된 [바퀴벌레]의 배경은 태국이다. 해리 홀레 시리즈의 또 다른 재미는 마치 화면으로 보는듯이 펼쳐지는 저자의 배경묘사이다. 전작 [박쥐]에서는 호주의 배경들을 멋지게 묘사했었지만, 이번 [바퀴벌레]에서는 덥고 습하고, 온갖 무질서와 범죄가 난무하는 태국의 방콕의 모습을 묘사한다. 특히 온갖 변태적 성적 문화가 왕성한 태국의 뒷모습들을 리얼하게 묘사한다. 올들어 전국에 폭염경보가 내릴 정도로 최고의 무더위와 열대아 속에서 이 책을 읽으며 해리의 상황이 더욱 공감이 갔다.


"차들이 엉금엉금 기어갔고, 에어컨에서는 불길하게 쌕쌕 소리가 났다. 해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 중략- 해리는 차에서 내렸다. 더위와 습기가 얼굴에 훅 끼쳤다. 물이 끓는 솥뚜껑을 연 느낌. 해리는 기지개를 켜고 느릿느릿 차를 돌았을 뿐인데 벌써 어지러웠다. (P248)"


이야기의 시작은 태국의 노르웨이 대사가 태국 변두리의 성매매 호텔에서 살해당하면서 시작된다. 죽은 묄레르는 현 노르웨이 총리의 정치적 친구이기에 외무부에서는 사건이 실체를 숨기고, 신속히 사건을 마무리하기 위해 호주에서 사건을 해결한 후 잠시 인기를 누린 술주정뱅이 형사 홀래를 급히 파견한다. 해리는 외무부에서는 자신의 알콜중독을 모르고 그가 유능한 형사라고 생각해서 파견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를 파견한 실제 이유는 뒤에 밝혀진다. 단순히 성매매 업소에서 강도에 의해 살해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묄레르의 과거를 캐면서 해리는 점점 커다란 범죄에 다가간다. 도박, 사채, 아동성매매, 주가조작 등 태국에서 만연하고 당연시 되는 범죄들을 맞딱뜨리면서 해리는 혼란스러워한다. 이런 모든 더러움이 '바퀴벌레'라는 이미지로 대변된다.


"해리는 어스름 속에서 무언가 싱크대에서 움직이면서 더듬이 두개를 이리저리 흔드는 것을 보았다. 바퀴벌레 한 마리, 엄지만 한 크기이고 등에는 주황색 줄이 하나 있었다. 이렇게 생긴 놈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닌 것 같았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바귀벌레는 종류가 3천 가지라고 했다. 그리고 바퀴벌레는 누가 다가오는 진동을 듣고 숨어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어디에나 있다는 뜻이었다. 바퀴벌레는 무게가 얼마나 될까? 10그램? 금 간 곳이나 테이블 뒤에 백 마리 넘게 숨어 있다면 방 안에 있는 바퀴벌레가 적어도 1킬로 그램은 된다는 뜻이다. 해리는 몸을 떨었다. 자기보다는 바퀴벌레들이 더 두려워할 거라는 사실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때로는 술이 해롭기보다는 '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눈을 감고 생각을 떨쳐내려 했다." - P 113



이번 작품 역시 요네스뵈의 치밀한 구성으로 완벽하게 짜여져 있는 소설이었다. 특히 그동안 조금 무기력하게 보였던 해리가 이번 작품에서는 매우 활발하게 움직인다. 특히 다른 작품에서와는 달리 방콕에서 여기 저기 부딪히며 싸워대는 해리의 액션이 돋보인다. 그럼에도 작가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비극적인 결말이 이 작품에서도 예외없이 발생한다. 이것이 그동안 읽은 해리 홀레 시리즈에서 해리가 알콜 중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무기력해지는 모습의 또 하나의 원인이 되는 것 같아 조금 씁쓸하게 끝부분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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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우리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두 편의 소설을 읽었다. 한 권은 올해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이혁진 작가의 [누운 배]라는 소설이다. 주인공이 한국인이 운영하는 중국 현지의 신생 조선소에서 3년 동안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건조 중이던 배가 침몰해서 누워 버리고, 이것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회사의 주먹구구식 운영과 조직적인 무능이 드러난다. 이것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조직사회의 억압 속에서 회사를 떠나고, 회장과 조직의 방침에 순응하는 사람들만 남게 된다. 주인공은 일부 사람들은 나름 회사를 혁신하기 위해 분투를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회사를 나오면서 이야기가 결말이 난다.

다른 한 편의 소설은 최근 영화화되어 더욱 관심을 받고 있는 소재원작가의 [터널]이라는 소설이다. 한 가정의 가장이 운전 중 터널에 갇힌다. 언론과 네티즌들의 동정으로 사건이 관심을 받고, 부실 공사에 관련된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이 공격을 받는다. 그러나 구조 과정으로 인해 터널 개통이 늦어지고 인근 주민들이 고통을 받자, 언론과 네티즌들은 무리한 구조작업을 강행하는 가족들과 구조자들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결국 언론과 네티즌의 횡포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주인공도, 가족들도 자살로 비참한 결말을 맞는다.


 


이 두 소설을 접하면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거대한 조직문화 속에서 한 개인이 조직문화의 부속품이 되어 버리는 현실과 획일적이고 자극적인 인터넷 문화 속에서 한 개인의 생명권조차도 철저히 짓밟히는 현실을 보게 되었다.

아카넷에서 출간한 차인석 교수의 [근대성과 자아의식]이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두 소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저자는 이 책에서 철학의 목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모두들 이제는 철학의 역할이 끝났다고 말하지만, 철학의 기능은 각 시대마다 개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철학이 그동안 제기했던 물음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철학은 여러 학문들에 많은 것을 양보하면서 많은 것을 잃기도 했으며, 근래에 와서는 철학이 아직도 필요한가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한다. 철학의 종언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논의가 있지만, 철학이 할 수 있는 역할에 관해 많은 견해가 여전히 제시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철학이 끝가지 버릴 수 없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다." (P113)

"인간다운 삶이란 다름 아린 바로 개개인의 자아실현이 가능한 삶을 가리키며, 철학은 이 삶의 영위가 소수집단에만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은 집단에서 그러한 실현이 이룩될 수 있도록 이론을 모색한다. 또한 그 이론은 가능한 많은 사회가 용인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일반성을 갖추어야 할 것이나 이것이 그리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역사가 인간의 해방이라는 보편적인 목표를 향해 진행한다면 철학도 자유와 권리라는 보편적 이념들의 실현이라는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P119)



 

저자는 철학은 각 시대마다 개인이 사회와 관계를 맺어가며, 그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고 말한다. 고대 플라톤에서부터 근대의 헤겔에 이르기까지 철학은 주어진 환경인 자연과 세계를 극복하고 개인의 자아성을 찾아가며 자유로운 존재로 성장하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근대 이후부터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조직화되면서 개인은 그 조직사회의 한 부속품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그러기에 근대 이후의 철학자들은 과학사회 속에서 어떻게 한 개인이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며,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단지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통한 가상공간이 우리 삶에 지배하면서, 이런 가상공간 속에서 어떻게 개인의 자아성을 실현할지를 고민한다.

 



"과학기술 시대에서, 문명 비판가들은 개체성의 종언을 염려해왔다. 이들은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의 주체로서 인간의 위치가 점차로 위축되어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이 두려움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의 자율성이 억제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을 만큼 일상적인 삶이 과학과 기술에 의해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P132)"



 

결국 지금의 철학은 과학 문화의 조직사회에서,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매체 속에서 개인이 매몰되지 않고, 그 자아의식을 찾아갈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자아의식이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주체성과 개체성은 만들어져야 한다. 한 개인이 스스로 평화의 의미를 배우고, 일을 통해서 자신의 창의성을 구현하고, 자신의 사적 선택이 이웃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책임을 지는 태도와 행동은 그가 다른 개인들과 공존 관계에서 성취하는 것이다. 이 개체성은 개인들이 놓인 사회체제의 환경에 의해 크게 규정되는 만큼, 앞에서 언급된 것처럼 정신적, 문화적 여건이 중요한 요인이라고 한다면, 이 여건 조성은 철학 교육에 의해 개인들의 내적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기존의 사회적 환경이 교육의 형태를 규정하고, 교육이 사회 성원들의 사유와 삶의 양식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가 교육을 통해 새롭게 구성되어야 하며, 철학은 이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P139-40)



 

현대 시대는 조직문화의 생각이 개인의 생각을 대체하고, 인터넷 여론이 개인의 생각을 대체한다. 한 개인이 주체적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를 규정하려는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성과 자아의식이 사라지고, 저자의 말처럼 현대 사회의 개인들은 아무런 비판 없이 눈에 보이고, 귀로 들려지는 대로의 세계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권력의 힘이 작용하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개인이 그렇게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냥 조직의 생각에, 대중의 생각에 따라가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비난하는 사람을 비난하고, 남들이 옳다고 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 편하기에 개인들이 그렇게 선택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앞에서 언급한 소설처럼 한 개인들이 매몰되고, 피해를 입는다. 

그나마 이것에 대한 경고가 철학과 인문학에서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인 노 교수 역시 자신의 평생 몸담아 왔던 학문인 철학이 이런 시대에 개인의 자아실현의 길을 제시해 주는 학문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마음에 이런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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