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아름답다 - 은퇴할 사람들과 은퇴한 사람들에게 띄우는 세 번째 지리산 통신
구영회 지음 / 나남출판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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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일터에서 사람과의 관계에 지치고, 육체적인 고단함까지 겹쳐져서 하루 하루 견디기가 쉽지 않았었다. 무작정 휴가를 내고 아내와 함께 지리산으로 떠났다. 그리고 계획도, 순서도 없이, 지리산 둘레길의 한구간을 마음대로 정해서 걷고 싶은 만큼 걸었다. 한참을 걷고 나니 산 아래로 마을들이 보이며 절경이 펼쳐졌다. 그제서야 내가 세상에서 아웅다웅하는 문제들이 사실은 별것이 아닐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경험이 있은 후 몇 해 동안 휴가때마다 지리산을 찾았다. 지리산 둘레길은 1한 코스씩 걸으며, 주변의 경치들이나 절경등을 구경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렇게 지리산을 다녀오면 마음에 무거운 짐들이 조금은 가벼워짐을 느꼈다.



구영회 작가의 [사라져 아름답다]라는 글을 읽으며 다시금 지리산의 추억이 생각났다. 구영회 작가는 나 역시 몇 번 이름을 들었을만큼 방송계에서 이름이 알려진 저명인사이다. 30대부터 지리산을 들렀고, 은퇴 후에는 아예 지리산에 내려가 산지 7년이 되었다고 한다. 가끔 볼 일이 있어 서울에 들르지만 주로 생활하는 곳이 지리산이다. 그에게 있어서 지리산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인생을 리셋하는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서울 볼일을 마치고 산골에 되돌아올 때 남원 땅에서 멀리 지리산이 보이기 시작하면, 언제나 전혀 다른 세상에 들어서는 느낌이 되살아나곤 한다.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에서 다시 벗어나 '나 홀로 상태'로 모든 것이 초기화되는 기분이 든다." (P 221)


"지리산에 들어서면 아까 서울 집 대문에서 나를 배웅하던 가족들도 어느새 눈앞에서 사라지고 안 보인다. 바로 어제 저녁 정답게 소주잔을 기울이던 서울의 벗들도 안 보인다. 나를 둘러싸고 주변 가까이 있던 지인들도 모조리 어디로 가고 이곳엔 없다. 그야말로 인간이라곤 나 하나뿐이다." (P222-4)



저자는 70이 넘은 나이에 지리산에서 세상을 돌아가는 것을 관조한다. 산 속에서 생활하다가 선거철에 읍내나 서울에 나와서 선거운동을 보면서 위로만 오르기 위해 아웅다웅하는 인간세계를 바라본다. 그리고 얼마만큼 힘겹게 올랐든지, 결국은 내려와야 하는 인생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지리산엔 봄이 왔고 정치판엔 대목이 왔다. 나 없이도 잘 굴러가는 곳이기에 부질없는 호기심을 발동할 이유는 없지만, 내 인생의 이런저런 길목에서 인연을 맺은 낯익은 꽤 여려 명의 얼굴들이 국회의원 서거판에 보였다." (P29)


"이제 머지않아 이들 중 몇 사람은 목에 화환을 걸고 두 손을 높이 치켜들어 맹령히 손을 흔드는 뒤에 옷깃에 황금색 배지를 달고 거대한 돔 지붕 건물 앞마당에서 뒷자석 차문을 려고 내려 대히석 바닥을 저벅저벅 울리며 보란 듯이 걸어갈 것이다. - 중략 - 그러다가 어느 날 사람들의 식어 버린 관심에 머쓱해하면서 풀 죽은 모습으로 지푸라기를 찾다가 그마저 여의치 않게 되면, 마침내 평범한 군중들 사이로 썩여 들 것이다." (P32-3)"



저자는 바다로 흘러가 섬진강이란 이름을 버리고 이름없는 물이 되는 망덕포구에서, 쓸쓸이 떨어져 생을 마감하는 지리산 계곡의 벚꽃들에게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제 하나 둘씩 떠나가는 친구들의 장례식장에서 인생을 떠나감을 체험한다. 때로는 시끌벅적하게, 때로는 외롭게 생을 마감하는 장소에서 저자는 결국 인생과 죽음은 사람이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의 것임을 깨닫는다.


"따라서 당신과 내가 알고 있는 죽음이란 것은 그저 한낱 '해석'에 불과하다. 해석이란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자기 생각을 곁들여 지가 멋대로 단정하는 것이다. 진실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 말이다. 이런 점에서 그 친구의 마감이 외로웠을 것이라거나 빈소가 쓸쓸해 보인다는 나의 '해석'은 크게 빗나간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감은 당신과 나에게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일 뿐 '해석'이 섣불리 허용되지 않는 저 너무에 있다." (P189)


우리는 흔히 장례식에서 입구의 화환 숫자나 조문객의 숫자로 그 사람의 인생이 어떠했는지를 판단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시각일뿐, 인생이나 죽음은 그런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저자의 글을 통해 깨닫는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의 죽음은 해석 바깥의 세계일지도... 그럼에도 가끔은 내가 아는 사람이나, 나의 죽음이 너무 쓸쓸하지 않기를 바래본다.



인생의 산전수전을 겪고 70의 나이에 지리산에서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을 이제 겨우 인생의 초반을 달리며 작은 문제로 아웅다웅하고 있는 내가 어찌 다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게 아웅다웅하는 삶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는 저자의 글귀에서 잊고 있었던 인생의 다른 부분을 보게 된다.


지금 주어진 싸움이 전부인 것 같고, 이것에서 패하면 인생을 다 잃을 것 같은 절박함도 결국에는 지나가는 인생의 한 단면임을 저자의 글귀에서 깨닫게 된다. 글로는 이해되지만, 인생으로는 아직 그 깊이를 다 이해할 수 없는 저자의 글들을 새기며, 다시금 지리산에서 여유로운 인생을 바라볼 그 휴식 시간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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