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벙어리 삼룡이 : 나도향 단편전집 ㅣ 한국문학을 권하다 27
나도향 지음, 노경실 추천 / 애플북스 / 2015년 7월
평점 :
오래 전 부터 읽고 싶어햇던 [한국문학을 권하다] 시리즈의 [나도향중단편전집]을 읽었다.
나도향작가와 그의 작품 [벙어리 삼룡이]나 [뽕], [물레방아] 등은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이고, 나 역시 오래 전부터 그의 작품들을
접했었다.
[벙어리 삼룡이]이 마지막 장면은 내 생애의 중요한 시험에서 마지막 내용이 시험에 나왔던 기억이 난다.
삼룡이가 불길에서 주인집 아씨를 구해내고 죽는 장면을 제시하면서 '이 소설의 제목은?'이라고 묻는 문제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도향 작가의 작품은 직접 책으로 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책에는 나도향 작가의 초기 작품부터 24살의 짧은 나이로 단명할 때까지의 작품이 거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1922년 작품부터 순서대로 수록되어 있어서 나도향의 문학이 짧은 시간에 어떻게 성숙해졌는지를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책에 처음 실린 작품은 [젊은이의 시절]이라는 작품으로 작가가 1922년 백조라는 동인지를 창간하면서 실은 작품이다.
그리고 그 다음 작품은 백조 2호에 실린 [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걸]이란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초기작품부터 읽으면서 조금은 실망했다.
그의 명성에 비해서 작품의 완성도가 조금 떨어진다고 생각을 했다.
거이 젊은이의 사랑 이야기이거나, 가난으로 인해 힘들어 하는 지식인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런 소설들의 구성이 조금 엉성한 느낌이 나고, 인물 역시 영어 이니셜로 부르기도 하는 조금은 미숙한 묘사로 느껴졌다.
그러다가 점점 그의 작품이 성숙 되어 가더니 중반부에 실린 작품부터는 천재작가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주로 죽기 1년 전이 1925년에 쓴 작품들에서 작가의 완숙함이 드러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나도향 작가의 작품들에서는 제일 먼저 그의 뛰어난 묘사력이 눈에 띈다.
주변의 환경, 등장인물의 모습, 주인공의 심리, 식민지의 가난한 현실 등에 대한 묘사들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
"아침 이슬이 겨우 풀 끝에서 사라지려 하는 봄날 아침이었다. 부드러운 공기는 온 우주의 향기를 다 모아다가 은하 같은 맑은 물에 씻어
그윽하고도 달콤한 내음새를 가는 바람에 실어다 주는 듯하였다. 꽃다운 풀 내음새는 사면에서 난다.
작은 여신의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풀포기 위에 다리를 뻗고 사람의 혼을 최음제의 마약으로 마비시키는 듯한 봄날의 보이지 않는 기운에
취하여 멀거니 앉아 있는 조철하는 그의 핏기 있고 타는 듯한 청년다운 얼굴은 보이지 않고 어디인지 찾아낼 수 없는 우수의 빛이 보인다.
그는 때때로 가슴이 꺼지는 듯한 한숨을 쉬었다. 그는 모을 일으켜 천천한 걸음으로 시내가 흐르는 구부러진 나무 밑으로 갔다. 흐르는
맑은 물은 재미있게 속살대며 흘러간다. 푸른 하늘에 높다랗게 떠가는 흰 구름이 맑은 시내 속으로 비치어 어롱어롱한다."
-[젊은이의 시절] 중에서-
|
|
"그 집에는 삼룡이라는 벙어리 하인 하나가 있으니 키가 본시 크지 못하여 땅딸보로 되었고 고개가 빼지 못하여 몸뚱이에 대강이를 갖다가 붙인
것 같다. 거기다가 얼굴이 몹시 얽고 입이 크다. 머리는 전에 새 고랑지 같은 것을 주인의 명령으로 깍기는 깎았으나 불밤송이 모양으로 언제든지
푸 하고 일어섰다. 그래 걸어다니는 것을 보면 마치 옴뚜꺼비가 서서 다니는 것같이 숨차 보이고 더디어 보인다. 동일 사람들이 부르기를 삼룡이라고
부르는 법이 없고 언제든지 '벙어리' '벙어리'라고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앵모' '앵모'한다. 그렇지만 삼룡이는 그 소리를 알지 못한다.
- [벙어리 삼룡이] 중에서-
|
그러나 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의 모습이다.
아마 주인공 자신의 자아상이기도 지식인의 모습은
가난하고, 병약하며, 소심하기까지
하다.
한 때 누렸던 부와 지위로 인해 허세만 남았지만 가난한 현실 앞에서 작은 돈에 전전긍긍한다.
그럼에도 자존심으로 인해 조금 있는 돈을 친구들 술값으로 사용하거나 어려운 처지에 빠진 여성을 돕는데 사용한다.
[여이발사]란 작품에서는 궁핍함으로 자신의 옷을 전당잡힌 일본 유학생이 여이발사에게 호기를 부리며 남은 돈을 모두 주는 허세를 부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주인공에 대한 묘사는 [피묻은 편지 몇 쪽]과 [지형근]이란 작품 속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
[피묻은 편지 몇 쪽]에서는 패병에 걸려 죽음의 그림자에 덮혀 있는 주인공이 한 여인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갈등하다가, 그 여인을 포기하는
마음의 변화를 잘 표현하고 있다.
마치 도스트옙스키의 소설의 주인공들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지형근]이란 소설의 주인공은 요즘 말로 하면 '찌질남'이다.
주인공은 한때는 도련님 소리를 듣는 지주의 아들이었으나 가나한 형편으로 인해 강원도의 한 마을로 막노동을 하러 온다.
그리고 그 곳에서 사귄 사람들에게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고, 이화라는 기생을 만나러 가기 위해 친구의 돈까지 훔친다.
마치 홍상수 감독의 영화의 찌질한 남자 주인공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면서도 연민의 모습과 자조의 모습으로 주인공을 묘사하는 것은 그 주인공의 모습에 나도향 작가 자신의 모습이 담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식민지 시대를 살았을 소심하고 나약한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읽는 내내 기분이 씁쓸했다.