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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4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평점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우산도 없이 한 남자를 따라 걸어갔다. 남자 역시 우산도 없이 도시의 뒷골목 속으로 걸어갔다. 해가 질 무렵의 도시의 뒷골목은 더러운 조명들과 빗물로 인해 검붉은색을 띠었다. 담벼락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쓰레기 봉지와 그 봉지를 뒤지다가 갑자기 뛰쳐 도망가는 고양이만이 보였다. 도대체 이 남자는 어디까지 가려는 걸까. 어디까지 깊숙이 들어가는 걸까. 그를 따라 들어가지만, 그가 도달한 끝이 어딜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두려운 마음이 들면서도 그를 따라가는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려지는 이미지이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가 마치 도스토옙스키라는 남자가 걸어간 그 어두운 골목길을 따라 걸어가는 느낌이다.
젊은 날에는 매일같이 나 자신에게 실망했었다. 스스로 위대하고 순수한 영혼이라고 생각하다가, 금세 진흙탕 속에 빠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자기 환멸과 세상에 대한 증오에 휩쌓였다. 그때 처음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페테르부르크의 어두운 뒷골목 속의 더 어둡고 침침한 방에 웅크리고 있던 라스콜리코프는 스스로를 나폴레옹과 같은 위대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인간에게는 인류를 위해 해충 같은 인간을 죽일 특권이 주어진다. 라스콜리코프는 자신을 그런 특권을 부여받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이웃집 노파를 해충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완전범죄에 가까운 범죄와 노파와 노파의 동생을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에게 있어서 살인은 더러운 범죄가 아니라 위대한 인간이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그렇게 위대한 인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살인 후의 지독한 육체적 열병에 시달린다. 육체적 열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매일 밤 그의 마음속을 찾아오는 어두운 공포이다. 라스콜리코프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어두운 자아는 매일 밤 그를 끝도 모르는 심연으로 끌고 간다. 마치 코카서스 언덕 위에서 매일같이 독수리에게 심장을 쪼이는 형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 같은 절망이 그를 덮친다. 이렇게 소설은 라스콜리코프의 살인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살인 후에 찾아오는 내면의 갈등과 공포를 그리고 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도스토옙스키를 현대 심리소설의 시초로 부른다. 현대의 많은 소설가들의 작품 속에서 또 다른 라스콜리코프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죄와 벌]을 읽고 그의 마지막 대작 [카라마조프가네 형제들]을 읽으며 느낀 것은 그가 도스토옙스키가 소설 속에서 탐구한 것은 단순히 인간의 심리나 내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소설 속에서 드러내고자 한 것은 인간의 영혼이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선하다고도 악하다고도 할 수 없는, 종교나 철학으로 정의할 수 없는 인간 영혼의 어둡고 신비한 깊이를 그는 소설로 드러내고자 시도했다. 그리고 그의 소설을 읽을 때면 그가 탐구한 어둡고 신비로운 인간의 영혼을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