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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최근 [미스 함무라비]라는 드라마가 인기이다. 고아라가 연기를 하고 있는 주인공 박차오름 판사는 어렸을 때 성폭력을 경험한 후 판사가 되었다. 그녀는 법조계의 여성에 대한 부당한 현실과 자신들이 재판하는 억울한 일을 당한 여성들의 현실과 싸운다. 그중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한 인터 여직원이 자신을 성희롱하는 부장을 고발했다. 부장을 중심으로 한 회사와 조직은 철저하게 여직원을 왕따시키고 사건을 무마하려 한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사소한 일로 한 가정의 가장의 밥줄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 여직원이 들어오기 전까지 팀은 매우 좋은 팀워크를 가졌고, 여직원은 예민한 성격이기에 적응을 하지 못한 것으로 몰아붙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여사원들은 여기에 동참한다. 결국 한 여직원의 폭로로 재판은 반전을 하게 된다.
드라마를 보면서 여성 혼자 힘으로 조직과 맞서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조직과 싸우는 것은 그나마 나을지도 모르겠다. 조직 구석구석에 숨어있고, 가정과 사회의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관습의 힘과 싸우는 것이 가장 힘들 것이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 아랫사람은 이래야 한다! 세상은 다 그런 것이다! 그런 당연하다는 생각과 맞서 싸운다는 것이 한 개인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 일일까.
[그녀 이름은]이라는 소설은 [82년 생 김지영]과 [현남 오빠에게]라는 소설로 인기를 얻은 조남주 작가의 신작이다. 소설이라고 하지만, 소설이라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맞딱드리고 있는 수많은 현실들을 마치 짧은 수기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 같다. 평범한 직장인이나 학생, 아내와 며느리, 엄마 로서 겪어야 하는 수많은 사회의 차별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인 [두 번째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한 소진이라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자신 보다 10살 많은 사수에게 성희롱을 당했고, 그것을 인사팀에 이야기한다. 그러나 인사팀은 오히려 소진을 나무라고, 결국 소진은 회사에서 왕따를 당한다.
"팀장이 소진을 불러 화를 냈다. 알아듣게 얘기했는데 꼭 이렇게 일을 키워야 했느냐고 사회 부적응자, 또라이, 사이코패스라고 말했다. 이 얘기도 녹음하고 있느냐며 녹음당할까 무서워 소진 씨하고는 말도 못 하겠다고 비아냥거렸다. 소진이 뻔히 보고 있는데 과장을 위로했다. 어쩌다 이렇게 지독하게 걸렸니, 액땜했다, 똥 밟았다고 생각하라 (P 16)"
그러나 소진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고용노동부와 인터넷에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한다. 그로 인해 이제 그녀의 적은 단순히 회사가 아니라 사회가 된다. 짧은 이야기이지만, 읽는 내내 그녀가 혼자 감당해야 할 싸움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
"소진의 신상이 나돌았고 인터뷰 기사마다 심각한 수준의 악플이 달렸다. -중략- 회사는 그 와중에 합의를 종용했고 과장은 고소를 준비 중이라고 전해왔다. 그래도 절대 후회하지 않느냐면 사실이 아니다. 소진은 매일, 매 순간순간 후회한다. 빗을 때마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고 음식이 들어가기만 하면 토해서 수액과 영양제로 버티고 있다. 소진이 혹시 나쁜 생각이라도 할까 봐 엄마가 밤마다 소진의 침대 옆에 이불을 깔고 잔다. 소진은 변호사에게, 선배에게, 가족에게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게 낫지 않겠냐고 묻곤 한다. 모두들 피해 당사자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며 너무 힘들다면 여기서 멈추어도 된다고 말하는데 정작 소진이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P 20)"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어린 여자 혼자서]라는 소설이다. 서울로 상경한 한 직장인 여성인 겪는 현실이다. 그녀는 서울 직장에 취직해 힘들게 직장생활을 하며 원룸에 살고 있다. 어느 날 누군가가 가스배관을 타고 올라와 그녀의 집을 창문을 연다. 그녀는 너무 놀라 소리치고, 놀란 침입자는 아래로 떨어진다. 경찰은 오히려 그녀를 나무라고, 피해자는 술김이었다고 말하고, 사람들은 별거 아닌 일로 몰고 간다. 소설은 한 여성이 경험해야 하는 도시와 사람의 냉혹함을 이야기하는데, 마치 세상에 발가벗겨 던져진 것 같은 그녀의 현실이 그대로 느껴졌다.
"근데 잡고 보니까 글쎄, 그 남자는 내 방이랑 같은 라인 일층에 사는 남자더라. 나보다 두 살 어리고 전과는 없대. 경찰에서는 술 마시고 실수한 거라고, 특히 나를 노린 것도 아니고 이 방에 여자가 사는 것도 몰랐다고, 자기가 도대체 왜 그랬는지 기억이 전혀 안 난다고 그랬데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만취한 사람이 좁고 위태로운 가스관을 딛고 올라와서 그렇게 치밀한 손놀림으로 창문을 연다는 게 가능한가. 나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는데 경찰은 그 말을 믿는 것 같더라. (P 47)"
최근에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세상에 적응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적응해 간다는 것이 어쩌면 세상의 부당함에 적응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남녀 차별의 문제뿐 아니라, 세상에는 너무나도 부당한 일이 많이 벌어진다. 젊었을 때는 그것을 볼 때마다 분노하고 그것과 맞서 싸웠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것에 순응하려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그러기에 때로는 자신이 찢기고 상처 입지만, 세상과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이들이 부럽다. 오늘도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홀로 외롭게 세상과 싸우는 그녀들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